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임영신의 생애는 1899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시작되어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하며 교육과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의 성장 배경과 교육 과정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임영신은 1899년 11월 20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아버지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金敬順) 사이의 12남매 중 다섯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관은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장로이자 지역의 명문가인 김해 김씨와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7대조 임온(任溫) 대에 금산군으로 낙향하며 가세가 기울었으나, 그녀의 아버지 임구환은 10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린 시절 임영신은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들려주던 정치 및 시사 이야기를 곁에서 함께 들으며 자랐다. 당시 여자아이는 남성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정치와 시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녀는 특히 아버지로부터 동학 농민 운동과 동학 농민군의 활약상, 최시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린 시절 러시아와 일본 동전의 대한제국 유입 및 조선 지폐의 일본 인쇄 유입에 대한 소문을 기억하기도 했다.
그녀의 가족은 개신교를 믿었지만, 아버지 임구환은 사회 분위기가 개화될 때까지 기독교인임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린 시절 집에 방문한 백인 선교사들의 유창한 조선말 설교를 들으며 임영신은 더욱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했으나,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비밀리에 담을 넘어 학교에 등교했고,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어 동네에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당시 "저렇게 큰 계집애가 학교엘 다니다니..., 저 계집아이는 예절도 모르고 부모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야"라는 동네 사람들의 비난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는 다시 학교에 등교하여 1914년 심광소학교를 졸업했다. 8세 때 처음 활동 사진(영화)을 보고 신기해했던 경험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1.2.1. 한국 및 일본에서의 교육
1911년, 12세가 되던 해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과 결혼 풍습 때문에 부모가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려 했다. 언니 임선유가 먼저 결혼하게 되었고, 다음은 임영신의 차례였다. 그러나 그녀는 중매쟁이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밝혔다. 이러한 어린 소녀의 논리에 구시대적 어른들은 당황해하며 돌아갔다. 매일같이 결혼을 종용하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어머니, 이건 죄가 될 것입니다. 열두 살 난 계집아이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한 낯선 집으로 보내지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제 인생은 제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부모를 설득하여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에 진학했다. 재학 중 그녀는 기독교 여학생들의 소모임을 주관하며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수업 시간에 교사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의 눈치를 보던 교사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임영신은 친한 친구 세 명과 함께 동국역사 책을 구해 매일 밤 몰래 필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필사본은 후에 김 목사를 통해 애국 청년들과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어 항일 운동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1915년에는 친구들과 함께 항일 자살특공대 '자살대'를 조직하고, 일본 국가 부르기와 일본 천황 사진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교실에 붙은 일본 천황 사진의 눈을 구멍 내는 대담한 행동으로 일본인 교사들을 분노케 하기도 했다.
또한, 교내에서 여성의 불편함과 불평등을 상징하던 쓰개치마 거부 운동을 주도했다. 친구 오자현과 함께 교장에게 쓰개치마 착용을 거부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임영신은 "선생님은 한국인을 사랑하시지요? 선생님도 우리 민족이 미국인들과 같이 진취적으로 되기 위하여 낡은 풍속이 변화되기를 원하시지요?"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학교 측은 그의 아버지를 포함한 학부모들을 소환하는 사태를 겪었지만, 그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쓰개치마 착용이 자유화되었다. 이 운동은 경성부에까지 알려지면서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쓰개치마를 입지 않는 현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 여름 방학 동안 고향 금산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학교 생활로 인해 부모님이 보수적인 동네 사람들에게 모욕과 수치스러움을 겪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1917년에는 고향 사람들이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더욱 키웠다. 1918년 3월 20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며, 학교 내 항일 비밀 조직인 자살대를 공식 해체했다.
졸업 후 그녀는 아버지의 권유로 이화학당에 진학하는 대신, 자신의 사명을 위해 결혼을 미루고 사회 활동에 나섰다. 1918년 3월, 이순길 교사의 주선으로 천안 양대소학교(良垈小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매질하지 않는 교육 방식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은 경험을 통해 체벌이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의 노력으로 양대소학교에서는 불필요한 매질의 악습이 사라졌다.
1918년 겨울,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녀는 전주기전여학교 재학 시절 이승만이 미국에서 지하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었다. 1918년 12월에는 한 사업가를 통해 경성부의 한국인 지하 조직 활동가를 만나 이승만에 대해 문의했으며, 이 활동가로부터 상하이에 한국인 지하 운동 본부가 있고, 난징에 지부가 있으며 이들이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소요 사태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녀는 천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리에 3.1 운동에 동참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2월 중순, 경성부에서 온 연락원으로부터 '태황제께서 돌아가셨소. 일본인이 독살하였소.'라는 소식을 들으며 거사 결행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연락원들은 행상, 여행자 등으로 위장하여 천안의 그녀에게 비밀리에 인쇄된 삐라와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충청남도 천안군 지부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그녀는 천안과 전주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천안역으로 가서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가 확산되자 주부처럼 머리를 땋아 올리고 상복을 구해 위장했으며, 일본 경찰의 수색을 피하기도 했다. 3월 초 전주역에 도착하여 이동우, 김건보 등 전주 지역 인사들과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3월 12일 전주 남문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고문과 나체 검속을 당했으며, 옥문 밖에서는 시민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3월 19일부터 고문이 계속된 후, 재판에서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어머니가 나서서 그녀를 석방시키려 했으나 거절하고 옥에 남았다가 그해 6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석방 직후 전주로 내려가 완산 병원 의사 신일용과 잠시 교제했으나, 대구고등법원에서 집행유예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으며 그와 헤어졌다. 이후 신일용이 보낸 연애편지가 아버지 임구환에게 발각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1919년 10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접했으나, 집행유예 상태로 금산 집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도 관여했다.
1919년 11월,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집을 나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도 형사들의 밀착 감시를 받았으나, 일본인 동기로부터 일본 여성과 한국 여성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의 성 윤리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1921년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선교사 친구 메리 쉐라(Mary Shearer)의 도움으로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같은 해 이화학당에서도 교사로 출강했다. 1921년 4월, 금산 주민들의 요청으로 딸 9명을 영명여학교에 입학시키고 생계를 지원했다. 영명여학교 재직 중에도 지하 운동가들과 접선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결을 유지했다.
1921년 10월 공주 YMCA 청년회에 가입하여 강연을 통해 "만일 우리들이 그 희망을 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돕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들과 딴 사람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십니다"라며 민족 독립에 대한 희망을 역설했다. 이 강연으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쉐라 부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교사증을 압수당하며 '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연설을 다시 한다면 종신 수감될 것이오'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도지사와 공주 시장, 공주 교육 국장이 해임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공주를 떠나려 했으나 쉐라 부인의 배려로 영명여학교 병설 유치원의 교사로 활동했다. 1922년 영명여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1.2.2. 미국 유학 및 독립운동
1924년 이화학당 교편에 있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된 일본에 유학한 이웃들의 자제들의 생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아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 사실을 지하 조직 요원들에게 접한 후, 그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여 이승만이 운영하는 동지회로 갔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요코하마에서 일본인이 한인들을 대량 학살한 현장 사진과 사망자 명단을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LA에서 유학 중이던 둘째 오빠 임양희와 함께 이승만이 투숙하던 호텔을 찾아가 자료를 건네주었다. 임영신은 이 자료를 서방 언론에 폭로하면 곧 독립이 될 것이라 순진하게 생각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이 사진들을 공표할 것이지만, 이것은 앞으로의 긴 싸움의 한 챕터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미국인들과 그들의 정부는 일본과 친밀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며, 우리가 이 자료들을 기사로 폭로해도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전쟁광내지는 분쟁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임 양, 하나의 것으로 한국의 승리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계가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독립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아주 강합니다. 우리는 희망하며 싸울 것입니다. 누군가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현실과 괴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 자유의 꿈이 스며든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싸우려고 한다면, 그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임 양,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이 서로 만날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날 것이고 어느 날, 우리는 서울에서 함께 설 것이며 그 때, 이 만남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그녀는 이승만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 수립, 외교를 통한 독립 달성 견해에 깊이 공감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보좌하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 허정, 박마리아, 이원순 등 이승만의 측근 인사들을 만나게 된다.
오빠 임양희로부터 여비를 받아 그래머시 플레이스(Gramercy Place)의 노인 요양원에 취직하여 노인을 돌보며 학비를 마련했다. 이후 기초부터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래머시 플레이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미국 교포 사회에서는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양자 간의 시각차를 줄이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매료되어 그를 지지했다.
1925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 편입하였고, 동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여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주제는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었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31년 졸업 때까지 이승만을 측근에서 보좌했다. 1927년에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오빠 양희가 운영하는 과일 가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28년 8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귀국하지 못하고 학업과 일에 전념했다. 한때 주유소에 취직하기도 했다. 1930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1931년에 수료했다. 이후 1957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일본 니혼대학에서도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30년대, 이승만은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그녀는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 ⋯ 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32년 배편으로 귀국하여 하와이의 이승만을 방문한 뒤, 요코하마 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다. 귀국 직후 한국인 밀정의 감시를 당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국제 YWCA 서기인 사라 라이언(Sarah Lyon)을 데리고 다니며 한국 YWCA의 활동을 소개했다.
2. 교육자로서의 활동
임영신은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며 특히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의 교육 철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민족의식 함양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를 지향했다.
2.1. 중앙대학교 설립 및 운영
1932년 4월, 임영신은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녀는 박희도와 김상돈으로부터 재정난에 처한 중앙 유치원 교사 양성소를 인수하여 유치원 교사들을 양성했다. 북 장로교회로부터 '피어슨 성서 학교'(The Pearson Bible School) 건물을 빌려 중앙보육학교를 개교했으며, 직접 교사를 초빙하고 아동심리학, 교수법, 기독교 교리, 예술, 자연과학, 가정학, 음악, 체육, 문학, 아동영양학, 수공, 구기, 그리기, 위생법, 그리고 일본사 및 동양사 등을 교과목으로 선정하는 등 교육 과정 전반을 설계했다. 1933년에는 중앙사범학교를 개교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선총독부 교육국에 고등학교와 전문학교 교수를 훈련할 수 있는 허가를 내줄 것과 중앙사범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총독부는 임영신의 과거 행적을 이유로 학교 폐쇄를 시도했으나, 그녀가 규칙을 조심해서 지켰기 때문에 직접적인 구실을 찾지 못했다. 매일 일본인 스파이들이 학교를 염탐했고, 그녀가 교육국을 자주 방문하자 '내 사상 중의 어떤 부분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1944년 일본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었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에 재개교했다. 1945년 10월에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1946년 9월에는 중앙여자대학(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9월 중앙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초대 학장에 취임했으며, 1953년에는 중앙대학을 종합 단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중앙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녀는 1953년 2월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중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학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61년 11월부터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도 겸임했다. 그녀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는 혁신적인 교육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2.2. 여성 운동 및 단체 활동
임영신은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 외에도 여성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지냈다. 1945년 10월에는 이은혜, 김활란 등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이 당은 1961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녀는 또한 다양한 여성 단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61년부터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부인회 회장,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이은혜, 박마리아 등 우익 성향의 여성 인사들과 함께 대한여성청년단을 운영하며 우익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녀는 여성 교육의 증진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여성의 권리 신장과 사회 개혁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3. 정치 경력 및 공직 활동
임영신은 교육 활동 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핵심 과정에 참여하고, 국회의원 및 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인으로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1. 유엔 대표 활동
임영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국제 무대에서 펼쳤다. 1945년 10월,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 운동을 추진하자, 그녀는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 참관했고, 2월 26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개원되자 민주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9월 1일 미국선 케이프 트라이언(CapeTryon)을 타고 출국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둘러보고, 귀국 후에는 민주의원 대표로 50개 회원국의 유엔 대표들을 상대하며 총선을 통한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목적으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가기 전 워싱턴에 들러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명의의 공식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UN에서 활동하기 위해 도미할 당시 국내에서 자금 지원을 할 형편이 못 되자, 그녀는 겨우 여비만을 마련하여 LA에서 트럭 사업과 주유소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친오빠 임일(任一)을 설득하여 활동비와 교제비 등의 비용을 조달받았다. 이후 총선거를 치르고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임영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데 든 비용만 무려 38.00 만 USD에 달했다.
UN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를 방문하여 변호사 존 스태거스(John G. Staggers), 중견 기자 제이 제롬 윌리암스(J. J. Williams),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 등과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1946년 10월 20일, 뉴욕의 플러싱 메도우스(Flushing Meadows)로 가서 유엔 회의에 참석했다. 아직 국가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정식 참석 자격이 없어 처음에는 출입을 저지당하며 몇 시간을 배회해야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알고 있는 베르나디노 양(Bernardino)과 AP통신의 시그리드 안(Miss Sigrid Arne) 기자의 도움으로 일시적 회의 참석 자격을 얻었다. 그 후 엘살바도르 대사, 리비아 대사 등 3명의 보증을 받아 2년 동안 유엔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한국의 공식 대표가 아닌 기자 신분의 옵저버 형태로 참가하여 앉을 좌석조차 없었다. 그녀는 당시 "유엔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반만년 역사를 가진 3천만의 인구를 가진 우리 나라가 세계 의회에서 공식 좌석조차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비통하였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녀는 "그곳에는 51개국의 각국 대표단이 있었고 어떤 대표단은 10명에서 최대 백여 명에 가까운 고문들과 비서들, 보좌관들과 어시스턴트를 데리고 다녔다. 그들은 아름다운 개인 자가용을 타고 다녔으며, 아주 잘 꾸며진 프리빗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위치의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태프도, 차도 없이 혼자였고 늘 카페에서 간단히 끼니를 떼워야만 했다. 나는 각국 대표단을 한 명씩 모두 찾아갔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긴밀한 국가들의 문제로 바빴으며, 온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거의 모르는 수천만 한국인을 위한 도움을 원하는 국제적 거렁뱅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엘리너 루스벨트의 도움으로 폴 헨리 스파크(Paul Henri Spaak) 초대 유엔 총회 의장과 노르웨이 출신 트뤼그베 리 초대 유엔 사무총장을 찾아가 한국 문제를 상정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트뤼그베 리의 비서인 앤드류 코디어(Andrew Cordier)는 유엔의 공식 문서로 한국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좋겠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그녀는 추가 도움을 얻기 위해 워싱턴으로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 법률고문 존 스태거스 변호사와 제이 제롬 윌리암스 기자, 그리고 임병직 의장을 불렀다. 이들은 1946년 10월 28일 뉴욕에 도착했으며, 임병직 대령(이승만의 의견에 따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의장으로서 '대령' 호칭 사용)은 이마누엘 뎀비(Emanuel Demby)를 연락책으로 고용하여 그녀와 소통하도록 했다. 이들 팀은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호텔에 본부를 두었다.
3일 뒤, 그들은 모든 각국 대표단에게 한국에 관한 청원서가 11월 1일 금요일에 제출된다는 사실을 전보로 알렸다. 당일 유엔 총회에서 의장과 사무총장이 한국 문제에 관한 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날 아침 모든 대표단이 한국 문제에 관한 유엔 공식 문서의 사본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한국이 미국이나 소련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족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지지해 줄 대표단을 포섭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한국 문제에 우호적이었던 중국 대표단을 찾아가 주 유엔 중국 대사로 활동하던 웰링턴 쿠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웰링턴 쿠는 1906년 노스필드에서 열린 국제 기독교 청년 중국 대표로서 한국 대표였던 이승만과 함께 활동한 인연이 있었다. 그의 고문인 조셉 쿠(Joseph Koo) 박사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라며 장개석 총통과의 연락을 주선해 주었다. 인도 대표로 활약하던 판디트 네루 여사와도 접촉했으나, 그녀는 자국의 공식 입장으로 인해 정중히 거절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생 국가 필리핀 대표 카를로스 로물로 외상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직접 이승만의 오랜 친구인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로하스(Manuel Roxas)에게 연락하여 의견을 구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마닐라로부터 "필리핀 대통령은 로물로 대령에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유엔에 있는 한국 대표를 돕도록 지시합니다"라는 전보 답신을 받았다.
그러나 며칠간 주 유엔 미국 대사와 상의한 결과, 그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면 찬성 투표를 할 것이지만 아직 미국은 이것에 대해 좀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임영신에게 말했다. 그녀는 다음으로 소련 대표단을 찾아갔으나, 몰로토프의 부하인 그롬코(Gromyko)는 친절히 그녀를 맞이하며 워싱턴의 주미 소련 대사이자 유엔 대표부 일원인 니콜라이 노비코프(Nikolai Novikov)에게 한국 문제에 대해 상의해보겠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노비코프와의 만남을 성사시켰으나 그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했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은 한국 문제에 동정적이지만 다른 문제가 많아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결국 강대국의 입김이 강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곧바로 주 유엔 미국 대사와 소련 대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반대하지는 못하도록 항의를 계획했다.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 Byrnes)와 상원의원 워렌 오스틴(Warren Austin)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매우 바빴고 대신 워렌 의원의 극동 고문인 존 앨리슨(John M. Allison)과 앨리슨(Allison)을 만났다. 그들은 임영신에게 "의원님께서는 미 국무성에서 승인하지 않는 한, 당신을 도울 힘이 없습니다. 워싱턴으로 가서 그 문제를 간청하세요"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에 임영신은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국인 대표로 온 것입니다. 만약 제가 워싱턴으로 가서 미 국무성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면, 소련은 저를 미군정이 자신들에 대한 악선전을 위해 보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우정을 유지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고문들은 "저희는 당신의 어려움을 이해합니다 미스 임, 하지만 우리 미국 대표단은 국무성의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당신에게 확신해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으로 소련 대표단을 찾아갔다. 몰로토프의 부하인 그롬코(Gromyko)는 매우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하며 워싱턴의 주미 소련 대사이자 유엔 대표부 일원인 니콜라이 노비코프(Nikolai Novikov)에게 한국 문제에 대해 상의해보겠다고 하였다. 이후 그녀는 노비코프와의 만남을 성사시켰으나 그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은 거부와 지연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들의 고문관들은 "우리 또한 한국 문제에 동정적이지만, 우리는 다른 너무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서 한국 문제에 관해 공부하고 시간을 쏟을 수 없을 뿐더러 우리들의 주 관심사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유럽 국가 대표단들은 그들은 소련과 미국의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멕시코, 파나마, 에콰도르, 아이티, 과테말라 등 남미 국가들에게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 에티오피아는 귀중한 조언을 그녀에게 해주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자신의 다음 행보에 관해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워싱턴의 미 국무성 직원들을 찾아갈 것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유엔의 활동들은 각 국가의 독자적인 활동이라기보단, 실질적으로 미국과 소련 이 두 강대국의 교섭 장소이며 다른 참석 국가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이들에게 자문하는 역할만 할 뿐, 사실상 윈도우 드레싱에 가깝다"고 조언했다.
임영신은 곧장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 국무성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cent)와 북아시아 담당자 휴 보튼(Hugh Borton)을 찾아가 소련이 북한 사람들을 징집하여 이미 10만 명 이상의 군대가 조직되었는데, 계속 한국 문제가 지연됨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더욱더 군인을 모집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유엔 본부로 돌아와 이 경위를 한국에 우호적인 각국에 보고했으며, 일부 대표단은 워싱턴에 직접 이 문제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무부에서는 한국 문제는 유엔에서 토의될 문제가 아니라며 반대했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문제라고 밝혔다. 임영신은 격분하여 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성명을 발표했다.
1946년 12월 중순, 유엔 총회가 끝나기 직전에 이승만이 민주의원 전권 대사로 도미하자, 그녀는 이승만과 폴 헨리 스파크 유엔 의장과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폴 의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나중에 그녀는 의장과 가까운 소식통으로부터 강대국들이 그에게 이승만과 만나는 것을 경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6년 12월, 국내에서 김구가 보낸 전보를 받고 국내의 소요 시위 계획을 접했으며,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미국으로 온 이승만을 만나 "만약 지금 소요 사태가 일어난다면 한국인들이 더 큰 희생을 당할 것이며, 미군 병사를 희생시킨다면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호소하여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3.2. 장관 및 국회의원 활동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조각에서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다. 1948년 9월 상공장관 재직 중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으로 취임했다.
1949년에는 정현모의 경상북도 도지사 취임으로 공석이 된 안동시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대한국민당 당수로서 출마하여 장택상을 이기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1949년 5월 28일, 보궐선거 당시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으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었으나,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49년 6월, 의정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1950년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임병직(단장), 장면, 장택상, 김동성과 함께 참석했다. 1953년 빨치산 이현상이 사살되자 동향 출신인 유진산과 함께 이현상의 신원을 확인해 주기도 했다.
1950년 1월, 국회 부의장 윤치영과 함께 애치슨 라인을 한반도까지 확장시키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2월에는 상공일보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6월 22일 출국하여 한국 전쟁 직전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에 한동안 체류하다가 이승만의 급보로 소환되어 전시 내각에 특별히 참여했다. 1952년에는 여성계사 사장 등 언론계에도 적극 관여했다.
3.3. 부통령 후보 출마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제3대 부통령 후보자로 자유당의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단독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그녀는 9명의 후보 중 7위를 차지하며 낙선했다. 1956년에도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기붕 계열이 성장하면서 이승만의 곁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며, 윤치영, 이범석, 이윤영 등과 함께 이승만 측근 인사로서 이기붕 계열을 비판했다.
1958년 대한국민당이 해체되자 일시적으로 자유당에 복귀했다. 1959년 11월, 대한국민당의 후신으로 대한여자국민당을 다시 부활시키고 부통령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했으나,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낙선했다.
4. 사상과 신념
임영신의 사상과 신념은 그녀의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의 동기가 되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 신장과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4.1.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임영신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녀의 가족은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를 믿었으며, 이는 그녀가 서구 교육을 접하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시야를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이는 그녀의 강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신다고 믿었다.
민족주의는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치와 시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기전여학교 재학 시절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키웠다. 한국사 필사 운동, 일본 천황 사진 훼손, 쓰개치마 거부 운동, 동맹 휴학 주도 등 그녀의 초기 활동은 강한 민족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과 조선인 구타를 보며 민족의 비극에 깊이 공감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4.2. 여성 권리 및 사회 개혁
임영신은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며 한국 여성의 잠재력과 고유한 가치를 강조했다. 그녀는 일본 여성들이 결혼 전에는 많은 자유를 누리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하인과 같은 관계에 놓인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여성들은 정치적, 법적 권리가 없었음에도 가정을 지배하고 남편의 상담 역할을 하는 등 가정 내에서 권리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특히 선덕여왕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세계 최초의 천문대를 세운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일본의 성 윤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일본인 여자들은 우리 한국 여자와는 대단히 달랐다. 그들은 혼전에는 우리보다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우리들보다 덜 자유로웠다. 그들은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천황에게 미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생아를 생산해도 좋다고 격려까지 받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임영신은 "일본 처녀들의 잡담에는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기생을 처리(성교)할 수 있는가 하는 토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들의 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세밀했으며 그것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일본 여자라고 해서 내가 만난 여자가 전부 관능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략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로서 인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몇 년 안 되어서 독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일본의 윤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를 가르치며, 어린 시절부터 천황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죽는 것을 배우는 비윤리적 사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에 대한 반감은 그녀가 우리 민족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녀는 교육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과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중앙보육학교 설립은 여성 교육 증진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었다. 쓰개치마 거부 운동은 여성의 오랜 인습에 대한 저항이자 사회 개혁을 위한 실천이었다. 그녀는 여성이 단순히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로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여성의 지적, 사회적 역량 강화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5. 개인사
임영신은 12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둘째 오빠는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녀의 조카 임철순(任哲淳)은 그녀의 둘째 오빠의 아들로, 중앙대학교 제2대 총장을 역임했다.
1937년 3월, 중앙보육학교 설립 및 운영 자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재도미했을 때, 한순교와 결혼했으나 곧 파경을 맞았다. 이 결혼 실패는 그녀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며, 교포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0년대, 이승만은 그녀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그녀는 당시 이승만을 직접 만나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 ⋯ 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6. 말년과 사망
1960년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야당 인사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군정 지지를 선언하며 재건당 창당에 참여했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으로 개편될 때도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민주공화당 총재고문에 선임되었다. 1964년과 1965년 한일협정 문제로 인한 국회의 파행에 대해 오히려 민주당 등 야당을 국정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며 비판했다.
제3공화국 기간 중 박정희의 각별한 신뢰를 받으며 친여 성향의 사회 원로로 활동했다. 1963년 한국부인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1965년부터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박정희의 1969년 3선 개헌에 윤치영 등과 함께 적극 지지를 보냈다. 10월 유신 출범 이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임영신은 1977년 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77세였다. 그녀의 유해는 평생을 바쳐 건립하고 운영했던 중앙대학교의 교정에 묻혔다. 사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그리고 미국 아이젠하워 상을 받았다.
7. 평가 및 영향
임영신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교육, 여성 운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특정 행적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공존한다.
7.1. 긍정적 평가
임영신은 대한민국 여성사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민족의식 함양에 기여했고, 특히 여성으로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항일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중앙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여성 교육의 지평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녀는 여성 교육을 통해 사회 변화와 여성 권리 신장을 추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는 초대 상공부 장관이자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여성의 정치 참여와 사회적 진출의 길을 열었다. 유엔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펼친 점도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할 때,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중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7.2. 비판과 논란
7.2.1. 주요 비판 사례
임영신에 대한 주요 비판과 논란은 크게 친일 행적 의혹과 독직 사건,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과의 관계에서 제기된다.
- 친일 행적 의혹**: 그녀는 1941년 12월 13일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성전(聖戰) 완수로 황국 흥융을 기한다'는 선서와 함께 발족한 친일 단체였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했을 때 김활란, 박순천, 박마리아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같은 해 3월 14일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되어 일본의 국방 정책에 협력하고 황국신민화를 추진하는 사업을 벌였다. 1942년 2월 1일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방송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친일 단체인 조선보육연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녀의 친일 활동은 김활란, 박순천, 박마리아, 노천명, 모윤숙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는 황국신민화 정책 초기에 미국에 체류했던 점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 독직 사건**: 1949년 5월 28일, 그녀는 상공부 장관 재직 중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 당시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비록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함께 기소된 9명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그녀의 정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았다.
- 권위주의 정권 지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의 주요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 정권에 참여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하고,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권위주의 체제에 협력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8. 영향
임영신은 교육, 여성 운동, 정치,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8.1. 후대에 미친 영향
임영신은 최초의 여성 장관이자 선출직 국회의원으로서 후대 여성들에게 사회 참여와 리더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교육자로서의 삶은 수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여성 교육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여성 인재 양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중앙대학교의 설립과 발전은 그녀의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로, 이는 한국 고등 교육 발전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한 열정과 사회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상징하며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8.2. 특정 분야 기여
- 교육 분야**: 중앙보육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중앙여자전문학교, 중앙여자대학을 거쳐 중앙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임영신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다. 그녀는 단순히 학교를 세우는 것을 넘어, 학생 중심의 교육 철학을 도입하고 매질을 없애는 등 혁신적인 교육 방식을 시도했다. 이는 한국 교육사에서 중요한 진보로 평가된다.
- 여성 운동 분야**: 대한여자국민당 창당을 통해 여성의 정치적 결집을 시도했으며, 다양한 여성 단체 활동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쓰개치마 거부 운동과 같은 대중적인 활동은 여성의 인습을 깨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 정치 및 외교 분야**: 초대 상공부 장관과 국회의원으로서 초기 대한민국 정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참여했다. 특히 유엔 대표 활동은 국가 수립 전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며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9. 기념 및 추모
임영신의 사후, 그녀의 유해는 평생을 바쳐 건립하고 운영했던 중앙대학교의 교정에 안장되었다. 이는 그녀가 중앙대학교의 정신적, 물리적 기반을 다진 설립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청조근정훈장 등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 아이젠하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훈장과 상은 교육, 정치, 외교 분야에서 그녀가 남긴 공헌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0. 관련 항목
- 이승만
- 윤치영
- 이범석
- 박정희
- 지청천
- 대한국민당
- 대한여자국민당
- 박마리아
- 김활란
- 임병직
- 여성주의
- 반공주의
- 이은혜
- 모윤숙
- 장택상
- 박순천
- 황신덕
- 이현상
- 민주공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