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町井 久之마치이 히사유키일본어 (1923년 7월 20일 ~ 2002년 9월 14일)는 본명 정건영정건영한국어으로, 일본의 재일 한국인 야쿠자 두목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동성회(東声会)의 설립자이며,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전후 일본의 혼란기에 암시장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키웠고, 이후 동성회를 통해 도쿄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치이 히사유키는 미군정 당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파업 파괴 활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 정부와 일본 야쿠자 간의 거래를 중개하며 양국 지하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김대중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적 평가를 받는다. 동성회 해산 후에는 합법적인 기업 형태의 전위 조직을 설립하여 사업 활동을 이어갔으나, 후기 사업에서 재정 문제와 법적 구속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일본 사회, 야쿠자 문화, 그리고 재일 한국인 커뮤니티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및 배경
마치이 히사유키는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의 유년기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형성되었고, 이는 그의 초기 활동과 조직 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유년기 및 교육
마치이 히사유키는 1923년 7월 20일, 일본 제국 도쿄 시바구 미나미사쿠마초에서 본명 정건영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정건영을 당시 일제 강점기 하의 서울(경성)에 있던 할머니에게 맡겼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1943년에는 센슈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중도에 포기했다.
2.2. 초기 활동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마치이는 전후 일본의 활발한 암시장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 시기 그는 조선건국청년동맹 도쿄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중앙상회'라는 사건 중개 회사와 '중앙흥행사'라는 흥행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조달을 위해 발행되던 PD(현재의 수표와 유사)를 만기 이전에 현금화하는 것은 일본 국적자에게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현금 교환 창구와 가까운 신바시에는 이와 유사한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이들 회사들은 민간에 유통된 암달러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마치이는 이러한 회사들을 기반으로 구렌타이 조직인 '마치이 일가'(관동 마치이 일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3. 동성회 설립 및 활동
마치이 히사유키는 자신의 조직인 마치이 일가를 기반으로 동성회를 결성하고 이를 거대 야쿠자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특한 사상을 내세웠으며, 미군정 당국과의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3.1. 동성회 결성과 사상
마치이 히사유키는 조녕주와의 만남을 계기로 대아시아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다. 1947년, 그는 도쿄 긴자에서 마치이 일가를 모체로 하여 "동양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이념 아래 동성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당시 재일본조선인연맹(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성회 결성 후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일본에 계속 거주했다.
3.2. 세력 확장과 영향력
동성회는 도쿄를 넘어 요코하마시, 후지사와시, 히라쓰카시, 지바시, 가와구치시, 다카사키시 등 일본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60년대 초에는 조직원이 1,500명에서 1,6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동성회는 도쿄에서 '긴자의 경찰'로 불릴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야마구치구미의 다오카 가즈오조차 도쿄에서 활동하기 위해 마치이와 거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급속한 세력 확장은 다른 야쿠자 단체들의 견제를 불러일으켰고, 동성회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경찰의 집중적인 단속으로 동성회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3.3. 미군정 하에서의 활동
마치이 히사유키는 동료 야쿠자 거물인 고다마 요시오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반공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 당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동성회 조직원들은 미군정 시기 동안 종종 파업 파괴자로 이용되었다. 마치이 자신도 미국 방첩대와 협력했다. 일본 야쿠자 두목들이 미군정 당국에 의해 구금되거나 엄중한 감시를 받던 시기에, 한국계 야쿠자들은 이익이 큰 암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마치이는 일본 야쿠자 대부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경력 내내 고다마와 다오카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치이의 광대한 사업 영역에는 관광, 엔터테인먼트, 술집 및 레스토랑, 매춘, 석유 수입 등이 포함되었다. 그와 고다마는 부동산 투자만으로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는 한국 정부와 야쿠자 간의 거래를 중개하여 일본 범죄자들이 한국에서 불법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치이 덕분에 한국은 야쿠자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양국 지하세계의 해결사로서 그의 역할에 걸맞게, 마치이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한국 부산을 잇는 가장 짧은 항로인 부관훼리 서비스를 인수할 수 있었다.
4. 주요 사건 및 관계
마치이 히사유키의 삶은 여러 주요 사건과 복잡한 인물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그의 활동은 일본 지하세계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며 논란을 낳았다.
4.1. 야마구치구미 및 고다마와의 관계
동성회가 급격한 세력 확장으로 다른 야쿠자 단체들의 견제를 받고 경찰의 집중 단속에 직면하자, 1963년 고다마 요시오의 중재로 마치이는 제3대 야마구치구미 조장 다오카 가즈오의 형제(舎弟)가 되었다. 이 제휴는 동성회가 일본 야쿠자 사회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마치이는 경력 내내 고다마 요시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고다마는 이후 마치이가 설립한 동아상호기업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4.2. 다나카 세이겐 총격 사건
1963년 11월 9일 오후 6시 9분경, 도쿄회관 앞 노상에서 동성회 조직원 기노시타 리쿠오가 도쿄회관에서 열린 출판 기념 축하회에서 돌아오던 다나카 세이겐을 총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사건의 배후를 의심하여 마치이를 총포도검류소지등단속법 위반 혐의로 별건 체포했으나, 배후 관계를 입증하지 못해 결국 마치이는 기소되지 않았다. 다나카 세이겐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기노시타 리쿠오가 고다마 요시오의 지시를 받고 돈을 받고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4.3. 김대중 납치 사건
마치이 히사유키는 1973년 7월, 한국 중앙정보부(KCIA)가 당시 한국의 주요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하는 사건에 협조했다는 의혹을 광범위하게 받았다. 김대중은 바다로 끌려가 결박당하고 재갈이 물린 채 눈이 가려졌으며, 시신이 떠오르지 않도록 추를 매달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타국에서 정치적 반대자를 납치하려 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평가된다. 마치이의 연루 의혹은 그의 활동이 일본 지하세계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5. 동성회 해산 및 재편
경찰의 지속적인 압력에 직면하면서 마치이 히사유키는 동성회를 해산하고, 이후 합법적인 형태의 전위 조직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5.1. 동성회 해산
1964년 2월, 경시청은 '조직폭력범죄단속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폭력단 일제 단속(제1차 정상작전)을 개시했다. 마치이의 동성회는 경찰청에 의해 전국 10대 광역 폭력단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경찰의 압력이 강해지는 가운데, 1966년 9월 1일 마치이는 동성회의 해산 성명을 발표했다. 일주일 후,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에서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마치이는 야쿠자 사회의 전면에서 물러나는 듯 보였다.
5.2. 전위 조직 결성
동성회를 해산한 후, 마치이 히사유키는 1967년 4월 동성회를 기업의 형태를 전면에 내세운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東亜友愛事業協同組合)으로 재건했으며, 자신은 명예회장이 되었다. 이 조직은 후에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亜友愛事業組合)으로 개칭되었다. 마치이는 이 동아우애사업협동조합에 자금을 제공하고 인사권도 장악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東亜相互企業株式会社)를 설립했으며, 회장직에는 고다마 요시오가 취임했다.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는 긴자에서 고급 요정 '비원'(秘苑)을 운영하기도 했다.
6. 후기 사업 및 법적 문제
동성회 해산 후 마치이 히사유키는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모하려 노력했으나, 그의 후기 사업들은 재정적 어려움과 법적 문제에 직면하며 결국 그의 은퇴로 이어졌다.
6.1. TSK/CCC 터미널 빌딩 사업
1973년 7월,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는 롯폰기에 TSK/CCC 터미널 빌딩을 개장했다. 이 빌딩 건설의 자금 조달은 한국외환은행 도쿄 지점이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에 약 60.00 억 JPY의 지급 보증을 제공하면서 이루어졌다.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는 이 지급 보증을 기반으로 일본부동산은행(이후 일본채권신용은행으로 행명 변경 후 현재의 아오조라은행)으로부터 54.00 억 JPY의 융자를 받았다. 동아상호기업 주식회사는 이 중 33.00 억 JPY를 나스 고원과 시라카와 고원의 종합 개발 사업에, 21.00 억 JPY를 TSK/CCC 터미널 빌딩 건설에 투자했다. TSK/CCC 터미널 빌딩은 마치이가 폭력단 활동과 같은 불법 활동에서 벗어나 '양지 사회의 성공자'로 행세하는 것을 연출하기 위한 주요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동성회 조직원들은 TSK/CCC 터미널 빌딩 사무실 동에 위치한 동아상호기업 및 그 그룹 기업의 사무실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6.2. 부도 및 법적 문제
그러나 시라카와 고원 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1976년 7월 5일, 동아상호기업의 구로사와 가쓰토시 등 3명이 후쿠시마현 지사 기무라 모리에에게 500.00 만 JPY를 뇌물로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기무라 모리에 지사도 수뢰 혐의로 후쿠시마 지방검찰청에 체포되었다. 마치이 또한 임의 조사를 받았으나, 결국 기소되지는 않았다. 1977년 6월, 동아상호기업은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이 사건 이후 마치이는 거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TSK/CCC 터미널 빌딩 근처의 자택 맨션에 은둔하는 나날을 보냈다.
7. 개인적인 삶과 평판
마치이 히사유키는 '긴자의 호랑이'와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일본의 지하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재일 한국인 사회와 스포츠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치이 히사유키는 젊은 시절 '긴자의 호랑이'와 '황소'로 불렸다. 그는 고다마 요시오와 함께 배우 미타 요시코와 친분이 있었으며, TSK/CCC 터미널 빌딩 개장 당시 미타 요시코가 개장 리셉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비록 지하세계의 인물이었지만, 재일 한국인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된다. 특히 그는 재일 동포 스포츠 선수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으며, 1971년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에 취임하는 등 한국 정부 및 재일 한국인 사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8. 사망 및 유산
마치이 히사유키의 사망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종착점이었으며, 그의 활동은 일본 사회와 재일 한국인 커뮤니티에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8.1. 사망
만년에 마치이 히사유키는 당뇨병으로 고통받았으며, 과거 '황소'라 불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2002년 9월 14일 오전 5시경, 그는 도쿄도 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사흘 뒤인 9월 17일에 빈소가 차려졌고, 9월 18일에는 롯폰기 자택에서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 및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오타구의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다.
그의 사망 직전인 2002년 5월 20일, 그가 회장으로 있던 부관훼리 주식회사는 새로운 항로선으로 호화선 '성희호'(星希号)를 취항시켰다. 이틀 뒤인 5월 22일, 부산광역시에서 취항 기념식이 열렸으며, 식전에는 류정석 해양수산부 장관, 부산광역시와 시모노세키시 등 부관항로 관련 부서 대표, 민단 중앙본부의 김재숙 단장 등이 참석했다.
8.2. 유산 및 평가
마치이 히사유키의 활동은 일본 사회의 질서, 경제, 그리고 재일 한국인 커뮤니티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존재는 전후 일본의 혼란 속에서 야쿠자 조직이 어떻게 성장하고 사회에 침투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여행 수요 증가에 따라, 부관훼리 회사는 규슈 지역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으나 이 프로젝트는 결국 좌절되었다. 당시 여러 기사에 따르면, 도쿄에서 일주일 만에 약 70명의 동성회 조직원들이 총격을 받거나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지하세계의 가해자들이 구도카이 (고쿠라 항을 장악) 또는 도진카이 (서규슈 대부분의 항구를 장악) 소속일 것이라는 강한 추측이 있었다. 특히 도진카이 이론이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도진카이가 동성회에 마약 밀매 협력을 강요했으나 동성회가 이를 거부하자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동성회가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도진카이에 엄청난 액수의 '해결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공격이 계속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유형의 갱단 공격은 역사적으로 도진카이의 전문 분야였고 구도카이의 특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이가 현역이었다면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당시 동성회는 리더십 부족으로 조직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제3대 회장 오키타 모리히로가 이끌고 있었다. 부관훼리 회사의 히로시마 항 사무실은 2002년에 개설되어 2005년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으며, 시모노세키 사무실은 현재까지도 운영 중이다.
마치이의 삶은 야쿠자 두목으로서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한일 관계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유산으로 평가된다.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 연루 의혹은 그의 활동이 민주주의와 인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며, 그의 역사적 평가에 중요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