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지요히메(千代姫일본어)는 에도 막부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그의 측실 오후리노 가타(於振之方일본어, 지쇼인(自証院일본어))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자, 오와리번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정실이었다. 1637년에 태어나 1699년에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레이센인(霊仙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지요히메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자녀 중 유일하게 혈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물로, 그녀의 후손은 천황가 및 여러 다이묘 가문과 연결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그녀의 혼례 도구인 '하쓰네노초도'(初音の調度일본어)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 생애
지요히메의 생애는 출생부터 혼인, 자녀 양육, 그리고 만년의 주요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2.1. 출생과 유년기
지요히메는 간에이 14년(1637년) 윤3월 5일, 에도에서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측실 오후리노 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후리노 가타는 오카 시게마사의 딸이기도 했으며, 후에 지쇼인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아기가 태어나 처음으로 신사나 절에 방문하는 의식인 미야마이리(宮参り일본어)를 거행했으며, 이 자리에서 덴카이(天海일본어)에 의해 '지요히메'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어머니 오후리노 가타가 1640년에 사망하자, 지요히메는 이에미쓰의 또 다른 측실인 오만노 가타(お万の方일본어, 후에 게이쇼인(慶昇院일본어) 또는 에이코인(永光院일본어))에게 입양되어 양육되었다. 지요히메는 이에미쓰의 맏딸이었으며, 그의 총애를 받는 딸로 여겨졌다. 어린 시절 그녀는 심각한 질병을 앓았다. 이에미쓰는 고즈케국(上野国일본어)의 만토쿠지(満徳寺일본어)에 깊이 관여하며 후원하고 있었는데, 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만토쿠지 주지인 슌초(舜超일본어)에게 의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지요히메가 병에서 회복된 후, 슌초와 다른 비구니들은 쇼군 가문 내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2.2. 혼인
간에이 15년(1638년) 2월 20일, 지요히메는 도쿠가와 미쓰토모와의 약혼을 맺었다. 약혼 당시 지요히메는 2세 6개월이었고, 미쓰토모는 14세였다. 간에이 16년(1639년) 9월 21일에는 오와리번의 이치가야(市谷일본어) 저택으로 시집을 갔다.
하지만 다른 기록인 『도쿠가와 쇼케 게후』(徳川諸家系譜일본어)의 '도쿠가와 막부 가후'(家譜일본어)에서는 간에이 16년(1639년) 9월 21일에 미쓰토모와 약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식 혼인은 쇼호(正保일본어) 2년(1645년)에 시집을 갔다가 쇼호 4년(1647년) 12월 29일에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혼인 시점에 대한 차이가 있다.
쇼호 2년(1645년) 12월 11일에는 수두에 걸렸고, 쇼호 3년(1646년) 5월에는 홍역에 걸리는 등 어린 시절 여러 질병을 겪었으나 같은 해 6월에는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2.3. 자녀와 만년
지요히메는 조오(承応일본어) 원년(1652년) 8월 2일에 장남 도쿠가와 쓰나나리(徳川綱誠일본어, 후에 오와리번 번주)를 낳았다. 이후 메이레키(明暦일본어) 원년(1655년) 5월 19일에는 장녀 도요히메(豊姫일본어, 일찍 사망), 메이레키 2년(1656년) 11월 9일에는 차남 마쓰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일본어, 후에 다카스번(高須藩일본어) 번주), 그리고 만지(万治일본어) 원년(1658년) 6월 1일에는 차녀 나오히메(直姫일본어, 일찍 사망)를 출산했다. 또한, 측실 소생의 마쓰다이라 요시마사(松平義昌일본어)와 마쓰다이라 도모아키라(松平友著일본어)를 양자로 입양했다.
게이안(慶安일본어) 4년(1651년) 아버지 이에미쓰가 사망했을 때, 지요히메는 유산으로 2.00 만 JPY와 다기인 차 쓰보(茶壺일본어)를 받았다. 1652년에는 사망한 어머니를 위해 지쇼인(自証院일본어)의 법명을 딴 지쇼인 영묘(自証院霊廟일본어)를 건립했다. 이 영묘는 현재 에도-도쿄 다테모노엔(江戸東京たてもの園일본어)에 보존되어 있다.
2.4. 죽음
지요히메는 겐로쿠(元禄일본어) 11년(1698년) 12월 10일, 에도 이치가야 저택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조조사(増上寺일본어)에 매장되었으며, 법명은 레이센인 쵸요 지코 쇼게쓰 다이시(霊仙院長誉慈光松月大姉일본어)로 부여되었다.
3. 가족 관계
지요히메의 직계 가족 구성과 그녀의 혈통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상세히 다룬다.
3.1. 직계 가족
지요히메의 주요 직계 가족은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친부모 | 도쿠가와 이에미쓰 | 에도 막부 제3대 쇼군 |
| 오후리노 가타(於振之方일본어) | 지쇼인(自証院일본어), 오카 시게마사의 딸, 1640년 사망 | |
| 양모 | 오만노 가타(お万の方일본어) | 게이쇼인(慶昇院일본어)/에이코인(永光院일본어), 1624년 ~ 1711년 |
| 남편 | 도쿠가와 미쓰토모 | 오와리번 제2대 번주 |
| 친자녀 | 도쿠가와 쓰나나리(徳川綱誠일본어) | 1652년 ~ 1699년, 오와리번 제3대 번주 |
| 마쓰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일본어) | 1656년 ~ 1715년, 다카스번 번주 | |
| 도요히메(豊姫일본어) | 1655년생, 일찍 사망 | |
| 나오히메(直姫일본어) | 1658년 ~ 1661년, 일찍 사망 |
3.2. 후손과 혈통의 중요성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는 지요히메 외에 세 명의 이복동생(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쓰나시게, 도쿠가와 쓰나요시)이 있었으나, 이들의 후손은 모두 단절되었다. 따라서 이에미쓰의 직계 혈통 중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은 유일하게 지요히메를 통한 혈통뿐이다.
지요히메의 혈통은 일본 황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제126대 천황 나루히토는 지요히메의 후손이다. 구체적인 계보는 다음과 같다.
- 지요히메 - 도쿠가와 쓰나나리 - 도쿠가와 요시미치(徳川吉通일본어) - 신주인(信受院일본어, 미치기미) - 니조 무네모토(二条宗基일본어) - 니조 하루타카(二条治孝일본어) - 구조 나오타다(九条尚忠일본어) - 구조 미치타카(九条道孝일본어) - 데이메이 황후(貞明皇后일본어, 사다코) - 쇼와 천황 - 아키히토 상황 - 나루히토 천황
또한, 지요히메의 외증조모인 오후리노 가타의 어머니 고이시도노(小石殿일본어)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이었기에, 지요히메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총대장인 증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서군의 중심이었던 고조부 이시다 미쓰나리 양측의 피를 잇는 특별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지요히메의 혈통은 이후 일본의 여러 다이묘 가문과 공가, 그리고 구 황족에까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4. 문화적 유산
지요히메와 관련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는 그녀의 혼례 도구가 있다.
4.1. 하쓰네노초도 (혼례 도구)
지요히메가 도쿠가와 미쓰토모에게 시집갈 때 사용했던 혼례 도구인 '하쓰네노초도'(初音の調度일본어)는 현재 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996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혼례 도구는 쇼군의 어용 마키에(蒔絵일본어) 장인인 고아미파(幸阿弥派일본어)의 고아미 나가시게(幸阿弥長重일본어)가 제작을 담당했다. 지요히메가 태어난 간에이 14년(1637년)부터 주문을 받아 2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례 도구의 디자인을 이와사 마타베에(岩佐又兵衛일본어)가 담당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현재 의문시되고 있다.
5. 가신
지요히메는 도쿠가와 미쓰토모에게 시집가기 전부터 그녀를 모시던 가신들을 두었다. 『시료소란』(史料綜覧일본어)에 따르면, 오하시 지카노부(大橋親善일본어)가 지요히메의 가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하시 지카노부는 지요히메의 혼인 직전인 간에이 16년(1639년) 9월 18일에 막부로부터 1,000 고쿠(石일본어)를 추가로 가증 받아 총 2,120여 고쿠의 영지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