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존 타일러는 1790년 3월 29일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의 그린웨이 농장(Greenway Plantation)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버지니아의 명망 높은 노예 소유주 가문이자 버지니아 퍼스트 패밀리의 후손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타일러 시니어(John Tyler Sr.)는 '타일러 판사'로 불렸으며, 토머스 제퍼슨의 개인적, 정치적 친구이자 대학 동창이었다. 그는 버지니아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의장을 지냈고, 이후 주 법원 판사와 버지니아 주지사, 그리고 리치먼드 소재 미국 동부 버지니아 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 마로트(애미스테드)는 뉴켄트 카운티의 저명한 농장주 로버트 부스 애미스테드의 딸로, 존이 7세이던 1797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타일러는 두 형제와 다섯 자매와 함께 아버지가 지은 1200 acre 규모의 그린웨이 농장에서 자랐다. 이 농장에서는 노예 노동력을 통해 밀, 옥수수, 담배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다. 타일러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 높은 임금을 주고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타일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마르고 설사에 취약했다. 12세에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의 예비 과정에 입학했으며, 17세이던 1807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그의 경제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평생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 대학 총장이었던 제임스 매디슨 주교는 타일러에게 아버지이자 멘토 역할을 했다.
졸업 후 타일러는 주 판사였던 아버지와 전 미국 법무장관 에드먼드 랜돌프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9세에 버지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는데, 이는 당시 자격 연령보다 어렸지만 인가 판사가 그의 나이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주도인 리치먼드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1810년 연방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리치먼드에 8명, 인접한 헨리코 카운티에 5명, 찰스 시티 카운티에 26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1813년 아버지가 사망한 해, 타일러는 우드번 농장(Woodburn Plantation)을 매입하여 1821년까지 거주했다. 1820년 기준으로 타일러는 우드번에서 24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13명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다.
2. 초기 경력
존 타일러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버지니아주 정치에 입문하여 1812년 전쟁에 참전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1. 변호사로서의 활동 시작
존 타일러는 19세에 버지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리치먼드에서 법률 활동을 시작했다. 1813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우드번 농장을 매입하여 1821년까지 거주하며 노예 노동력을 활용한 농장 경영을 병행했다.
2.2. 버지니아 정치 입문
존 타일러는 21세이던 1811년 버지니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찰스 시티 카운티를 대표했다. 그는 5년 연속 1년 임기를 수행하며 법원 및 사법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주권론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국립은행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그는 버지니아주 의회의 지시를 어기고 미국 제1은행 재인가에 찬성표를 던진 미국 상원 의원 윌리엄 브랜치 자일스와 리처드 브렌트에 대한 비난 결의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어떠한 조치에도 반대했으며, 켄터키주 하원의원 헨리 클레이가 제안한 아메리칸 시스템 경제 계획(도로 및 기타 국내 개선에 연방 자금을 늘리고 미국 제조업자를 돕기 위한 고관세 요구)에도 반대했다.
2.3. 1812년 전쟁
대부분의 당시 남부인들처럼 타일러는 반영국주의 성향을 가졌으며, 1812년 전쟁 발발 시 버지니아 대의원에서 군사 행동 지지를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1813년 여름 영국군이 버지니아주 햄프턴을 점령하자, 타일러는 리치먼드를 방어하기 위해 찰스 시티 라이플스(Charles City Rifles) 민병대를 조직하고 대위 계급으로 이를 지휘했다. 그러나 공격은 없었고, 그는 두 달 후 부대를 해산했다. 그의 군 복무에 대한 보상으로 훗날 아이오와주 수시티 근처에 토지 보조금을 받았다. 181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13명의 노예를 상속받았다. 1816년에는 의원직을 사임하고 총회가 선출하는 8명의 자문위원단인 주지사 자문위원회에 합류했다.
3. 정치 경력 (대통령 이전)
타일러는 연방 하원과 상원 의원을 거치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며 휘그당에 합류했고, 부통령 후보로서 선거 운동에 참여하며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까지 다양한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3.1. 연방 하원 및 상원 의원
3.1.1. 연방 하원 의원
1816년 9월, 존 클롭턴 연방 하원의원의 사망으로 버지니아주 제23선거구에 공석이 생기자 타일러는 이 자리에 출마하여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1816년 12월 17일 미국 제14차 의회에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취임했다. 1812년 전쟁 이후 많은 민주공화당원들이 강력한 중앙 정부를 주장했으나, 타일러는 엄격해석주의 신념을 고수하며 항만 및 도로 건설과 같은 내부 개선을 위한 연방 자금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각 주가 자체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주 경계 내에서 지역 자금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1818년에는 5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미국 제2은행 감사에 참여하여 은행 내부에 만연한 부패에 경악했으며, 은행 특허 취소를 주장했으나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제1차 세미놀 전쟁 중 앤드루 잭슨 장군이 1818년 플로리다를 침공했을 때, 타일러는 잭슨의 인품을 칭찬하면서도 영국인 두 명을 처형한 것에 대해 과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며 그와 첫 충돌을 겪었다. 1819년 초 그는 반대 없이 재선되었다.
미국 제16차 의회(1819~1821)의 주요 쟁점은 미주리주의 연방 가입 허용 여부와 신생 주에서의 노예제 허용 여부였다. 타일러는 노예제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노예제가 확장되면 서부로 노예와 주인이 이동하여 동부의 노예 수가 줄어들고, 이를 통해 버지니아주에서 노예제 폐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는 의회가 노예제를 규제할 권한이 없으며, 노예주 또는 자유주 여부에 따라 주를 인정하는 것은 지역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미주리 타협은 타일러의 지지 없이 통과되었다. 그는 의회 재임 기간 내내 준주에서의 노예제를 제한하는 법안에 반대 투표를 했다.
1820년 말, 타일러는 잦은 건강 악화와 워싱턴의 정치 문화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상징적인 반대 투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의원의 낮은 급여로는 자녀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재지명을 거부했다. 그는 1821년 3월 3일 의원직을 사임하고 전업 변호사로 돌아갔다.
3.1.2. 주지사 및 연방 상원 의원
집에서 2년간 변호사 활동을 하며 지루함을 느낀 타일러는 1823년 다시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쉽게 당선되었다.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의회 내에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초기 방식인 의회 코커스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떨어지자, 타일러는 하원을 설득하여 코커스 시스템을 지지하고 윌리엄 H. 크로퍼드를 민주공화당 후보로 지명하도록 시도했다. 크로퍼드는 의회의 지지를 얻었지만, 타일러의 제안은 부결되었다. 이 두 번째 의정 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등록 학생 수 감소로 폐쇄 위기에 처한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을 살려낸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대학을 시골 윌리엄스버그에서 인구 밀집 지역인 리치먼드로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타일러는 행정 및 재정 개혁을 제안했고, 이는 법으로 통과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1840년에는 학교 역사상 가장 많은 학생 수를 기록했다.

타일러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커져갔으며, 1824년 미국 상원 선거를 위한 의회 심의에서 잠재적 후보로 거론되었다. 1825년 12월, 그는 당시 의회에서 임명하는 버지니아 주지사 후보로 지명되어 존 플로이드를 131대 81표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1776년부터 1830년까지 적용된 버지니아주 헌법 하에서 주지사직은 거부권조차 없는 무력한 자리였다. 타일러는 저명한 연설가로서의 발언권을 누렸지만, 의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주지사로서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1826년 7월 4일에 사망한 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장례식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었다. 타일러는 제퍼슨에게 깊이 헌신했으며, 그의 웅변적인 추도사는 호평을 받았다.
타일러의 주지사 임기는 대체로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주권론을 옹호하고 연방 권력 집중을 강력히 반대했다. 연방 인프라 제안을 저지하기 위해 버지니아주가 자체적으로 도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주립 공립학교 시스템 확장을 위한 제안도 있었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1826년 12월 만장일치로 두 번째 1년 임기에 재선되었다. 1829년에는 리치먼드와 윌리엄스버그를 포함하는 지역구에서 버지니아 헌법 제정 회의 (1829-1830)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존 마셜 대법원장과 함께 입법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타일러는 버지니아 식민지화 협회 회장, 그리고 훗날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의 총장과 총장 대행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주 차원의 직책을 수행했다.
1827년 1월, 총회는 존 랜돌프 연방 상원의원의 6년 임기 재선 여부를 심의했다. 랜돌프는 논쟁적인 인물이었는데, 버지니아 의회 대부분이 공유하는 주권론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원에서의 불같은 수사와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동맹국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과 켄터키주 상원의원 헨리 클레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적을 만들었다. 애덤스와 클레이를 지지하는 민주공화당의 국가주의자들은 버지니아 의회에서 상당한 소수파였다. 그들은 랜돌프의 평판에 불편함을 느끼는 주권론 지지자들의 표를 얻어 랜돌프를 낙선시키려 했다. 그들은 타일러에게 접근하여 그가 상원 의석을 추구한다면 자신들의 지지를 약속했다. 타일러는 랜돌프를 최고의 후보로 지지하며 거듭 제안을 거절했지만, 정치적 압력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선택된다면 상원 의석을 수락하기로 동의했다. 투표 당일, 한 의원은 후보들 사이에 정치적 차이가 없으며 타일러가 랜돌프보다 더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현직 의원의 지지자들은 타일러의 당선이 애덤스 행정부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는 115대 110표로 타일러를 선출했고, 그는 1827년 3월 4일 상원 임기가 시작되면서 주지사직을 사임했다.
3.1.3. 민주당 내 이단아
타일러가 상원에 당선될 무렵,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이었다. 현직 대통령 애덤스는 앤드루 잭슨의 도전을 받았다. 민주공화당은 애덤스의 국민공화당과 잭슨의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타일러는 두 후보 모두 연방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잭슨이 애덤스만큼 내부 개선에 많은 연방 자금을 지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잭슨에게 점점 더 끌렸다. 잭슨에 대해 그는 "그에게로 향하면 적어도 희망을 품을 수 있지만, 애덤스를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1827년 12월 미국 제20차 의회가 시작되자, 타일러는 그의 버지니아 동료이자 친구인 리틀턴 월러 태즈웰과 함께 활동했다. 태즈웰 역시 엄격해석주의적 견해와 잭슨에 대한 불편한 지지를 공유했다. 재임 기간 내내 타일러는 국가 인프라 법안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는 각 주가 결정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와 그의 남부 동료들은 비판자들에게 "혐오스러운 관세"로 알려진 1828년 관세법에 성공하지 못하고 반대했다. 타일러는 이 관세의 유일한 긍정적인 결과는 국가적인 정치적 반발을 일으켜 주권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한마디로 연방 정부를 소멸시키고, 헌법을 파괴하여 그 조각들을 바람에 흩뿌릴 수 있다"고 말하며 주권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로 남았다.
타일러는 곧 잭슨 대통령과 불화를 겪게 되었는데, 잭슨의 새로이 등장한 엽관제에 좌절감을 느꼈고 이를 "선거 운동 무기"라고 묘사했다. 그는 잭슨의 지명자들 중 많은 수가 위헌적이거나 엽관제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으로 보일 때 반대표를 던졌다. 자신의 당 대통령의 지명에 반대하는 것은 당에 대한 "반란 행위"로 간주되었다. 타일러는 특히 잭슨이 오스만 제국 사절단과 만날 세 명의 조약 위원을 지명하기 위해 휴회 임명 권한을 사용한 것에 불쾌함을 느꼈고, 이에 대해 잭슨을 비난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일부 문제에서는 타일러가 잭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는 잭슨이 위헌이라고 생각했던 메이즈빌 도로 자금 지원 프로젝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옹호했다. 그는 잭슨의 여러 임명자들을 승인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는데, 여기에는 잭슨의 미래 러닝메이트인 마틴 밴 뷰런의 영국 주재 미국 공사 임명도 포함되었다. 18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은 미국 제2은행의 재인가였는데, 이는 타일러와 잭슨 모두 반대하는 사안이었다. 의회는 1832년 7월 은행 재인가에 찬성표를 던졌고, 잭슨은 헌법적, 실용적 이유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타일러는 거부권을 지지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고, 잭슨의 성공적인 재선 도전을 지지했다.
3.1.4. 민주당과의 결별
타일러와 그의 당과의 불편한 관계는 미국 제22차 의회에서 무효화 위기(1832~1833)가 시작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탈퇴를 위협하며 1832년 11월 "혐오스러운 관세"를 주 내에서 무효화하는 무효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는 주가 연방 법률을 무효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헌법적 질문을 제기했다. 그러한 권리를 부인한 잭슨은 연방 정부가 관세 집행을 위해 군사 행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 법안에 서명할 준비를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무효화 이유에 공감했던 타일러는 주에 대한 잭슨의 군사력 사용을 거부했으며, 1833년 2월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10년에 걸쳐 관세를 점진적으로 인하하여 주와 연방 정부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1833년 타협 관세를 지지했다.
강제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하면서 타일러는 이 시점까지 그의 불규칙성을 용인했던 버지니아 의회의 친잭슨파를 영구적으로 소외시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는 1833년 2월 그의 재선에 위협이 되었는데, 그는 친행정부 민주당원 제임스 맥도웰과 맞섰지만, 클레이의 지지 덕분에 12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잭슨은 행정 명령으로 은행을 해산하려 함으로써 타일러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1833년 9월, 잭슨은 재무장관 로저 B. 테이니에게 연방 자금을 은행에서 주 헌장 은행으로 즉시 이체하도록 지시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타일러는 이를 "권력의 명백한 강탈", 계약 위반, 그리고 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몇 달간의 고뇌 끝에 그는 잭슨의 반대자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상원 재무 위원회에 앉아 그는 1834년 3월 대통령에 대한 두 가지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무렵 타일러는 클레이가 새로 결성한 휘그당에 소속되었고, 휘그당은 상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1835년 3월 3일, 미국 제23차 의회 회기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휘그당은 타일러를 상원 임시의장으로 선출했는데, 이는 상징적인 승인 제스처였다. 그는 이 직책을 맡았던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직후 민주당이 버지니아 대의원을 장악했다. 타일러는 상원 의원직 사임 대가로 판사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해했다. 의회가 곧 그에게 헌법적 신념에 반대하는 투표를 강요할 것이었다. 미주리주 상원의원 토머스 하트 벤턴은 잭슨에 대한 비난을 삭제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의 결의에 따라 타일러는 이 법안에 찬성 투표를 하도록 지시받을 수 있었다. 그가 지시를 무시한다면, 그는 자신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 정치 생활의 첫 행위는 자일스 씨와 브렌트 씨가 지시에 반대한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언급했다. 다음 몇 달 동안 그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상반된 조언을 받았다. 2월 중순쯤 그는 자신의 상원 경력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다. 그는 1836년 2월 29일 마틴 밴 뷰런 부통령에게 사임서를 제출했다.
3.2. 1836년 및 1840년 부통령 후보
3.2.1. 1836년 대통령 선거
타일러는 사생활과 가족에게 전념하고 싶었지만, 곧 18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1835년 초부터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고, 버지니아 민주당이 삭제 지시를 내린 바로 그날, 버지니아 휘그당은 그를 후보로 지명했다. 당시 신생 휘그당은 잭슨의 후계자인 밴 뷰런에 맞서 단일 후보를 지명할 만큼 조직적이지 못했다. 대신, 각 지역의 휘그당원들은 당의 취약한 연합을 반영하여 자체적으로 선호하는 후보를 내세웠다. 매사추세츠 휘그당은 대니얼 웹스터와 프랜시스 그레인저를, 북부 및 국경주의 반프리메이슨당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그레인저를, 중남부 및 하남부의 주권론자들은 휴 로슨 화이트와 존 타일러를 지명했다. 메릴랜드주에서는 해리슨과 타일러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윌리 P. 망검과 타일러가 휘그당 후보였다. 휘그당은 밴 뷰런이 선거인단에서 과반수를 얻는 것을 막아 선거를 미국 하원으로 넘겨 거래를 성사시키려 했다. 타일러는 선거인단이 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고, 자신이 미국 헌법 수정 제12조에 따라 상원에서 선택해야 할 상위 2명 중 한 명이 되기를 희망했다.
당시 관례에 따라 후보자가 직접 선거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타일러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집에 머물렀고 연설도 하지 않았다. 1836년 11월 선거에서 그는 조지아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테네시주에서 단 47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그레인저와 민주당 후보 리처드 멘터 존슨 모두에게 뒤처졌다. 해리슨은 휘그당의 선두 대통령 후보였지만, 밴 뷰런에게 패했다.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부통령 선거는 상원에서 결정되었고, 상원은 첫 투표에서 그레인저 대신 존슨을 선택했다.
3.2.2. 전국적인 정치 인물
타일러는 미국 상원의원으로서 버지니아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829년 10월부터 1830년 1월까지 그는 주 헌법 제정 회의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이 역할은 그가 마지못해 수락한 것이었다. 원래 버지니아주 헌법은 인구와 관계없이 각 카운티에 동일한 수의 의원을 배정하고 재산 소유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여 주의 보수적인 동부 카운티에 과도한 영향력을 부여했다. 이 회의는 인구가 많고 진보적인 서부 버지니아 카운티에게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주었다. 동부 버지니아의 노예 소유주였던 타일러는 기존 시스템을 지지했지만, 주내 정치 파벌 중 어느 쪽도 소외시키고 싶지 않아 토론 중에는 대체로 관망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폭넓은 지지 기반이 필요한 상원 경력에 집중했으며, 회의 동안 타협과 단결을 촉진하는 연설을 했다.
1836년 선거 후, 타일러는 자신의 정치 경력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개인 변호사 활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1837년 가을, 한 친구가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상당한 재산을 그에게 팔았다.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었던 타일러는 대의원 선거에 성공적으로 출마하여 1838년에 의석을 차지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전국적인 정치 인물이 되었고, 그의 세 번째 대의원 활동은 공공 토지 매각과 같은 국가적 문제에까지 미쳤다.
상원에서 타일러의 후임은 보수적인 민주당원 윌리엄 카벨 리브스였다. 1839년 2월, 총회는 다음 달에 만료될 이 의석을 누가 채울지 고려했다. 리브스는 자신의 당에서 멀어져 휘그당과의 동맹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이미 민주당을 완전히 거부했기 때문에 휘그당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많은 휘그당원들은 리브스를 정치적으로 더 편리한 선택으로 보았는데, 그들은 184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보수파와 동맹을 맺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략은 당시 타일러를 존경했지만, 휘그당 지도자 헨리 클레이의 지지를 받았다. 리브스와 타일러를 포함한 세 후보 사이에 표가 분산되면서, 상원 의석은 1841년 1월까지 거의 2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3.2.3. 1840년 대통령 선거

1839년 휘그당 전당대회가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당의 후보를 선택하기 위해 소집되었을 때, 미국은 1837년 공황 이후 심각한 경기 침체의 3년째에 접어들었다. 밴 뷰런이 상황을 해결하려는 비효율적인 노력은 대중의 지지를 잃게 했다. 민주당이 파벌로 나뉘면서, 휘그당의 선두 주자는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해리슨, 클레이, 그리고 윈필드 스콧 장군 모두 지명을 추구했다. 타일러는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버지니아 대표단과 함께했지만, 공식적인 지위는 없었다. 미해결 상원 선거에 대한 불만 때문에 버지니아 대표단은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타일러 자신도 자신의 기회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선호하는 대통령 후보인 클레이가 성공한다면, 지리적 균형을 위해 북부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은 부통령 후보로 선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당대회는 세 주요 후보 사이에 교착 상태에 빠졌고, 버지니아의 표는 클레이에게 돌아갔다. 많은 북부 휘그당원들은 클레이에게 반대했고, 펜실베이니아의 새디어스 스티븐스를 포함한 일부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스콧이 노예제 폐지론적 감정을 드러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영향력 있는 버지니아 대표단은 해리슨이 두 번째 선택이라고 발표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스콧 지지자들은 해리슨을 지지하게 되었고, 해리슨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었다.
부통령 지명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어떤 대통령도 선출된 임기를 완료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선택에 많은 관심이 주어지지 않았고, 타일러가 어떻게 지명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치트우드는 타일러가 논리적인 후보였다고 지적했다. 남부의 노예 소유주로서 그는 후보의 균형을 맞추었으며, 해리슨이 노예제 폐지론적 성향을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남부인들의 불안을 해소했다. 타일러는 1836년에 이미 부통령 후보였고, 그를 후보로 내세우면 남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버지니아주를 얻을 수 있었다. 전당대회 관리자 중 한 명인 뉴욕 출판사 설로 위드는 "타일러는 우리가 다른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타일러 대통령과 휘그당 간의 결별 이후에야 한 말이었다. 다른 타일러의 적들은 그가 클레이의 패배에 울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가능성이 낮았다. 왜냐하면 클레이는 상원 선거에서 타일러의 상대인 리브스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타일러의 이름은 투표에 제출되었고, 버지니아는 기권했지만, 그는 필요한 과반수를 얻었다. 대통령으로서 타일러는 자신의 견해를 숨기고 지명을 얻었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의 전기 작가 로버트 시거 2세는 타일러가 다른 대안 후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보았다. 시거는 "그는 남부를 해리슨에게 끌어들이기 위해 후보에 올랐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휘그당에는 정강이 없었다. 당 지도자들은 정강을 만들려고 하면 당이 분열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휘그당은 밴 뷰런에 대한 반대를 내세우며, 경기 침체의 원인을 그와 민주당에게 돌렸다. 선거 운동 자료에서는 타일러가 주 의회의 지시에 반대하여 사임한 정직성을 칭찬했다. 휘그당은 처음에는 해리슨과 타일러가 당의 일부를 소외시킬 수 있는 정책 성명을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타일러의 민주당 경쟁자인 존슨 부통령이 성공적인 연설 투어를 마친 후, 타일러는 윌리엄스버그에서 오하이오주 컬럼버스로 가서 지역 대회에서 연설하도록 요청받았다. 이 연설은 북부인들에게 그가 해리슨의 견해를 공유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거의 두 달간의 여정 동안 타일러는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고, 타협 관세(많은 휘그당원들은 반대했다)를 지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야유를 받은 후, 해리슨의 모호한 연설을 인용하는 데 의존했다. 컬럼버스에서의 두 시간 연설에서 타일러는 당시 주요 쟁점 중 하나였던 미국 은행 문제를 완전히 회피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휘그당 지도자들은 당시 투표권이 없었던 여성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미국 정당이 여성들을 선거 운동 활동에 광범위하게 포함시킨 첫 사례였으며, 타일러의 버지니아주 여성들은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당은 쟁점을 회피하고 대중의 열정, 즉 횃불 행진과 술에 취한 정치 집회를 통해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선거 운동에 대한 관심은 전례 없이 높았으며, 많은 공개 행사가 열렸다. 민주당 언론이 해리슨을 늙은 군인으로 묘사하며, 그에게 하드 사이다 한 통만 주면 통나무집에서 캠페인을 중단할 것이라고 비꼬자, 휘그당은 이 이미지를 열렬히 받아들였고, 통나무집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해리슨이 오하이오강변의 궁궐 같은 저택에 살고 타일러가 부유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고, 통나무집 이미지는 현수막에서 위스키 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나타났다. 사이다는 많은 농부와 상인들이 선호하는 음료였으며, 휘그당은 해리슨이 서민의 음료를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후보의 군 복무가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해리슨의 티페카누 전투 승리를 언급하는 잘 알려진 캠페인 노래 "티페카누와 타일러도"가 만들어졌다. 전국적으로 합창단이 생겨나 애국적이고 영감을 주는 노래를 불렀다. 한 민주당 편집자는 휘그당을 지지하는 노래 축제가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불려진 가사 중에는 "우리는 이유 없이 타일러에게 투표할 것이다"라는 가사도 있었다. 루이스 해치는 부통령직 역사에서 "휘그당은 '티페카누의 영웅'을 백악관으로 포효하고, 노래하고, 하드 사이다를 마시게 했다"고 언급했다.
클레이는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 패배로 인해 쓰라렸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원 선거에서 타일러가 철수하여 리브스의 당선을 허용함으로써 달래졌고, 해리슨/타일러 후보를 위해 버지니아에서 선거 운동을 했다. 타일러는 휘그당이 버지니아에서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그의 예측이 틀리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인 승리에 위로를 받았다. 해리슨과 타일러는 선거인단 234대 60표로 승리했으며, 일반 투표에서는 53%를 얻었다. 밴 뷰런은 26개 주 중 7개 주만 차지했다. 휘그당은 상하 양원 모두를 장악했다.
4. 부통령 재임 (1841년)
부통령 당선자로서 타일러는 윌리엄스버그 자택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는 해리슨이 단호하게 행동하고 행정부 내에서 음모를 허용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그는 내각 구성에 참여하지 않았고, 새로운 휘그당 행정부에서 연방 공직에 누구도 추천하지 않았다. 해리슨은 밴 뷰런이 임명한 사람들을 해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차례 타일러에게 조언을 구했고, 타일러는 두 경우 모두 해임에 반대했다. 두 사람은 1841년 2월 리치먼드에서 짧게 만나 함께 퍼레이드를 관람했지만,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타일러는 1841년 3월 4일 미국 상원 회의실에서 취임 선서를 했고, 주권론에 대한 3분 연설을 한 후 신임 상원의원들의 취임 선서를 주재하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 취임식에 참석했다. 해리슨 대통령이 영하의 날씨에 많은 인파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연설한 후, 타일러는 상원으로 돌아와 대통령의 내각 지명을 받아들여 다음 날 인준을 주재했다. 상원 의장으로서 총 두 시간 동안의 활동을 마친 그는 책임이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조용히 윌리엄스버그 자택으로 돌아갔다. 로버트 시거는 훗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살아있었다면, 존 타일러는 분명히 미국 역사상 어떤 부통령만큼이나 무명이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한편, 해리슨은 클레이와 다른 이들이 자신의 행정부에서 직책과 영향력을 얻으려는 요구에 시달렸다. 해리슨의 나이와 건강 악화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비밀이 아니었으며, 대통령 승계 문제는 모든 정치인의 관심사였다. 취임 후 몇 주 동안 해리슨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3월 말 비바람에 노출된 후 폐렴과 흉막염에 걸렸다.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는 4월 1일 타일러에게 해리슨의 병세를 알렸고, 이틀 후 리치먼드의 변호사 제임스 라이언스는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내일 우편으로 해리슨 장군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타일러는 해리슨의 죽음을 예상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워싱턴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4월 5일 새벽, 국무부 수석 서기인 웹스터의 아들 플레처 웹스터가 타일러의 윌리엄스버그 자택에 도착하여 전날 아침 해리슨의 사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타일러는 윌리엄스버그를 떠나 다음 날 새벽 워싱턴에 도착했다.
5. 대통령 재임 (1841-1845)
타일러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전례 없는 대통령직 승계로 시작되어 휘그당과의 격렬한 갈등, 주요 외교적 성과, 그리고 텍사스 합병이라는 중요한 국내외 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5.1. 대통령직 승계 및 초기 행정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으며, 대통령 승계에 대한 상당한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당시 대통령 임기 중 승계를 규정했던 미국 헌법 제2조 제1절 제6항(현재는 미국 헌법 수정 제25조로 대체됨)은 "대통령이 직무에서 해임되거나, 사망, 사임 또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그 직무는 부통령에게 귀속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 헌법 조항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제 대통령직 자체가 타일러에게 귀속되는지, 아니면 단지 그 권한과 의무만이 귀속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해리슨 사망 후 한 시간 이내에 내각은 회의를 열었고, 나중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타일러가 "부통령 대행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타일러는 헌법이 자신에게 대통령직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권한을 부여한다고 단호하고 결단력 있게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는 즉시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했고, 백악관으로 이주하여 완전한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 이는 대통령 사망 시 질서 있는 권력 이양을 위한 중요한 선례를 확립했으며, 비록 1967년 제25차 수정헌법 통과 전까지는 법제화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승계에 모델이 되었다.
윌리엄 크랜치 판사가 타일러의 호텔 방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주재했다. 타일러는 부통령으로서의 선서에 비추어 이 선서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승계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불식시키고 싶어 했다. 51세의 나이로 취임한 타일러는 당시까지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의 바로 다음 후임자인 제임스 K. 포크가 49세에 취임하면서 그 기록은 다시 깨졌다.
타일러는 해리슨의 지지자들을 소외시킬 것을 우려하여, 여러 내각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고 그의 대통령직 승계를 불쾌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해리슨의 내각 전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첫 내각 회의에서 웹스터는 해리슨이 다수결 투표로 정책을 결정하는 관행을 가지고 있었다고 타일러에게 알렸다(이는 해리슨이 내각 회의를 거의 열지 않았고, 적어도 한 번은 내각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단호하게 주장했음을 고려할 때 의심스러운 주장이었다). 내각은 새 대통령이 이 관행을 계속할 것이라고 전적으로 예상했다. 타일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즉시 그들을 바로잡았다: "신사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는 내각에 여러분과 같은 유능한 국무위원들이 계셔서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조언과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지시받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저는 제 행정부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정책을 실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한, 저는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기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여러분의 사표는 수리될 것입니다."
타일러는 4월 9일 미국 의회에 비공식적인 취임 연설문을 전달했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제퍼슨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과 제한된 연방 권력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했다. 존 퀸시 애덤스와 같은 의회 야당 의원들은 타일러의 대통령직 주장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타일러가 "대통령 대행"이라는 직함으로 과도 정부의 역할을 하거나 명목상 부통령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레이는 해리슨이 살아있을 때 "무능한 왕좌 뒤의 실세"가 될 계획이었고, 타일러에게도 마찬가지로 의도했다. 클레이는 타일러를 "부통령"으로, 그의 대통령직을 단순한 "섭정"으로 보았다.
의회의 결정은 대통령에게 회기 중임을 알리고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통보하는 관례적인 절차를 통해 비준되었다. 양원 모두에서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타일러를 지칭하는 "부통령"과 같은 용어로 바꾸려는 수정안이 제출되었으나 실패했다. 미시시피주 상원의원 로버트 J. 워커는 이에 반대하며 타일러가 여전히 부통령이고 상원을 주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1841년 5월 31일, 하원은 타일러를 남은 임기 동안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확인하는 공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841년 6월 1일, 상원은 이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특히 상원의원 클레이와 존 C. 칼훈은 워커의 수정안을 부결시키는 다수결에 동참했다.
타일러의 반대자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우연한 대통령"(His Accidency)을 포함하여 많은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타일러는 자신이 정당한 대통령이라는 확신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백악관으로 "부통령" 또는 "대통령 대행"으로 주소 지정된 서신을 보내면 타일러는 개봉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타일러는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그의 단호한 행동으로 강력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대통령 권한에 대해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법은 의회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대통령의 거부권은 법률이 위헌이거나 국익에 반할 때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5.2. 휘그당과의 갈등 및 주요 정책
해리슨과 마찬가지로 타일러는 휘그당 의회의 정책을 따르고 휘그당 지도자 클레이에게 양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휘그당은 특히 잭슨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직에 대한 대응으로 타일러에게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클레이는 의회가 자신이 지도자가 되는 의원내각제와 유사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기를 구상했다. 처음에는 타일러가 새로운 휘그당 의회에 동의하여, 공공 토지 정착민에게 "점유자 주권"을 부여하는 1841년 선매권 법안, 분배 법안(아래에서 논의), 새로운 파산법, 그리고 독립 재무부 폐지 법안에 서명했다. 그러나 대규모 은행 문제에 있어서 타일러는 곧 의회 휘그당과 대립했으며, 국립은행법에 대한 클레이의 법안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 법안은 원래 첫 번째 거부권의 반대 의견을 수용하도록 조정되었지만, 최종 버전은 그렇지 않았다. 클레이가 1844년 휘그당 지명 경쟁에서 성공적인 현직 대통령을 경쟁자로 두지 않기 위해 고안된 이 관행은 버지니아주 휘그당 하원의원 존 마이너 보츠가 만든 용어인 "타일러 선장 머리 치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타일러는 "재무부"(Exchequer)라는 대안적인 재정 계획을 제안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클레이의 친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1년 9월 11일, 두 번째 은행 법안 거부권 행사 후, 내각 구성원들은 차례로 타일러의 사무실로 들어와 사임했다. 이는 타일러의 사임을 강요하고 클레이의 부관인 상원 임시의장 새뮤얼 L. 사우더드를 백악관에 앉히기 위한 클레이의 지휘였다. 유일한 예외는 대니얼 웹스터였는데, 그는 1842년 웹스터-애쉬버턴 조약을 마무리하고 클레이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 남았다. 웹스터가 남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을 때, 타일러는 "그 점에 대해 악수합시다. 이제 당신에게 말하건대, 헨리 클레이는 운이 다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9월 13일, 대통령이 사임하거나 굴복하지 않자, 의회 휘그당은 타일러를 당에서 축출했다. 타일러는 휘그당 신문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았고, 암살 위협 편지를 수백 통 받았다. 의회 휘그당은 타일러에게 너무 화가 나서 백악관 수리 자금 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5.2.1. 은행 및 재정 정책
1841년 중반, 연방 정부는 1100.00 만 USD의 재정 적자를 예상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더 높은 관세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1833년 타협 관세로 설정된 20% 세율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연방 수입을 줄일지라도, 주들의 증가하는 부채를 관리하기 위한 비상 조치로 공공 토지 판매 수익을 주에 분배하는 계획을 지지했다. 휘그당은 높은 보호 관세와 주 인프라에 대한 국가적 자금 지원을 지지했으므로, 타협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공통점이 있었다. 1841년 분배법은 관세 상한선을 20%로 설정한 분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두 번째 법안은 이전에 낮은 세금이 부과되었던 상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인상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842년 3월까지 연방 정부가 여전히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5.2.2. 관세 및 토지 분배 논쟁
문제의 근원은 1842년에 6년째에 접어든 1837년 공황으로 시작된 경제 위기였다. 1836년부터 1839년 사이에 투기 거품이 터지면서 금융 부문이 붕괴하고 이어진 대공황이 발생했다. 국가는 위기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을 놓고 깊이 분열되었다. 1842년 초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년 전 경제가 강했을 때, 의회는 남부 주들에게 혐오스러운 연방 관세를 인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북부 주들은 신생 산업을 보호하는 관세를 환영했지만, 남부는 산업 기반이 없었고 면화에 대한 영국 시장의 개방에 의존했다. 의회에 대한 권고에서 타일러는 1833년 타협 관세를 무시하고 20% 한도를 넘어 세율을 인상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전 합의에 따르면, 이는 분배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모든 수입이 연방 정부로 귀속되도록 할 것이었다.
반항적인 휘그당 의회는 주에 대한 자금 분배에 영향을 미칠 방식으로 관세를 인상하지 않았다. 1842년 6월, 그들은 관세를 인상하고 분배 프로그램을 무조건적으로 연장하는 두 가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연방 수입 부족으로 관세 인상이 필요한 시점에 분배를 계속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타일러는 두 법안 모두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자신과 휘그당 사이의 남아있던 모든 다리를 불태웠다. 의회는 두 법안을 하나로 합쳐 다시 시도했지만, 타일러는 다시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많은 의원들이 실망했지만 거부권을 뒤집는 데 실패했다. 어떤 조치라도 필요했기 때문에, 하원 세입세출위원회 위원장 밀러드 필모어가 이끄는 의회 휘그당은 각 원(한 표 차이로)에서 관세를 1832년 수준으로 복원하고 분배 프로그램을 종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타일러는 8월 30일 1842년 관세법에 서명했으며, 분배를 복원하는 별도의 법안에 대해서는 포켓 거부권을 행사했다.
5.2.3. 뉴욕 세관 개혁
1841년 5월, 타일러 대통령은 마틴 밴 뷰런 대통령 재임 시기에 발생했다고 알려진 뉴욕 세관의 사기를 조사하기 위해 세 명의 민간인을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전 주지사이자 미시시피주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포인덱스터가 이끌었다. 위원회는 밴 뷰런 휘하의 뉴욕 세관장 제시 D. 호이트의 사기 행위를 밝혀냈다. 위원회의 조사는 휘그당이 장악한 의회와 논란을 일으켰는데, 의회는 조사 보고서 공개를 요구했고 타일러가 의회 승인 없이 위원회에 비용을 지불한 것에 불만을 표했다. 타일러는 이에 대해 법률을 집행하는 것이 자신의 헌법적 의무라고 답했다. 1842년 4월 29일 보고서가 완성되자, 하원은 보고서를 요구했고 타일러는 이를 따랐다. 포인덱스터의 보고서는 휘그당 뉴욕 세관장뿐만 아니라 호이트에게도 굴욕적이었다. 타일러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의회는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조사관에게 자금을 배정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세출 법안을 통과시켰다.
5.3. 외교 정책
타일러의 국내 정책에서의 어려움은 그의 외교 정책 성과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오랫동안 태평양을 향한 확장주의와 자유 무역의 옹호자였으며,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국가적 운명과 자유 확산이라는 주제를 즐겨 언급했다. 그의 입장은 태평양 전역에서 미국 상업을 촉진하려 했던 잭슨의 이전 노력과 대체로 일치했다. 국제 시장에서 영국과 경쟁하기를 열망했던 그는 변호사 케일럽 쿠싱을 중국에 파견하여 왕샤 조약(1844)의 조건을 협상하게 했다. 같은 해, 그는 베를린에 헨리 휘튼을 공사로 파견하여 관세를 관리하는 독일 국가 연합인 관세 동맹과 무역 협정을 협상하고 서명했다. 이 조약은 주로 타일러 행정부에 대한 적대감의 표시로 휘그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타일러는 군사력 증강을 옹호했으며, 이는 전함의 현저한 증가를 목격한 해군 지도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42년 의회에 보낸 특별 메시지에서 타일러는 하와이에 먼로 독트린을 적용했으며("타일러 독트린"으로 불림), 영국에게 하와이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훗날 미국의 하와이 합병으로 이어진 과정을 시작했다.
5.3.1. 주요 조약 및 외교 성과

1839년에 끝난 아루스툭 전쟁의 여파로 외교 위기가 발생했다. 메인주 주민들은 뉴브런즈윅 주민들과 3107986 만 m2 (1.20 만 mile2)에 달하는 분쟁 지역을 놓고 충돌했다. 1841년, 미국 선박 '크리올 호'는 버지니아주에서 뉴올리언스로 노예를 수송 중이었다. 선상에서 반란이 일어나 배는 영국군에 나포되어 바하마로 끌려갔다. 영국은 노예들을 주인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타일러의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는 영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열망했고, 타일러는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냈다. 1842년, 영국은 특사 애쉬버턴 경(알렉산더 바링, 초대 애쉬버턴 남작)을 미국에 파견했다. 곧이어 우호적인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웹스터-애쉬버턴 조약으로 이어졌고, 이 조약은 메인주와 캐나다 국경을 확정했다. 이 문제는 수십 년 동안 미국과 영국 간의 긴장을 유발했으며, 여러 차례 양국을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 조약은 영국-미국 관계를 개선했다. 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양국 선박이 노예를 싣고 있다고 의심될 경우 "방문권"을 부여하는 데 동의했다. 또한, 공동 해양 사업으로 미국 함대와 영국 함대는 아프리카 해역에서 노예 밀매를 막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서부의 오리건 국경 분쟁은 또 다른 문제였으며, 웹스터-애쉬버턴 조약 협상 중에 해결하려 시도되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1818년 협약에 따라 오리건을 공동 점유하고 있었다. 미국인의 정착은 영국에 비해 미미했으며, 영국의 모피 무역 회사인 허드슨 베이 회사는 컬럼비아 강 계곡 북쪽에 거점을 마련했다. 협상 중 영국은 컬럼비아 강을 따라 영토를 분할하기를 원했다. 이는 웹스터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고, 그는 영국이 멕시코에 압력을 가하여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만을 미국에 할양하도록 요구했다. 타일러 행정부는 오리건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한 영국과의 조약 체결에 성공하지 못했다.
5.3.2. 서부 영토 확장 및 탐험
타일러는 로키산맥 서쪽에 위치한 광대한 오리건 영토에 관심을 가졌다. 이 영토는 캘리포니아 북부 경계(북위 42도선)부터 알래스카 남부 경계(북위 54도 40분)까지 확장되었다. 일찍이 1841년부터 그는 의회에 아이오와주 카운슬블러프스에서 태평양까지 일련의 미국 요새를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이 미국 요새들은 오리건으로 가는 길 또는 오리건 가도를 따라 미국 정착민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타일러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오리건, 와이오밍,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서부 탐험에서 두 가지 대중적인 성공이 있었다. 존 C. 프레몬트 대위는 두 차례의 내륙 과학 탐험(1842년과 1843~1844년)을 완료하여 서부 지역을 미국인 이민자들에게 개방했다. 1842년 탐험에서 프레몬트는 와이오밍의 산인 프레몬트 봉(0.4 만 m (1.38 만 ft))을 과감히 등반하여 미국 국기를 꽂고 상징적으로 로키산맥과 서부 지역을 미국 영토로 선언했다. 1843년에 시작된 두 번째 탐험에서 프레몬트와 그의 일행은 오리건 가도를 따라 오리건으로 진입했다. 컬럼비아 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며 프레몬트는 캐스케이드 산맥의 봉우리들을 목격하고 세인트헬렌스 산과 후드 산을 지도에 표시했다. 1844년 3월 초, 프레몬트와 그의 일행은 아메리칸 강 계곡을 따라 멕시코령 캘리포니아의 서터 요새로 내려갔다. 존 서터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은 프레몬트는 수가 늘어나고 있던 미국인 정착민들과 대화하며 캘리포니아에 대한 멕시코의 권한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레몬트가 두 번째 탐험에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오자, 윈필드 스콧 장군의 요청으로 타일러는 프레몬트를 두 계급 특진시켰다.
5.3.3. 플로리다
타일러의 마지막 임기일인 1845년 3월 3일, 플로리다주는 27번째 주로 연방에 편입되었다.
5.3.4. 텍사스 합병

타일러는 대통령이 된 직후 텍사스 공화국의 합병을 자신의 의제에 포함시켰다. 타일러는 자신이 정당 없는 대통령임을 알고 있었고, 텍사스 합병이 휘그당이나 민주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개의치 않으며 클레이와 밴 뷰런 같은 당 지도자들에게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 텍사스는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멕시코는 여전히 텍사스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텍사스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연방 가입을 추진했지만, 잭슨과 밴 뷰런은 또 다른 남부 주를 합병함으로써 노예제에 대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을 꺼렸다. 타일러는 합병을 자신의 행정부의 핵심으로 삼으려 했지만, 웹스터 장관은 반대했고, 타일러에게 임기 후반까지 태평양 관련 계획에 집중하도록 설득했다.
타일러의 서부 확장주의에 대한 열망은 역사가들과 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지만, 그 동기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다. 전기 작가 에드워드 C. 크라폴은 제임스 먼로 대통령 재임 당시 타일러(당시 하원의원)가 노예제가 연방을 맴도는 "어두운 구름"이라고 언급하며, "이 구름을 흩뜨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구 노예주에 흑인 수가 줄어들면 버지니아와 다른 상부 남부 주에서 점진적인 노예 해방 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윌리엄 W. 프리링은 타일러가 텍사스를 합병하려 한 공식적인 동기는 영국이 텍사스에서 노예 해방을 추진하여 미국 내 노예 제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선제적으로 막기 위함이었다고 썼다.
초기 시도
1843년 초, 웹스터-애쉬버턴 조약과 다른 외교적 노력을 완료한 타일러는 텍사스 합병을 추진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이제 당 기반이 없어진 그는 공화국 합병이 1844년 독립 선거로 나아갈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그는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치적 강경책"을 펼칠 의향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자신의 동맹인 당시 버지니아주 연방 하원의원 토머스 워커 길머를 파견하여 합병을 옹호하는 서한을 발표하게 했고, 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웹스터와의 성공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타일러는 텍사스 계획을 지지하는 국무장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과의 조약 작업이 완료되자, 그는 웹스터의 사임을 강요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휴 S. 레가레를 임시 후임으로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재무장관 존 C. 스펜서의 도움을 받아 타일러는 여러 공직자들을 해임하고, 이전의 엽관제 반대 입장을 뒤집어 합병 찬성론자들로 교체했다. 그는 뉴욕에 정치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정치 조직가 마이클 월시의 도움을 얻었다. 하와이 주재 미국 영사 임명 대가로 언론인 알렉산더 G. 아벨은 아첨하는 전기 『존 타일러의 삶』을 저술했고, 이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우체국장들에게 배포되었다.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타일러는 1843년 봄 전국 순회 연설에 나섰다. 이 행사들에서 대중의 긍정적인 반응은 워싱턴에서의 그의 따돌림과 대조를 이루었다. 순회 연설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벙커힐 기념비 헌납식에 집중되었다. 헌납식 직후 타일러는 레가레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고 축제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며, 나머지 순회 일정을 취소했다.
타일러는 인기 있는 해군장관이자 측근 고문이었던 아벨 P. 업셔를 새로운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고, 길머를 업셔의 전임 직책에 지명했다. 타일러와 업셔는 텍사스 정부와 조용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합병 약속 대가로 멕시코로부터의 군사적 보호를 약속했다. 헌법은 이러한 군사적 약속에 의회 승인을 요구했으므로 비밀 유지가 필요했다. 업셔는 새로운 노예주 편입을 경계하는 북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텍사스에 대한 영국의 잠재적 의도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1844년 1월까지 업셔는 텍사스 정부에 상원의원 대다수가 합병 조약에 찬성하고 있음을 알렸다. 텍사스 공화국은 여전히 회의적이었고, 조약 최종화는 2월 말까지 이어졌다.
USS 프린스턴호 참사

합병 조약이 완료된 다음 날인 1844년 2월 28일, 새로 건조된 USS 프린스턴호에서 포토맥강을 따라 기념 항해가 열렸다. 배에는 타일러와 그의 내각을 포함한 400명의 손님이 탑승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해군 포인 "피스메이커"도 실려 있었다. 이 포는 오후에 여러 차례 의례적으로 발사되어 구경꾼들의 큰 환호를 받았고, 이후 손님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건배를 했다. 몇 시간 후, 로버트 F. 스톡턴 함장은 군중의 설득에 못 이겨 한 발 더 발사하기로 했다. 손님들이 갑판으로 올라가는 동안, 타일러는 잠시 멈춰서 사위 윌리엄 월러가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위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포가 오작동한 것이었다. 타일러는 갑판 아래에 안전하게 머물러 다치지 않았지만, 그의 중요한 내각 구성원인 길머와 업셔를 포함한 여러 명이 즉사했다. 또한 메릴랜드주의 버지스 맥시, 뉴욕주 하원의원 데이비드 가디너, 미국 해군 건설국장 베벌리 케넌 제독, 그리고 타일러의 흑인 노예이자 시종이었던 아미스테드도 사망하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데이비드 가디너의 죽음은 그의 딸 줄리아 가디너 타일러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녀는 기절했고, 대통령 자신이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줄리아는 나중에 슬픔에서 회복되어 6월 26일 타일러와 결혼했다.
타일러에게 11월 이전에 텍사스 계획을 완료할 희망(그리고 재선 희망)은 즉시 사라졌다. 역사가 에드워드 P. 크라폴은 훗날 "남북 전쟁과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이전까지, 프린스턴호 참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 대통령이 직면했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비극이었다"고 썼다.
비준 문제

미러 센터 오브 퍼블릭 어페어스가 "그의 정치적 존경심을 확립하려는 계획을 망친 심각한 전술적 오류"라고 평가한 행동으로, 타일러는 1844년 3월 초 전 부통령 존 C. 칼훈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타일러의 좋은 친구인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헨리 A. 와이즈는 프린스턴호 참사 이후, 와이즈가 대통령의 자칭 특사로서 칼훈에게 자발적으로 직책을 제안했고 칼훈이 이를 수락했다고 썼다. 와이즈가 타일러에게 자신이 한 일을 말하러 갔을 때, 대통령은 화를 냈지만 그 행동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칼훈은 노예제의 주요 옹호자였고, 그의 합병 조약 통과 시도는 그 결과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저항을 받았다. 조약의 내용이 대중에게 유출되자, 타일러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휘그당뿐만 아니라 노예제 반대자들과 합병을 미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발표한 멕시코와의 대결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정치적 반대에 부딪혔다. 휘그당과 민주당의 유력 후보였던 클레이와 밴 뷰런은 밴 뷰런의 자택에서 사적인 회의를 통해 합병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알고 있던 타일러는 1844년 4월 상원에 조약을 비준을 위해 보낼 때 비관적이었다.
칼훈 국무장관은 텍사스 합병의 동기가 미국 노예제를 영국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서한을 미국 주재 영국 공사에게 보냈다. 이 서한은 또한 남부 노예들이 북부 자유 흑인이나 영국 백인 노동자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1844년 선거
1841년 타일러가 휘그당과 결별한 후, 그는 자신의 옛 민주당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특히 밴 뷰런의 추종자들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844년 선거가 다가오면서 밴 뷰런은 민주당 후보 지명을 확실히 할 것으로 보였고, 클레이는 휘그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했다.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타일러는 대통령으로서의 유산을 살릴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 출마를 위협하고 텍사스 합병에 대한 대중의 수용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타일러는 자신의 광범위한 대통령 엽관제 권한을 활용하여 전년도에 구축한 공직자와 정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타일러당이라는 제3당을 창설했다. 전국 각지의 여러 지지 신문들은 1844년 초 내내 그의 출마를 홍보하는 사설을 발행했다. 전국에서 열린 회의 보고서들은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널리 가정되는 것처럼 공직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민주당이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열고 있을 때, 바로 그 도시에서 타일러 지지자들은 "타일러와 텍사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높은 가시성과 에너지를 보여주며 타일러를 후보로 지명했다. 그의 당은 1844년 5월 27일 타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타일러의 당은 조직이 느슨했고,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지 못했으며, 정강도 없었다.
정규 민주당원들은 텍사스 합병을 자신들의 정강에 포함하도록 강요받았지만,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투표가 거듭될수록 밴 뷰런은 필요한 민주당 투표의 초다수결을 얻지 못했고, 순위가 서서히 떨어졌다. 민주당이 합병을 지지하는 덜 저명한 후보인 제임스 K. 포크에게 관심을 돌린 것은 아홉 번째 투표에서였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정강에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그는 3분의 2의 득표로 지명되었다。 타일러는 자신의 노력이 정당화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수락 서한에서 선거보다는 합병이 자신의 진정한 우선순위임을 암시했다.
1844년 봄, 타일러는 존 C. 칼훈 국무장관에게 텍사스 대통령 샘 휴스턴과 텍사스 합병 협상을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합병을 강화하고 멕시코를 견제하기 위해 타일러는 과감하게 미국 육군을 서부 루이지애나의 텍사스 국경으로 파견했다. 그는 텍사스 합병을 강력히 지지했다.
합병 달성
1844년 6월 휘그당이 장악한 상원이 그의 조약을 16대 35표로 부결시켰을 때 타일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합병이 이제 조약이 아닌 공동 결의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느꼈고, 의회에 그 요청을 했다. 합병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전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포크를 설득하여 타일러를 민주당으로 다시 받아들이도록 했고, 민주당 편집자들에게 그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전개에 만족한 타일러는 8월에 경선에서 물러났고 포크를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11월 선거에서 클레이에 대한 포크의 근소한 승리는 타일러 행정부에 의해 결의를 완료하라는 위임 통치로 간주되었다. 타일러는 의회에 보낸 연례 메시지에서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와 주들의 상당한 다수가 즉각적인 합병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고 발표했다. 1845년 2월 26일, 레임덕 대통령 타일러가 강력히 로비했던 공동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하원은 텍사스에 합병을 제안하는 공동 결의안을 상당한 표 차이로 승인했고, 상원은 27대 25라는 근소한 차이로 이를 승인했다. 그의 마지막 임기일인 1845년 3월 3일, 타일러는 이 법안에 서명했다. 직후 멕시코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으며, 텍사스가 독립을 유지할 경우에만 텍사스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약간의 논의 끝에 텍사스는 조건을 수락하고 1845년 12월 29일 28번째 주로 연방에 가입했다.
5.4. 국내 정책 및 사건
5.4.1. 도어 반란 및 인디언 문제

1842년 5월, 로드아일랜드주에서 도어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타일러는 연방군을 파견하여 반란 진압을 돕도록 요청한 주지사와 의회의 요청을 숙고했다. 토머스 도어가 이끄는 반군들은 무장하고 새로운 주 헌법을 제정하려 했다. 이러한 행동 이전까지 로드아일랜드는 1663년에 제정된 동일한 헌법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타일러는 양측에 진정을 촉구하고, 주지사에게 대부분의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선거권을 확대할 것을 권고했다. 타일러는 로드아일랜드에서 실제 반란이 발생할 경우 정규 정부 또는 헌장 정부를 돕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연방 지원은 반란이 일단 시작되면 진압하는 데만 주어질 것이며, 폭력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제공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밀 요원들의 보고를 들은 후, 타일러는 "불법적인 집회"가 해산되었고, 연방군을 사용하지 않고도 "화해와 에너지, 결단력의 태도"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반군들은 주 민병대가 그들을 향해 진격하자 주를 떠났지만, 이 사건은 주 내에서 더 넓은 참정권 확대로 이어졌다.
인디언 문제
세미놀족은 남부에 남아있던 마지막 인디언 부족으로, 1833년에 사기성 조약에 서명하도록 유도되어 남은 토지를 빼앗겼다. 오세올라 추장 휘하의 세미놀족은 10년 동안 미군의 괴롭힘 속에서도 미군의 괴롭힘에 저항했다. 타일러는 1842년 5월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길고 피비린내 나는 비인간적인 제2차 세미놀 전쟁을 종결시켰다. 타일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강제적인 문화 동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1842년 5월, 하원은 타일러 대통령의 육군장관 존 캔필드 스펜서에게 체로키족 사기 혐의에 대한 미 육군의 조사 정보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6월, 타일러는 스펜서에게 이를 따르지 말라고 명령했다. 행정 특권이 도전받은 타일러는 이 문제가 ex parte이며 공익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하원은 세 가지 결의안으로 응답했는데, 이는 하원이 타일러 내각으로부터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포함했다. 하원은 또한 체로키족 사기 조사를 담당하는 육군 장교에게 정보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타일러는 의회가 휴회에서 돌아온 1월까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5.5. 행정부 및 내각

타일러와 의회 휘그당 간의 갈등으로 인해 그의 내각 지명자들 중 상당수가 거부되었다. 그는 민주당으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의회 양대 정당으로부터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명자의 자격에 관계없이 많은 지명이 거부되었다. 당시 대통령의 내각 지명자가 거부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다만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은 상원의 반대로 앨버트 갤러틴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하는 것을 보류했다). 타일러의 내각 지명자 중 4명이 거부되었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이들은 케일럽 쿠싱(재무), 데이비드 헨쇼(해군), 제임스 매디슨 포터(육군), 제임스 S. 그린(재무)이었다. 헨쇼와 포터는 거부되기 전까지 휴회 기간 임명직으로 봉사했다. 타일러는 쿠싱을 여러 차례 재지명했지만, 그는 1843년 3월 3일, 제27차 의회 마지막 날에 하루에 세 번 거부되었다. 타일러 임기 이후에는 1868년 헨리 스탠베리의 법무장관 지명이 상원에서 거부되기 전까지 내각 지명이 실패한 사례가 없었다.
직책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정당 |
---|---|---|---|---|
국무장관 | 대니얼 웹스터 | 1841년 | 1843년 | 휘그당 |
국무장관 | 아벨 P. 업셔 | 1843년 | 1844년 | 휘그당 |
국무장관 | 존 C. 칼훈 | 1844년 | 1845년 | 민주당 |
재무장관 | 토머스 유잉 | 1841년 | 1841년 | 휘그당 |
재무장관 | 월터 포워드 | 1841년 | 1843년 | 휘그당 |
재무장관 | 존 캔필드 스펜서 | 1843년 | 1844년 | 휘그당 |
재무장관 | 조지 M. 빕 | 1844년 | 1845년 | 민주당 |
육군장관 | 존 벨 | 1841년 | 1841년 | 휘그당 |
육군장관 | 존 캔필드 스펜서 | 1841년 | 1843년 | 휘그당 |
육군장관 | 제임스 매디슨 포터 | 1843년 | 1844년 | 휘그당 |
육군장관 | 윌리엄 윌킨스 | 1844년 | 1845년 | 민주당 |
법무장관 | 존 J. 크리텐든 | 1841년 | 1841년 | 휘그당 |
법무장관 | 휴 S. 레가레 | 1841년 | 1843년 | 민주당 |
법무장관 | 존 넬슨 | 1843년 | 1845년 | 휘그당 |
우정장관 | 프랜시스 그레인저 | 1841년 | 1841년 | 휘그당 |
우정장관 | 찰스 A. 위클리프 | 1841년 | 1845년 | 휘그당 |
해군장관 | 조지 에드먼드 배저 | 1841년 | 1841년 | 휘그당 |
해군장관 | 아벨 P. 업셔 | 1841년 | 1843년 | 휘그당 |
해군장관 | 데이비드 헨쇼 | 1843년 | 1844년 | 민주당 |
해군장관 | 토머스 워커 길머 | 1844년 | 1844년 | 민주당 |
해군장관 | 존 Y. 메이슨 | 1844년 | 1845년 | 민주당 |
5.6. 사법부 임명
타일러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스미스 톰슨과 헨리 볼드윈 대법관이 각각 1843년과 1844년에 사망하면서 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의회, 특히 휘그당이 장악한 상원과 항상 대립했던 타일러는 이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여러 명을 대법원에 지명했다. 그러나 상원은 존 C. 스펜서, 루벤 월워스, 에드워드 킹, 존 M. 리드의 인준에 잇따라 반대 투표를 했다(월워스는 세 번, 킹은 두 번 거부되었다). 상원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클레이가 184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공석을 채우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타일러의 네 명의 실패한 지명자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결국 1845년 2월, 임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타일러가 톰슨의 자리에 지명한 새뮤얼 넬슨은 상원의 인준을 받았다. 넬슨은 민주당원이었으며, 신중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법학자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준은 놀라운 일이었다. 볼드윈의 자리는 제임스 K. 포크가 지명한 로버트 쿠퍼 그리어가 1846년에 인준될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타일러는 단 6명의 다른 연방 판사를 임명할 수 있었는데, 모두 미국 지방법원 판사였다.
법원 | 이름 | 임기 |
---|---|---|
미국 대법원 | 새뮤얼 넬슨 | 1845년-1872년 |
미국 동부 버지니아 지방법원 | 제임스 댄드리지 핼리버턴 | 1844년-1861년 |
미국 인디애나 지방법원 | 엘리샤 밀스 헌팅턴 | 1842년-1862년 |
미국 동부 루이지애나 지방법원 미국 서부 루이지애나 지방법원 | 시어도어 하워드 매케일럽 | 1841년-1861년 |
미국 버몬트 지방법원 | 새뮤얼 프렌티스 | 1842년-1857년 |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 지방법원 | 아치볼드 랜들 | 1842년-1846년 |
미국 매사추세츠 지방법원 | 펠레그 스프라그 | 1841년-1865년 |
5.7. 탄핵 시도
관세 거부권 행사 직후, 하원 휘그당은 대통령에 대한 첫 번째 탄핵 절차를 시작했다. 의회의 타일러에 대한 적대감은 그의 거부권 행사의 근거에서 비롯되었다. 휘그당의 숙적 앤드루 잭슨 대통령 재임 이전까지 대통령들은 법안에 거의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행사하더라도 헌법적 근거에 한정되었다. 타일러의 행동은 정책을 수립하는 의회의 권한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타일러는 총 10개의 의회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6개는 일반 거부권이었고 2개는 포켓 거부권이었다. 반면 휘그당이 혐오했던 잭슨은 총 12개의 의회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5개 일반, 7개 포켓). 마틴 밴 뷰런은 단 하나의 포켓 거부권만 행사했다.
타일러에 반대했던 존 보츠 하원의원은 1842년 7월 10일 타일러에 대한 탄핵 결의안을 제출했다. 보츠는 타일러에 대해 "중대한 범죄 및 비행"으로 9가지 공식 탄핵 조항을 제기했다. 타일러에 대한 혐의 중 6개는 정치적 권력 남용에 관한 것이었고, 3개는 공직에서의 비행 혐의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보츠는 타일러의 행동을 조사할 9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식적인 탄핵 권고를 기대했다. 클레이는 이 조치를 시기상조라고 보았고, 타일러의 "불가피한" 탄핵을 향한 보다 온건한 진행을 선호했다. 보츠의 결의안은 1843년 1월까지 보류되었다가 127대 83의 투표로 부결되었다.
존 퀸시 애덤스가 이끄는 하원 특별위원회는 타일러의 거부권 행사를 비난하고 그의 인격을 맹렬히 비난했다. 애덤스는 노예 소유주인 타일러를 싫어하는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위원회 보고서는 공식적으로 탄핵을 권고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명확히 제시했으며, 1842년 8월 하원은 위원회 보고서를 지지했다. 애덤스는 양원의 거부권 재의결 요건인 3분의 2를 단순 과반수로 변경하는 헌법 수정안을 발의했지만, 어느 의회에서도 승인되지 않았다. 휘그당은 이후 미국 제28차 의회에서 추가 탄핵 절차를 추진할 수 없었다. 1842년 선거에서 상원에서는 다수당 지위를 유지했지만, 하원에서는 통제권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타일러 임기 마지막 날인 1845년 3월 3일, 의회는 미국 세입선박국과 관련된 사소한 법안에 대한 그의 거부권을 재의결했다. 이는 대통령 거부권이 재의결된 첫 사례였다.
타일러에게 의회 내 지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료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헨리 A. 와이즈를 포함한 소수의 하원의원들은 '하사관 경호대'(Corporal's Guard)로 알려졌으며, 와이즈의 주도로 휘그당과의 갈등 내내 타일러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타일러는 1844년 와이즈를 주 브라질 미국 공사로 임명했다.
6. 대통령직 이후 (1845-1862)
타일러는 새로 취임한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워싱턴을 떠났다.
6.1. 퇴임 후 생활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의 제임스강변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인 월넛 그로브(Walnut Grove)를 은퇴지로 삼았다. 그는 이 농장을 로빈 후드 전설을 인용하여 셔우드 포레스트 농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자신이 휘그당으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농업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높은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1847년, 대부분 휘그당원이었던 그의 이웃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도로 감독관이라는 사소한 직책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타일러는 이 직책을 진지하게 수행했으며, 이웃들에게 도로 작업을 위해 노예들을 제공하도록 자주 소환했고, 이웃들이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후에도 자신의 의무를 계속해서 수행했다.
전직 대통령은 버지니아 퍼스트 패밀리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파티를 열고 다른 귀족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의 방문을 받았으며, 여름에는 가족의 해변 별장인 "빌라 마거릿"에서 지냈다. 1852년, 타일러는 기쁘게 버지니아 민주당에 다시 합류했으며 이후 정치 문제에 관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옛 동맹국들의 방문을 거의 받지 못했고, 자문가로도 거의 찾지 않았다. 가끔 공개 연설을 요청받았는데, 헨리 클레이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정치적 싸움을 인정했지만, 1833년 타협 관세를 이끌어낸 옛 동료를 항상 존경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6.2. 남북 전쟁 시기 활동

존 브라운의 하퍼스 페리 습격 이후 노예 해방 시도나 실제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이 고조되자, 여러 버지니아 공동체는 민병대를 조직하거나 기존 민병대를 재활성화했다. 타일러의 공동체는 기병대와 향토 수비대 중대(Charles City Rifles)를 조직했으며, 타일러는 대위 계급으로 향토 수비대 병력을 지휘하도록 선택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발발 직전, 타일러는 1861년 2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평화 회의의 의장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이 회의는 몽고메리 회의에서 남부 연합 헌법이 제정되는 와중에도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한 타협을 모색했다. 평화 회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일러는 최종 결의안에 반대했다. 그는 결의안이 자유주 대표들에 의해 작성되었고, 준주 내 노예 소유주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며, 남부 하부를 다시 연방으로 되돌리고 연방을 복원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회의가 1861년 2월 말 의회에 승인을 위해 보낸 헌법 수정안 제안인 7개 결의안에 반대 투표를 했다.
평화 회의가 시작된 같은 날, 지역 유권자들은 타일러를 버지니아 분리 회의 (1861)의 대의원으로 선출했다. 그는 평화 회의가 진행 중이던 1861년 2월 13일 개회 회의를 주재했다. 타일러는 타협의 희망을 버리고 분리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남부 주의 깔끔한 분리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3월 중순, 그는 평화 회의 결의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4월 4일, 그는 분리 회의가 이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에 찬성 투표를 했다. 4월 17일, 섬터 요새 전투와 링컨의 병력 소집 요청 이후, 타일러는 분리에 찬성하는 새로운 다수와 함께 투표했다. 그는 버지니아의 아메리카 연합국 가입 조건을 협상하는 위원회를 이끌었고, 군 장교의 급여 책정을 도왔다. 6월 14일, 타일러는 분리 조례에 서명했고, 일주일 후 회의는 그를 남부 연합 임시 의회 의원으로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타일러는 1861년 8월 1일 남부 연합 의회에 착석했으며, 1862년 사망 직전까지 봉사했다. 1861년 11월, 그는 남부 연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62년 2월 첫 회기가 열리기 전에 리치먼드의 발라드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7. 사망
평생 동안 타일러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겨울철에는 감기에 더 자주 걸렸다. 1862년 1월 12일, 그는 오한과 현기증을 호소한 후 구토하고 쓰러졌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고, 그는 18일까지 셔우드 포레스트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전날 밤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고, 줄리아는 그의 주치의를 불렀다. 자정 직후, 타일러는 브랜디 한 모금을 마시고 주치의에게 "선생님, 저는 갑니다"라고 말했고, 주치의는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자 타일러는 "아마도 이게 최선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타일러는 직후 리치먼드의 익스체인지 호텔(Exchange Hotel) 방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뇌졸중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향년 71세였다.
타일러의 사망은 남부 연합에 대한 그의 충성 때문에 워싱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사망 사례였다. 그는 간소한 장례를 요청했지만,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타일러를 새로운 국가의 영웅으로 묘사하며 성대하고 정치적인 장례식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제10대 미국 대통령의 관은 남부 연합기로 덮였는데, 그는 미국 국기가 아닌 다른 깃발 아래에 안장된 유일한 미국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타일러는 자신이 대통령이었던 연방보다 버지니아와 자신의 원칙에 더 충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할리우드 묘지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묘지 근처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는 텍사스 합병에서의 역할 때문에 텍사스주 타일러 시를 포함하여 여러 미국 지명의 이름이 되었다.
8. 역사적 평가 및 유산
타일러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매우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재임을 낮게 평가한다. 에드워드 P. 크라폴은 그의 전기 『존 타일러, 우연한 대통령』(2006)에서 "다른 전기 작가들과 역사가들은 존 타일러가 무능하고 서투른 최고 행정관이었으며, 그의 대통령직은 심각하게 결함이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언급하며 시작한다. 댄 먼로는 『존 타일러의 공화주의 비전』(2003)에서 타일러의 대통령직이 "일반적으로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것 중 하나로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시거는 타일러가 "위대한 대통령도 위대한 지식인도 아니었다"고 덧붙이며, 몇 가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정부는 현대적인 성과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썼다. C-SPAN이 2021년에 실시한 역사가 설문조사에서는 타일러를 역대 대통령 44명 중 39위로 평가했다.
8.1. 긍정적 평가

2002년, 타일러 대통령의 역사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 추세에 역행하여, 역사가 리처드 P. 맥코믹은 "[일반적인] 의견과는 달리, 존 타일러는 강력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때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선례를 확립했다. 그는 공공 정책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직무의 완전한 권한을 사용할 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맥코믹은 타일러가 "상당한 위엄과 효율성으로 그의 행정부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타일러가 완전한 대통령 권한을 인수한 것은 버지니아 대학교 밀러 공공문제 연구소의 전기적 개요에 따르면 "엄청나게 중요한 선례를 세웠다". 타일러가 자신이 대통령이며, 임시 대행이나 대리 대통령이 아니라고 성공적으로 주장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대통령 사망 시 7명의 다른 부통령(밀러드 필모어, 앤드루 존슨, 체스터 A. 아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캘빈 쿨리지, 해리 S. 트루먼,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모델이 되었다. 타일러의 대통령직 직함과 완전한 권한을 인수한 행위의 적절성은 1967년 미국 헌법 수정 제25조에 법제화되면서 법적으로 확인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타일러의 외교 정책을 칭찬했다. 먼로는 그에게 "영국과의 관계 개선 전망을 알린 웹스터-애쉬버턴 조약과 국가 영토에 수백만 에이커를 추가한 텍사스 합병과 같은 업적"을 인정한다. 크라폴은 타일러가 "일반적으로 기억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통령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시거는 "나는 그를 용기 있고 원칙적인 사람,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공정하고 정직하게 싸운 사람으로 본다. 그는 정당 없는 대통령이었다"고 썼다. 작가 이반 엘런드는 2008년 저서 『러시모어 재조각』의 업데이트판에서 44명의 미국 대통령을 평화, 번영, 자유의 기준으로 평가했으며, 최종 평가에서 존 타일러가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선정되었다. 『히스토리 투데이』 기사에서 루이스 클레버는 타일러가 정치에 많은 이들이 정직성이 부족했던 시기에 백악관에 정직성을 가져왔고, 반대자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다고 썼다. 크라폴은 타일러의 남부 연합에 대한 충성이 대통령으로서 그가 행한 많은 선행을 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타일러의 역사적 평가는 그가 한때 '미국의 첫 번째 위대한 이익'이라고 정의했던 연방 보존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배신한 비극적인 결정으로부터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노마 로이스 피터슨은 타일러의 대통령으로서의 전반적인 성공 부족이 백악관에 누가 있었든 영향을 미쳤을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에 대한 자신의 거대한 경제 비전에 반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헨리 클레이였다. 잭슨이 행정부 권한을 단호하게 사용한 여파로, 휘그당은 대통령이 의회에 의해 지배되기를 원했고, 클레이는 타일러를 부하처럼 대했다. 타일러는 이에 분개했고, 이는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을 지배한 행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타일러의 외교 정책에서의 진전을 지적하며, 타일러의 대통령직이 "결함이 있었지만... 실패는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학자들이 타일러를 칭찬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일반 미국 대중은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여러 작가들은 타일러를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대통령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시거가 언급했듯이, "그의 동포들은 그를,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면, 기억하기 쉬운 선거 구호의 마지막 운율로만 기억한다."
8.2. 비판 및 논란
타일러는 휘그당과의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남북 전쟁 시기 남부 연합에 가담한 행보로 인해 비판받는 측면이 많다. 그는 '정당 없는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었으며, 역사가들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정치적 고립과 행정부 운영의 불안정성이다. 특히 노예 소유자로서의 그의 입장과 노예제 확장을 지지한 정책은 후대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남부 연합 가담은 그가 한때 헌신했던 연방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행위로 간주되며, 그의 역사적 유산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9. 사생활 및 가족
타일러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다.
9.1. 결혼 및 자녀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레티샤 크리스천 타일러(1790년 11월 12일 ~ 1842년 9월 10일)로, 그녀와의 사이에 여덟 자녀를 두었다: 메리(1815~1847), 로버트(1816~1877), 존(1819~1896), 레티샤(1821~1907), 엘리자베스(1823~1850), 앤(1825~1825), 앨리스(1827~1854), 태즈웰(1830~1874).

레티샤는 1842년 9월 백악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844년 6월 26일, 타일러는 줄리아 가디너 타일러(1820년 7월 23일 ~ 1889년 7월 10일)와 재혼하여 일곱 자녀를 더 두었다: 데이비드(1846~1927), 존 알렉산더(1848~1883), 줄리아(1849~1871), 라클란(1851~1902), 라이언(1853~1935), 로버트 피츠월터(1856~1927), 마거릿 펄(1860~1947).
타일러는 가족을 소중히 여겼지만, 정치적 상승기 동안 종종 장기간 집을 비웠다. 1821년 건강 문제로 하원의원 재선을 포기했을 때, 그는 곧 늘어나는 가족을 교육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워싱턴에서 한 해의 일부를 보내면서 변호사 활동을 하는 것은 어려웠고, 타일러가 직접 관리할 수 있을 때 그의 농장은 더 많은 수익을 냈다. 1827년 상원에 입성할 무렵, 그는 한 해의 일부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에 체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지를 통해 자녀들과 가깝게 지내려 노력했다.
9.2. 노예제 관련 입장
타일러는 노예 소유주였으며, 한때 그린웨이 농장에 40명의 노예를 두었다. 그는 노예제를 악으로 여겼고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노예 중 누구도 해방시키지 않았다. 타일러는 노예제를 주권론의 일부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미국 연방 정부가 이를 폐지할 권한이 없다고 보았다. 그의 노예들의 생활 조건은 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노예들의 복지를 돌보고 신체적 폭력을 삼갔다고 추정한다. 1841년 12월, 타일러는 노예들과 여러 아들을 낳고 나중에 그들을 팔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한 노예제 폐지론자 출판인 조슈아 리빗의 공격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여러 흑인 가문들은 자신들이 타일러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러한 가계도를 증명할 증거는 없다. 그의 아들 중 최소 4명은 남부 연합 정부나 군대에서 복무했다. 그의 딸 메리의 아들인 손자 로버트 타일러 존스는 1861년 6월 25일 버지니아 제53보병연대 K중대에 입대했으며, 1863년 7월 3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버지니아군의 기수로 피켓의 돌격에 참여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9.3. 재산 및 말년
타일러의 개인 순자산은 현대 기준으로 인플레이션을 감안할 때 5000.00 만 USD를 초과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남북 전쟁 중 빚을 지게 되었고, 크게 줄어든 재산으로 사망했다.
타일러와 그의 아들 라이언은 훨씬 젊은 여성과 재혼하여 고령에 자녀를 두었으며, 타일러의 딸 펄은 아버지의 출생 후 157년이 지나서야 사망했다. 2024년 1월 현재, 타일러는 라이언을 통해 여전히 한 명의 살아있는 손자(해리슨 러핀 타일러)를 두고 있는데, 그는 1928년에 태어나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의 가족 자택인 셔우드 포레스트 농장을 관리하고 있어, 현존하는 손자를 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오래된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