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위베르 드 지방시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패션에 대한 깊은 관심을 키웠다.
1.1. 어린 시절과 가문 배경
위베르 제임스 마르셀 타팽 드 지방시는 1927년 2월 20일 프랑스 우아즈주 보베에서 개신교 귀족 가문인 타팽 드 지방시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시앙 타팽 드 지방시(1888년~1930년)는 지방시 후작이었고, 어머니는 베아트리스 "시시" 바댕(1888년~1976년)이었다. 타팽 가문은 1713년에 귀족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가문의 수장이 지방시 후작이 되었다. 그의 형인 장클로드 드 지방시(1925년~2009년)는 가문의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훗날 지방시 향수의 사장이 되었다. 1928년에는 베아트리스라는 여동생이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1930년 아버지가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후, 그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마르그리트 디테를 바댕(1853년~1940년)의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역사적인 고블랭 태피스트리와 보베 태피스트리 공장의 소유주이자 이사였던 예술가 쥘 바댕(1843년~1919년)의 미망인이었다. 바댕 가문은 대대로 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방시의 외증조부인 쥘 디테를은 무대 디자이너였는데, 보베 공장을 위한 디자인도 만들었으며, 여기에는 엘리제궁을 위한 13가지 디자인 세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고조부 중 한 명은 파리 오페라를 위한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타팽 가문은 원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뿌리를 둔 타피니(Taffini) 가문에서 유래했다.
1.2. 교육
지방시는 17세가 되던 해 파리로 이주하여 에콜 데 보자르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그의 예술적 감각과 디자인 철학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 경력
위베르 드 지방시는 초기 견습 기간을 거쳐 자신만의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며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특히 오드리 헵번과의 협업을 통해 패션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업 확장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2.1. 초기 경력 및 영향
지방시의 첫 디자인 작업은 1945년 자크 파트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1946년에는 로베르 피게와 뤼시앵 를롱을 위해 디자인했으며, 당시에는 아직 무명이었던 피에르 발맹과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는 아방가르드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 밑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2.2. 지방시 하우스 설립 및 초기 컬렉션
1952년, 지방시는 파리의 플렌 몽소(Plaine Monceau)에 자신의 디자인 하우스를 열었다. 그의 첫 컬렉션은 당시 파리 최고의 모델이었던 베티나 그라치아니의 이름을 따 "베티나 그라치아니"로 명명되었다. 이 컬렉션은 셔츠용 면 소재를 사용하여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분리형 의상에 집중한 것이 특징이었다. 당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보수적인 디자인과는 대조적으로, 지방시의 스타일은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보였다. 25세의 나이로 그는 당시 진보적인 파리 패션계에서 가장 젊은 디자이너였다. 초기 컬렉션은 재정적인 이유로 비교적 저렴한 원단을 사용했지만, 독특한 디자인으로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2.3. 오드리 헵번과의 협업

지방시의 패션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 된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는 1953년 영화 사브리나 촬영 중에 처음 만났다. 이후 지방시는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상징적인 검은색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그는 또한 헵번을 위한 첫 향수 컬렉션인 '랑테르디'와 '르 드 지방시'를 개발했다. 헵번은 이 향수의 얼굴이 되었는데, 이는 스타가 향수 광고 캠페인의 얼굴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지방시와 헵번은 단순한 디자이너와 고객 관계를 넘어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헵번은 지방시의 영원한 뮤즈로 불렸다.
2.4. 주요 디자인과 혁신
이 시기에 지방시는 그의 우상이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를 만났다. 지방시는 오트 쿠튀르의 고상한 환경뿐만 아니라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림보와 같은 아방가르드한 환경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1954년, 그는 기성복 컬렉션을 처음 선보였는데, 그의 디자인은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으면서도 "옷걸이 매력(hanger appeal)"이 있을 만큼 형태가 잘 잡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5년에는 편안한 스웨터 스타일, 날렵하고 옆이 트인 펌프스, 그리고 작고 섬세한 모자 디자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1955년 그의 가장 예언적인 기여는 시프트 드레스였다. 그는 1957년에 이를 변형하여 더 풍성하지만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색 드레스(sack dress)" 또는 "슈미즈 드레스(chemise dress)"를 만들었는데, 이는 곧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1957년 퓨조/스핀들(Fuseau/Spindle) 라인에서 모방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위상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른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컬렉션을 선보인 지 몇 주 후에 자신의 컬렉션을 발표하여 언론이 파리를 다시 방문하도록 만들었다.
1958년에는 상징적인 '벌룬 코트(balloon coat)'와 '베이비돌 드레스(baby doll dress)'를 선보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기하학적인 재단과 실험적인 구조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 1959년 그의 프린세스 라인(princess line) 또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졌다. 1969년에는 남성복 라인이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2.5. 주요 고객
지방시의 의상을 입었던 주요 고객으로는 다음과 같은 유명 인사들이 있다.
- 마렐라 아녤리
- 로런 바콜
- 잉그리드 버그만
- 모나 폰 비스마르크 백작부인
- 크리스티아나 브란돌리니 다다 백작부인
- 서니 폰 뷜로
- 레나타 테발디
- 마리아 칼라스
- 카푸신
- 마를레네 디트리히
- 데이지 펠로우즈
- 그레타 가르보
- 글로리아 기네스
- 돌로레스 기네스
- 에이미 드 헤렌
- 제인 홀저
- 그레이스 켈리
- 살리마 아가 칸 공주
- 레이첼 램버트 멜론
- 소피아 로렌
- 잔느 모로
-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파라 팔라비 황후
- 베이브 페일리
- 리 라지윌
- 호프 포르토카레로
- 자클린 드 리브 백작부인
- 노나 헨드릭스
- 폴린 드 로스차일드 남작부인
-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 가비 반 주일렌 반 니예벨트 남작부인
- 다이애나 브릴랜드
- 벳시 휘트니
- 실비아 드 발드너 남작부인
- 윈저 공작부인
- 미셸 뒤발리에 (아이티 영부인)
- 제인 라이츠먼
2.6. 패션 트렌드와 변화하는 위상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지방시는 최고의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미니스커트와 청바지 같은 캐주얼 스타일의 부상, 물질주의에 대한 사회적 거부, 그리고 오트 쿠튀르의 중요성 감소와 함께 지방시의 디자인은 여전히 격식 있고 화려한 스타일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일부에서는 부유한 "특정 연령대" 여성들을 위한 구시대적인 디자이너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1963년부터 나타났다. 그는 패션계에서 다양한 높이의 여성용 부츠를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단조로운 펌프스를 고수했다. 또한 허리선이 없는 시프트와 트라페즈(trapeze) 형태가 강력한 트렌드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꼭 맞는 프린세스 실루엣을 다시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미니스커트 시대에도 그의 옷 길이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보다 길었으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마이크로 미니 길이로 짧아졌는데, 이때는 이미 짧은 길이가 보수적인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1971년의 짧은 핫팬츠 유행에 동참했으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원단을 선보이기도 했다.
1974년 '빅 룩(Big Look)' 트렌드와 함께 드레스가 다시 유행하면서, 지방시는 다시금 진지하게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격식과 과시적 소비가 다시 유행하고, 1978년 가을부터 모자, 장갑, 정장, 어깨 패드를 강조한 화려함이 재도입되면서, 지방시는 발렌티노, 이브 생 로랑, 오스카 드 라 렌타와 같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다시 패션계의 상위 계층에 진입했다. 그는 어깨 패드가 들어간 슈미즈 드레스, 날카롭게 재단된 정장, 웅장한 무도회용 가운, 1940년대와 1950년대에서 부활한 칵테일 드레스 등을 선보였다. 1950년대의 혁신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작업은 매우 인기가 많았고 당시 부유층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는 심지어 1960년대의 캐주얼한 스타일이 아닌, 드레시한 느낌의 무릎 위 스커트도 가끔 선보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내내 증가했다.
2.7. 사업 확장 및 브랜드 관리
1976년부터 1987년까지 포드 모터 컴퍼니의 링컨 부문은 컨티넨탈 마크 시리즈(1976년~1982년)와 링컨 컨티넨탈(1982년~1987년) 자동차의 지방시 에디션을 제공했다. 이는 1976년 링컨 컨티넨탈 마크 IV 쿠페에서 시작하여 1977년~1979년 링컨 컨티넨탈 마크 V 쿠페, 그리고 1982년 링컨 컨티넨탈 마크 VI와 1987년 링컨 컨티넨탈 세단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닛산과 협력하여 닛산 로렐 (4세대 C31형)의 내외장을 지방시 버전으로 세 차례 출시하기도 했다.
지방시 하우스는 1981년에 분할되어 향수 라인은 뵈브 클리코에, 패션 부문은 1989년 LVMH에 인수되었다. 현재 LVMH는 지방시 향수도 소유하고 있다. 1988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에 위치한 비벌리 윌셔 호텔에서 자신의 작품을 회고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3. 후기 활동 및 은퇴
위베르 드 지방시는 1995년 패션 디자인계에서 은퇴한 후에도 예술품 수집과 다양한 공적인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활발한 삶을 이어갔다.
3.1. 은퇴와 예술 활동
지방시는 1995년 패션 디자인계에서 은퇴했다. 그의 뒤를 이어 존 갈리아노가 지방시 레이블의 수장이 되었으며, 갈리아노의 짧은 재임 기간 후에는 알렉산더 맥퀸이 5년 동안, 줄리앙 맥도널드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그리고 리카르도 티시가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지방시의 여성 기성복 및 오트 쿠튀르를 이끌었다. 2018년 리조트 컬렉션부터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은퇴 후 지방시는 파리 근교 외르에루아르주 로미이쉬르에그르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성인 존셰 성에 거주했다. 그는 은퇴 생활 동안 17세기와 18세기 청동 및 대리석 조각품을 수집하는 데 전념했다.
3.2. 공적인 활동 및 행사
2010년 7월, 지방시는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강연을 했다. 2014년 9월 8일부터 14일까지 열린 비엔날레 데 상티케르(Biennale des Antiquaires) 기간 중에는 파리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장바티스트 클로드 오디오, 세브르 국립 도자기 제작소, 자크 루이 다비드,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등의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개인 판매 전시회를 주최했다. 2007년 1월, 프랑스 우체국은 지방시가 디자인한 밸런타인 데이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2014년 10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그가 디자인한 95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회고전이 열렸다.
4. 개인 생활
위베르 드 지방시는 오랜 기간 패션 디자이너 필리프 베네를 그의 인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5. 사망
위베르 드 지방시는 2018년 3월 10일 토요일, 91세의 나이로 파리 근교의 르네상스 양식 샤토(일부 자료에 따르면 뇌이쉬르센)에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파리의 파시 묘지에서 치러졌다.

6. 유산과 영향력
위베르 드 지방시는 그의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과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으로 패션계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후대 디자이너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6.1. 패션계에 미친 영향
지방시의 디자인 철학은 혁신과 우아함의 조화에 있었다. 그는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분리형 의상에 집중하며 당시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25세의 나이로 파리 패션계에서 가장 젊은 디자이너였던 그는 기하학적인 재단과 실험적인 구조에 혁신적인 기여를 하며 '시프트 드레스', '벌룬 코트', '베이비돌 드레스'와 같은 상징적인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특히 오드리 헵번을 위한 그의 디자인은 패션뿐만 아니라 셀러브리티를 활용한 광고 캠페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한 옷을 넘어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드러내면서도 편안함을 제공하는 디자인을 추구했으며, 이는 패션 산업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스타일은 "순수하고 우아하며, 과장되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6.2. 수상 및 명예
위베르 드 지방시는 패션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영예를 안았다. 1970년에는 국제 베스트 드레서 리스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