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하세가와 준조(長谷川 淳三하세가와 준조일본어)는 1928년 9월 27일 지바현 나가세군 이치노미야정 출신으로, 스모 선수, 프로레슬링 선수, 그리고 프로레슬링 프로모터로 활동했던 일본의 저명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요시노사토 준조요시노사토 준조일본어라는 링네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핵심 인물로서 일본 프로레슬링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모 선수 시절에는 니쇼노세키 방 소속으로 활약하며 '하세가와', 카미와카 준조카미와카 준조일본어(神若 淳三), 카미와카 준조카미와카 준조일본어(神若 順三), 요시노사토 야스히데요시노사토 야스히데일본어(芳ノ里 安秀) 등의 시코나(力士名)를 사용했고, 이후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일본 라이트 헤비급, 올 재팬 태그팀, 일본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등 여러 타이틀을 획득했다. 특히 미국 원정에서는 '데빌 사토'라는 악역 페르소나로 '타고사쿠 스타일'의 반칙 공격을 선보이며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리키도잔 사후에는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공동 경영에 참여했으며, 3대 회장으로서 연맹을 이끌었지만, 연맹 해체 과정과 그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일본 무도계와 프로레슬링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를 둘러싼 비판적 시각 또한 존재한다.
2. 유년기 및 스모 경력
하세가와 준조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였으며, 일본 전통 무도인 스모에 입문하여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
2.1. 출생과 초기 성장
하세가와 준조는 1928년 9월 27일 지바현 나가세군 이치노미야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반적으로 운동 신경이 뛰어난 스포츠 선수였다.
2.2. 스모 입문 및 활동
하세가와 준조는 스모 선수로서의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카미카제 쇼이치의 도움으로 타마노우미 다이타로가 이끌던 니쇼노세키 방에 입문했다. 그는 1944년 1월 대회에서 '하세가와'라는 시코나(力士名)로 첫 씨름판에 데뷔했다. 이후 시코나를 카미와카 준조카미와카 준조일본어 (神若 淳三)로, 다시 카미와카 준조카미와카 준조일본어 (神若 順三)로 변경했으며, 1950년 1월 대회에서 최고 등급인 마에가시라로 승격했다. 1952년 1월 대회에서는 시코나를 다시 '요시노사토'로 변경했고, 요시노사토 야스히데요시노사토 야스히데일본어 (芳ノ里 安秀)라는 시코나도 사용했다. 그는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언더핸드 스로우(下手投げ)를 특기로 삼는 뛰어난 기술파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와카노하나 칸지 1세 및 코토가하마와 함께 '니쇼노세키 삼총사'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최고 순위는 마에가시라 12매였다. 하세가와 준조의 신장은 174 cm였고, 체중은 84 kg이었다.
2.3. 스모 경력의 끝
마에가시라 등급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하세가와는 자신의 순위 성적과 소속 스모 방 내부의 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54년 9월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마쿠우치 등급에서 39승 51패의 기록을 남긴 채 스모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2.4. 주요 스모 기록
하세가와 준조의 스모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기록 |
|---|---|
| 생애 전적 | 178승 158패 1무 승률 .530 |
| 막내 전적 | 39승 51패 승률 .433 |
| 현역 재임 기간 | 30개 대회 |
| 막내 재임 기간 | 6개 대회 |
3. 프로레슬링 경력
스모 은퇴 후 하세가와 준조는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일본 프로레슬링의 초창기 발전에 기여하며 독특한 페르소나와 논란의 사건들로 이목을 끌었다.
3.1. 프로레슬링 전향 및 데뷔
1954년 9월 10일, 하세가와는 스모 은퇴 직후 오사카 부립 체육관에서 자신의 니쇼노세키 방 선배인 리키도잔을 찾아가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에 입문하겠다고 직접 간청하여 승낙받았다. 그는 같은 날 와타나베 테이조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는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빠른 데뷔로 기록되었다. 그는 프로레슬링 훈련과 함께 프로 복싱 훈련도 받았다.
3.2. 일본 내 주요 활동 및 성과
1956년 10월 23일, 요시노사토는 오사카 부립 체육관에서 열린 초대 일본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출전하여 결승에서 국제 프로레슬링의 사장이 되는 요시하라 이사오를 꺾고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이후 주니어 헤비급 부문으로 이동하면서 이 타이틀을 반납했다. 1960년에는 리키도잔과 함께 올 재팬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일본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을 받았다. 또한 1959년에 데뷔한 긴타로 오키의 훈련을 담당하기도 했다.
3.3. 해외 원정 및 페르소나
1961년, 요시노사토는 자이언트 바바 및 맘모스 스즈키와 함께 미국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는 짧은 타이츠와 무릎 보호대, 그리고 나무 나막신을 착용한 차림으로 경기에 임하며 악역(히어로 (프로레슬링)|힐)으로 활동했다. 특히 테네시주 지역에서는 '데빌 사토'라는 링네임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는 나중에 그의 제자인 메라 아키히사가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경기 중 '타고사쿠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반칙 공격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미국 내 일본인 악역 선수들의 전통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경기 중 나무 나막신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다 공격'은 그의 상징적인 기술이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3.4. 이치카와 노보루 관련 사건
1954년 12월 22일, 구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리키도잔 대 키무라 마사히코의 '쇼와 간류지마 결전' 전초전에서 요시노사토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소속의 상대 선수 이치카와 노보루에게 예상치 못한 세멘트세멘트일본어 (실제 싸움) 공격을 감행하여 수십 발의 하리테하리테일본어 (손바닥치기)를 날려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이치카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뇌에 심각한 장애를 입었고, 결국 1967년 말 사망에 이르렀다. 이 갑작스러운 폭거는 당시 절대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던 리키도잔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리키도잔은 식사 때마다 "이치카와를 죽여라"고 반복해서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요시노사토의 프로레슬링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 중 하나로, 그의 행동이 단순한 각본이 아닌 폭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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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로모터 및 경영 활동
선수 생활 은퇴 후 하세가와 준조는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환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1.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 경영 참여
1963년 리키도잔이 사망한 후, 요시노사토는 요시무라 미치아키, 토요노보리, 엔도 코키치와 함께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경영을 이어받았다. 당시 토요노보리가 회장직을 맡았다.
4.2. 연맹 회장 재임과 활동
1966년 1월, 요시노사토는 토요노보리의 뒤를 이어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현역 선수로서의 활동을 점차 줄여나가 1967년 10월에는 완전히 은퇴했다. 그는 회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도쿄 12채널에서 방영되던 국제 프로레슬링의 TV 중계 프로그램인 '국제 프로레슬링 아워'의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후년에 그는 은퇴한 레슬러들의 친목 단체인 리키도잔 OB회 & 프로레슬링의 초대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4.3. 논란의 심판 판정
1978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국제 프로레슬링과 한국군(긴타로 오키 파벌)과의 3파전 대항전을 개최했다. 이 흥행에서 자이언트 바바 대 러셔 키무라 경기에 요시노사토가 특별 심판으로 나섰다. 바바가 키무라에게 피겨 포 레그락을 걸자 키무라는 상반신을 링 밖으로 내밀어 로프 브레이크를 시도했다. 그러나 요시노사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브레이크를 인정하지 않고 링아웃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고, 결국 키무라는 링아웃 패배를 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의혹의 심판 판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된다.
4.4.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해체
1972년,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최고 스타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각각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하며 연맹을 떠났다. 1973년,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과 신일본 프로레슬링 간의 합병 계획이 제안되기도 했으나, 긴타로 오키의 강력한 설득으로 요시노사토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합병이 성사되었다면 요시노사토에게 회장직이 제공될 예정이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1973년 4월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이 해체되자, 그는 아내에게 "내가 교육을 받았다면 회사를 망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회장보다는 2인자가 더 어울렸고, 위와 아래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 더 능숙했다"고 회고하며 자신의 리더십 부재에 대한 자책감을 드러냈다. 연맹의 남은 업무를 모두 정리한 후, 그는 사무실에 남아있던 모든 직원 배지를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5. 레슬링 스타일 및 획득 타이틀
요시노사토 준조는 자신만의 독특한 레슬링 스타일과 시그니처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여러 중요한 타이틀을 획득했다.
5.1. 레슬링 스타일 및 주요 기술
요시노사토는 경기 중 반칙 공격으로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스타일을 자주 사용했다. 특히, 그는 경기장에 나무 나막신을 신고 입장하여 경기 중에 이 나막신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게다 공격'을 주력 기술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게다 사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피니시 무브는 Small Package Hold스몰 패키지 홀드영어였다. 그는 반칙 공격으로 상대를 흔든 뒤 이 기술로 경기를 끝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젊은 시절의 자이언트 바바가 이 기술에 자주 당했다고 전해진다.
5.2. 획득 타이틀 및 주요 업적
요시노사토 준조가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획득한 주요 타이틀 및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
- 올 재팬 태그팀 챔피언십 (1회) - 리키도잔과 함께
- 일본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1회)
- 일본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십 (1회)
- NWA 미드-아메리카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미드-아메리카 버전) (1회)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미드-아메리카 버전) (1회) - 사쿠로 타로와 함께
6. 말년 및 사망
요시노사토 준조는 말년까지 프로레슬링계와의 인연을 이어갔으며, 건강 문제로 인해 삶을 마감했다.
6.1. 말년의 활동
그는 사망 전까지 프로레슬링계 내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1996년에는 은퇴한 레슬러들을 위한 친목 단체인 리키도잔 OB회 & 프로레슬링의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동료 레슬러들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6.2. 사망
하세가와 준조는 1998년 3월 11일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후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인해 1999년 1월 19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평가 및 비판
요시노사토 준조의 생애와 업적은 일본 스모와 프로레슬링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특정 행동과 경영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 또한 존재한다.
7.1. 역사적 평가
하세가와 준조는 스모 선수 시절 '니쇼노세키 삼총사'의 일원으로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았으며,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한 후에는 일본 프로레슬링 초창기의 주요 선수이자 리키도잔의 사망 이후 연맹 경영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 원정에서 '데빌 사토'라는 악역 페르소나와 '타고사쿠 스타일'을 정립하며 일본인 악역 레슬러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기반을 다지고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7.2. 비판 및 논란
요시노사토 준조의 경력에는 여러 논란과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가장 큰 논란은 1954년 이치카와 노보루 선수에게 행한 세멘트세멘트일본어 (실제 싸움) 사건이다. 이 사건은 리키도잔의 명령에 의해 실제 폭력이 가해졌고, 이치카와가 심각한 뇌 손상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요시노사토의 도덕성과 스포츠맨십에 대한 비판을 초래했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따른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1978년 자이언트 바바 대 러셔 키무라 경기에서 특별 심판을 맡았을 때 발생한 '의혹의 심판 판정'은 그의 심판으로서의 공정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키무라의 로프 브레이크를 인정하지 않고 바바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린 것은 팬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의 원작 만화 '프로레슬링 슈퍼스타 열전'(더 그레이트 카부키 편)에서는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의 자금을 가지고 긴자에서 매일 밤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는 요시노사토의 모습이 과장되어 그려졌고, 이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묘사는 그의 경영자로서의 책임감과 윤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