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가이자 언론인 카를 크라우스는 1874년 4월 28일 보헤미아의 이친에서 태어나 1936년 6월 12일 빈에서 사망했다. 그는 풍자, 수필, 경구 작가, 극작가, 시인으로 활동하며 당대 사회의 위선, 언론의 타락, 정치적 부패, 그리고 문화적 허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특히 1899년 직접 창간한 풍자 잡지 디 파켈 (Die Fackel디 파켈독일어, '횃불'이라는 뜻)을 통해 그의 비판적 목소리를 세상에 알렸다. 이 잡지는 초기에는 여러 필진이 참여했으나, 1911년 이후부터는 크라우스 자신이 거의 유일한 필자로 활동하며 강력한 편집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신랄한 반전 비판을 담은 대규모 풍자극 인류 최후의 날들을 집필했으며, 나치즘의 부상을 비판하는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을 남기기도 했다. 언론 활동 외에도 약 700회에 걸친 1인 공개 낭독회를 통해 괴테,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과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누렸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세 차례 지명될 정도로 문학적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지만, 때로는 그의 행동과 사상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크라우스는 언어의 부주의한 사용이 사회 문제의 징후라고 보았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2. 생애와 배경
카를 크라우스는 유년기부터 학업 기간,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내딛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그의 독특한 사상과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2.1. 유년기와 교육
크라우스는 1874년 4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왕국 이친 (현재 체코의 이친)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지업자인 야콥 크라우스였고, 어머니는 에르네스틴 칸토르였다. 1877년, 그의 가족은 빈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1891년에 사망했다.
크라우스는 1892년 빈 대학교에 법학 전공으로 입학했다. 같은 해 4월부터 그는 Wiener Literaturzeitung비너 리터라투어차이퉁독일어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으며, 그 첫 작품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공들에 대한 비평이었다. 이 시기 그는 소극장에서 배우로 활동하거나 연극 연출가로서의 시도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94년에는 전공을 철학과 독일 문학으로 변경했으며, 1896년에는 학위를 마치지 않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때부터 그는 페터 알텐베르크와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2.2. 초기 활동과 디 파켈 창간
1896년 대학교를 중퇴한 크라우스는 배우, 무대 연출가, 공연자로 활동을 시작하며 당시 젊은 빈 그룹에 합류했다. 이 그룹에는 페터 알텐베르크, 레오폴트 안드리안, 헤르만 바르,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아르투어 슈니츨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펠릭스 잘텐 등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97년, 크라우스는 이 그룹의 위선을 맹렬히 비판하는 풍자문 Die demolierte Literatur디 데몰리에르테 리터라투어독일어 (파괴된 문학)를 발표하며 이들과 결별했다. 이로 인해 그는 브레슬라우어 차이퉁 (Breslauer Zeitung)의 빈 특파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898년에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을 공격하는 논쟁적인 비판서 Eine Krone für Zion아이네 크로네 퓌어 치온독일어 (시오니즘을 위한 왕관)을 발표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 책의 제목은 '크로네'가 '왕관'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화폐 단위를 모두 의미하는 언어 유희로, 당시 바젤에서 열린 시오니스트 총회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 기부금이 1 크로네였고, 헤르츨이 반시오니스트들에게 "시오니즘의 왕"으로 조롱받던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1899년 4월 1일, 크라우스는 유대교를 포기했으며, 같은 해 4월 1일 직접 잡지 디 파켈을 창간했다. 그는 이 잡지를 사망할 때까지 직접 편집, 출판, 집필하며 위선, 정신분석학, 합스부르크 제국의 부패, 범게르만 민족주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 등 수많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3. 주요 활동과 저술
카를 크라우스는 그의 잡지 디 파켈을 통해 풍자적인 저널리즘을 펼치며 당대 사회에 대한 깊은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
3.1. 풍자 저널리즘과 비판 의식
크라우스의 주된 활동 영역은 풍자 저널리즘이었다. 그는 사회의 위선과 부패를 폭로하고, 언론의 타락과 정치인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특히 언어의 오용이 사회적 문제의 징후라고 보았으며,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그의 모든 저술 활동의 핵심을 이루었다.
3.1.1. 잡지 디 파켈

디 파켈은 크라우스의 풍자적 비판 의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 매체였다. 이 잡지는 그의 재정적 독립성 덕분에 편집 독립성을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며, 크라우스가 원하는 내용을 자유롭게 인쇄했다. 처음에는 디 벨트뷔네와 같은 저널과 유사했지만, 점차 크라우스의 개인 잡지로 변모하여 1911년 이후부터는 그가 거의 유일한 필자가 되었다.
창간 초기에는 페터 알텐베르크, 리하르트 데멜, 에곤 프리델, 오스카 코코슈카, 엘제 라스커-쉴러, 아돌프 로스, 하인리히 만,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게오르크 트라클, 프랑크 베데킨트, 프란츠 베르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유명 작가와 예술가들이 기고했다. 그러나 이후 크라우스는 지면에 실리는 모든 글을 직접 쓰고 발행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디 파켈은 총 922호가 부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크라우스의 거의 모든 작품은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크라우스가 지원했던 작가로는 페터 알텐베르크, 엘제 라스커-쉴러, 게오르크 트라클 등이 있다.
디 파켈은 부패, 언론인, 잔인한 행위 등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비판 대상으로는 막시밀리안 하르덴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사건에서),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 (Neue Freie Presse) 신문 소유주 모리츠 베네딕트, 알프레드 케어, 헤르만 바르, Imre Békessy임레 베케시독일어, 그리고 요한 쇼베르 등이 있었다.
3.1.2. 초기 논쟁과 주제 (1896-1909)
디 파켈의 창간 초기부터 1909년까지 크라우스는 여러 주요 논쟁에 휘말렸다. 1901년에는 헤르만 바르와 에머리히 부코비츠로부터 디 파켈에서 자신들이 공격당했다고 느끼며 소송을 당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당사자들로부터 여러 소송에 직면해야 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출판업자 모리츠 프리슈가 그가 몇 달 간의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잡지의 표지를 상표로 등록하고 노이에 파켈 (Neue Fackel, 새 횃불)을 발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라우스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으며, 그 이후 디 파켈은 야호다 & 지겔 인쇄사에서 표지 없이 발행되었다.
1902년 크라우스는 도덕과 형사 사법 (Sittlichkeit und Kriminalität지틀리히카이트 운트 크리미날리테트독일어)을 출판하여, 이후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가 될 주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당시 성 도덕을 형사 사법을 통해 방어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비판하며, "스캔들은 경찰이 그것을 끝낼 때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1906년부터 크라우스는 디 파켈에 자신의 경구들을 처음으로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 경구들은 1909년 속담과 모순 (Sprüche und Widersprüche슈프뤼헤 운트 비더슈프뤼헤독일어)이라는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3.1.3. 제1차 세계 대전과 인류 최후의 날들 (1910-1919)
1911년 이후 크라우스는 디 파켈의 대부분 호에서 유일한 필자가 되었다.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풍자 문학 기법 중 하나는 인용문을 사용한 영리한 언어 유희였다. 한 논쟁은 난교 (Die Orgie디 오르기독일어에 대한 텍스트와 함께 일어났는데, 이 텍스트는 신문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가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선거 운동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폭로했다. 이 텍스트는 게릴라 장난으로 고안되어 신문에 가짜 편지로 보내졌고 (디 파켈은 1911년 나중에 이를 출판했다), 이 속임수에 넘어간 격분한 편집자는 크라우스를 "정치인과 편집자의 진지한 업무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 대한 부고 기사 이후, 디 파켈은 몇 달 동안 발행되지 않았다. 1914년 12월, 잡지는 "이 위대한 시대에" (In dieser großen Zeit인 디저 그로센 차이트독일어)라는 수필과 함께 다시 등장했다. 크라우스는 "내가 이 작디작던 시절에 알았던 이 위대한 시대가, 다시 작아질 시간이 남아 있다면 또 작아질 것이다. ... 행위를 낳는 보고서와 행위를 야기하는 보고서들의 끔찍한 교향곡으로 시끄러운 이 시기에, 당신은 나에게서 단 한 마디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후 크라우스는 세계 대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고, 검열관들은 반복적으로 디 파켈의 판본을 압수하거나 발행을 방해했다.
크라우스의 대표작은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대규모 풍자극인 인류 최후의 날들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디 레츠텐 타게 데어 멘슈하이트독일어)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동시대의 문서에서 발췌한 대화와 아포칼립스적 환상, 그리고 "불평꾼"과 "낙천주의자"라는 두 인물의 해설을 결합했다. 크라우스는 1915년 이 희곡을 쓰기 시작했으며, 1919년 디 파켈의 특별호 시리즈로 처음 출판했다. 그 에필로그인 "마지막 밤" (Die letzte Nacht디 레츠테 나흐트독일어)은 이미 1918년에 특별호로 발행된 바 있다.
에드워드 팀스는 이 작품을 "결함 있는 걸작"이자 "균열이 있는 텍스트"라고 불렀는데, 이는 크라우스의 태도가 작품 집필 기간 (귀족적 보수주의자에서 민주적 공화주의자로) 동안 변화했기 때문에 지질학적 단층과 유사한 구조적 불일치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1919년 크라우스는 자신의 전쟁 관련 글들을 세계 심판 (Weltgericht벨트게리히트독일어)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출판했다. 1920년에는 프란츠 베르펠의 크라우스 비판작인 거울 인간 (Spiegelmensch)에 대한 답변으로 풍자극 문학, 아니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Literatur oder man wird doch da sehn리터라투어 오더 만 비어트 도흐 다 제헨독일어)를 출판했다.
3.1.4. 전후 비평과 정치적 참여 (1920-1936)

1924년 1월, 크라우스는 타블로이드지 디 슈툰데 (Die Stunde디 슈툰데독일어, '시간')의 발행인 임레 베케시와 대결을 시작했다. 크라우스는 베케시가 식당 주인들에게 나쁜 평가를 내리겠다고 위협하며 돈을 갈취했다고 비난했다. 베케시는 이에 대해 크라우스에 대한 명예훼손 캠페인으로 보복했고, 크라우스는 "빈에서 그 악당을 내쫓아라!" (Hinaus aus Wien mit dem Schuft!히나우스 아우스 빈 미트 뎀 슈프트!독일어)라는 구호와 함께 자신의 비판서인 정산 (Erledigung)을 발표했다. 결국 1926년 베케시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빈을 떠났다. 베케시는 나중에 그의 소설 바라바스 (Barabbas)가 미국의 한 북클럽의 월간 선정작이 되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크라우스의 정치적 참여의 절정은 1927년 1927년 7월 봉기 당시 경찰이 89명의 폭동 참여자를 사살한 사건 이후, 강력한 빈 경찰청장이자 두 차례 전직 수상이었던 요한 쇼베르에 대한 그의 선동적인 비판이었다. 크라우스는 한 문장으로 쇼베르의 사임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 포스터는 빈 전역에 게시되었으며, 20세기 오스트리아 역사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1928년에는 희곡 난공불락 (Die Unüberwindlichen디 우뉘버빈트리헨독일어)이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베케시와 쇼베르에 대한 투쟁을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 크라우스는 자신이 케어의 전쟁 시들을 디 파켈에 출판한 후 케어가 자신을 고소했던 소송 기록도 출판했다 (당시 케어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초기 전쟁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1932년 크라우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들을 번역했다.
크라우스는 적어도 1920년대 초부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1934년, 그는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즘이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키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돌푸스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지지는 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 중 일부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1933년 크라우스는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Die Dritte Walpurgisnacht디 드리테 발푸르기스나흐트독일어)을 집필했으며, 그 첫 단편들이 디 파켈에 실렸다. 크라우스는 나치 정권 하에서 살고 있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폭력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이 작품의 전체 출판을 보류했다.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풍자극은 이제 유명한 문장인 "히틀러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Mir fällt zu Hitler nichts ein미어 팰트 추 히틀러 니히츠 아인독일어)로 시작한다. 방대한 발췌본은 크라우스가 히틀러 집권 당시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한 변론서인 왜 디 파켈이 나오지 않는가 (Warum die Fackel nicht erscheint바룸 디 파켈 니히트 에어샤인트독일어)라는 315쪽 분량의 잡지 특별호에 실렸다. 디 파켈의 마지막 호는 1936년 2월에 발행되었다.
3.2. 공개 낭독회와 공연
크라우스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매우 영향력 있는 공개 낭독회를 진행했다. 1892년부터 1936년까지 그는 약 700회의 1인 공연을 펼쳤는데, 이 공연에서 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요한 네스트로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낭독했으며,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를 직접 피아노 반주에 맞춰 모든 역할을 혼자 노래하며 공연하기도 했다. 크라우스의 강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엘리아스 카네티는 자신의 자서전 2권의 제목을 귀 속의 횃불 ("Die Fackel" im Ohr)이라고 붙이며 잡지와 그 저자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크라우스의 강연에는 4,000명의 청중이 모였고, 그의 잡지는 40,000부가 팔렸다.
1904년 크라우스는 프랑크 베데킨트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희곡 판도라의 상자를 빈에서 상연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희곡은 부유한 남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독일 사회에서 상승했지만 나중에 가난과 매춘으로 전락하는 성적으로 매혹적인 젊은 무용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레즈비언 관계와 잭 더 리퍼와의 만남을 포함하여 성과 폭력을 솔직하게 묘사한 이 희곡들은 당시 무대에서 용납되는 경계를 넘어섰다. 베데킨트의 작품들은 표현주의의 전조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1914년 리하르트 데멜과 같은 표현주의 시인들이 전쟁 선전을 시작하자 크라우스는 그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1907년, 크라우스는 그의 이전 후원자였던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오일렌부르크 재판에서 맡았던 역할 때문에 그의 화려한 비판서인 정산 (Erledigungen) 중 첫 번째 작품에서 그를 공격했다.
4. 사상과 신념
크라우스는 개인적인 관계와 종교에서부터 언어와 사회에 대한 독특한 관점,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4.1. 개인적 관계와 종교
크라우스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191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시도니 나드헤르나 폰 보루틴 남작 부인 (1885-1950)과 갈등이 많으면서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나드헤르나 가문의 소유지인 야노비츠 성에서 쓰였다. 시도니 나드헤르나는 크라우스에게 중요한 펜팔 친구이자 그의 책과 시의 수신인이 되었다.
1911년 크라우스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세례를 받았으나, 1923년 교회 전쟁 지지에 대한 환멸로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그는 비꼬듯이 자신이 "주로 반유대주의" 때문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막스 라인하르트가 잘츠부르크의 콜레기엔키르헤를 연극 공연 장소로 사용한 것에 대한 분개심 때문이었다.
4.2. 언어와 사회에 대한 관점
언어에 대한 관심은 크라우스의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의 부주의한 언어 사용을 세상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의 징후로 보았다. 빈의 작곡가 에른스트 크셰네크는 1932년 크라우스를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하이에 대한 일본의 폭격을 비난하고 있을 때, 나는 카를 크라우스가 그의 유명한 쉼표 문제 중 하나로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략 이렇게 말했다.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능한 한 이것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쉼표를 제대로 배치해야 할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했다면 상하이는 불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그가 언어의 정확성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시켰음을 보여준다.
4.3. 정신분석학 비판
토머스 사스의 저서 카를 크라우스와 영혼의 의사들과 반-프로이트: 카를 크라우스의 정신분석학 및 정신의학 비판은 크라우스를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전반에 대한 가혹한 비판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팀스와 같은 다른 평론가들은 크라우스가 프로이트를 존중했지만, 그의 일부 이론 적용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그의 견해가 사스가 주장하는 것만큼 흑백논리적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5. 죽음
1936년 2월, 크라우스는 자전거 충돌 사고로 낙상하여 심한 두통과 기억 상실을 겪었다. 그는 4월에 마지막 강연을 진행했으며, 6월 10일 호텔 임페리얼의 카페 임페리얼에서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다. 그는 1936년 6월 12일 빈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했으며, 빈의 빈 중앙묘지에 매장되었다. 사고 직전에 발행된 디 파켈 922호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6. 유산과 평가
카를 크라우스의 생애와 작품은 동시대와 후대의 여러 인물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남겼다.
6.1. 동시대 및 후대의 평가
카를 크라우스는 평생 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그를 '헛되고, 독선적이며,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반면 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그를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오류의 권위자로 보았다. 크라우스는 후대를 자신의 궁극적인 독자로 생각했으며, 디 파켈이 처음 출판된 지 몇 년 후에 이를 다시 단행본 형태로 재인쇄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한때 크라우스를 "악의에 찬 조롱의 대가" (der Meister des giftigen Spotts데어 마이스터 데스 기프티겐 슈포츠독일어)라고 불렀다. 1930년까지 크라우스는 자신의 풍자적 저술을 정치 스펙트럼의 중도와 좌파 인물들에게 집중했다. 그는 우파의 결점은 너무 자명하여 자신의 논평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나치에 대한 그의 대응에는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이 포함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언론인과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기 드보르와 크라우스를 비교했다. 그는 "우리 세기에 드보르가 아마도 비교되기를 원할 작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카를 크라우스일 것이다. 크라우스가 기자들과의 고집스러운 싸움에서만큼 '뉴스를 만들어내는 사실과 사실의 원인인 뉴스'와 같이 스펙터클의 숨겨진 법칙을 밝혀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드보르 영화에서 스펙터클의 잔해 속 사막을 설명하는 배경 목소리에 해당하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면, 크라우스의 목소리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레고어 폰 레초리는 크라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삶은 도덕적 강직함과 용기의 본보기이며, 어떤 언어로 글을 쓰든 모든 작가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나는 그의 대화를 듣고, 독일어라는 기적에 대한 그의 광적인 사랑과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자들에 대한 그의 신성한 증오의 창백한 불꽃으로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크라우스의 작품은 문학적 관점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다. 비평가 프랭크 필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크라우스의 죽음을 듣고 썼던 말을 인용했다. "시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손을 들었을 때, 그가 바로 그 손이었다."
6.2. 비판과 논란
크라우스의 강경하고 단호한 당파성 때문에 그가 만든 수많은 적들에게 그는 쓰디쓴 인간 혐오증 환자이자 '불쌍한 흉내쟁이' (알프레드 케어)였다. 그는 증오에 찬 비난과 '정산' (Erledigungen)에 몰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카를 발렌틴과 함께 블랙 유머의 대가로 여겨진다. 그의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1934년 오스트리아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한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그의 추종자 중 일부를 소원하게 만들었으며, 후대에도 그의 정치적 판단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적 정신과 언어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7. 주요 저서
카를 크라우스가 남긴 대표적인 저서들은 그의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7.1. 원본 작품
- Die demolierte Literatur디 데몰리에르테 리터라투어독일어 (파괴된 문학) (1897)
- Eine Krone für Zion아이네 크로네 퓌어 치온독일어 (시오니즘을 위한 왕관) (1898)
- Sittlichkeit und Kriminalität지틀리히카이트 운트 크리미날리테트독일어 (도덕과 형사 사법) (1908)
- Sprüche und Widersprüche슈프뤼헤 운트 비더슈프뤼헤독일어 (속담과 모순) (1909)
- Die chinesische Mauer디 키네지셰 마우어독일어 (만리장성) (1910)
- Pro domo et mundo프로 도모 에트 문도독일어 (고향과 세상을 위하여) (1912)
- Nestroy und die Nachwelt네스트로이 운트 디 나흐벨트독일어 (네스트로이와 후대) (1913)
- Worte in Versen보르테 인 페르젠독일어 (운문 속 단어들) (1916-1930)
-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디 레츠텐 타게 데어 멘슈하이트독일어 (인류 최후의 날들) (1918)
- Weltgericht벨트게리히트독일어 (세계 심판) (1919)
- Nachts나흐츠독일어 (밤에) (1919)
- Untergang der Welt durch schwarze Magie운터강 데어 벨트 두르히 슈바르체 마기독일어 (흑마술을 통한 세계의 몰락) (1922)
- Literatur리터라투어독일어 (문학) (1921)
- Traumstück트라움슈튀크독일어 (꿈 조각) (1922)
-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 Tragödie in fünf Akten mit Vorspiel und Epilog디 레츠텐 타게 데어 멘슈하이트: 트라게디 인 퓐프 악텐 미트 포어슈필 운트 에필로그독일어 (인류 최후의 날들: 서막과 에필로그를 포함한 5막 비극) (1922)
- Wolkenkuckucksheim볼켄쿠쿠크스하임독일어 (구름 뻐꾸기 집) (1923)
- Traumtheater트라움테아터독일어 (꿈 극장) (1924)
- Epigramme에피그람메독일어 (경구) (1927)
- Die Unüberwindlichen디 우뉘버빈트리헨독일어 (난공불락) (1928)
- Literatur und Lüge리터라투어 운트 뤼게독일어 (문학과 거짓말) (1929)
- Shakespeares Sonette셰익스피어스 조네테독일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933)
- Die Sprache디 슈프라헤독일어 (언어) (사후 출판, 1937)
- Die dritte Walpurgisnacht디 드리테 발푸르기스나흐트독일어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사후 출판, 1952)
7.2. 영어 번역 작품
- 인류 최후의 날들: 5막 비극 (축약본) (The Last Days of Mankind: A Tragedy in Five Acts (abridged), 1974), 알렉산더 고드, 수 앨런 라이트 번역.
- 타협 없음: 카를 크라우스 선집 (No Compromise: Selected Writings of Karl Kraus, 1977), 프레데릭 운가르 편집. 디 파켈의 시, 산문, 경구 및 서신과 인류 최후의 날들 발췌본 포함.
- 이 위대한 시대에: 카를 크라우스 독자본 (In These Great Times: A Karl Kraus Reader, 1984), 해리 존 편집. 디 파켈에서 번역된 발췌본 (원문 독일어와 함께 시 포함), 그리고 인류 최후의 날들의 대폭 축약된 번역본 포함.
- 반-프로이트: 카를 크라우스의 정신분석학 및 정신의학 비판 (Anti-Freud: Karl Kraus' Criticism of Psychoanalysis and Psychiatry, 1990), 토머스 사스 저.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학에 대한 크라우스의 여러 글과 경구에 대한 사스의 번역 포함.
- 절반의 진실과 한 바퀴 반의 진실: 선별된 경구 (Half Truths and One-and-a-Half Truths: selected aphorisms, 1990), 해리 존 번역.
- 명언과 모순 (Dicta and Contradicta, 2001), 조나단 맥비티 번역. 경구 모음집.
- 인류 최후의 날들 (The Last Days of Mankind, 1999), BBC 쓰리 라디오 드라마. 폴 스코필드가 신의 목소리 연기. 자일스 하버갈 각색 및 연출. 3회 방송 (1999년 12월 6일-13일).
- 크라우스 프로젝트: 카를 크라우스 에세이 (The Kraus Project: Essays by Karl Kraus, 2013), 조나단 프랜즌 번역, 폴 라이터와 다니엘 켈만의 주석 및 추가 각주 포함.
- 이 위대한 시대에 외 (In These Great Times and Other Writings, 2014), 패트릭 힐리 번역 및 주석. 11편의 에세이, 경구, 인류 최후의 날들 서문 및 1막 모음집.
- 인류 최후의 날들 (The Last Days of Mankind, 2015), 프레드 브리검과 에드워드 팀스 번역, 전체 텍스트. 예일 대학교 출판부.
- 인류 최후의 날들 (The Last Days of Mankind, 2016), 패트릭 힐리 대체 번역.
-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전체 텍스트 (Third Walpurgis Night: the Complete Text, 2020), 프레드 브리검 번역. 예일 대학교 출판부.
7.3. 일본어 번역 작품
- 칼 크라우스 저작집 (미완결)
- 칼 크라우스 저작집 5 아포리즘 (이케우치 키 편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1978)
- 칼 크라우스 저작집 6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사토 야스히코 외 번역, 1976, 호세이대학 출판국)
- 칼 크라우스 저작집 7·8 언어 (다케다 쇼이치 외 번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1993년 3월)
- 칼 크라우스 저작집 9 인류 최후의 날들 (상) (이케우치 키 번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1971년), 보급판 2016년
- 칼 크라우스 저작집 10 인류 최후의 날들 (하) (이케우치 키 번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1971년), 보급판 2016년
- 도덕과 범죄 (코마츠 타로 번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총서 우니베르시타스>, 1970)
- 흑마술에 의한 세계의 몰락 (야마구치 히로유키, 코노 에이지 번역, 겐다이시초 신샤 <에트르 총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