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홍구(이홍구李洪九한국어, 1934년 5월 9일~)는 대한민국의 학자이자 관료, 정치인이다. 학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후 정계에 입문하여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에 걸쳐 주요 공직을 역임했다. 특히 제28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주 영국 대사와 주 미국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퇴임 후에는 동아시아연구원을 설립하여 이끄는 등 학술 및 정책 연구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초기 생애 및 학력
이홍구는 1934년 5월 9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여의리(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및 과거 고양군에 속했던 서울특별시 은평구 일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씨로,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의 아들인 영산군 이정의 15대손이다. 그는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성장했으며, 1953년 명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54년 중퇴했다.

2.1. 학력
이홍구는 한국에서의 학업을 중단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다. 1955년 에모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1959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1961년)와 박사 학위(1968년)를 취득했다. 학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3. 학술 경력
이홍구는 미국과 한국에서 교수로서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쳤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1973년에는 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의 연구원으로, 1974년에는 하버드 로스쿨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내 주요 연구기관에서 학자적 역량을 발휘했다.
1968년 또는 1969년에 귀국한 이홍구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73년까지 재직했다.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1974년경 다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복귀했으며, 1988년 정부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약 33년간의 학자 생활 중 절반가량을 미국에서, 나머지 절반가량을 서울에서 보냈다.
4. 정치 경력
이홍구는 약 33년간의 학자 생활을 마친 후 1988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치와 공직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그는 다양한 고위직을 역임하며 한국 정치와 외교의 중요한 순간들에 참여했다.
4.1. 국토통일원 장관
이홍구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2월 25일부터 1990년 3월 18일까지 제14대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도 1994년 4월 30일부터 1994년 12월 16일까지 제20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맡아 두 차례에 걸쳐 통일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2. 주 영국 대사
이홍구는 노태우 정부의 임명에 따라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주 영국 대한민국 대사로 재직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제12대 주 영국 대사로서 양국 관계 강화에 기여했다.
4.3. 국무총리
이홍구는 1994년 12월 17일부터 1995년 12월 17일까지 김영삼 정부의 제28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당시 한국은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였으므로 국무총리직은 대통령에 종속되는 위치였으나, 그는 국가 운영의 중요한 축으로서 다양한 정책 추진에 관여했다.
4.4. 신한국당 활동
이홍구는 국무총리 재임 당시에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1994년 6월, 그는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에 당무위원으로 입당했으나 같은 해 11월 탈당했다. 이후 1996년 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재입당하여 정식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의 전국구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한국은 비례대표 47석을 배분했는데, 당에서 그에게 부여한 높은 순번은 국회 입성을 보장했다. 신한국당은 이 선거에서 전체 299석 중 139석을 얻어 경쟁 정당들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표, 79석)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대표, 50석)의 개별 득표를 훨씬 상회하는 결과를 보였다.
신한국당은 1990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합당하여 형성된 보수 및 중도 세력 연합의 재편된 형태였다. 1995년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이 연합에서 이탈한 후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신한국당은 1998년 한나라당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으며,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다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한 정치적 위기로 새누리당이 분열되기 전까지 존속했다. (김종필과 그의 지지자들은 2006년경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
이홍구는 1996년 신한국당에서 빠르게 부상하여 당의 집행위원과 당 대표를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김영삼 대통령(1993년 2월~1998년 2월 임기)의 잠재적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널리 거론되기도 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6년 초까지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의 월드컵 공동 개최 유치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FIFA는 1996년 5월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를 결정했다.)
그러나 1996년 12월, 정부가 전국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 노동법을 강행 처리하자 이홍구는 신한국당의 최고 지도부 직위에서 사임했으나 당원 자격은 유지했다. 이는 당시 보수 정부가 국민적 합의 없이 정책을 강행했을 때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하고, 1997년 12월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당선되어 1998년 2월 취임한 후에도 이홍구는 당시 한나라당(1997년 11월 신한국당에서 개칭)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4.5. 주 미국 대사
1998년 3월 24일, 김대중 대통령은 이홍구를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로 지명했다. 당시 이홍구는 한나라당의 최고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그를 주미 대사로 임명한 결정은 한국 정치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외교통상부는 이 전 정부의 비교적 중요한 인사를 임명한 것이 "초당적 외교를 펼쳐나가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통일부 장관으로 동시 임명한 것도 이러한 태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홍구는 1998년 5월부터 2000년 8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주 미국 대사로 재직했다. 그의 대사 임기 동안 한국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시기였으며, 남북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나타나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0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0년 8월 양성철 대사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5. 정치 활동 이후
이홍구는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2년간 정부와 외교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년간은 국회에서 선출직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000년 공직에서 물러나 개인 생활로 돌아온 후, 그는 신문 칼럼니스트와 싱크탱크 및 정책 연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전직 국가원수 및 정부 수반들의 엘리트 모임인 클럽 드 마드리드의 회원으로, 그리고 서울포럼의 이사회 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직접 싱크탱크를 설립하기도 했다.
5.1. 동아시아연구원 설립
2002년 5월, 이홍구는 서울에 본부를 둔 독립적이고 비영리적인 정치 및 외교 정책 싱크탱크인 동아시아연구원(EAI)을 설립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은 2010년대에 들어 전 세계 6,000여 개 싱크탱크 중 '상위 100위'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그 연구와 기관 모델이 개발도상국의 신생 연구기관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이홍구는 동아시아연구원 이사회 의장으로 정확히 10년간 재직했으며, 78세 생일을 맞은 2012년 5월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은퇴 후 하영선이 의장직을 이어받았다.
5.2. 언론 활동 및 논쟁
이홍구는 수년간 중앙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며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2011년에는 진보 성향의 학자 진중권이 이홍구의 칼럼이 실리는 날과 같은 날 자신의 칼럼을 진보 성향 일간지 한겨레에 게재하여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진중권의 이러한 행동은 2011년 4월 11일에 시작되어 2011년 10월 14일까지 10회 연속으로 이어졌다. 진중권의 칼럼은 이홍구의 칼럼이 게재된 지 약 20시간 후에 올라왔다. 이홍구는 보통 3주에 한 번 칼럼을 썼으나, 10월 3일에는 4주 만에 새로운 칼럼을 썼고, 진중권은 이때도 그를 따라 칼럼을 게재하여 의도적인 행동임이 분명해졌다. 진중권의 이러한 행동의 목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 그의 트위터에서는 컴퓨터 해킹 및 성 정체성 관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진중권의 칼럼은 더 이상 게재되지 않았다.
한편, 2019년 10월 10일, 일제 강제징용 소송 문제와 한일 무역 분쟁 등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던 시기에 이홍구는 다른 정계, 종교계, 학계 인사들과 함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일본의 수출 규제 철폐와 헌법 유지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6. 개인사
이홍구의 배우자는 강주현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7. 평가 및 영향
이홍구는 학계에서 쌓은 깊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학자로서의 분석적 사고와 정치인으로서의 실무 역량을 겸비하여 국토통일원 장관, 주 영국 대사, 국무총리, 주 미국 대사 등 다양한 고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에서 야당 소속의 그를 주미 대사로 임명한 것은 당시 한국 정치에서 초당적 외교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는 그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어선 역량과 신뢰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6년 신한국당 대표 시절 노동법 강행 처리로 인해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히며 대표직에서 사임한 사건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논란이 된 지점으로 남아있다. 이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적 합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활동 이후 그가 설립한 동아시아연구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 싱크탱크로 성장하여 국제 관계 및 외교 정책 연구에 기여하며 그의 학자적 면모와 공공 기여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이홍구는 한국 사회의 학술적 발전과 민주주의 및 외교 역량 강화에 다방면으로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