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 및 가족
잔앙투아네트 푸아송은 1721년 12월 29일 파리에서 프랑수아 푸아송과 마들렌 드 라 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은 당시 프랑스 경제 자금을 주로 담당했던 파리 형제들의 집사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부유한 금융가 장 파리 드 몽마르텔 또는 세금 징수원(fermier général)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프랑수아 푸아송이 미납 부채 스캔들로 인해 1725년 프랑스를 떠나야 했을 때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당시 이러한 범죄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나, 프랑수아 푸아송은 8년 후 무죄를 선고받고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잔앙투아네트에게는 프랑수아즈 루이즈 푸아송과 아벨-프랑수아 푸아송 드 방디에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1.2. 교육 및 초기 영향
잔앙투아네트는 5세 때 푸아시에 있는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보내져 당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녀의 재치와 매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백일해로 추정되는 건강 문제로 인해 1730년 1월, 9세의 나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어머니 마들렌은 딸이 고등 교육을 받은 숙녀가 되는 것을 막지 않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 잔앙투아네트를 개인 교습에 등록시켰다. 후견인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그녀의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졌으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잔앙투아네트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와 극작가 크레비용에게 발성법을 배웠고, 오페라 가수 젤리오트에게 노래를 배웠다. 이 외에도 인문학, 미술, 음악, 사교 기술 등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점쟁이 마담 드 르봉에게 데려갔는데, 점쟁이는 소녀가 언젠가 왕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불가능한 일을 정확히 예측한 대가로 유언장에 마담 드 르봉에게 600 리브르를 남겼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 잔앙투아네트의 교육을 특별히 후원한 것이 그가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소문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에 의해 "작은 여왕"을 뜻하는 "레네트"로 불리며 루이 15세의 정부가 될 운명으로 길러졌다.
2. 결혼 및 사교 생활
2.1. 결혼
20세가 되던 1740년 12월 15일, 잔앙투아네트는 후견인 샤를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조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후견인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막대한 재정적 인센티브가 따랐다. 1740년 12월 15일, 투르넴은 그의 다른 모든 조카들을 유산에서 제외시키고 자신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결혼 선물로 그녀의 후견인은 왕실 사냥터인 세나르 숲 가장자리에 위치한 에티올 영지를 주었다. 결혼 당시 그녀는 이미 미모와 지성, 넘치는 매력으로 파리 살롱가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남편 르 노르망 데티올은 처음에는 결혼 주선에 불만을 가졌으나, 곧 퐁파두르 여후작과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이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주었다. 르 노르망 데티올은 상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막대한 지참금"을 얻었고, 잔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의심스러운 과거를 가릴 수 있는 존경"을 얻었다.
결혼 후 부부는 매우 사랑하는 듯 보였다. 잔앙투아네트는 종종 남편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했지만, 왕을 위해서는 예외라고 덧붙였다. 부부는 유아기에 사망한 아들과 1744년에 태어나 9세에 사망한 딸 알렉상드린 르 노르망 데티올을 두었다. 그녀의 아들은 1741년에 태어나 1742년 유아기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 알렉상드린은 1754년 9세의 나이에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딸이 사망한 지 11일 후,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도 손녀를 잃은 슬픔으로 사망했다. 1745년 5월 7일, 그녀와 남편의 공식적인 별거가 선언되었다.
2.2. 살롱 및 지적 교류
결혼한 여성으로서 잔앙투아네트는 마담 드 탕생, 마담 조프랭, 마담 뒤 데팡 등이 주최하는 파리의 유명한 살롱에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이 살롱들에서 그녀는 볼테르, 샤를 피노 뒤클로, 몽테스키외, 클로드 아드리앙 엘베시우스,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 등 계몽주의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다. 또한 잔앙투아네트는 에티올에 자신만의 살롱을 열었는데, 이곳에는 클로드 프로스페 졸리오 드 크레비용, 몽테스키외, 베르니 추기경, 볼테르 등 많은 문화 엘리트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사교 모임에서 그녀는 대화의 미학을 익히고 훗날 베르사유에서 유명해질 날카로운 재치를 길렀다.
3. 왕의 정부와 궁정 생활
3.1. 루이 15세와의 만남

잔앙투아네트가 파리 살롱에서 활동하고 우아함과 미모를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는 이미 1742년부터 그녀의 이름을 궁정에서 듣고 있었다. 1744년, 잔앙투아네트는 루이 15세가 세나르 숲에서 사냥을 할 때 그의 눈에 띄려 노력했다. 그녀의 영지가 이 지역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왕실 일행을 멀리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주목을 끌기 위해 잔앙투아네트는 한 번은 분홍색 페이톤을 타고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다른 한 번은 파란색 페이톤을 타고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 왕의 길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왕은 그녀에게 사냥한 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당시 왕의 정부였던 샤토루 공작부인은 잔앙투아네트를 경계했지만, 1744년 12월 8일 샤토루 공작부인이 사망하면서 정부 자리가 비게 되었다.
1745년 2월 24일, 잔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 도팽 루이와 스페인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기념하여 2월 25일에 열리는 주목나무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공식 초대를 받았다. 이 무도회에서 왕은 일곱 명의 궁정인들과 함께 주목나무로 변장한 채 잔앙투아네트에게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왕은 모든 궁정과 왕실 가족 앞에서 잔앙투아네트 앞에서 변장을 풀었는데, 그녀는 세나르 숲에서의 만남을 상징하는 사냥의 여신 디아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2. 공식 지위와 영향력
1745년 3월까지 그녀는 왕의 정부가 되었고, 베르사유에 있는 왕의 아파트 바로 위에 거처를 마련했다. 5월 7일, 그녀와 남편의 공식적인 별거가 선언되었다. 궁정에 정식으로 소개되려면 작위가 필요했기에, 왕은 6월 24일 퐁파두르 후작령을 매입하여 작위와 문장(紋章)과 함께 잔앙투아네트에게 주어 그녀를 여후작으로 만들었다. 1745년 9월 14일,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의 사촌인 콩티 공주의 소개로 왕 앞에서 공식적인 입궁식을 가졌다.
궁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잔앙투아네트는 즉시 왕실 가족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왕비가 상호 아는 지인인 마담 드 세삭에 대해 물으며 퐁파두르에게 대화를 걸자, 퐁파두르는 기뻐하며 왕비에게 존경과 충성을 맹세했다. 왕비는 이에 보답하여 왕의 다른 정부들 대신 잔앙투아네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고도로 형식화된 궁정 예절을 빠르게 익혔다. 그러나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여, 딸이 왕의 확고한 정부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궁정의 총애받는 인물로서 퐁파두르 여후작은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1752년 10월 12일 공작부인으로 승격되었고, 1756년에는 왕비의 시녀로 임명되어 궁정에서 여성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얻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사실상 재상 역할을 수행하며 승진, 특혜, 해고를 결정하고 국내외 정치에 기여했다.
3.3. 왕실과의 관계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매우 신중했다. 그녀는 왕비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노력했으며, 왕비도 그녀를 다른 정부들보다 선호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입궁 직후부터 왕실 가족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왕비가 상호 지인에 대해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자, 퐁파두르 여후작은 기쁨을 표하며 왕비에게 존경과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왕세자 루이는 퐁파두르 여후작이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으며, 왕비의 태도 역시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1756년 2월 8일에는 왕비의 13번째 시녀로 임명되어 궁정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다.
3.4. 국왕의 친구로서의 역할

퐁파두르 여후작은 국왕의 친구이자 조언자로서의 귀중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궁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이 15세의 이전 정부들과 달리, 퐁파두르 여후작은 루이 15세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루이 15세는 우울하고 지루함을 느끼기 쉬웠는데, 퐁파두르 여후작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위안이었다. 그녀만이 왕을 사로잡고 즐겁게 해줄 수 있었으며, 우아한 개인 파티와 오페라, 오후 사냥, 그리고 여러 성과 숙소를 오가는 여행으로 왕을 즐겁게 했다. 때로는 왕의 도움을 받아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를 초대하기도 했다.
1750년경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과의 성적인 관계를 중단하면서 '왕의 친구'로서의 역할이 그녀의 유일한 역할이 되었다. 성적인 관계의 종료는 부분적으로 퐁파두르 여후작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일해 후유증, 재발하는 감기와 기관지염, 각혈, 두통, 왕과의 세 번의 유산, 그리고 미확인된 대하증으로 고통받았다. 또한 퐁파두르 여후작은 자신이 "매우 냉담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불행"을 인정했으며, 송로버섯, 셀러리, 바닐라를 먹는 등 성욕을 높이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1750년 희년은 왕에게 죄를 회개하고 정부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총애받는 인물로서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의 친구' 역할을 맡았으며, 이를 예술 후원을 통해 선언했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이러한 선언은 장 바티스트 피갈에게 의뢰한 조각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조각상은 자신을 '우정'(Amitié)으로 표현하며, 현재는 사라진 루이 15세의 대칭 조각상에 자신을 바치는 모습이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1759년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도 이와 관련된 조각상을 묘사하게 했다.
동시대인들과 많은 역사적 담론에 의해 퍼진 오해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을 위한 다른 정부를 고용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보충하지 않았다. 퐁파두르 여후작과 루이 15세의 성적인 관계가 끝난 후, 왕은 특히 그 목적으로 설립된 베르사유의 한 집, 즉 사슴 공원(Parc-aux-Cerfs프랑스어)에서 젊은 여성들을 만났다. 이곳은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하렘이 아니었으며, 한 번에 한 명의 여성만이 머물렀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이를 "필요성"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퐁파두르 여후작이 사슴 공원에 기여한 유일한 점은 이를 궁정 내의 경쟁자 대신 유리한 대안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다! 교육받지 못한 이 작은 소녀들은 그것을 나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궁정이나 수도의 예쁜 여인이 그것을 정복하려 한다면 나는 그렇게 침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4. 정치 활동 및 영향력
4.1. 조언자 및 외교관으로서의 역할
퐁파두르 여후작은 궁정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승진, 특혜, 해고를 결정하는 책임을 맡았고 국내외 정치에 기여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루이 15세를 대신하여 그녀는 상당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치의였던 프랑수아 케네가 이끄는 중농주의 학파를 보호했으며, 이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 길을 열었다. 또한 그녀는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를 억압하려 했던 크리스토프 드 보몽 파리 대주교를 비롯한 반대자들로부터 옹호했다. 디드로의 첫 소설 『음란한 보석』(Les bijoux indiscrets)에서 망고굴과 미르조자라는 인물은 각각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여후작을 풍자한 것이었다. 디드로는 『백과전서』에 대한 그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퐁파두르 여후작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자신의 서재에 『음란한 보석』 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이 디드로를 왕에 대한 그러한 무례함으로 처벌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이 평민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타협시킨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긴 궁정인들 사이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씨인 '푸아송'(Poisson, 프랑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을 이용한 말장난인 푸아소나드(poissonnades프랑스어)라고 불리는 끊임없는 비방에 매우 민감했다. 루이 15세는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뒤 플레시, 리슐리외 공작과 같이 알려진 그녀의 적들에게 마지못해 징벌적 조치를 취했다.
4.2. 외교 정책에 미친 영향
1755년, 저명한 오스트리아 외교관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리트베르크는 퐁파두르 여후작에게 1756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어진 협상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게 되는 외교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동맹 변화 속에서 유럽 강대국들은 7년 전쟁에 돌입했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영국과 프로이센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는 1757년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고, 결국 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에 잃었다. 로스바흐 전투 이후, 퐁파두르 여후작은 왕을 위로하며 지금은 유명해진 "나 죽고 나면 홍수가 덮치리라"(au reste, après nous, le Déluge프랑스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약화되고 사실상 파산 상태로 벗어났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이러한 정책들을 계속 지지했으며, 베르니 추기경이 실패하자 쇼아죌을 등용하고 그의 모든 계획, 즉 가족 협약, 예수회 탄압, 1763년 파리 조약을 지지하고 지도했다. 영국의 전쟁 승리는 영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선도적인 식민 강대국이 되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흔히 퐁파두르 여후작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4.3. 국내 정책 및 인사
퐁파두르 여후작은 국내 정책과 인사에 깊이 관여하여 약 15년간 권세를 누렸다. 그녀의 추천을 받아 1758년 외무 대신이 된 쇼아죌은 전쟁 대신 등의 직위도 겸하여, 대략 10년에 걸쳐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 학파 지도자인 프랑수아 케네는 그녀의 주치의였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프랑스 정치를 좌지우지한 '그림자의 실력자'였다.
5. 예술 및 문화 후원
5.1. 예술가 및 공예 후원

퐁파두르 여후작은 파리를 유럽의 취향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영향력 있는 예술 후원자였다. 그녀는 후견인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 그리고 나중에는 그녀의 동생 아벨-프랑수아 푸아송을 정부의 예술 정책 및 지출을 통제하는 건축 총감(Directeur Général des Bâtiments프랑스어) 직책에 임명함으로써 이러한 영향력을 얻었다.
그녀는 1759년 세브르에 도자기 공장을 건설하고 나중에 직접 매입하여 프랑스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이 공장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체 중 하나가 되었고, 지역에 숙련된 일자리를 제공했다. 세브르 도자기는 너무 붉지도 희미하거나 연하지도 않은 독특한 분홍빛 바탕 색깔(일명 '퐁파두르의 장밋빛')에 꽃 장식이나 전원 풍경, 우화적인 형상 등으로 장식한 특유의 스타일로 유명해졌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수많은 조각가와 초상화가를 후원했는데, 그중에는 궁정 화가인 장-마르크 나티에와 1750년대의 프랑수아 부셰, 장-바티스트 레베이용, 프랑수아-위베르 드루에 등이 있었다. 그녀는 보석 조각가 자크 귀에를 후원했으며, 귀에는 그녀에게 오닉스, 벽옥 및 기타 준보석을 조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로코코 양식의 순수 및 장식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혁신을 촉진했다. 예를 들어, 부셰와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루이 15세와 함께 소유했던 15개의 저택을 끊임없이 재단장하는 것을 통해서였다. 로코코 양식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해로운 "여성적" 영향으로 비판받았지만, 많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왕의 관심을 사로잡고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가꾸는 방법으로 저명한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부셰의 퐁파두르 여후작 초상화의 유실된 유화 스케치는 와데스던 매너의 스타른베르크 방에 세브르 도자기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세브르 도자기는 그녀가 국제적인 고객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적으로 보급하여 크게 영향을 미치고 혁신한 또 다른 산업이었다.
예술의 후원자로서뿐만 아니라, 퐁파두르 여후작은 예술 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8세기 몇 안 되는 보석 조각가 중 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와 벨뷰 성에 있는 그녀의 개인 극장에서 상연된 연극에서 호평받는 무대 배우였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지휘 아래 다른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일부 예술 작품, 특히 1758년 부셰의 화장대에서의 퐁파두르 여후작 초상화는 퐁파두르 여후작과의 협업으로 볼 수 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부셰의 도움을 받아 판화 조각을 제작한 아마추어 판화가로 여겨진다. 그녀는 부셰와 귀에의 작품을 판화로 만들기 위해 베르사유의 개인 아파트에 조각 장비를 들여놓았다. 그녀의 정치적 감각은 방대한 장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1760년에 자신의 인쇄기로 인쇄된 『스튜어트 왕조의 역사』와 같은 영향력 있는 책들을 수집했는데, 표지에 있는 그녀의 문장(紋章)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런던과 와데스던 매너의 열렬한 수집가였던 페르디난트 드 로스차일드 남작은 이 책과 1764년에 출판된 그녀의 책 목록(전체 소장품이 기재되어 있음) 사본을 포함하여 그녀의 여러 책들을 수집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귀에의 보석 조각을 바탕으로 부셰의 그림을 이용해 52점의 판화를 제작했다. 그녀의 작품집은 책 형태로 왕의 조각가 귀에의 조각된 보석을 바탕으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조각한 판화 시리즈(Suite d'Estampes Gravées Par Madame la Marquise de Pompadour d'Apres les Pierres Gravées de Guay, Graveur du Roy프랑스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개인 포트폴리오는 미술사학자 수잔 웨이거에 의해 월터스 미술관 필사본실에서 발견되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퐁파두르 여후작이 작품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한 문서가 없기 때문에, 그녀를 후원받는 예술가들과의 협력자로 보아야 할지 여부에 대해 논쟁한다. 아이디어와 구성이 누구의 것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작품집 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및 도서관은 다음과 같다.
- 월터스 미술관, 볼티모어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영국박물관, 런던
- 보스턴 미술관
- 아르스날 도서관, 파리
- 로스차일드 컬렉션, 루브르 박물관
- 트루아 도서관
그녀의 판화 작품들은 미술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다양한 신화적 주제와 일상적인 장면을 판화로 표현하며 예술적 재능을 선보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섬세한 묘사와 우아한 구도로 당시 로코코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랑과 우정,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작품들도 다수 제작되었다.


이러한 판화들은 퐁파두르 여후작의 예술적 감각과 당대 예술가들과의 협업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5.2. 계몽주의 사상가 지원
퐁파두르 여후작은 볼테르, 드니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는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를 억압하려 했던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을 비롯한 반대자들로부터 옹호했다.
5.3. 건축 및 거주지

퐁파두르 여후작은 루이 15세와 함께 15채의 저택을 소유하거나 거주하며 끊임없이 재단장했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궁도 그녀의 저택 중 하나였으며, 루이 15세가 선물한 궁전이었다. 엘리제궁은 1718년에 귀족 저택으로 세워졌고, 1753년 루이 15세가 매입하여 퐁파두르 여후작에게 선물했다. '엘리제'라는 이름은 1787년 궁을 매입한 뒤 케일라 백작부인이 저택의 위치가 샹젤리제 거리와 가깝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그녀는 크레시 성을 매각한 후, 175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생투앙 성의 용익권을 누렸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생투앙 성은 1821년 철거되어 현재의 뒤 케일라 백작부인의 성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명문 제브르 공작 가문의 소유였다. 생투앙 성의 원래 설계는 앙투안 르포트르가 맡았으며, 강을 마주보는 정원 쪽에 두 개의 날개가 본관을 연장하는 고전적인 U자형 구조였다. 생투앙의 독창성은 내부 배치에 있었다. 본관은 세 개의 "살롱 아 랄리엔느"(salons à l'italienne프랑스어)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으며, 1750년대에 제브르 가문을 위해 슬로츠 가문이 장식을 전면적으로 변경했다. 프랑스 건축에서 "살롱 아 랄리엔느"는 건물 전체 높이를 차지하는 방을 의미하며, 보르비콩트 성의 그랑 살롱이 대표적인 예이다.
퐁파두르 여후작이 이 영지를 취득하자마자, 마구간과 부속 건물을 포함한 전체 건물의 대대적인 재정비 프로젝트가 계획되었으며, 비용은 50만 리브르 이상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없지만, 1층의 복원 계획이 제안되었다. 이 재정비를 감독한 건축가는 당시 퐁파두르 여후작의 여러 거주지 개조 및 건축 작업을 총괄했던 앙주-자크 가브리엘로 보인다. 중앙의 "살롱 아 랄리엔느"를 중심으로 왕의 아파트가 퐁파두르 공작부인의 아파트와 대칭되도록 조성되었으며, 이는 명망 높은 생투앙 성이 그녀의 사회적, 정치적 성취를 상징하는 거울이 되도록 했다.
그녀가 소유하거나 관련되었던 다른 건축물로는 루이 15세가 그녀를 위해 지었으나 그녀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한 프티 트리아농, 라 뮈에트 성, 메나르 성, 벨뷰 성, 라 셀 성 등이 있다.
5.4. 패션 및 개인 스타일

퐁파두르 여후작은 당대의 패션과 헤어스타일, 보석 등 개인적인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쳐 유행을 선도했다. 그녀의 수집 열정은 다양한 미술품 생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이러한 수집 열정은 각종 미술품의 생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퐁파두르 여후작의 취향은 당시 유행의 기준으로 통용되었다. 그녀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기였다.
그녀의 이름을 딴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은 앞머리를 크게 부풀려 높이 올려 고정하는 스타일로,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큰 유행을 이끌었다. 또한, 마르키즈 컷 다이아몬드는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여후작의 입술 모양을 닮게 해달라고 주문하여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6. 개인 생활 및 건강
6.1. 건강 문제
퐁파두르 여후작은 평생 동안 연약한 건강으로 고통받았다.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재발하는 감기, 기관지염, 각혈, 두통에 시달렸다. 또한 왕과의 사이에서 세 번의 유산을 경험했으며, 미확인된 대하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이 "매우 냉담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으며, 송로버섯, 셀러리, 바닐라를 섭취하는 등 성욕을 높이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건강 문제와 약골 체질로 인해 그녀는 30세가 넘은 1750년경부터 루이 15세와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았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1764년 4월 15일, 42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이는 그녀의 첫 아들이 사망했던 병과 동일했다. 그녀가 거주했던 베르사유 궁전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그녀의 결핵을 악화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6.2. 가족 및 자녀
퐁파두르 여후작은 남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1741년에 태어났으나 1742년 유아기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둘째 딸은 알렉상드린 르 노르망 데티올로 1744년에 태어났으나, 1754년 9세의 나이에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딸 알렉상드린이 사망한 지 불과 11일 후,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도 손녀를 잃은 슬픔으로 사망했다.
7. 평가 및 논란
7.1. 동시대의 평가와 비판
퐁파두르 여후작은 동시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그녀를 악의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낙인찍었다. 그녀의 평민 출신 성분은 큰 약점이었으며, 왕세자 루이는 그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왕비의 태도 또한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궁정인들은 왕이 평민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의 위신을 손상시켰다고 여겨 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씨인 '푸아송'(Poisson, 프랑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을 이용한 말장난인 푸아소나드(poissonnades프랑스어)라고 불리는 끊임없는 비방에 매우 민감했다.
또한 그녀는 루이 15세에게 젊은 여성들을 소개하는 이른바 '뚜쟁이' 역할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은 주로 사슴 공원(Parc-aux-Cerfs프랑스어)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곳은 왕이 젊은 여성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슴 공원은 흔히 묘사되는 하렘이 아니었으며, 한 번에 한 명의 여성만이 머물렀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이곳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를 궁정 내의 경쟁자를 피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미술사학자 멜리사 하이드는 퐁파두르 여후작에 대한 비판이 그녀의 권력과 영향력이 기존의 사회적, 성별 계층을 뒤엎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귀족이 아닌 여성이 그토록 강력한 위치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회에 큰 충격과 불안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7.2. 역사적 평가
동시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퐁파두르 여후작에 대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들은 그녀가 예술의 후원자로서, 그리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서 거둔 성공을 강조한다. 그녀는 파리를 유럽의 취향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로코코 예술 양식의 발전과 세브르 도자기 공장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볼테르와 드니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지원하며 지적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7.3. 논란
퐁파두르 여후작을 둘러싼 주요 논란 중 하나는 예수회와의 갈등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막강한 힘과 권한을 갖고 있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는 퐁파두르 여후작과 갈등을 겪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여후작은 예수회 신부에게 자신들을 공식 커플로 인정해 주길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고, 이 때문에 퐁파두르 여후작은 예수회에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때 마침 라발레트 파산 사건이 발생하자, 퐁파두르 여후작이 프랑스에서 예수회를 추방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예수회의 추방은 라발레트 파산 사건과 잇따른 국왕 암살 음모 등으로 인해 예수회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퐁파두르 여후작의 영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또 다른 논란은 사슴 공원(Parc-aux-Cerfs프랑스어)과 관련된 것이다. 퐁파두르 여후작이 루이 15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젊은 여성들을 모아 놓은 '하렘'을 운영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슴 공원은 하렘이 아니었으며, 한 번에 한 명의 여성만이 머물렀다. 퐁파두르 여후작은 이곳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이를 궁정 내의 다른 경쟁자를 피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8. 죽음

루이 15세는 1764년 퐁파두르 여후작이 42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루이 15세는 그녀의 병간호를 직접 했다. 그녀의 적들조차도 마지막 고통스러운 몇 주 동안 그녀의 용기에 감탄했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담 드 퐁파두르의 죽음에 매우 슬픕니다. 저는 그녀에게 빚을 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애도합니다. 걷기도 힘든 늙은 작가가 아직 살아 있는데, 화려한 경력의 아름다운 여인이 42세의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적들은 크게 안도했다. 베르사유에서 정부의 관이 떠나는 동안 비를 바라보며, 비통해진 왕은 "여후작은 여행에 좋은 날씨를 얻지 못하겠군"(La marquise n'aura pas de beau temps pour son voyage프랑스어)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왕은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는 파리의 카푸신 수녀원에 묻혔다. 프랑스 왕실의 법도상 정부는 왕실 거처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으나, 루이 15세의 깊은 애정으로 퐁파두르 여후작은 이 예외를 적용받았다. 그녀의 시신은 호텔 데 레제르부아르에 있는 그녀의 방에 이틀 밤낮 동안 안치되었고, 1764년 4월 17일 화요일 저녁 베르사유 노트르담 교회에서 첫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9. 유산 및 영향력
퐁파두르 여후작은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이자 사실상의 재상으로서 약 15년간 프랑스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외교 혁명과 7년 전쟁을 포함한 주요 외교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국내 관직 임명 및 해임에도 개입했다. 그녀는 프랑수아 케네의 중농주의 학파를 보호하고 『백과전서』의 편찬을 지원하는 등 지적 운동에도 기여했다.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성과 예술적 안목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녀가 주최한 살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등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며 지적 교류의 장이 되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 문예 진흥에 큰 힘이 되었으며, 극장 및 소극장 건립, 예술가 후원 등을 통해 당대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녀의 수집품은 가구, 도자기,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방대하여 그녀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유품을 정리하는 데만 1년이 걸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집 열정은 각종 미술품 생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퐁파두르 여후작의 취향은 당시 유행의 기준으로 통용되었으며, 그녀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이름을 딴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은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큰 유행을 이끌었으며, 마르키즈 컷 다이아몬드의 탄생에도 영감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10. 대중문화 속 모습
10.1. 영화 및 텔레비전
퐁파두르 여후작은 여러 차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려졌다.
- 폴레트 뒤발: 『무슈 보케르』 (1924년)
- 도로시 기시: 『마담 퐁파두르』 (1927년)
- 애니 알러스: 『마담 퐁파두르』 (1931년)
- 도리스 케년: 『볼테르』 (1933년)
- 잔 보아텔: 『샹젤리제를 거슬러 올라가다』(Remontons les Champs-Élysées프랑스어) (1938년)
- 힐러리 브룩: 『무슈 보케르』 (1946년)
- 주느비에브 파주: 『팡팡 튤립』 (1952년)
- 미슐린 프레슬레: 『베르사유의 로열 어페어』 (1954년)
- 모니크 르파주: 『왕의 편지』(Le Courrier du roy프랑스어) (1958년)
- 엘피 마이어호퍼: 『마담 퐁파두르』 (1960년)
- 뇌미 나델만: 『마담 퐁파두르』 (1996년)
- 카티아 플린트: 『젊은 카사노바』(Il giovane Casanova이탈리아어) (2002년)
- 엘렌 드 푸즈롤: 『팡팡 튤립』 (2003년), 『잔 푸아송, 퐁파두르 여후작』(Jeann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프랑스어) (TV, 2006년)
- 소피아 마일즈 (성인 역)와 제시카 앳킨스 (아역): BBC 공상과학 드라마 『닥터 후』의 에피소드 "벽난로 속의 여인" (2006년)
- 보야나 노바코비치: 『카사노바』 (2015년)
10.2. 문학 및 기타 매체
- 1755년부터 1881년까지 존재했던 영국 육군의 부대인 제56 보병연대는 "퐁파두르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연대 제복의 보라색 안감이 퐁파두르 여후작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며, 일부 병사들은 그녀의 속옷 색깔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신인 에식스 연대는 이 색깔과 별명을 유지했다.
- 샴페인 잔의 일종인 "쿠프 드 샴페인"(coupe de champagne프랑스어)은 그녀의 유방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레오 팔이 작곡하고 루돌프 샨처와 에른스트 벨리쉬가 대본과 가사를 쓴 독일 오페레타 『마담 퐁파두르』는 런던(1923년)과 브로드웨이에서도 성공적으로 각색되었다.
- 그녀는 평생 동안 여러 초상화의 소재가 되었다.
- 전설에 따르면, "마르키즈 컷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리는 "나베트" 다이아몬드는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여후작의 입 모양을 닮게 해달라고 주문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은 퐁파두르 여후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2막에서 백작부인 역은 과거 예술가들의 위대한 이름들을 회상하며 "그리고 때로는 퐁파두르 여후작 본인도!"라고 언급한다.
- 그녀는 조니 머서의 노래 "Personality"의 첫 줄에 언급된다.
- 사토 켄이치의 역사 소설 『그 이름은 퐁파두르』와 코야마 유카리 원작, 시모츠키 카요코 작화의 만화 『푸아송~총희 퐁파두르의 생애』가 있다.
- 일본의 베이커리 체인 "퐁파두르"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프랑스 델바르사의 장미 품종 중 '로즈 퐁파두르'가 있다.
- 향수 브랜드 우비강은 퐁파두르 여후작이 직접 제조에 관여했던 애용 향수 중 하나였다.
- 퐁파두르 여후작은 『닥터 후』 새 시리즈 시즌2 에피소드04 "벽난로 속의 여인"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 q=베르사유 궁전|position=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