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rwin Heinrich René Lahousen, Edler von Vivremont에르빈 하인리히 르네 라호우젠 에들러 폰 비브르몽독일어은 1897년 10월 25일에 태어나 1955년 2월 24일에 사망한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 국방군의 고위 장교이자 독일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프베어의 고위직을 맡으면서도 나치즘에 깊은 반감을 가졌으며,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1943년 3월 13일 스몰렌스크 음모와 1944년 7월 20일 음모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저항 활동을 펼쳤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그는 검찰 측의 첫 번째 증인으로 나서, 수십만 명의 소련군 포로 학살과 아인자츠그루펜의 잔혹 행위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을 제공함으로써 나치 정권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삶은 나치즘에 대한 저항과 인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에르빈 라호우젠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걸으며 성장했다. 그의 초기 경력은 오스트리아의 군사 체계와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이는 이후 독일에 합류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1. 출생 및 초기 생애
에르빈 라호우젠은 1897년 10월 25일 오스트리아의 귀족 가문인 '에들러 폰 비브르몽(Edler von Vivremont)'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Erwin Heinrich René Lahousen, Edler von Vivremont에르빈 하인리히 르네 라호우젠 에들러 폰 비브르몽독일어이다. '에들러(Edler)'는 귀족 칭호 중 하나로, 그의 가문이 전통적인 귀족 혈통임을 보여준다.
2.2. 초기 군 경력
라호우젠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전쟁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의 방첩 부서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8년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정보 기관들은 독일의 정보 기관으로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라호우젠도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끌던 아프베어에 합류하게 되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에르빈 라호우젠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프베어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은밀히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반나치 성향은 여러 작전과 암살 시도에서 드러났다.
3.1. 반나치 성향과 정보 활동
라호우젠과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은 서로 비슷한 나치즘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라호우젠은 카나리스에 의해 히틀러에 반대하는 엄선된 장교들로 구성된 정보 기관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었다. 카나리스는 그를 주로 브란덴부르크 특공대와 사보타주를 담당하는 아프베어 제2부의 부장으로 임명했다.
3.2. 사보타주 작전
라호우젠은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성공적인 사보타주 작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카나리스 제독이 사보타주보다는 간첩 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라호우젠은 영국으로 파견될 요원들을 주로 첩보 활동 위주로 훈련시키도록 지시했고, 이는 나중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1942년 6월 미국에서 벌어진 파스토리우스 작전 당시 미국에 상륙한 사보타주 요원들은 그들 중 한 명의 배신으로 FBI에 체포되어 군사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3.3. 히틀러 암살 시도 가담
라호우젠은 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특히 1943년 3월 13일에 계획된 스몰렌스크 음모를 위해 폭탄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이 암살 시도는 Fabian von Schlabrendorff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독일어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폭탄이 작동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1944년 7월 20일 음모 실패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수천 명의 공모자들이 처형되었고, 카나리스 제독 또한 이 숙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라호우젠은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덕분에 이 숙청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4. 후기 전쟁 복무 및 부상
1943년 라호우젠은 동부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이로 인해 아프베어와 카나리스 제독이 히틀러의 신임을 잃고 해체되는 과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7월 19일 포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었으나, 전선에서의 복무 덕분에 암살 음모 관련자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전후 활동 및 뉘른베르크 재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에르빈 라호우젠은 나치 정권의 잔학 행위를 폭로하고 전범들을 처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증언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4.1.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증언

전쟁이 끝난 후, 라호우젠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21명의 나치 피고인들에 대항하여 자발적으로 증언에 나섰다. 그는 '아프베어 저항 세력'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검찰 측의 첫 번째 증인이 되어 재판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그의 증언은 소련군 포로 수십만 명의 학살과 소련,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점령 지역에서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한 아인자츠그루펜의 잔혹 행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증언은 고위 나치 전범들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5. 유산과 평가
에르빈 라호우젠은 독일의 귀족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깊이 반대하며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이 아니라, 도덕적 양심에 따라 나치즘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저항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고위 나치 전범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데 기여한 그의 증언은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와 진실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호우젠의 삶은 권력에 맞선 개인의 용기와 저항 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6. 같이 보기
- 나치즘에 저항한 독일인 목록
- 검은 관현악단
- 빌헬름 카나리스
7. 더 읽어보기
- Harry Carl Schaub, Call Your First Witness: The Untold Story of Abwehr General Erwin Lahousen, First U.S. Witness at the Nuremberg Trial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