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경력
제임스 젠틸의 초기 경력은 그의 출생과 신체적 특징, 프로 계약 및 마이너 리그에서의 성장, 그리고 메이저 리그 데뷔 과정으로 구성된다.
1.1. 계약 및 마이너리그 시절
제임스 에드워드 젠틸은 1934년 6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젠틸은 키 1.8 m (6 ft) 0.1 m (3 in)에 95 kg (210 lb)의 체격을 가진 강력한 좌타자였다. 그는 1952년 고등학교 시절 브루클린 다저스와 투수로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첫 마이너 리그 시즌에는 투수로 활동하며 2승 6패의 기록을 남겼다. 이듬해 그는 1루수로 포지션을 전환했다. 당시 다저스 팀에는 이미 길 호지스와 놈 라커와 같은 올스타 1루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젠틸은 8년 동안 마이너 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두 개의 다른 리그에서 홈런 선두를 차지하기도 했다. 1956년 11월에는 다저스 선수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미일 야구에 참가했으며, 당시 2A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팀 내 최다인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1.2. 메이저 리그 데뷔
젠틸은 1957년 9월 24일 브루클린의 유명한 에베츠 필드에서 열린 다저스의 마지막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5회 초 피 위 리스와 교체되었는데, 리스는 3루로 이동하고 길 호지스가 3루에서 1루로 자리를 옮겼다. 이 경기의 마지막 타자인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디 폰디가 돈 짐머에게 땅볼을 쳤고, 짐머가 1루의 호지스에게 공을 던져 경기의 마지막 아웃을 기록했다.
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경력
젠틸은 메이저 리그에서 총 9시즌 동안 활약하며 뛰어난 장타력을 선보였다. 그의 경력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의 전성기와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이어진 활약, 그리고 그의 통산 기록으로 요약될 수 있다.
2.1.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1960년, 젠틸은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이적 첫 풀 시즌에 1960년 올스타전에 선정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의 경력 중 최고의 시즌은 1961년이었다. 그는 이 시즌에 타율 .302, 46 홈런, 141 타점, 96 득점, 147 안타, 25 2루타, 96 볼넷, 출루율 .423, 장타율 .646, OPS 1.069를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그는 미키 맨틀과 로저 매리스에 이어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또한 젠틸은 이 시즌에 5개의 그랜드 슬램을 기록했는데, 한 경기에서 2개의 그랜드 슬램을 연속으로 터뜨리기도 했다. 이는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었으며, 1987년 돈 매팅리가 6개의 그랜드 슬램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2.2. 기타 MLB 팀 시절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의 전성기 이후, 젠틸은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거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1967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3A 팀에서 타율 .236, 13홈런을 기록했으며, 1968년에도 같은 3A 팀에서 타율 .185, 8홈런에 그치는 등 노쇠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2.3. MLB 통산 기록
젠틸은 메이저 리그에서 총 9시즌 동안 93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0, 179홈런, 549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연도별 타격 성적은 다음과 같다.
| 년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몸에 맞는 공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57 | BRO LAD  | 4 | 7 | 6 | 1 | 1 | 0 | 0 | 1 | 4 | 1 | 0 | 0 | 0 | 0 | 1 | 0 | 0 | 1 | 0 | .167 | .286 | .667 | .952 | 
| 1958 | BRO LAD  | 12 | 34 | 30 | 0 | 4 | 1 | 0 | 0 | 5 | 4 | 0 | 0 | 0 | 0 | 4 | 1 | 0 | 6 | 1 | .133 | .235 | .167 | .402 | 
| 1960 | BAL | 138 | 464 | 384 | 67 | 112 | 17 | 0 | 21 | 192 | 98 | 0 | 0 | 0 | 5 | 68 | 5 | 7 | 72 | 8 | .292 | .403 | .500 | .903 | 
| 1961 | BAL | 148 | 601 | 486 | 96 | 147 | 25 | 2 | 46 | 314 | 141 | 1 | 1 | 0 | 8 | 96 | 5 | 11 | 106 | 12 | .302 | .423 | .646 | 1.069 | 
| 1962 | BAL | 152 | 639 | 545 | 80 | 137 | 21 | 1 | 33 | 259 | 87 | 1 | 0 | 0 | 10 | 77 | 16 | 7 | 100 | 13 | .251 | .346 | .475 | .821 | 
| 1963 | BAL | 145 | 582 | 496 | 65 | 123 | 16 | 1 | 24 | 213 | 72 | 1 | 0 | 1 | 3 | 76 | 9 | 6 | 101 | 14 | .248 | .353 | .429 | .782 | 
| 1964 | KCA | 136 | 533 | 439 | 71 | 110 | 10 | 0 | 28 | 204 | 71 | 0 | 0 | 1 | 5 | 84 | 6 | 4 | 122 | 9 | .251 | .372 | .465 | .837 | 
| 1965 | KCA HOU  | 119 | 397 | 345 | 36 | 84 | 16 | 1 | 17 | 153 | 53 | 0 | 0 | 0 | 1 | 43 | 8 | 6 | 98 | 8 | .243 | .337 | .443 | .780 | 
| 1966 | HOU CLE  | 82 | 222 | 191 | 18 | 41 | 7 | 1 | 9 | 77 | 22 | 0 | 0 | 1 | 0 | 26 | 4 | 4 | 57 | 4 | .215 | .321 | .403 | .724 | 
| MLB 9년 | 936 | 3479 | 2922 | 434 | 759 | 113 | 6 | 179 | 1421 | 549 | 3 | 1 | 5 | 32 | 475 | 54 | 45 | 663 | 69 | .260 | .368 | .486 | .854 | |
3. 일본 프로 야구 (NPB) 경력
메이저 리그 경력 후, 젠틸은 1969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하며 일본 프로 야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의 일본에서의 활약은 긴테쓰 입단과정, 특이한 기록과 에피소드, 그리고 NPB 통산 기록으로 구성된다.
3.1. 긴테쓰 입단 및 활약
당시 긴테쓰 버펄로스는 만년 최하위 팀이었고, 젠틸은 팀의 오랜 염원이었던 거포로서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랜 프로 생활과 과체중의 영향으로 그의 양쪽 다리는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개막전에서부터 무릎 부상을 당하는 등 잦은 부상과 등록 말소를 반복했다. 결국 선발 출전은 12경기에 그쳤고, 한 시즌 만에 팀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주로 대타로 경기에 나섰다.
3.2. 일본에서의 특이 기록 및 에피소드
젠틸은 양쪽 다리에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긴테쓰에 입단했기 때문에, 1969년 시즌 개막전부터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대부분 대타로 출전했는데,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홈런을 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루하면 즉시 대주자가 기용되었다. 당시 퍼시픽 리그에는 아직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으므로, 선발 출전할 때는 수비 범위가 좁은 1루수로만 제한되었다.
5월에 한 번 등록 말소된 후 복귀한 젠틸은 5월 18일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복귀 후 첫 선발 출전했다. 그는 2회 초 한큐의 선발 투수 아다치 미쓰히로로부터 선제 솔로 홈런을 때렸으나, 1루로 향하던 중 왼쪽 다리에 햄스트링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심판진은 홈까지 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주자 기용을 허용했다. 홈런을 친 타자에게 대주자가 보내진 것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 기록에서 홈런과 타점은 젠틸에게, 득점은 대주자로 나선 이세 다카오에게 기록되었다.
이세는 홈을 밟을 때 한큐의 포수 오카무라 고지로부터 "홈런을 친 기분이 어때?"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이세는 8회 초 요네다 데쓰야로부터 결승 홈런을 쳐내며 자신의 힘으로 홈을 밟았다. 이후 젠틸은 6월에 다시 복귀했지만, 1루수로서의 선발 출전은 앞서 언급된 이세나 오가와 히토시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기용 방식 때문에 젠틸은 시즌 내내 자신의 홈런 외에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으며, 일본에서의 통산 기록은 8홈런 7득점으로 홈런 수보다 득점 수가 적게 되었다. 이처럼 홈런 수보다 득점 수가 적은 기록은 홈런을 친 타자에게 대주자가 보내지는 극히 드문 경우가 아니면 발생하기 어려우며 (이외에 홈런을 치고 대주자가 보내진 사례는 히코노 도시카쓰뿐이다), 젠틸의 사례는 2021년 시즌 종료 시점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3.3. NPB 통산 기록
젠틸의 일본 프로 야구 연도별 타격 성적은 다음과 같다.
| 년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몸에 맞는 공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69 | 긴테쓰 | 65 | 102 | 86 | 7 | 22 | 1 | 0 | 8 | 47 | 16 | 0 | 0 | 0 | 0 | 16 | 8 | 0 | 23 | 1 | .256 | .373 | .547 | .919 | 
| NPB 1년 | 65 | 102 | 86 | 7 | 22 | 1 | 0 | 8 | 47 | 16 | 0 | 0 | 0 | 0 | 16 | 8 | 0 | 23 | 1 | .256 | .373 | .547 | .919 | |
4.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젠틸은 마이너 리그 팀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2001년과 2002년에 포트워스 캐츠의 감독을 맡았으며, 2005년에는 프론티어 리그 소속의 미드-미주리 매버릭스를 지도했다.
5. 수상 및 영예
제임스 젠틸은 선수 경력과 은퇴 후 활동을 통해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그의 등번호는 그의 활약 시기를 보여준다.
5.1. 등번호
- 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 헌액: 1989년
 - MLB 올스타 선정: 3회 (1960년, 1961년, 1962년)
 - 타점왕: 1회 (1961년, 로저 매리스와 공동)
 - 38 (1957년)
 - 27 (1958년)
 - 4 (1960년 ~ 1963년, 1965년 중반 ~ 1966년 중반)
 - 6 (1964년 ~ 1965년 중반)
 - 12 (1966년 중반 ~ 1966년 종료)
 - 44 (1969년)
 
6. 기록 관련 논란
1961년 시즌 젠틸의 141 타점은 당시 로저 매리스의 142 타점에 이어 리그 2위였다. 그러나 레트로시트의 분석 결과, 매리스는 1961년 7월 5일 경기에서 실책으로 출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점을 잘못 기록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1961년 시즌 타점은 젠틸과 매리스 모두 141타점으로 공동 1위였다.
젠틸은 1961년 오리올스와의 계약에 리그 타점왕을 차지할 경우 5000 USD의 보너스를 받는 조항이 있었다. 오리올스 구단은 50년이 지난 2010년에 이 계약 조항을 이행하여, 젠틸에게 5000 USD 수표를 전달했다.
7. 개인 생활
제임스 젠틸은 현재 오클라호마주 에드먼드에 거주하고 있다.
8. 관련 항목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간 타점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목록 G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