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선왕후 장씨는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의 왕비이자 제18대 왕 현종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1619년에 태어나 1674년에 서거할 때까지 조선 후기의 격동적인 시대를 경험하며 왕실의 안녕과 국정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남편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의 인질 생활을 겪었으며, 이 시기에도 침착함과 현명함을 잃지 않았다. 왕비가 된 후에는 궁중을 현명하게 이끌고 아랫사람들을 자애롭게 대하는 한편, 남편 효종의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관련 정책 추진에 기여하였다. 그녀의 서거 이후에는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예송 논쟁이 다시 불거지는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인선왕후는 온화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왕실을 안정시키고, 국난 극복 의지를 지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인선왕후 장씨는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의 왕비이자 제18대 왕 현종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광해군 재위 11년인 1619년에 태어나 봉림대군과의 혼인, 병자호란으로 인한 청나라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 그리고 왕비와 왕대비로서의 삶을 거쳐 1674년에 서거하였다. 인선왕후의 생애는 조선 후기의 격동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왕실의 안녕과 국정 안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2.1. 탄생 및 가계
인선왕후 장씨는 1619년 1월 30일 (음력 1618년 12월 25일) 광해군 재위 10년에 경기도 안산 (현 시흥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어머니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안동 김씨 김이순(金二順) 사이의 둘째 딸이자 막내딸이었다. 그녀의 본관은 덕수 장씨이다.
어머니 김이순은 김상용의 딸이자 척화파 김상헌의 조카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순절하였다. 인선왕후는 외증조할머니를 통해 세조와 근빈 박씨의 장남 덕원군(德源君)의 7대손이며, 외할아버지를 통해서는 성종과 숙의 홍씨의 7남 경명군(景明君)의 외고손녀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훗날 양녀가 되는 의순공주와 5촌 관계가 된다. 또한 그녀의 외조모의 계모를 통해 김장생과 먼 친척 관계이며, 김장생의 고손녀이자 그녀의 손자인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와도 먼 인척 관계이다. 덕수 장씨 귀인 이씨는 그녀의 아버지의 후손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이다.
인선왕후는 예의 바르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통통한 볼을 가진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인선왕후의 외할아버지이자 성종의 11남인 왕자 경명군의 외증손자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

인선왕후의 아버지이다.
2.2. 혼인 및 봉림대군 시절
1630년, 인조는 둘째 아들 봉림대군 이호의 배우자로 장유의 딸을 현명하고 덕망 있는 인물로 여겨 직접 간택하였다. 이듬해인 1631년 9월 13일,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궁에 들어온 후 풍안부부인은 매일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였고, 어른들을 한결같이 섬기고 공경하여 시어머니 인렬왕후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4년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궁을 떠나 사가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 집안일을 현명하게 처리하고 모든 종류의 가정사를 잘 다루며 신중함을 보여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풍안부부인은 남편 봉림대군, 시동생의 아내인 강빈, 그리고 외할아버지인 영의정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이후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모두가 혼란 속에서 울부짖을 때, 풍안부부인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평소와 같이 위기를 침착하게 대처하였다. 적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성을 점령하자,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붙여 적과 함께 자폭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그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결국 병자호란에서 "삼전도의 굴욕"으로 알려진 패배를 겪었다. 그 결과 봉림대군과 그의 형인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다. 이때 풍안부부인 또한 봉림대군을 따라 청나라로 갔다. 그녀는 8년 동안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며 남편을 지지했으며, 그곳에서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중 한 명만이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 이연이다.
2.3. 왕세자빈 시절
수년 후, 소현세자가 풀려나 귀국하였으나 1645년 5월 21일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독살이 의심되었다. 봉림대군이 1645년 여름 청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는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에 따라 풍안부부인은 자동으로 왕세자빈이 되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계몽적인 왕실 여성이었던 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인조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왕세자빈으로서 그녀는 전 왕세자빈의 비극적인 죽음을 교훈 삼아야만 했다.
2.4. 왕비 시절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봉림대군이 조선의 제17대 군주 효종으로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왕세자빈은 자동으로 왕비가 되었다. 왕실 후궁들의 수장으로서, 그녀는 궁녀들을 현명하게 이끌고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태도를 보였다.
효종의 후궁 중 한 명인 안빈 이씨가 자신의 딸인 숙녕공주를 "너"라고 부르며 큰 소동을 일으켰다. 당시 왕실 후궁들은 비록 친어머니라 할지라도 왕의 자녀들에게 비격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왕자녀들은 왕실 후궁보다 높은 지위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효종은 안빈 이씨를 벌하려 했으나, 왕비는 왕에게 강력히 설득하여 이를 용서하게 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아랫사람들을 진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비의 지문(誌文)에는 "아내가 자신을 높이 여기면 집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강빈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그녀에게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왕비는 출가한 딸들과 한글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현재 왕비가 숙신공주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70여 통이 남아있다. 왕비는 안빈 이씨의 딸이자 효종의 유일한 후궁 소생 자녀인 숙녕공주를 차별 없이 아꼈다. 예를 들어, 효종과 왕비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줄 때, 효종이 왕비의 반응을 의식하여 후궁의 딸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고 공주들에게만 선물을 주려 하자, 왕비는 이를 염려하여 숙녕공주를 직접 불러 선물을 주었다.
또한 왕비는 효종만큼이나 북벌론을 지지하였으며, 왕비 재임 기간 동안 굿을 없애고 음주를 금지하였다. 이불의 색깔을 붉은색과 푸른색 두 가지로 통일하여 전쟁 시 군복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하였고, 이 모든 재정은 북벌을 위해 사용되었다.
2.5. 왕대비 시절 및 말년
1659년, 효종이 머리의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침을 맞던 중 과다 출혈로 위독해졌고, 결국 의료 사고로 사망하였다. 왕비는 심하게 통곡하며 슬픔을 표했지만, 장례 절차를 의미 있게 진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직접 효종의 손톱과 발톱을 다듬고 시신을 씻겼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녀는 3개월 동안 묽은 쌀죽만 먹었다.
이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18대 군주로 즉위하였고, 그녀는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 이후 건강을 돌보지 못하여 병을 얻게 되었다. 이후 효숙왕대비는 자주 온양에 행차하여 온천욕을 하며 건강이 다소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1669년 3월에는 약 한 달 동안 온양온천에 머물렀다. 이때 현종과 명성왕후를 비롯하여 네 공주(숙안, 숙명, 숙휘, 숙경공주)도 함께 행차하였다. 그러나 1674년 56세가 되던 해, 그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3월 20일 (음력 2월 2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서거하였다. 사망일은 《현종실록》에 2월 23일, 《현종개수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2월 24일로 기록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인선왕후의 가족 관계는 그녀의 부모, 형제자매, 남편 효종과 시댁 식구들, 그리고 소생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된다. 특히 그녀의 가문인 덕수 장씨와 안동 김씨는 조선 시대 주요 명문가였으며,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3.1. 부모와 형제
구분 | 이름 (한자)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부 | 장유 (張維) | 덕수 장씨 | 1587년 1월 22일 ~ 1638년 4월 30일 | 장운익 (張雲翼) 밀양 박씨 | 신풍부원군, 우의정, 증 영의정, 문충공 |
모 | 김이순 (金二順) | 안동 김씨 | 1585년 ~ 1654년 1월 19일 | 김상용 (金尙容) 안동 권씨 | 영가부부인, 경명군의 외고손녀 |
언니 | 덕수 장씨 | 덕수 장씨 | 1610년 ~ ? | 장유 김이순 | |
오빠 | 장선징 (張善澂) | 덕수 장씨 | 1614년 ~ 1678년 | 장유 김이순 | 례조판서, 풍양군, 정장공 |
3.2. 남편과 시댁
구분 | 이름 (한자) | 본관 | 생몰년 | 비고 |
---|---|---|---|---|
남편 | 이호 (李淏) | 전주 이씨 |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 조선 제17대 국왕 |
시아버지 | 이종 (李倧) | 전주 이씨 | 1595년 12월 7일 ~ 1649년 6월 17일 | 조선 제16대 국왕 |
시어머니 | 인렬왕후 한씨 (仁烈王后 韓氏) | 청주 한씨 | 1594년 8월 16일 ~ 1636년 1월 16일 | 효종의 생모 |
시어머니 | 장렬왕후 조씨 (莊烈王后 趙氏) | 양주 조씨 | 1624년 12월 16일 ~ 1688년 9월 20일 | 인조의 계비, 효종의 계모 |
3.3. 자녀와 후손
인선왕후는 효종과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으며, 양녀 1명을 두었다.
구분 | 작호 (한자)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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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숙신공주 (淑愼公主) | 1634년 ~ 1645년 | 미혼 | 조졸 | |
양녀 | 의순공주 (義順公主) | 이애숙 (李愛淑) | 1635년 ~ 1662년 | 도르곤 (多爾袞) 보로 (博洛) | 성종의 서자 익양군의 3세손 금림군의 딸, 청나라에 출가 |
차녀 | 숙안공주 (淑安公主) | 1636년 ~ 1697년 12월 22일 | 익평위(益平尉) 홍득기 (洪得箕) | 1남 홍치상 | |
(이름 없는) 왕자 | 대군 | 1640년 ~ 1642년 | 조졸 | ||
3녀 | 숙명공주 (淑明公主) | 1640년 ~ 1699년 | 청평위(靑平尉) 심익현 (沈益顯) | 2남 심정보, 심정협 | |
장남 | 현종대왕 (顯宗大王) | 이연 (李棩) | 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 |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 조선 제18대 국왕 |
4녀 | 숙휘공주 (淑徽公主) | 1642년 ~ 1696년 | 인평위(寅平尉) 정제현 (鄭齊賢) | 2남 정인상, 정태일 (조졸, 양자), 1녀 정씨 | |
(이름 없는) 공주 | 공주 | ? ~ 1644년 | 조졸, 심양에서 의주로 향하던 중 사망 | ||
(이름 없는) 왕자 | 대군 | 1645년 ~ 1645년 | 조졸 | ||
5녀 | 숙정공주 (淑靜公主) | 1646년 12월 13일 ~ 1668년 6월 13일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 (鄭載崙) | 3남 2녀 (1남 정효선, 1녀 정씨만 성인) | |
6녀 | 숙경공주 (淑敬公主) | 1648년 2월 22일 ~ 1671년 2월 17일 | 흥평위(興平尉) 원몽린 (元夢麟) | 1녀 원숙희, 양자 원명구 |
현종과 명성왕후의 자녀 (인선왕후의 손자녀)
- (이름 없는) 손녀 (1658년 ~ 1658년)
- 명선공주 (明善公主, 1659년 ~ 1673년 9월 12일)
- 숙종대왕 (肅宗大王) 이순 (李焞, 1661년 10월 7일 ~ 1720년 1월 12일)
- 명혜공주 (明惠公主, 1663년 9월 12일 ~ 1673년 6월 11일)
- 명안공주 (明安公主) 이온희 (李溫姬, 1665년 1월 30일 ~ 1687년 5월 16일)
4. 주요 활동 및 영향
인선왕후는 왕비로서 궁중을 현명하게 이끌고 아랫사람들을 자애롭게 대하는 등 뛰어난 성품을 보여주었다. 또한 남편 효종의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관련 정책 추진에 기여하는 등 국정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1. 궁중 내 역할 및 성품
인선왕후는 왕실 후궁들의 수장으로서 궁녀들을 현명하게 이끌고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어른들을 한결같이 섬기며 시어머니 인렬왕후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효종의 후궁 중 한 명인 안빈 이씨가 자신의 딸인 숙녕공주를 "너"라고 부르며 큰 소동을 일으켰을 때, 왕비는 효종에게 강력히 설득하여 안빈 이씨를 용서하게 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아랫사람들을 진심으로 보살폈다. 또한 왕비는 안빈 이씨의 딸이자 효종의 유일한 후궁 소생 자녀인 숙녕공주를 차별 없이 아꼈다. 효종이 왕비의 반응을 의식하여 후궁의 딸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고 공주들에게만 선물을 주려 하자, 왕비는 이를 염려하여 숙녕공주를 직접 불러 선물을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녀의 지문(誌文)에는 "아내가 자신을 높이 여기면 집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그녀가 의지했던 최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었을 수 있다. 왕비는 출가한 딸들과 한글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현재 그녀가 숙신공주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70여 통이 남아있다.
4.2. 북벌론 지지 및 정책
인선왕후는 남편 효종만큼이나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녀는 왕비 재임 기간 동안 궁중 내에서 굿(무속 의식)을 없애고 음주를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불의 색깔을 붉은색과 푸른색 두 가지로 통일하여 전쟁 시 군복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하였으며, 이 모든 재정은 북벌 계획을 위해 사용되었다.
5. 역사적 사건 및 평가
인선왕후의 생애는 병자호란과 같은 격동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사후 발생한 예송 논쟁은 단순한 상복 문제에서 벗어나 당시 조선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5.1. 병자호란과 청나라 생활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선왕후는 남편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이때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영의정 김상용은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성을 점령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하며 순절하였다. 조선은 결국 병자호란에서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겪었고, 그 결과 봉림대군과 그의 형인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갔다.
인선왕후 또한 봉림대군을 따라 청나라 심양에서 8년 동안 인질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온갖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을 지지했으며, 그곳에서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특히 강화도 피난 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위기를 대처하는 등 뛰어난 침착성을 보여주었다.
5.2. 예송 논쟁
인선왕후가 1674년에 서거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그녀보다 여섯 살 어린 시어머니였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상중에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다시 발생하였다. 이는 효종의 죽음 이후 발생했던 1차 예송 논쟁에 이어 2차 예송 논쟁으로,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 불린다.
서인은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의 상중에 기년복(1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였으나, 남인은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신환국 때까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6. 사후
인선왕후는 1674년 경희궁에서 서거하였으며, '인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묘인 영릉은 남편 효종과 함께 동원상하릉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6.1. 사망 및 시호
인선왕후는 1674년 56세의 나이로 3월 20일 (음력 2월 24일) 새벽 경희궁 회상전에서 서거하였다. 그녀의 사망일은 《현종실록》에 2월 23일로, 《현종개수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2월 2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에게 추증된 시호는 인선(仁宣)이다. '인(仁)'은 사랑을 베풀고 의리에 승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선(宣)'은 성스럽고 착함이 널리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 존호와 휘호를 합친 정식 시호는 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貞範敬烈明獻仁宣王后)이다. 왕대비 시절에는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6.2. 능묘
인선왕후의 능은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영릉(寧陵)으로, 남편 효종과 함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방식으로 합장되어 있다. 이는 왕의 능이 왕비의 능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형태이다.

7. 관련 항목
- 효종
- 현종
- 소현세자
- 민회빈 강씨
- 병자호란
- 예송
- 장유
- 김상용
- 숙신공주
- 숙안공주
- 숙명공주
- 숙휘공주
- 숙정공주
- 숙경공주
- 의순공주
- 영녕릉
- 덕수 장씨
- 안동 김씨
- 숙명신한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