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신 및 초기 활동
주무는 정원현(定遠중국어 (한자)) 출신으로, 동료인 진달(陳達중국어 (한자)) 및 양춘(楊春중국어 (한자))과 함께 의형제를 맺고 산적 두목으로 활동했다.
1.1. 고향과 소화산 시절
주무는 현재 안후이성(安徽省) 정원현에 해당하는 정원현 출신이다. 그는 현재 산시성(陝西省) 화현(華縣) 남동쪽에 위치한 소화산(少華山중국어 (한자))에서 진달, 양춘과 함께 산적 두목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식량이 부족해질 때마다 인근 현과 마을을 약탈했으며, 화음현(華陰縣중국어 (한자))은 주요 약탈 대상 중 하나였다. 화음현의 관원들은 이들을 잡기 위해 3천 관의 현상금을 걸었으나, 감히 소화산에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q=Dingyuan County Anhui, Hua County Shaanxi|position=right
2. 사진과의 관계
주무는 사진(史進중국어 (한자))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의협심을 이용하고, 이후 사진이 양산박에 합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1. 사진과의 첫 만남과 우의
어느 날 진달이 식량 약탈을 위해 화음현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자, 주무는 그 경로에 사진이 사는 사가촌(史家村)이 있음을 경고하며 만류했다. 그러나 진달은 이를 무시하고 습격을 강행하다가 사진에게 붙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양춘은 사진과 맞서 싸우려 했으나, 주무는 심리적인 전술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무와 양춘은 무기 없이 단둘이 사가촌으로 가서 사진에게 자신들을 체포하여 진달과 함께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의 의리에 감동한 사진은 진달을 풀어주고 세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자주 선물을 교환하고 비밀리에 모여 술을 마시며 친분을 쌓았다.
2.2. 사진의 양산박 합류 과정
어느 날, 사냥꾼 이길(李吉)이 사진이 산적들과 교류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관아에 고발했다. 이로 인해 사진의 저택은 관군에게 포위되었고, 사진은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세 산적 두목과 함께 싸워 탈출했다. 소화산으로 돌아온 주무는 사진에게 자신들의 두목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진은 이를 거절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후 사진은 방랑을 마치고 소화산으로 돌아와 마침내 두목이 되었다. 이때 양산박 합류를 권유하러 온 노지심(魯智深중국어 (한자))과 만났으나, 사진은 화주(華州중국어 (한자))의 태수(太守)인 하태수(賀太守중국어 (한자))에게 납치된 여인을 구하려다 오히려 붙잡혔다. 사진을 구하려던 노지심 또한 하태수의 함정에 빠져 붙잡혔다. 이에 주무, 진달, 양춘은 양산박에 도움을 요청했고, 양산박의 호걸들은 화주로 가서 하태수를 유인해 죽이고 사진과 노지심을 구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무를 포함한 소화산의 산적들은 양산박에 합류하게 되었다.
3. 양산박에서의 역할
양산박에 합류한 주무는 108호걸 중 37위이자 지살성의 으뜸인 지괴성으로 임명되었으며, 군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군사로서의 임명과 임무
양산박 108호걸이 모두 모인 대집결 이후, 주무는 양산박의 최고 군사인 오용(吳用중국어 (한자))과 공손승(公孫勝중국어 (한자))을 보좌하는 부군사(副軍師중국어 (한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군무(軍務)와 기밀(機密)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공손승이 잠시 이탈한 후에는 방랍의 난 평정 전투에서 사실상 정군사(正軍師)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노준의(盧俊義중국어 (한자))의 진영에서 군사 업무를 보좌하기도 했다.
3.2. 전략 및 용병술
주무는 군사적 지략과 병력 배치에 능하며, 특히 진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용병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적장이 사용하는 진형을 잇달아 간파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섬세한 계책에 능한 오용과 비교했을 때, 주무의 진형 지식과 용병술은 군대를 움직이는 데 기대되었지만, 실제 전술 운용에서는 그 지식이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여 군사로서의 역할은 오용에게 약간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었다.
4. 전역 및 이후 행적
양산박에 합류한 주무는 여러 주요 전역에 참여하여 활약했으며, 전역 후에는 관직을 거부하고 도교 수련에 전념하며 은둔 생활을 보냈다.
4.1. 주요 전역 참여
주무는 송 휘종(宋徽宗중국어 (한자))의 사면을 받은 후 양산박군이 참여한 주요 전역에 모두 참가했다. 그는 요나라(遼중국어 (한자)) 침략군과의 전투, 송나라 영토 내의 반란군 진압 전투, 그리고 방랍(方臘중국어 (한자))의 난 평정 전투 등에서 그의 뛰어난 군사적 통찰력을 발휘하여 양산박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4.2. 도교 수련과 은둔
주무는 양산박의 주요 전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호걸 중 한 명이다. 모든 전역이 끝난 후, 생존한 호걸들이 황제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수도 개봉(開封)으로 돌아갈 때, 주무는 번서(樊瑞중국어 (한자))와 함께 무혁랑(武奕郞중국어 (한자)) · 도통령(都統領중국어 (한자))의 관직을 거부하고 양산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공손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도교(道教)를 수련하며 도술을 익혔고, 소설에서는 그가 도교의 신선이 되었다고 묘사된다.
5. 관련 항목
- 수호전 108성
- 진달
- 양춘
- 사진
- 노지심
- 오용
- 공손승
- 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