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히라 슈조 (大平修三Ōhira Shūzō일본어, 1930년 3월 16일 ~ 1998년 12월 11일)는 일본의 저명한 바둑 기사로, 일본기원 소속의 9단이었다.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문하생으로, 공격적인 기풍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해머 펀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4연패를 포함해 총 5회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맨'으로 불렸다. 그의 바둑은 조와의 재래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힘과 타개 능력이 뛰어났으며, 가토 마사오보다 먼저 '살인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히라 슈조는 전후 일본 바둑계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으로, 여러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고 수많은 인상 깊은 대국을 남겼다. 이 문서에서는 그의 생애와 경력, 주요 타이틀 및 기록, 대표 대국, 저작, 그리고 바둑계에 미친 영향과 평가를 상세히 다룬다.
2. 생애와 경력
오히라 슈조는 1930년 3월 16일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 1998년 12월 11일 사망할 때까지 일본기원의 대표적인 프로 기사로 활동했다. 그의 바둑 인생은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문하생으로 시작하여, 특유의 공격적인 기풍으로 '해머 펀치'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성기를 맞았다.
2.1. 유년기 및 교육
오히라 슈조는 쇼와 5년인 1930년에 기후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오히라 겐지 5단은 초등학교 교사에서 전문 기사로 전향한 인물로, 슈조는 아버지의 지도를 통해 9세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바둑의 기초를 다졌다. 10세 때인 1940년, 기후에서 기타니 미노루 9단으로부터 7점 접바둑 지도를 받았고, 이듬해인 1941년에는 3점 접바둑 대국을 가지며 기타니 9단의 내제자가 되어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여 한때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1945년 초 다시 히라쓰카로 돌아와 일본기원의 원생이 되었다. 빈번한 공습으로 인해 다시 기후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이후 사카이 야스오의 일을 도우면서 1947년 일본기원 도카이 본부(현재 중부총본부의 전신)에서 초단으로 입단했으며, 같은 해에 2단으로 승단했다.
2.2. 프로 기사 활동 초기
오히라 슈조는 1947년 입단 후 빠른 속도로 승단했다. 1949년에 4단으로 승단한 후에는 도쿄 본원의 오테아이에 참가했으나, 일시적으로 2단으로 강등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51년에 다시 4단으로 재승단하며 도쿄에 정착했다. 1952년 청년 기사 선수권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에 결혼하고 5단으로 승단하면서 가노 요시노리, 가다 가쓰시와 함께 '전후 신삼익조(戦後派新三羽烏)'라 불리며 차세대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1957년에는 수상배 쟁탈전에서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58년에는 최고위 리그전에 참가했으나 2승 5패 1지교(비김)의 성적으로 강등되었다. 1960년에 8단으로 승단하고 수상배 쟁탈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금 기력을 입증했다. 1963년에는 최고 단수인 9단에 올랐다.
2.3. 전성기 활동 및 주요 업적
오히라 슈조의 전성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1964년과 1965년에는 일본기원 제일위 결정전에서 사카타 에이오에게 연속으로 도전했으나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1966년 제13기 일본기원 선수권전 도전기에서 사카타 에이오를 3-1로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린 하이펑, 야마베 도시로, 미야시타 히데요를 연이어 물리치며 4연패를 달성했고, 이로 인해 '챔피언십 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특히 1967년 린 하이펑과의 도전기는 쇼와 시대에 태어난 기사들 간의 첫 타이틀전으로 기록되었다. 연패를 이어가는 동안 만성 중이염과 통풍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방어에 성공하는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야마베 도시로는 오히라를 "조와의 재래"라 평가하며, 이 시기에는 "힘뿐만 아니라 밝음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극찬했다.


1970년에 이시다 요시오에게 일본기원 선수권전 타이틀을 빼앗겼으나, 1972년에 이시다에게 재도전하여 타이틀을 탈환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명인전 리그에도 1964년 제4기 리그에 진입하여 4승 3패로 잔류했고, 이듬해에도 4승 4패를 기록하며 3기 연속으로 리그에 머물렀다. 1967년 제3회 닛세이 5인 토너먼트 승발전(닛세이 하야고 시리즈)에서는 사카타 에이오가 8인 연속으로 승리한 후 오히라가 사카타를 이기면서 기전이 종료되기도 했다.
1977년에는 하야고 선수권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또 하나의 주요 타이틀을 추가했다. 1984년과 1988년에도 명인전 리그에 진입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1987년에는 1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90년에는 IBM 하야고 오픈전에서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92년 기성전 최고 기사 결정전에서 4강에 진출하는 등 말년까지 최고 수준의 기력을 유지했다.
2.4. 기풍과 바둑 철학
오히라 슈조의 기풍은 '해머 펀치'로 불릴 정도로 공격적이고 강력한 힘바둑으로 유명했다. 그의 바둑은 한번 노린 돌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력을 자랑했다. 이 별명은 마에다 친지 9단으로부터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히라 본인은 슈에이를 존경했으며,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갈 의지는 없었고 오히려 지키면서 공격하는 바둑, 즉 '뻗으면서 물러나는 바둑'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1973년 일본기원 선수권전 5번기 제2국에서 도전자 사카타 에이오의 무려 40집이 넘는 대마를 잡은 대국은 그의 기풍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국으로 회자된다. 또한 변을 중시하는 기풍으로도 평가받았다.
그는 자신의 바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했다. "중반 전투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초반 감각은 상당히 무르다"고 스스로의 장단점을 솔직하게 평가했다.
2.5. 개인 생활 및 말년
오히라 슈조는 1953년에 결혼했으며, 말년에는 요코하마시에 거주했다. 그의 취미는 영화 감상, 주니치 드래건즈 야구 팀 응원, 그리고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읽기였다.
1996년에는 대동맥류 수술을 받아 4월부터 9월까지 장기간 휴장했으나 복귀에 성공했다. 이듬해인 1997년에도 다시 동맥류 수술을 받으며 4월부터 10월까지 휴장했으나 또다시 복귀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98년 12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인해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그의 인품은 '선인원기(善人原器)', 즉 "선한 사람의 원형"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했으며, 쇼와 한자리수 세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오히라 슈조의 통산 전적은 800승 456패 5지교(비김)이다. 준기사 오야마 가요 3단은 그의 친누나이다.
3. 주요 타이틀 및 기록
오히라 슈조는 일본 바둑계에서 여러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고 다양한 기록을 세웠다.
3.1. 획득 타이틀
오히라 슈조가 우승을 차지했던 주요 공식 타이틀은 다음과 같다.
타이틀명 | 획득 연도 |
---|---|
청년 기사 선수권전 | 1953년 |
수상배 쟁탈전 | 1960년 |
일본기원 선수권전 |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2년 |
하야고 선수권전 | 1977년 |
3.2. 기타 주요 성과 및 준우승
획득 타이틀 외에도 오히라 슈조는 여러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거나 상위권에 올랐다.
- 청년 기사 선수권전 준우승 (1952년)
- 수상배 쟁탈전 준우승 (1957년)
- 일본기원 제일위 결정전 도전 (1964년, 1965년, 1968년)
- 하야고 선수권전 준우승 (1970년)
- 천원전 준우승 (1976년)
- NHK배 준우승 (1978년)
- IBM 하야고 오픈전 준우승 (1990년)
- 기성전 9단전 우승 (1988년, 1991년)
- 프로 십걸전 9위 (1974년), 10위 (1975년)
- 명인전 리그 5기 재적
- 본인방전 리그 4기 재적
- 일중 바둑 교류
- 1984년: 류 샤오광에게 0-2 패
- 1988년: 팡 톈펑에게 1-0 승
- 일중 슈퍼 바둑
- 1987년: 류 샤오광에게 승, 왕 충에게 패 (1-1)
- 1989년: 장 원둥에게 0-1 패
3.3. 수상 및 특별 기록
오히라 슈조가 개인적으로 달성한 특별한 기록과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 기도상 기술상 (1972년, 1975년, 1984년, 1987년)
- 최고 승률상
- 1975년: 17승 6패 (승률 0.739)
- 1987년: 31승 6패 (승률 0.838)
- 연승상: 17연승 (1987년)
4. 대표 대국
오히라 슈조의 바둑 실력과 그의 '해머 펀치' 기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국 중 하나는 1966년 1월 26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제13기 일본기원 선수권전 도전 5번기 제4국, 사카타 에이오 선수권자와의 대국이다. 이 대국에서 오히라는 흑번(선착)을 잡았다.
오히라는 이 대국 전까지 토너먼트에서 이와모토 가오루, 미와 요시로, 스기우치 마사오, 후지사와 호사이, 그리고 결승에서 오타케 히데오를 꺾고 세 번째 도전 기회에 진출한 상태였다. 1964년과 1965년에 일본기원 제일위 결정전에서 사카타에게 도전하여 모두 패했지만, 조금씩 승산에 대한 감각을 익혔으며, "제일위 결정전에서의 선전으로, 상대가 누구든 그렇게 쉽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한편 사카타는 전년에 린 하이펑에게 명인 타이틀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방 5연패 중이었고 일본기원 선수권전도 7연패 후 2연패 중인 여전히 바둑계의 1인자였다. 도전 5번기 제1국은 사카타가 승리했지만, 사카타는 "이번에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2국은 흑번 오히라의 공격에 사카타가 타개 과정에서 패감 사용을 잘못하면서 오히라가 1승을 거두어 타이(승패 동일)를 만들었고, 이어진 제3국도 연승하며 앞서나갔다.

제4국은 흑번 오히라가 선호하는 소목의 한 형태인 '다스키 소목'으로 시작되었으나, 우상귀에서 흑9의 한 칸 협공 이후의 정석 선택이 좋지 않아 백이 두터움을 얻고 좌상귀의 지킴과 호응하여 좋은 형태를 구축했다. 우하귀 정석을 통해 우변을 확장했으나, 백34, 36이 예리한 수였고, 백48까지 우변을 정리하며 백이 우세해졌다. 흑은 불리함을 인식하고 우하귀 백의 공격을 노리는 흑51을 선택했으며, 61부터 엮어가는 공격을 노렸지만, 백66, 68 또한 타개의 묘수였고, 엷은 형태였음에도 흑이 끊는 것이 아슬아슬하게 잘 되지 않았다. 흑은 일단 59부터 73까지 대장(大場, 큰 곳)을 두었지만, 백74 역시 예리한 침입이었다. 백84 먹여치기에 잇는 것은 심하게 당하는 것이지만, 바로 104로 잇고 패를 하는 것은 상변 흑에 대한 공격이 패감으로 사용될 수 있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흑85로 대비했고, 어려운 패싸움이 되었다. 패감을 만드는 흑91에 백은 패를 따내며 94로 계속해서 패를 키워나갔다. 결국 백96의 패감에 흑은 응수할 수 없어 우하귀와의 바꿔치기가 되었다.
형세는 백이 유리했지만 차이는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좌변 전투에서의 흑119가 실착이었고, 백이 선수를 잡고 126으로 돌아가면서 우세를 확대했다. 백128에서 한 줄 위인 133에 두었다면 백이 승리할 수 있었으나, 흑133부터의 패가 필사적인 승부수였다. 백148에서도 패를 해소했다면 좌변 백과 상변 흑의 바꿔치기로 백이 이길 수 있었다. 흑153의 끊음 이후, 백164로 잘못 둔 것이 패착이었는데, 백a, 흑b, 백 패따냄 이후, 흑c, 백d의 손해 패를 두게 한 뒤 164에 두었더라면 백이 이겼을 것이다. 실전에서는 여기서 흑이 두터운 반집 승부가 되었고, 이후 차이가 벌어져 264수까지 흑 3집반 승으로 끝났다.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는 격전을 오히라가 제압하며, 세 번째 도전 만에 첫 대형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5. 저작
오히라 슈조는 자신의 바둑 지식과 경험을 담은 여러 서적을 저술했다. 그의 저서들은 다양한 바둑 기술과 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바둑 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대규모의 초점 (고 슈퍼북스 19)』 (大模様の焦点 (ゴ・スーパーブックス19)일본어), 일본기원, 1971년
- 『명국 감상실 (고 슈퍼북스 28)』 (名局鑑賞室 (ゴ・スーパーブックス28)일본어), 일본기원, 1974년
- (복간: 『명국 감상실 일본기원 아카이브 도사쿠부터 슈사쿠까지 에도 시대의 바둑』, 일본기원, 2010년)
- 『도테키·명인 인세키 (일본 바둑 대계 4)』 (道的・名人因碩 (日本囲碁大系4)일본어), 지쿠마쇼보, 1976년
- 『괴완 오히라 슈조 (기예 탐구 시리즈 2)』 (怪腕 大平修三 (芸の探求シリーズ2)일본어), 일본기원, 1977년
- 『오히라 슈조 (현대 바둑 대계 30)』 (大平修三 (現代囲碁大系30)일본어), 고단샤, 1983년
- 『오히라 사활 120제』 (大平詰碁120題일본어), 긴엔샤, 1978년
- 『변의 침입 (우로 북스)』 (辺の打ちこみ 烏鷺うろブックス일본어), 일본기원, 1989년
6. 평가 및 영향
오히라 슈조는 그의 강력하고 공격적인 기풍으로 인해 '해머 펀치'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별명은 그의 바둑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챔피언십 맨'으로 불리기도 했다. 가토 마사오 9단이 '살인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전에 오히라 슈조가 먼저 이 별명을 가졌다는 일화는 그의 공격적인 바둑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야마베 도시로 9단은 그의 바둑을 두고 조와의 재래라고 평가하며, 특히 전성기에는 힘뿐만 아니라 바둑에 밝음까지 갖추었다고 격찬했다.
오히라 슈조는 쇼와 한자리수 세대에 태어난 기사들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전후 일본 바둑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바둑계 내에서는 그의 인품이 매우 뛰어나 '선인원기(善人原器)', 즉 "선한 사람의 원형"이라 불릴 정도로 덕망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의 꾸준한 타이틀 획득과 리그에서의 활약은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일본 바둑계의 정상급 기사로 자리매김했음을 증명한다. 오히라 슈조는 바둑의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기사이다.
7. 관련 항목
- 바둑
- 일본기원
- 기타니 미노루
- 사카타 에이오
- 린 하이펑
- 이시다 요시오
- 가토 마사오
- 오타케 히데오
- 본인방 조와
- 본인방 슈에이
- 명인전 (바둑)
- 본인방전
- 기성전 (바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