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이가와 게이는 1979년 7월 13일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오아라이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아라이 야구 스포츠 소년단에서 야구를 시작했으며, 초등학생 시절에는 오른손 투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오른손으로 던지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이후 프로 입단 후에도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후배들을 위해 야구 교실을 열어 재능을 기부했다.
이가와는 이바라키 현립 미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하시모토 미노루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3학년 봄 현 대회에서 이바라키 현립 류가사키 제1고등학교를 상대로 7회 참고 기록이지만 1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에는 허리 통증으로 인해 거의 등판하지 못했다. 현 대회 결승전에서는 진통제 주사를 맞고 등판했지만, 자신의 실책 등으로 4실점하며 패배했다. 비록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당시 가와구치 도모치카, 노미 아쓰시와 함께 "고교 좌완 투수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97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신 타이거스에 2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그의 담당 스카우트는 기쿠치 도시유키였다. 당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도 그를 지명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고등학교 시절의 허리 통증 이력을 이유로 지명을 포기했다. 야구 외적으로는 고등학교에서 일본상공회의소 부기 2급과 실용영어기능검정 3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2. Professional Career
이가와 게이는 일본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리그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했으나,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 이적 후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일본 프로 야구로 복귀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으며, 독립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2.1. Hanshin Tigers (1998-2006)
1998년 한신 타이거스에 2순위로 지명된 이가와는 데뷔 후 몇 년간 한신 마이너 리그 시스템에서 활동했다. 1999년 5월 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중간 계투로 데뷔했으며, 5월 7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하루 도시오를 상대로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5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 프로 첫 선발 등판 및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초기 시즌에는 1군에 정착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2001년, 당시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발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4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프로 데뷔 후 첫 완투승을 기록했고,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이 시즌에 평균자책점 2.67로 센트럴 리그 2위를 기록했으나, 팀의 타선 지원 부족으로 9승 13패를 기록하며 4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하고도 패전이 더 많은 경우는 1991년 이마나카 신지 이후 처음이었다.
2002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부임한 후, 3월 30일 요미우리전에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완투하며 3대 1 승리를 이끌었고, 이는 한신에게 12년 만의 개막전 승리였다. 여름에 잠시 부진했으나, 시즌 14승을 기록하며 생애 첫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했고, 206개의 탈삼진으로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는 센트럴 리그 선발 투수 부문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선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추정 연봉 1.00 억 JPY로 계약을 갱신했다.
2003년에도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으나 패전했다. 하지만 6월과 7월에 걸쳐 4경기 연속 완투승을 포함해 8월 2일 주니치 드래곤즈전까지 12연승을 기록했다. 연승 기간 동안 그는 미신으로 머리를 자르지 않아 아프로 헤어와 같은 머리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2003년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 2위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1위였던 가와사키 겐지로의 부상으로 인한 출장 사퇴 때문이었다. 이 해 그는 1999년 우에하라 고지 이후 4년 만에 센트럴 리그에서 20승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고, 2024년 시즌 종료 시점까지도 센트럴 리그의 마지막 20승 투수로 남아 있다. 이가와의 활약에 힘입어 한신은 18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200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1차전에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20승을 달성했던 사이토 가즈미와 투수전을 펼쳤으나, 5이닝 3실점으로 강판되어 승패가 없었다. 4차전에서는 6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7회에 동점을 허용하며 6⅔이닝 4실점으로 물러났다. 팀은 사요나라 승을 거두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은 놓쳤다. 당시 그는 연봉 1.00 억 JPY 이상을 받으면서도 "식사가 맛있고 야구할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는 이유로 신인 및 미혼 선수용 숙소인 '도라후소'에서 계속 생활했는데, 구단의 퇴소 명령을 반복적으로 받아야 했고, 그 해 오프 시즌 우메모토 마사유키 훈련부장이 정년퇴직한 것을 계기로 퇴소했다. 숙소에서는 모범생이었고, 나중에는 젊은 선수들의 멘토 역할도 맡았다.
2004년에는 10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 프로 야구 사상 71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이 해 그는 전년보다 부진하여 11패를 기록하고 평균자책점도 3.73으로 상승했지만, 14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이적을 희망했으나 구단과의 교섭이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사비를 들여 캠프에 참가했고, 일부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는 매년 오프 시즌마다 포스팅을 통한 메이저 리그 이적을 희망하게 되었다.
2005년 8월 23일 히로시마전에서 개인 통산 1,000 투구회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연속 삼진을 잡는 기세에 포수 야노 아키히로가 기념구를 실수로 관중석으로 던져버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벤치 앞에는 대부분의 선수와 코치들이 나와 팬에게 고개를 숙여 기념구를 돌려받았다. 이 해 그는 13승 9패, 평균자책점 3.86을 기록하며 2년 만에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와 맞붙은 200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 선발을 맡았으나 6이닝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고, 이가와의 부진을 시작으로 한신 투수진은 4경기에서 33실점을 허용하며 팀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4연패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2006년에는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했다. 그동안 이가와의 공헌을 고려한 구단은 그가 3년 넘게 바라던 메이저 리그 이적을 허용했다. 11월 10일, 이가와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의 에이전트는 아른 텔렘이었다. 11월 29일, 뉴욕 양키스가 2600.02 만 USD를 제시하여 독점 교섭권을 얻었고, 12월 27일 5년 연봉 2000.00 만 USD (2011년까지 매년 400.00 만 USD)와 성과급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직전인 2007년 2월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2.2. Major League Baseball (2007-2011)
이가와 게이는 한신 타이거스에서의 성공적인 경력을 뒤로하고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높은 기대와 달리, 그는 메이저 리그 무대에서 연이은 부진을 겪으며 주된 선수 생활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내야 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 있어 가장 큰 좌절의 시기였으며, 구단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여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2.1. MLB Transition and Initial Struggles (2007)
2007년 1월 8일, 이가와 게이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뉴욕 양키스 입단을 공식 발표하며 높은 기대를 모았다. 4월 7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5이닝 동안 7실점하며 강판되었으나, 팀이 역전승을 거두면서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4월 1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6이닝 5안타 5탈삼진 2실점으로 메이저 리그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투구폼과 제구력이 불안정해지면서 구원 투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4월 28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는 선발 투수가 부상으로 강판되자 긴급 등판하여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2승째를 올렸다. 이 호투로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했지만, 5월 7일 결국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양키스 구단은 그의 투구 매커니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플로리다 주립 리그 소속의 탬파 양키스로 보내 나르디 콘트레라스와 빌리 코너스와 함께 훈련하도록 지시했다. 탬파에서 매커니즘과 투구 위치에 진전을 보인 후, 트리플 A 소속의 스크랜턴/윌크스배러 양키스로 콜업되었다.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지만 4⅔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2007년 7월 27일, 이가와는 다시 트리플 A 스크랜턴/윌크스배러로 강등되었다. 그 해 8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그를 웨이버로 영입하려 했으나, 양키스가 포스팅 시스템 입찰금의 분담까지 요구하면서 이적이 불발되었다. 이가와는 2007년 9월 로스터 확장 시점에 다시 양키스에 복귀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2승 3패, 평균자책점 6.25, WHIP 1.67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2.2. Minor League Assignments and Contractual Issues (2008-2011)
2008년, 이가와는 전년도의 부진으로 인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선발 구상에 들지 못했고, 시즌을 마이너 리그인 스크랜턴/윌크스배러에서 시작했다. 5월 9일 이안 케네디를 대신하여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으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 3이닝 동안 11안타 6실점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고, 5월 15일 다시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6월에는 한 차례 더 메이저 리그에 콜업되어 뉴욕 메츠전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다음 날 또 다시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7월 26일에는 메이저 리그 계약이 해지되어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었다. 이가와는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 로테이션을 지킬 수 있는 투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메이저 리그에서의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스크랜턴에서 14승 6패, 평균자책점 3.45, WHIP 1.19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트리플 A 올스타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이가와의 영입이 "실패였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캐시먼은 그에게 사이드암 투구로 전환을 제안했으나 이가와는 이를 거부했다.
2009년, 이가와는 보장된 계약을 가진 유일한 비(非)로스터 초청 선수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다. 15⅓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했지만, 볼넷 허용률이 높아 3월 23일 다시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2년 연속으로 스크랜턴에서 시즌을 시작한 그는 전반기에는 9승 4패, 평균자책점 4.04, WHIP 1.24의 성적을 보였으나, 후반기에는 1승 4패, 평균자책점 5.66, WHIP 1.70으로 부진했다. 최종적으로는 팀 최다승인 10승 8패, 평균자책점 4.15, WHIP 1.41을 기록했지만, 메이저 리그 등판 기회는 없었다. 그 해 12월, 그는 영주권을 신청 중임을 밝혔으며, 현지 신문 뉴욕 포스트에서는 그를 "지난 10년간 뉴욕 프로 스포츠 선수 최악의 10인" 중 1위로 선정하는 불명예를 안겼다.
2010년에도 이가와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비로스터 초청 선수로 참가했지만, 구원 투수로 2⅔이닝 5실점, 평균자책점 16.87, WHIP 1.88이라는 극심한 부진을 보이며 3월 13일 다시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다. 스크랜턴에서 선발 투수로 10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96, WHIP 1.24를 기록했으나, 구원 투수로 12경기에서는 평균자책점 5.00, WHIP 1.65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 해에도 메이저 리그 등판은 없었으며, 2년 연속으로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전년도에 신청했던 영주권을 취득했으며, 양키스와의 계약 종료 후에도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2011년, 이가와는 마이너 리그인 트렌턴 선더 (더블 A)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3월 14일 고향인 이바라키현 오아라이정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일시 귀국했으나, 3월 20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크랜턴에서 4경기에 등판하여 1승 무패 평균자책점 2.78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시즌 대부분을 트렌턴에서 보냈다. 이후 왼팔꿈치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5년간의 마이너 리그 통산 성적은 107경기 등판(선발 83경기)에 36승 2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83, 419탈삼진을 기록했다. 이가와는 미국에서의 5년 생활에 대해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나의 피와 살이 되었다"고 말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2017년 인터뷰에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세상에 나와 능력 있는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차이를 절감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구단 측의 낮은 신뢰도와 영입 당시의 조사 부족으로 인해 몇 번의 실패로 기회를 잃었고, 2008년 트리플 A에서 최다승을 기록했음에도 메이저 리그 승격이 좌절되는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양키스가 나를 방치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구단이 언더핸드나 사이드암 투구로 전환하지 않으면 메이저 리그로 승격시키지 않겠다고 강요했다는 소문을 언급하며, 본인은 메이저 리그라면 선발이든 중간 계투든 어디서든 던질 의향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 일본 구단에 이가와를 트레이드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가와는 두 번 모두 거부했다. 캐시먼은 그에게 "당신의 능력은 메이저 리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평가다. 일본 구단과의 거래는 양키스의 재정적 부담도 덜어줄 것이다"라고 직접 설득했지만, "그러나 당신이 양키스에 남기를 원한다면 이 트레이드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는 2011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다.
2.3. Return to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2012-2015)
메이저 리그에서의 힘든 시기를 보낸 이가와 게이는 2012년 일본 프로 야구로 복귀하여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새로운 시작을 모색했다. 그러나 복귀 후에도 부상과 부진이 이어지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12년 3월 28일, 이가와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 시절 은사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있는 오릭스 버펄로스 입단을 발표하며 6년 만에 일본 프로 야구로 복귀했다. 그의 등번호는 한신과 양키스 시절과 동일하게 29번이 되었다. 5월 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며 2,032일 만에 일본 프로 야구 1군 공식 경기에 출장했지만, 4회초 에가와 도모아키에게 두 번째 공을 던지던 중 오른쪽 허벅지 경련을 호소하며 62구 만에 강판되었고, 결국 3⅔이닝 1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7월 11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8이닝 3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며 2006년 10월 16일 이후 2,095일 만에 일본 무대 복귀 첫 승을 거두었다. 7월 26일 라쿠텐전에서도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고, 8월 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도 7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이때 왼쪽 옆구리 통증을 느꼈다. 한신 시절에는 최고 구속이 140 km/h대 후반을 기록했으나, 이 해 평균 구속이 137 km/h로 떨어지면서 힘든 투구를 이어갔다. 이후 2경기 연속 8실점을 허용하며 8월 16일 등록 말소되었다. 8월 31일 1군에 복귀하여 2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달성했지만 모두 패전 투수가 되었고, 9월 14일 라쿠텐전 선발 등판 시 왼쪽 옆구리 통증이 재발하여 1이닝 만에 강판,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일본 복귀 첫해 성적은 12경기 선발 등판에 2승 7패, 평균자책점 4.65에 그쳤다. 10월 30일에는 오릭스 이적 전부터 이물감을 느꼈던 왼쪽 팔꿈치 유리 연골 및 골극 제거 수술을 받았다.
2013년에는 수술 후 재활 중에도 허리에 이상을 느껴 복귀가 5월 말로 늦어졌지만, 이후 8월 초까지 9경기 선발 등판에서 3승 3패, 평균자책점 2.59를 기록했다. 8월에 2군으로 내려간 이후에는 팀 사정상 1군 복귀 없이 시즌을 마감했다.
2014년에는 오픈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개막 로테이션에 진입했다. 그러나 3월 29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양다이강에게 선두 타자 홈런을 허용하는 등 초반부터 난조를 보이며 개인 최단 기록인 ⅔이닝 만에 강판되었다. 이후 이례적으로 3일 휴식 후 4월 3일 라쿠텐전에 선발 등판하여 5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교류전을 계기로 선발 투수진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5월에 등록 말소되었고, 신인 도메이 다이키와 같은 좌완 선발 마쓰바 다카히로가 로테이션에 정착하면서 이후 1군 등판은 없었다.
2015년에는 1군 공식 경기 등판 기회가 없었고, 웨스턴 리그 (2군) 공식 경기에서도 0승 4패, 평균자책점 14.40으로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시즌 중인 6월경부터 식단 관리를 시작하여 두 달 만에 약 12 kg을 감량하는 노력을 했으나, 10월 2일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4. Independent League and Post-Playing Career (2016-present)
오릭스 퇴단 후에도 이가와 게이는 현역 선수 생활 지속을 모색했다. 그는 2015년 12개 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가장 좋은 상태"라며 계속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2016년 2월부터 한신 시절 트레이닝 코치였던 쓰즈키 도시유키의 권유로 독립 리그인 BASEBALL FIRST LEAGUE (현 간사이 독립 리그) 소속의 효고 블루 썬더스 훈련에 참가했다. 이가와는 9월에 자신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블루 썬더스 경기에서 등판할 기회를 얻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공식적인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그 해에는 실전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6년 12월 15일부로 효고 블루 썬더스와 정식 선수 계약을 체결했다. 등번호는 계속해서 29번을 사용했다. 당시 계약은 오픈전이나 연습 경기만 출전할 수 있는 연습생 계약이었으며, 몸 상태가 준비되면 리그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본 계약으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1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1년 내내 훈련해왔고, 야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NPB 복귀 등 앞날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다. 우선 효고의 선수로서 한 시즌을 제대로 던질 수 있도록 몸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7년 3월 31일, 이가와는 효고 블루 썬더스와 지배하 선수 계약을 맺었다. 4월 2일 리그 개막전에서는 구원 투수로 2년 만에 공식 경기에 등판했으며, 4월 20일 선발 등판 경기에서는 6이닝 무실점 호투로 BFL 첫 승을 기록했다. 한편 6월에는 "어떻게든 한 단계 더 수준을 높여 내 공을 던지고 기분 좋게 끝내고 싶다. 1년 동안 제대로 던져 납득할 만한 형태가 되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며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BFL 공식 경기에서 11승 0패, 평균자책점 1.09, 94탈삼진을 기록하며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하는 압도적인 성적을 남겼다. 10월 5일에는 효고 소속으로 한신 2군과의 연습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3이닝 1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경기 후 그는 "할 만큼 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끝난 후 생각해보겠다"며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11월 27일, 11월 30일부로 계약이 만료되어 효고 블루 썬더스를 퇴단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때 그는 "이대로 은퇴할 생각은 없으며, 현역은 계속할 생각으로 잠시 휴식기에 들어가겠다"고 언급하며, 계속해서 효고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유지할 의향을 내비쳤다.
2018년 7월, 후지 TV의 한 방송에서는 이가와의 연 수입이 0 JPY이며, 현역 복귀를 위해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바라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현재 상태를 "휴식"이라고 표현하며 효고 선수들과의 훈련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효고를 퇴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독립 리그는 젊은 선수들의 자리"라는 생각을 밝혔다. 11월 4일에는 효고 OB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3이닝 동안 6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나, 경기 후 "현역을 계속하기는 어렵겠다"고 언급했다.
2019년 7월 29일 도쿄 돔에서 열린 프로 야구 OB들의 친선 경기인 '산토리 드림 매치 2019'에 '드림 히어로즈' 소속으로 참가하여 선발 투수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경기 후 그는 블로그에 "앞으로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훈련에 매진하며 언제든 던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언젠가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으며 복귀를 위한 훈련을 계속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2020년 6월 6일 TBS TV 프로그램 '불꽃의 체육회TV'에 '마스크드 투수'로 출연하여 티몬디의 다카기시 히로유키, 골든봄버의 다루빗슈 겐지, 산다이메 J SOUL BROTHERS from EXILE TRIBE의 ELLY, 배우 오카다 겐시 등을 상대로 모두를 잡아냈다. 그는 이 방송 출연을 위해 구단이었던 간사이 독립 리그 효고에서 4일간 훈련을 하기도 했다. 8월 9일에는 효고와 그 해 막 창설된 홋카이도 베이스볼 리그의 비바이 블랙 다이아몬즈 간의 교류전(비공식 경기)에 효고 OB 자격으로 1경기 한정으로 복귀 등판하여 1이닝 33구 동안 4탈삼진(낫아웃 포함) 무실점을 기록했다.
2021년부터 마이니치 방송 및 GAORA (Tigers-ai 제작)의 야구 해설자로 취임했으며, 2023년부터는 데일리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3. Playing Style and Characteristics

이가와 게이는 오버핸드 투구폼에서 나오는 직구를 주 무기로 삼았으며, 최고 구속은 151 km/h를 기록했다. 메이저 리그 1년차에는 평균 구속이 144 km/h, 일본 복귀 첫해에는 137 km/h로 떨어졌다. 그의 또 다른 주 무기는 직구와 같은 회전으로 싱커처럼 휘어져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였다. 뉴욕 양키스 이적 후에는 커트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도 구사하게 되었다.
신인 시절 제구력이 좋지 않자,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그에게 "다트의 과녁에 맞추는 이미지로 던져라"는 조언을 했고, 이가와는 실제로 다트 보드를 구매하여 훈련했다. 한신에 동기 입단하여 그의 공을 받아온 포수 나카타니 히토시에 따르면, 입단 초기 이가와의 공은 특별히 좋지 않았으나 2001년경부터 공의 회전과 위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나카타니는 이가와가 이때 체인지업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그의 강력한 하체 덕분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구위 자체는 메이저 리그에서도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에는 마리아노 리베라에 이어 팀 내에서 두 번째로 낮은 .196의 하드 히트율 (타자가 공의 중심을 맞히는 비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스크랜턴 시절 팀 동료들은 이가와에 대해 "메이저 리그에서 던져야 할 투수"라거나 "위에서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언급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프랭크 토마스는 "볼넷이 많은 문제보다는 코스가 너무 달콤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고, 조 토리 감독 또한 "공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제구력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메이저 리그 승격을 가로막은 주요 원인으로는 목표한 스폿에 공을 던지는 커맨드 능력 부족과 일본 시절부터 높았던 피홈런율이 꼽혔다. 사노 시게노리는 이가와가 메이저 리그에서 어려움을 겪은 원인으로 체인지업의 제구력을 꼽았다. 이가와 본인도 "체인지업이 높게 뜨는 공은 일본 선수들이 실수하는 경우가 많지만, 메이저 리그 선수들은 높은 확률로 때려낸다"고 회고했다. 양키스 입단 당시 빌리 에플러 당시 GM 보좌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적이 성사되었으나, 첫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불펜 투구를 할 때 불펜 포수는 "메이저 리그 수준이 아니다. 제구는 최악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가와는 독특한 팔로스루로도 유명했는데, 투구 후 왼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투구 팔을 높은 위치로 되돌리는 동작을 취했다. 그가 변화구보다는 직구에서 이 동작을 더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타자들이 공의 구종을 미리 알아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한 이가와는 주간 경기에 약한 면모를 보였으며, 일본에서의 주간 경기 성적은 4승 5패, 평균자책점 7.09였다. 그는 주간 경기 등판 시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야간 경기와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즌 오프에는 자율 훈련의 일환으로 이바라키현 내의 오리엔티어링 대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4. Personal Life and Interests
이가와 게이는 2007년 2월 자신의 일본 블로그를 통해 결혼 사실을 발표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매년 몇 달간 뉴욕을 방문하여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젊은 시절 그는 한 달에 1.00 만 JPY를 쓰면 "이번 달은 너무 많이 썼다"고 말할 정도로 검소했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의 취미는 비디오 게임으로, 2012년에는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WORLD CLUB Champion Football'의 제16회 JAPAN WINNER'S CHAMPIONSHIP에서 간토 지역 대회를 통과하여 전국 대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한신 시절 선수 기숙사에 거주할 당시에는 야구 외 시간에는 거의 게임에 몰두했으며, 한 달 지출이 게임 공략집 490 JPY뿐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가와는 장기를 좋아하기도 했는데, 한신 시절에는 구장 라커룸에서 선수나 스태프들과 장기를 두곤 했다. 2004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날에도 경기 전에 구보타 도모유키와 장기에 너무 몰두하여 불펜 투구 연습에 늦었고,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판하여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2007년 1월에는 일본쇼기연맹으로부터 '장기 친선 대사'로 위촉되었으며, 장기 보급을 위해 초단 면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축구를 매우 좋아하지만, 중학교에 축구부가 없어 야구부에 가입하게 되었다. 원래는 고향인 이바라키현 인근을 연고로 하는 가시마 앤틀러스의 팬이었으나, 한신 타이거스 입단 후에는 감바 오사카의 팬이 되었다. 이가와는 야구에서 좌투좌타지만, 펜은 오른손으로 잡고 젓가락은 왼손으로 잡는 양손잡이이다. 또한 그의 고향인 오아라이정은 오쿠보 히로모토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연이 있다.
5. Awards and Records
이가와 게이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다수의 개인 타이틀과 상을 획득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2003년 시즌은 그의 경력 중 가장 빛나는 해로 평가받는다.
5.1. 타이틀
; NPB
- 최다승: 1회 (2003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2003년)
- 최다 탈삼진: 3회 (2002년, 2004년, 2006년)
- 최고 승률: 1회 (2003년)
; BFL (독립 리그)
- 최다승: 1회 (2017년)
- 평균자책점 1위: 1회 (2017년)
- 최다 탈삼진: 1회 (2017년)
5.2. 표창
; NPB
-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 (2003년)
- MVP: 1회 (2003년)
- 베스트 나인: 1회 (투수 부문: 2003년)
- 최우수 투수: 1회 (2003년)
- 월간 MVP: 3회 (투수 부문: 2002년 4월, 2003년 6월, 2003년 7월)
- 최우수 배터리상: 1회 (2003년, 포수: 야노 아키히로)
- 우수 JCB·MEP상: 1회 (2001년)
- 산케이 스포츠 MVP 특별상: 1회 (2002년)
5.3. 기록
; NPB 투수 기록
- 첫 등판: 1999년 5월 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5회초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안타 2볼넷 1사구 3실점
- 첫 탈삼진: 1999년 5월 7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6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회말 하루 도시오를 상대로
- 첫 완투승: 2001년 4월 24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이닝 1실점
- 첫 완봉승: 2001년 8월 17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 첫 세이브: 2002년 10월 1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이닝 무실점
- 1000 투구회: 2005년 8월 2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 3아웃째 마에다 도모노리를 삼진으로 달성 ※역대 304번째
- 1000 탈삼진: 2006년 4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초 소 히신을 상대로 ※역대 119번째
; NPB 타격 기록
- 첫 안타: 1999년 6월 1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9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3회말 후쿠모리 가즈오를 상대로 좌익수 방면 2루타
- 첫 타점: 2001년 5월 10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7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초 요네 마사히데를 상대로 투수 앞 스퀴즈
; 기타 NPB 기록
- 노히트 노런: 1회 (2004년 10월 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역대 71번째
- 올스타전 출장: 3회 (2001년 ~ 2003년)
5.3.1. 상세 통계
연도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99 | 한신 | 7 | 3 | 0 | 0 | 0 | 1 | 1 | 0 | -- | .500 | 80 | 15.1 | 23 | 1 | 13 | 0 | 1 | 14 | 0 | 0 | 11 | 11 | 6.46 | 2.35 |
2000 | 9 | 5 | 0 | 0 | 0 | 1 | 3 | 0 | -- | .250 | 172 | 39.1 | 36 | 5 | 19 | 1 | 0 | 37 | 7 | 0 | 19 | 19 | 4.35 | 1.40 | |
2001 | 29 | 28 | 3 | 2 | 0 | 9 | 13 | 0 | -- | .409 | 829 | 192.0 | 174 | 11 | 89 | 6 | 3 | 171 | 6 | 0 | 76 | 57 | 2.67 | 1.37 | |
2002 | 31 | 29 | 8 | 4 | 2 | 14 | 9 | 1 | -- | .609 | 830 | 209.2 | 163 | 15 | 53 | 1 | 7 | 206 | 8 | 0 | 63 | 58 | 2.49 | 1.03 | |
2003 | 29 | 29 | 8 | 2 | 3 | 20 | 5 | 0 | -- | .800 | 839 | 206.0 | 184 | 15 | 58 | 3 | 3 | 179 | 5 | 0 | 72 | 64 | 2.80 | 1.17 | |
2004 | 29 | 29 | 6 | 3 | 1 | 14 | 11 | 0 | -- | .560 | 840 | 200.1 | 190 | 29 | 54 | 0 | 6 | 228 | 5 | 0 | 95 | 83 | 3.73 | 1.22 | |
2005 | 27 | 27 | 2 | 1 | 1 | 13 | 9 | 0 | 0 | .591 | 749 | 172.1 | 199 | 23 | 60 | 0 | 1 | 145 | 4 | 0 | 91 | 74 | 3.86 | 1.50 | |
2006 | 29 | 29 | 8 | 3 | 2 | 14 | 9 | 0 | 0 | .609 | 844 | 209.0 | 180 | 17 | 49 | 3 | 6 | 194 | 4 | 0 | 77 | 69 | 2.97 | 1.10 | |
2007 | NYY | 14 | 12 | 0 | 0 | 0 | 2 | 3 | 0 | 0 | .400 | 313 | 67.2 | 76 | 15 | 37 | 1 | 4 | 53 | 5 | 1 | 48 | 47 | 6.25 | 1.67 |
2008 | 2 | 1 | 0 | 0 | 0 | 0 | 1 | 0 | 0 | .000 | 24 | 4.0 | 13 | 0 | 0 | 0 | 0 | 0 | 0 | 0 | 6 | 6 | 13.50 | 3.25 | |
2012 | 오릭스 | 12 | 12 | 0 | 0 | 0 | 2 | 7 | 0 | 0 | .222 | 278 | 62.0 | 64 | 5 | 31 | 0 | 2 | 36 | 3 | 1 | 35 | 32 | 4.65 | 1.53 |
2013 | 9 | 9 | 0 | 0 | 0 | 3 | 3 | 0 | 0 | .500 | 205 | 48.2 | 48 | 2 | 15 | 0 | 2 | 41 | 2 | 0 | 15 | 14 | 2.59 | 1.34 | |
2014 | 8 | 8 | 0 | 0 | 0 | 2 | 2 | 0 | 0 | .500 | 149 | 33.0 | 37 | 4 | 12 | 0 | 0 | 28 | 0 | 0 | 17 | 14 | 3.82 | 1.48 | |
NPB 통산 (11년) | 219 | 208 | 35 | 15 | 9 | 93 | 72 | 1 | 0 | .564 | 5815 | 1387.2 | 1298 | 127 | 453 | 14 | 31 | 1279 | 44 | 1 | 571 | 495 | 3.21 | 1.26 | |
MLB 통산 (2년) | 16 | 13 | 0 | 0 | 0 | 2 | 4 | 0 | 0 | .333 | 337 | 71.2 | 89 | 15 | 37 | 1 | 4 | 53 | 5 | 1 | 54 | 53 | 6.66 | 1.76 |
- 각 연도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연도 | 구단 | 투수 (P) | |||||
---|---|---|---|---|---|---|---|
경기 | 자살 | 어시스트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99 | 한신 | 7 | 0 | 3 | 0 | 0 | 1.000 |
2000 | 9 | 0 | 6 | 0 | 2 | 1.000 | |
2001 | 29 | 9 | 29 | 7 | 1 | .844 | |
2002 | 31 | 8 | 42 | 0 | 3 | 1.000 | |
2003 | 29 | 8 | 28 | 1 | 1 | .973 | |
2004 | 29 | 3 | 26 | 3 | 1 | .906 | |
2005 | 27 | 3 | 29 | 1 | 3 | .970 | |
2006 | 29 | 2 | 26 | 1 | 0 | .966 | |
2007 | NYY | 14 | 1 | 3 | 1 | 1 | .800 |
2008 | 2 | 0 | 1 | 0 | 0 | 1.000 | |
2012 | 오릭스 | 12 | 3 | 15 | 1 | 0 | .947 |
2013 | 9 | 2 | 7 | 0 | 1 | 1.000 | |
2014 | 8 | 0 | 3 | 1 | 0 | .750 | |
NPB 통산 | 219 | 38 | 214 | 15 | 12 | .944 | |
MLB 통산 | 16 | 1 | 4 | 1 | 1 | .833 |
- 각 연도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연도 | 구단 | 등판 | 완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2017 | 효고 | 14 | 1 | 11 | 0 | 0 | 1.00 | 300 | 82.0 | 43 | 1 | 18 | 0 | 94 | 2 | 0 | 11 | 10 | 1.10 | 0.74 |
독립 리그 통산 (1년) | 14 | 1 | 11 | 0 | 0 | 1.00 | 300 | 82.0 | 43 | 1 | 18 | 0 | 94 | 2 | 0 | 11 | 10 | 1.10 | 0.74 |
- 각 연도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5.4. 등번호
- 29 (1998년 ~ 2008년, 2012년 ~ 2015년, 2017년)
6. Reception and Legacy

이가와 게이의 선수 경력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압도적인 성공과 메이저 리그에서의 기대 이하의 부진으로 극명하게 나뉘며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그는 한신 타이거스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에이스 투수로 기억된다. 특히 2003년에는 MVP, 사와무라 에이지상, 베스트 나인을 동시에 석권하고 20승을 달성하며 팀의 1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2024년 시즌 종료 시점까지도 센트럴 리그의 마지막 20승 투수로 남아 있으며,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9연승을 기록하는 등 상징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가 기록한 세 차례의 최다 탈삼진 타이틀과 노히트 노런은 그의 압도적인 구위와 잠재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후의 경력은 일본에서의 명성과는 대조적이었다. 양키스가 그의 영입을 위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2600.02 만 USD라는 거액을 투자하고, 5년 연봉 2000.00 만 USD의 계약을 안겨주면서 그에게 걸린 기대는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통산 2승 4패, 평균자책점 6.66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고, 주로 마이너 리그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양키스의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공개적으로 이가와의 영입을 "실패"라고 평가했으며, 뉴욕 포스트는 그를 "지난 10년간 뉴욕 프로 스포츠 선수 최악의 10인" 중 1위로 선정하는 등 비판을 받았다.
이가와는 메이저 리그에서의 부진에 대해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세계에 나와 능력 있는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차이를 절감했다"고 인정하며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양키스 구단이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기회를 박탈했다는 주장을 제기하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특히 2008년 트리플 A에서 최다승을 기록했음에도 메이저 리그 승격이 좌절되고, 투구폼 변경을 강요받는 등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단과의 갈등과 트레이드 거부 등은 그의 메이저 리그 경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가와 게이의 커리어는 일본 야구에서 정상에 올랐던 선수가 해외 진출 후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도전 과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비록 메이저 리그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그의 업적은 여전히 높이 평가되며, 현재 해설가 및 평론가로서 야구계에 기여하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일본 야구 팬들에게 '한신의 에이스'이자 잊을 수 없는 스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