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공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은 뒤 형의 공백을 메우며 음악가로 전향하여 짧은 생애 동안 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성장과 교육, 공학자로서의 활동, 그리고 뒤늦게 시작된 음악가로서의 삶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
1.1. Early life and education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1827년 8월 20일 빈 외곽 마리아힐프의 '시민 주택 69호'에서 저명한 음악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안나 슈트레임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페피(Pep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요제프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척추에도 영향을 미쳐 육체적, 정신적 장애는 없었지만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다. 이러한 약점 때문인지, 활달하고 명랑했던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는 달리 조용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요제프와 그의 형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음표를 오선지에 쓰고 그 의미를 이해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리허설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피아노로 연탄하며 즐거워할 정도로 음악은 그들의 주요 놀이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훗날 자신과 요제프가 "진심으로 피아노를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며, "자주 함께 여러 가정에 초대되어 아버지의 곡을 암보로 연주하며 박수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요제프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들의 피아노 실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악보 출판업자 토비아스 하슬링거로부터 아들들의 피아노 재능에 대해 듣고 놀랐다. 요제프는 형과 함께 아버지 방으로 불려가 피아노를 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그곳에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보고 "이런 피아노로는 연주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아버지는 놀라 자신의 방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가져오게 했다. 이후 형의 회상에 따르면 "둘은 아버지의 스타일로 연주하거나, 여러 연주법을 선보였다"고 한다. 이들은 "너희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라는 아버지의 칭찬과 함께 고급 망토를 선물로 받았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강한 영향을 받아 음악가가 된 형과는 달리, 요제프는 음악가가 될 의지가 전혀 없었다. 명문 고등학교인 쇼텐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는 빈 종합기술전문학교(현재의 빈 공과대학교)에서 기계 공학, 제도, 수학을 공부했다. 출석률은 높지 않았지만, 최종 시험에서는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1848년 혁명이 발발하자 요제프는 혁명군 편에 서서 무기를 들고 싸웠다. 같은 해 12월 23일, 아버지는 요제프에게 군인이 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배우고 싶지 않다. 인간으로서 인류에, 시민으로서 국가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이를 거부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사망했기 때문에 요제프는 군인이 되는 것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기술자로서 순조롭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1.2. Engineering career and early compositions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로 전향하기 전까지 기술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851년에는 다뉴브강 지류의 돌 댐과 수문 건설 현장 감독을 맡았다. 1852년에는 '수학, 공학, 기하학, 물리학의 실례, 공식, 표, 테스트 모음집'이라는 수학 서적을 출판했다. 1853년에는 동료와 함께 회전식 브러시가 장착된 마차형 노면 청소차 설계 계획서를 빈 시의회에 제출했다. 이 청소차 계획은 처음에는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되었지만, 훗날 채택되어 오늘날 시스템의 전신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제설차 설계도 제출할 의사를 밝혔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기술자 외에도 예술가, 화가, 시인, 극작가, 가수, 작곡가, 발명가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도 요제프는 취미로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으며, 주로 친구들 사이에서 연주되었다. 프란츠 마일러에 따르면, 요제프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가수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종류의 작품들을 자주 작곡했다"고 한다. 오토 브루사티에 따르면, 요제프의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작곡 연대가 확인된 것은 1849년에 작곡된 '연주회 대 갤럽'이다. 또한 그는 직접 대본을 쓰고, 무대 장치를 구상하며, 등장인물과 의상, 배경 스케치까지 다양하게 그린 5막짜리 연극 '도적'도 남겼다.
1.3. Transition to music


1849년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사망하자, '요한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의 음악가는 오직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분산되어 있던 빈 전체의 음악 활동이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집중되었다. 형은 연일 밤낮으로 이어지는 연주회와 작곡 활동으로 인해 몸이 견디지 못하고, 종종 재기 불능으로 여겨질 만큼 심각한 병에 쓰러졌다.
의사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장기적인 요양을 권고했다. 이에 어머니 안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대역으로 (최소한 한동안이라도) 요제프가 슈트라우스 악단을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도 이에 동의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요제프는 자신이 형처럼 화려한 세계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슈트라우스 가문을 위해서'라고 설득하는 어머니와 형의 간곡한 부탁에 굴복했다.
1853년 7월 23일, 요제프는 요양 중인 형을 대신하여 '카페 슈페를'에서 지휘 데뷔를 가졌다. 당일 요제프는 당시 연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카롤리네 요제파 플루크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피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으로 '슈페를'에서 연주합니다. 이런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진심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요제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 활동뿐만 아니라, 형을 대신하여 새로운 왈츠를 작곡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하르날스 교회 축제에서 연주할 왈츠 작곡을 맡았지만, 이 의뢰를 방치한 채 장기 요양에 들어갔다. 그러다 8월 29일 연주 예정일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요제프가 작곡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작곡된 곡이 바로 왈츠 '처음이자 마지막'(작품번호 1)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곡명에서도 당시 요제프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곡은 "탁월하고 독창적이며, 멜로디와 리듬이 뛰어나다"고 신문에 평가받으며, 오히려 요제프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였다. 이 왈츠는 무려 6번의 앙코르 요청을 받았고, 이튿날 많은 신문은 "이것이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논평을 실었다.
1.4. Musical career and style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형의 대역으로 시작한 음악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왈츠의 슈베르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적 경향과 교향곡적 요소를 결합하여 깊이와 서정성을 더했다.
1.4.1. Development of style

1854년 9월 중순,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빈으로 돌아오면서 눈병과 두통에 시달리던 요제프는 곧바로 임시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1854년 6월 초,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떠났고, 요제프는 또다시 형을 대신하여 슈트라우스 악단의 지휘와 일부 작곡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 요제프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연인 카롤리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요제프는 본의 아니게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54년 7월 왈츠 '마지막 뒤의 처음'(작품번호 12)을 발표했다. '처음이자 마지막'과 같은 이전 작품들이 형의 대역으로 어쩔 수 없이 작곡된 것이었다면, 이 왈츠는 요제프가 음악 세계에 계속 머물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같은 해, 그는 정식으로 기술자 직을 사임했다.
음악가로 전향하기로 결심한 요제프는 음악 이론, 작곡법,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철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스승은 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악단의 수석 연주자였던 프란츠 아몬이었다. 1857년 3월 16일, 2년간의 정규 음악 교육을 마친 그는 화성학 교수 프란츠 돌레샬로부터 다음과 같은 면허를 받았다.
"오늘 진행된 통주저음과 작곡 원리에 대한 시험을 최우수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의 음악 실전에서의 최대 능력을 보증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현재도 자주 연주되는 폴카 프랑세즈 '작은 물레방아'(작품번호 57)와, 발표 후 빈의 유행가로 변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왈츠 '쾌활한 사람'(작품번호 62) 등이 있다. 한편, 1858년 6월 15일에는 왈츠 '이상'을 초연하여 신문으로부터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이 곡의 원고가 분실되어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요제프는 고전 음악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슈베르트를 비롯한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다. 1855년,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요제프는 "내 인생은 3/4박자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3/4박자'는 곧 왈츠를 의미하며, 이는 자신이 단순한 댄스 음악 작곡가로만 끝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고전 음악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요제프는 '교향곡적 왈츠'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자 했다.
1857년 6월 8일, 그는 연인 카롤리네와 결혼했다. 이때 그녀에게 헌정한 왈츠 '사랑의 진주'(작품번호 39)를 요제프는 '콘서트 왈츠'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 왈츠는 작곡가가 기대했던 만큼 평가받지 못하고, 신문으로부터 "란너의 스타일에 기울어져 있다"는 평을 받았다. 빈 시민들은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후계자로, 그리고 동생 요제프를 요제프 란너의 후계자로 여겼다. 그러나 요제프 본인은 란너의 단순한 '후계자' 이상의 평가를 얻고 싶어 했다.
바그너나 리스트를 높이 평가하지 않던 비평가들에게는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지만, 요제프는 바그너, 리스트, 슈만, 그리고 슈베르트의 작품을 자신의 연주회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바그너 작품의 빈 초연은 요제프에게 맡겨졌고, 1860년 초여름에는 이미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일부를 빈에서 연주하기도 했다(정식 초연 5년 전). 이후 요제프는 당시 빈에서 연주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던 베르디의 작품도 마치 바그너의 작품과는 방향성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처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시대 독일 작곡가 페터 코르넬리우스는 요제프를 슈트라우스 형제 중에서 가장 "교양 있는 음악가"라고 평했다.
1864년 9월 6일, 요제프는 왈츠 '오스트리아 마을 제비'(작품번호 164)와 폴카 마주르카 '여심'(작품번호 166)을 초연했다. 이는 형이 왈츠 '빈 숲 속의 이야기'를 작곡하기 4년 전의 일로, 당시에는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도 '오스트리아 마을 제비'처럼 시적인 왈츠의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프로이센 왕국령 브로츠와프의 흥행주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3000석 규모의 홀에서 연주해 달라고 제안해 왔고, 요제프는 이 계약에 서명했다. 요제프는 어머니와 형이 있는 빈을 떠나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기대와 달리 브로츠와프에서의 활동은 비참했다. 요제프의 편지에 따르면,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너무 미약하여 요제프의 레퍼토리 중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고 한다.
상심한 채 빈으로 돌아온 요제프는 더욱더 열정적으로 고전 낭만주의 음악을 공부했다. 슈베르트, 슈만 외에 베토벤이나 베를리오즈 등도 레퍼토리에 추가하며 이들의 악풍을 작품에 담아내려 했다. 그 대표작이 왈츠 '다이나미덴'(작품번호 173)이다. 1865년, 요제프는 작곡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휴식을 취하고 회복한 후, 그는 더욱 슈베르트에게 심취하여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에 '로자문데'를 추가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왈츠 '트랜스악치오넨'(작품번호 184)이 있다.
1.4.2. Mature period

한때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란너와 '왈츠 대결'을 펼쳤던 것처럼, 요제프도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요제프는 더 이상 '란너의 후계자'가 아니라 '왈츠의 슈베르트''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867년 요제프가 왈츠 '망상'(작품번호 212)을 발표했을 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요제프에게 경의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페피가 더 재능이 있다. 나는 단지 인기 있을 뿐이다."
작곡에 관해서는 형도 인정할 만한 재능을 가진 요제프였지만, 대중적 관심도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요한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을 이어받은 형에게 미치지 못했다. 슈트라우스 형제의 작품은 종종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고, 요제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악보 표지에 '요한 슈트라우스'라고 인쇄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었던 요제프는 진정으로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려 했고, 선천적으로 병약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정력적인 작곡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1867년에 요제프가 발표한 작품 수는 '마리아의 선율'(작품번호 214) 외 25곡이라는 경이로운 숫자였다. 같은 해 슈트라우스 형제의 신곡은 형 요한이 6곡, 동생 에두아르트가 8곡이었으니, 요제프의 작품 수가 월등히 많았다. 1868년 1월 21일, 왈츠 '천체의 음악'(작품번호 235)을 발표했다. 이 시기 요제프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레오폴트슈타트의 카페에서 매일 밤새도록 카드 놀이를 하고, 하루에 시가를 20개비나 피웠다고 한다. 이 무렵 과로로 인해 요제프는 또다시 쓰러졌다.
1869년 2월 1일, 왈츠 '수채화'(작품번호 258)를 초연했다. 그리고 6일 뒤인 2월 7일에는 왈츠 '내 인생은 사랑과 기쁨'(작품번호 263)을 초연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 3월 13일에는 '대장간 폴카'(작품번호 269)를 발표했다. 연달아 걸작을 탄생시키는 요제프는 당시 형에게 있어 분명 가장 큰 음악적 라이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반응은 형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형과 함께 러시아 파블로프스크에 갔을 때 요제프는 비정상적인 인기를 누리는 형과 비교되는 것을 걱정했다.
"여기서 나의 입장은 쉽지 않다. 선입견(=형)에 맞서 싸워야 한다." (1869년 4월 16일 빈에 남겨둔 아내 카롤리네에게 보낸 편지)
참고로 유명한 '피치카토 폴카'(작품번호 없음)는 이 러시아 연주 여행 때 형과 합작한 것이다. 이듬해인 1870년 2월 17일에는 '조키 폴카'(작품번호 278)를 초연했다. 4월 4일에는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왈츠 '저녁별의 궤도'(작품번호 279)를 초연하여 이 또한 청중의 큰 갈채를 얻었다. 요제프는 형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작곡가로서 절정에 있었는데, 이는 그의 죽음 전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다.
1.5. Personal life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1857년 6월 8일 빈의 성 요한 네포무크 교회에서 카롤리네 요제파 플루크마이어(Caroline Josepha Pruckmayer독일어, 1831년 ~ 1900년)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858년 3월 27일에는 외동딸 카롤리네 안나 슈트라우스(Karoline Anna Strauss독일어, 1858년 ~ 1919년)를 얻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아내 카롤리네가 한때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연인이었다는 점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러시아 파블로프스크에서 빈에 있는 제수 카롤리네에게 다음과 같은 장난스러운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키스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없었던 뻔뻔함으로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아들을 원하시나요? 리나, 만약 그렇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테니, 그때는 당신을 사랑하는 처남 장(Jean)은 잊지 마세요. 이 마지막 말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세요."
1.6. Death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말년의 대부분을 병으로 고생했다. 그는 잦은 실신과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1869년 10월 10일, 파블로프스크 철도 회사는 변화를 이유로 슈트라우스 형제에게 1870년부터 다른 음악가와 계약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다른 음악가는 프로이센의 벤야민 빌제였다. 이에 요제프는 빌제가 바르샤바에서 비워 놓은 자리를 노려, 1870년 5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계약을 따냈다. 어머니 안나는 이 계약에 반대했지만, 공을 서두르던 요제프는 형이 파블로프스크에서 얻었던 명성을 자신도 바르샤바에서 똑같이 얻으려 했다. 이 계약은 결국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샤바에서의 일은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관습의 차이로 악보와 악기 도착이 늦어졌고, 예약했던 숙소도 사용할 수 없었다. 많은 악단원도 에이전트의 실수로 오지 못했으며, 시작 예정일 이틀 뒤인 5월 17일, 요제프는 형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우울합니다. 언제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가 형의 손에 닿을 무렵에는 파국이 최고조에 달했을 것입니다."
동생 에두아르트의 도움 덕분에 요제프는 5월 22일에서야 첫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10일 뒤인 6월 1일, 걱정과 피로가 겹친 요제프는 '스위스 계곡' 콘서트홀에서 지휘를 하던 중 갑자기 지휘대 위에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숙소로 옮겨졌다.
6월 5일, 빈에서 바르샤바로 급히 달려온 아내 카롤리네가 본 요제프는 훗날 동생 에두아르트가 썼듯이 "사지가 마비되고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요제프를 진찰한 폴란드 의사는 뇌졸중의 징후가 있으며 뇌종양이 파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요제프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 후, 6월 15일에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바르샤바에서의 계약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급히 바르샤바로 가서 지휘를 맡게 되었다.
7월 17일, 카롤리네는 이국에서 쓰러진 남편을 빈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이때 요제프는 의식이 또렷했다고 한다. 7월 22일 오후 1시 30분, 요제프는 슈트라우스 가문의 자택인 '사슴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카롤리네가 시체 해부를 거부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영문 출처에서는 '분해된 혈액'으로 인한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그가 취한 러시아 병사들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 공식적으로는 부정되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믿어졌다.

10월 18일 추모식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오스트리아 마을 제비'와 '여심'이 형의 지휘 아래 연주되었다. 요제프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2월 23일에는 어머니 안나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한때 창작 의욕을 잃기도 했다. 친분이 있던 필리프 파르바흐 2세는 훗날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추억'이라는, 고인이 된 요제프를 기리는 왈츠를 작곡했다. 요제프는 오페라, 교향곡, 가곡의 작곡도 목표로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모르겐 포스트'지는 사망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요제프는 그의 인생 최대의 야망인 대규모 오페라 작곡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다."
또한 요제프는 1869년에 "다른 종류의 작곡으로 전환 중"이라고 말했으며, 아내 카롤리네와 동명인 딸 카롤리네가 함께 요제프가 쓴 것으로 보이는 오페레타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 오페레타는 요제프가 사망하자마자 수수께끼처럼 사라졌다.
2. Works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총 283곡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238곡이 댄스 음악에 해당한다. 그는 또한 500곡 이상의 편곡을 수행하며 왈츠, 폴카, 마주르카, 행진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독창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2.1. Waltzes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왈츠 작품들은 그의 서정적이고 심오한 음악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다음 작품들은 그의 '교향곡적 왈츠' 스타일과 낭만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 '처음이자 마지막'(Die Ersten und Letzten독일어) 작품번호 1 (1853)
- '오래된 좋은 시절'(Die Guten, Alten Zeiten독일어) 작품번호 26 (1856)
- '5월의 장미'(Mai-Rosen독일어) 작품번호 34 (1857)
- '사랑의 진주'(Perlen der Liebe독일어) 콘서트 왈츠 작품번호 39 (1857)
- '쾌활한 사람'(Flattergeister독일어) 작품번호 62
- 오스트리아 마을 제비''(Dorfschwalben aus Österreich독일어) 작품번호 164 (1864)
- 다이나미덴''(Dynamiden독일어 또는 Geheimne Anziehungskräfte) 작품번호 173 (1865)
- 트랜스악치오넨''(Transaktionen독일어) 작품번호 184 (1865)
- '독일 인사'(Deutsche Grusse독일어) 작품번호 191
- 망상''(Delirien독일어) 작품번호 212 (1867)
- '마리아의 선율'(Marien-Klänge독일어) 작품번호 214
- '학생들의 꿈'(Studententräume독일어) 작품번호 222
- '가을 장미'(Herbstrosen독일어) 작품번호 232 (1867)
- 천체의 음악''(Sphärenklänge독일어) 작품번호 235 (1868)
- '진지함과 유머'(Ernst und Humor독일어) 작품번호 254
- 수채화''(Aquarellen독일어) 작품번호 258 (1869)
- 내 인생은 사랑과 기쁨''(Mein Lebenslauf ist Lieb' und Lust독일어) 작품번호 263 (1869)
- '여성의 위엄'(Frauenwürde독일어) 작품번호 277 (1870)
- '저녁별의 궤도'(Hesperusbahnen독일어) 작품번호 279 (1870)
2.2. Polkas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폴카 작품들은 그의 기지와 유머러스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특히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공동 작곡한 '피치카토 폴카'가 유명하다.
- 폴카 프랑세즈 '작은 물레방아'(Moulinet독일어) 작품번호 57 (1858)
- 폴카 프랑세즈 '락센부르크 폴카'(Laxenburger독일어) 작품번호 60 (1858)
- 폴카 슈넬 '소브레트'(Die Soubrette독일어) 작품번호 109
- 폴카 슈넬 '휴가 여행에서!'(Auf Ferienreisen!독일어) 작품번호 133 (1863)
- 폴카 슈넬 '루돌프스하임 사람들'(Rudolfsheimer독일어) 작품번호 152
- 폴카 프랑세즈 '실 잣는 여인'(Die Spinnerin독일어) 작품번호 192
- 폴카 프랑세즈 '빈의 삶'(Wiener Leben독일어) 작품번호 218
- 폴카 슈넬 '서둘러!'(Im Fluge독일어) 작품번호 230
- 폴카 슈넬 '독자 투고란'(Eingesendet독일어) 작품번호 240 (1868)
- 폴카 슈넬 '수다쟁이 아가씨'(Plappermäulchen독일어) 작품번호 245 (1868)
- 폴카 슈넬 '스케이트'(Eislauf독일어) 작품번호 261 (1869)
- 폴카 프랑세즈 '대장간 폴카'(Feuerfest!독일어) 작품번호 269 (1869)
- 폴카 슈넬 '근심 없이!'(Ohne Sorgen!독일어) 작품번호 271 (1869)
- 폴카 프랑세즈 '예술가의 인사'(Kunstler-Gruss독일어) 작품번호 274
- 폴카 슈넬 '조키 폴카'(Jokey독일어) 작품번호 278 (1870)
- 폴카 프랑세즈 '명랑한 용기'(Heiterer Muth독일어) 작품번호 281
- '피치카토 폴카'(Pizzicato-Polka독일어) (작품번호 없음):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공동 작곡.
2.3. Polka-Mazurkas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폴카-마주르카 작품들은 그의 독창성과 서정성이 돋보이는 장르로, 특히 이 분야에서는 형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경우도 많다.
- '타는 듯한 사랑'(Brennende Liebe독일어) 작품번호 129 (1862)
- '수다쟁이 여인'(Die Schwätzerin독일어) 작품번호 144 (1863)
- '여심'(Frauenherz독일어) 작품번호 166 (1864)
- '잠자리'(Die Libelle독일어) 작품번호 204 (1866)
- '팔짱 끼고'(Arm in Arm독일어) 작품번호 215
- '멀리서'(Aus der Ferne독일어) 작품번호 270 (1869)
- '해방된 여인'(Die Emancipierte독일어) 작품번호 282 (1870)
2.4. Marches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왈츠와 폴카 외에도 행진곡을 작곡했다.
- '리히텐슈타인 행진곡'(Liechtenstein-Marsch독일어) 작품번호 36 (1857)
- '왈로넨 행진곡'(Wallonen-Marsch독일어) 작품번호 41 (1857)
- '일본 행진곡'(Japanesischer Marsch독일어) (작품번호 없음)
- 출판 악보에는 작품번호 124로 인쇄되어 있지만, 이 작품번호는 왈츠 '행운의 아이들'(Glückskinder독일어)과 중복된다. 일반적으로 작품번호 124라고 하면 '행운의 아이들'을 지칭한다.
2.5. Other works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위에 언급된 범주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을 남겼다.
- 피아노곡**:
- '연주회용 대 갤럽'(Grand Galoppe du concert독일어)
- '카프리스'(Capprice독일어)
- '주제와 변주'(Thême variée독일어)
- '연주회용 대 행진곡'(Grand marche du concert독일어)
- '멜랑콜리'(Melancholie독일어)
- '랩소디'(Rhapsodie독일어)
- '세레나데'(Serenade독일어)
- '저녁 종소리'(Abendläuten독일어)
- 환상곡**:
- '환상적인 알레그로'(Allegro fantastique독일어)
-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 소품 '마음의 고통(사랑의 아픔)'(Peine du coeur독일어)
3. Legacy and reception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음악적 유산은 그의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평가되고 재해석되었다. 그는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 가려졌지만, 그의 독창적인 음악성은 동시대인들과 후대 음악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3.1. Contemporary and historical reception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왈츠의 슈베르트'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시적이고 깊이 있는 왈츠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반면, 요제프는 그의 음악적 재능과 교양 있는 작곡 스타일로 특히 음악 비평가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초기 작품인 '처음이자 마지막'을 "탁월하고 독창적이며 멜로디와 리듬이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작곡가 페터 코르넬리우스는 요제프를 슈트라우스 형제 중 가장 "교양 있는 음악가"라고 평했다.
처음에는 요제프 란너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는 단순한 계승자를 넘어 자신만의 '교향곡적 왈츠' 개념을 발전시키며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바그너, 리스트,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 베를리오즈 등 당대 거장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주회 레퍼토리에 포함하고, 바그너 작품의 빈 초연을 맡기도 하며 그들의 음악적 영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흡수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단순한 댄스 음악 작곡가를 넘어 '왈츠의 슈베르트'라는 독보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조차 동생의 재능을 인정하며 "페피가 더 재능이 있다. 나는 단지 인기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요제프의 음악적 깊이와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3.2. Posthumous influence and controversies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사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로 재조명되고 활용되었다. 왈츠 '다이나미덴'의 일부 선율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옥스 남작의 왈츠'로 차용되었고, 왈츠 '천체의 음악'과 '내 인생은 사랑과 기쁨'은 각각 독일 영화 '회의는 춤춘다'의 테마 음악과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그의 사망 후 33년이 지난 1903년에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곡들만으로 구성된 오페레타 '봄바람'이 등장했다. 이를 시작으로 '여자의 마음', '빈 숲 속의 제비', '미인의 딸', '하얀 깃발', '인생을 즐기자', '왈츠의 꿈', '슈트라우스 가문의 아들들' 등 요제프와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을 활용한 오페레타들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에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모티프에 기반하여' 또는 '고(故)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같은 부제가 붙어 그의 음악적 유산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사후에는 그의 미발표 악보 유실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남겨진 요제프의 처자에게 생활비를 지원한 대가로 동생이 남긴 모든 수고를 넘겨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동생의 미발표곡을 표절하려는 의도로 생활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요제프의 미망인에게 접근하여 육체관계를 맺고 수고를 얻어낸 후, 그 유고를 바탕으로 오페레타 '박쥐'를 만들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돌았다. 특히 '박쥐'가 표절작이라는 소문의 출처는 막내 동생 에두아르트인 것으로 보인다.
요제프는 다작의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재에서 유작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미망인이 된 카롤리네에게 거액을 보냈다는 점이 소문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바르샤바에서 요제프를 대신하여 지휘한 대가로 받은 거액의 보수를 카롤리네에게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었다. 또한, 유언 집행인으로서 요제프의 서재를 조사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발견한 작품들은 이미 모두 세상에 발표된 것들이었다.
요제프의 아내 카롤리네는 남편의 유품 중 악단과 관련 없는 요제프의 악보(피아노 악보 등)를 계속 보관했다. 1907년 10월 22일 에두아르트가 악단 소유의 악보들을 소각 처분했을 때도, 이러한 이유로 요제프의 일부 수고들은 불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에두아르트는 마차 7대 분량의 악보를 소각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로 인해 슈트라우스 가문의 작품은 출판된 것들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요제프의 수고들은 귀중한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4. Tributes and memorials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물과 행사가 이어졌다.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처음에는 성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훗날 빈 중앙묘지로 이장되어 어머니 안나와 함께 공동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묘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그의 사망 후 필리프 파르바흐 2세는 요제프를 추모하는 왈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추억'(Erinnerung an Josef Strauß독일어)을 작곡하여 그를 기렸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연주회와 신년 음악회 등에서 연주되며 그의 위대한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