1. 생애 및 배경
달마티우스는 수도원 생활에 헌신하기 전, 콘스탄티노플의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1. 초기 경력 및 군 복무
달마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휘하의 근위대 두 번째 중대에서 복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1.2. 수도원 생활 및 영적 훈련
군 복무와 가족 생활 이후, 달마티우스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깊은 소명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달마티아의 이삭으로부터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 수도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주요 활동 및 기여
달마티우스는 수도사로서의 삶 외에도 당시 기독교 세계의 주요 논쟁에 깊이 관여하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1. 콘스탄티노플의 대수도사제
달마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달마시안 수도원의 대수도사제를 맡았다. 그는 또한 '수도원의 수석 수도사'(Archimandrite of the Monasteries)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콘스탄티노플 시내 수도사들의 우두머리임을 의미하며 그에게 막대한 권위와 영향력을 부여했다.
2.2. 네스토리우스파 반대 및 에페소스 공의회
달마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부분의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의 지시를 받아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궁전으로 수사들을 이끌고 가 황제에게 거친 비난을 퍼붓는 사건을 주도했다. 이는 황제가 네스토리우스파를 지지하고 에페소스 제1차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했기 때문이었다. 달마티우스가 수도원을 떠난 것은 4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황제는 이 성인이 수도원 밖으로 나선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제는 결국 키릴로스의 변론을 들어달라는 달마티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키릴로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사망
달마티우스는 서기 440년에 사망했다.
4. 기념 및 축일
성 달마티우스는 축일인 8월 3일에 기억되고 기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