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육강(陸康, 陸康Lù Kāng중국어, 126년 ~ 19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로, 자는 계녕(季寧)이다. 양주 오군 오현(吳縣, 현재 장쑤성 쑤저우시 우중구) 출신이다. 그는 효심과 우애가 돈독하고 품행이 바르며 근면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사랑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하여 뛰어난 치적을 남긴 후한의 충신이었다.
육강은 영제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동상 주조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애민 정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여강군 태수 재임 중에는 황양(黃穰황양중국어)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여 지역의 안정을 되찾았다. 헌제 즉위 후 천하가 혼란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조정에 공물을 바치는 등 한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을 지켰다. 말년에는 원술의 보급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손책이 이끄는 군대에 맞서 2년간 여강군을 굳건히 지켜내며 충의를 다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된 지 한 달여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가문은 손권 휘하에서 크게 번성했으며, 특히 그의 종손인 육손은 동오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출생 및 가족
육강은 126년 한 순제 재위기에 양주 오군 오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육속(陸續육속중국어)은 후한 초기에 군의 하급 관리를 지냈으나, 한 명제를 전복하려던 유영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다. 비록 한 명제가 결국 육속을 사면했으나, 그는 평생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으며, 이후 노환으로 사망했다. 육강의 부친인 육포(陸襃육포중국어)는 도덕적으로 올곧은 인물로 명성이 높았으며, 후한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육강은 어린 시절부터 덕행과 근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으며, 자신의 품행을 부지런히 닦았다. 오군 태수 이숙(李肅이숙중국어)은 그의 이러한 인품을 높이 사 그를 효렴으로 천거했고, 육강은 오군에서 하급 관리로 임명되었다. 162년 11월, 이숙이 전투 패배로 인해 처형당하자, 육강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숙의 고향인 영천군까지 운구하여 장사 지내고 상복을 입으며 애도했다. 이러한 그의 의로운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3. 경력 및 관직 생활
3.1. 초기 경력 및 임관
이숙의 장례를 치른 후, 육강의 의로운 행동이 널리 알려지자 양주 자사 장민(臧旻장민중국어)은 그를 재능이 뛰어난 인재인 무재(茂才무재중국어)로 천거했다. 이에 육강은 발해군 고성현령(高成縣令)으로 임명되었다. 고성현은 변방에 위치하여 치안이 좋지 않았고, 예로부터 각 가구마다 활과 쇠뇌를 갖추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으며, 외부와의 왕래도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새로 부임하는 지방관들은 늘 백성들을 징발하여 성곽을 보수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육강은 고성현에 부임하자마자 이러한 관습을 모두 철폐하고 백성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는 은혜와 신의로써 현을 다스렸고, 그 결과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도적의 활동마저 잠잠해졌다. 그의 이러한 치적은 군청을 통해 후한 조정에 보고되었다.
3.2. 지방관으로서의 활동
육강의 뛰어난 행정 능력과 치적을 인정받아 178년(광화 원년) 그는 무릉태수(太守태수중국어)로 승진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계양군과 낙안군(樂安郡)의 태수를 역임했으며, 가는 곳마다 칭송을 받았다. 그는 부임하는 지역마다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여, 지방관으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다.
4. 주요 활동 및 업적
4.1. 영제에게 올린 상소
185년(중평 2년), 한 영제는 거대한 동상을 주조하려 했으나, 국고가 부족하자 농토 1무(畝)당 10전(錢)의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당시 백성들은 이미 수해와 한해(旱害)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육강은 이러한 상황을 깊이 우려하며 영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듣건대 선왕들은 애민을 귀히 여겼다 합니다. 부역과 부세를 줄이고 번잡한 규율을 간소화해 만민이 따르고 신령도 덕(德)으로 응했습니다. 말세를 부르는 쇠주(衰主)는 사치가 극에 달하고[궁사극치, 窮奢極侈],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며, 탐욕을 부려 아랫사람을 핍박합니다. 폐하의 성덕은 하늘을 이어 융성해야 하거늘 이번에 무(畝)마다 돈을 걷어 동상을 주조한다는 조서를 엎드려 읽으니 비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세금은 10분의 1이었고 주나라에선 철법(徹法)이라 하였습니다. 철(徹)은 '통한다[通]'는 뜻으로 가히 만세토록 행할 정도란 말입니다. 노 선공은 공전(公田) 이외의 농지까지 조세를 부과하는 세무(稅畝, 세묘)를 실시해 메뚜기 유충 떼를 당했고 노 애공 때의 증세는 공자에게 지탄받았습니다. 어떻게 백성의 재물을 수탈해 쓸모없는 동상을 제작하겠으며, 거룩한 계율을 저버리고 망한 왕의 방식을 좇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좌씨전》(좌전)에도 '군주의 거동은 반드시 기록하는데 그 기록이 법도에 맞지 않으면 후세가 어찌 본받겠습니까'란 구절이 있습니다. 폐하께선 이를 주의 깊게 성찰해 폐단은 고치고 선은 추구함으로써 만백성의 원망을 막으셔야 합니다."
상소문이 제출되자, 영제의 측근인 환관들은 육강이 황제의 총명을 망국의 군주에 비유하여 불경을 저질렀다고 모함했다. 이로 인해 육강은 함거(檻車)에 실려 체포되어 정위(廷尉정위중국어)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어사(侍御史시어사중국어) 유대가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고 육강의 입장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조정에 올려 그의 억울함을 밝혀주었다. 덕분에 육강은 면직되는 것으로 그쳤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정에 소환되어 의랑(議郞)으로 복귀하였다. 이 사건은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황제에게 직언을 올린 육강의 강직함과 애민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4.2. 황양의 난 진압
180년경, 여강군에서는 황양(黃穰황양중국어)을 비롯한 도적 무리가 강하군 일대의 만인(蠻人)들과 연합하여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조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네 개 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수년간 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조정은 육강을 여강군 태수로 임명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육강은 부임 후 상벌을 명확히 하고 군사 작전을 펼쳐 황양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남은 잔당들까지 모두 항복시켰다. 그의 이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 조정은 육강의 손자 육상(陸尙육상중국어)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육강은 혼란에 빠진 여강군의 안정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했다.
4.3. 원술 및 손책과의 대립
한 헌제가 즉위한 190년대에 이르러 후한 제국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의 군벌들이 할거하며 천하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육강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효렴과 계리(計吏)를 수도로 보내고 공물을 바치는 등 후한 조정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에 헌제는 조서를 내려 육강을 칭찬하고, 그에게 충의장군(忠義將軍충의장군중국어)의 관직을 더하며 그의 수입을 2000 dan으로 늘려주었다.
q=안후이성 루안시|position=right
이 무렵, 군벌 원술은 구강군 수춘(壽春, 현재 안후이성 서우현)에 주둔하며 서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보급품이 부족하자 그는 여강군 태수 육강에게 3만 곡(斛곡중국어)의 곡식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육강은 원술을 반역자로 여겨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여강군의 방어를 강화하며 전쟁에 대비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원술은 그의 부하 손책을 보내 여강군을 공격하게 했다. 손책은 과거 육강을 방문했을 때 육강이 직접 만나주지 않고 주부(主簿)를 보내 접대했던 일로 인해 육강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
손책이 이끄는 군대는 여강군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육강의 군대는 굳건히 방어했으며, 심지어 휴가를 나갔던 일부 부하들과 병사들까지 밤을 틈타 성으로 돌아와 육강의 방어를 도왔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 끝에 결국 여강군은 손책의 군대에 함락되었다. 육강은 성이 함락된 지 한 달여 만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이 과정에서 육강의 가문 100여 명 중 절반 가까이가 기아나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5. 개인적인 삶과 가족
육강의 가문은 약 100여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한 말기의 혼란기 동안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기아나 전쟁으로 인해 사망하는 고통을 겪었다.
5.1. 자녀와 후손
육강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육준(陸儁육준중국어)은 육강이 여강군을 지키다 사망한 후, 그의 충절을 기린 조정에 의해 낭중(郎중)으로 임명되었다. 차남인 육적은 박학다식하고 정치에 능하여 당시 명성이 높았으며, 훗날 손권 휘하에서 울림군(鬱林郡울림군중국어) 태수를 지냈다. 그는 또한 이십사효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어린 시절 원술을 만났을 때 품속에 귤을 숨겼다가 떨어뜨린 일화로 유명하다. 육강에게는 고옹에게 시집간 딸도 있었다. 고옹의 장남인 고소(顧邵)는 젊은 시절 외숙부인 육적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강의 손자 중 한 명인 육상(陸尙육상중국어)은 육강이 황양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한 조정으로부터 낭중으로 임명되었다.
육강은 육손의 종조부(從祖父)였다. 육손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육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원술의 군대(손책 지휘)가 여강군을 공격하려 할 때, 육강은 육손과 그의 가족들을 안전을 위해 고향인 오군으로 돌려보냈다. 육강이 사망한 후, 육손은 육강의 아들 육적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육씨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되었다.
5.2. 가계 및 혈연 관계
육강의 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조부**: 육속(陸續)
- 부친**: 육포(陸襃)
- 형제**: 육우(陸紆) - 자는 숙반(叔盤). 성문교위(城門校위)를 지냈으며, 육손의 할아버지이다.
- 본인**: 육강
- 아들**: 육준(陸儁)
- 아들**: 육적
- 손자**: 육굉(陸宏)
- 손자**: 육예(陸叡)
- 손녀**: 육울생(陸鬱生)
- 딸**: 고옹의 아내
- 손자 (육준 또는 육적의 아들)**: 육상(陸尙)
- 종손**: 육손 (육강의 형 육우의 손자)
6. 죽음
육강은 195년, 손책이 이끄는 원술의 군대에 의해 여강군이 함락된 지 약 한 달여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의 죽음은 2년간의 치열한 항전 끝에 성이 함락되는 비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일본어 소스에 따르면 육강의 사망지는 양주 여강군 서현으로 추정된다.
7. 평가 및 영향
7.1. 충절과 애민 정신
육강은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변함없는 충절과 깊은 애민 정신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영제의 무리한 동상 주조 계획에 대해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투옥되는 위험까지 감수했다. 이는 그가 백성의 삶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무릉군, 계양군, 낙안군 등 여러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에게 은혜와 신의로써 다스려 가는 곳마다 칭송을 받았다.
특히 원술이 반역의 기미를 보이자 그의 보급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손책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2년간 여강군을 굳건히 지켜낸 것은 한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강직한 원칙을 명확히 드러낸다. 비록 결국 성이 함락되고 자신도 사망했지만, 그의 이러한 저항은 당시 혼란스러운 시기에 관리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조정에서도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7.2. 후대에 미친 영향
육강의 삶과 행보는 후대 인물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특히 그의 가문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크게 번성하여 동오의 주요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종손인 육손은 육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고, 훗날 손권 휘하에서 대도독(大都督)에 올라 이릉 대전에서 유비의 대군을 격파하는 등 동오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육강의 아들 육적 또한 학문과 정치적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육강은 개인의 충절과 애민 정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을 통해 후대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8.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사(正史)와는 달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육강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간략하다. 《삼국지연의》 제15회에서 손책이 여강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육강이 패배했다는 사실만 짧게 언급될 뿐, 그의 생애나 주요 업적, 애민 정신 등은 상세히 다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