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드워드 에밀 크레인풀 3세(Edward Emil Kranepool III에드워드 에밀 크레인풀 3세영어)는 1944년 11월 8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2024년 9월 8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 전체를 뉴욕 메츠에서 보내며 팀에 대한 헌신적인 충성심을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주로 1루수로 활약했지만 외야수로도 뛰었으며, 1962년 메츠 창단 시즌의 마지막 남은 선수로 1979년 은퇴할 때까지 팀에 머물렀다. 특히 1969년 '미라클 메츠'의 월드 시리즈 우승 주역 중 한 명으로, 팬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으며 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에드 크레인풀은 1944년 11월 8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임스 몬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와 농구를 시작하며 운동 재능을 키웠다.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스포츠)인 버버 조나드(Bubber Jonnard)는 1962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아마추어 자유계약선수로 크레인풀과 계약을 맺었다.
3. 프로 야구 경력
에드 크레인풀은 뉴욕 메츠에서 18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을 보내며 팀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다. 그는 팀의 창단 멤버로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1969년 '미라클 메츠'의 기적적인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3.1. 계약 및 메이저 리그 데뷔 (1962년)
1962년 프로 계약 후, 크레인풀은 메츠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 세 단계에서 합계 타율 .301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해 9월, 그는 프로 첫 시즌 만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 당시 17세였던 크레인풀은 1962년 메츠 선수단 중 두 번째로 어린 선수보다 6살이나 어렸는데, 이는 메츠 구단이 196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확장 드래프트에서 주로 노련한 베테랑들을 선택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1962년 9월 22일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등번호 21번을 달고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길 호지스의 1루수 대수비로 후반에 투입되었으며, 유일한 타석에서 컵스 2루수 켄 허브스에게 땅볼을 쳤다. 다음 날인 9월 23일, 그는 1루수로 첫 선발 출장하여 4타수 1안타 12루타를 기록했다.
3.2. 메츠에서의 초기 경력 개발 및 도전 (1963-1966년)
1963년 시즌 초, 크레인풀은 1루에서 "마블러스" 마브 스론베리와, 우익수에서 듀크 스나이더와 출전 시간을 나누어 가졌다. 5월 5일, 스론베리가 시즌 첫 23경기 동안 타율 .143과 1타점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보이자, 그는 메츠의 트리플 A 계열사인 버팔로 바이슨스로 강등되었다. 1루수 자리는 팀 하크니스에게 돌아갔고, 스나이더는 좌익수로 이동했으며, 크레인풀은 메츠의 주전 우익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크레인풀은 7월에 타율 .190을 기록한 채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그는 그 시즌 후반에 9월 재승격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복귀 첫 경기에서 5타수 4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시즌 막판의 활약으로 그는 시즌 타율을 .209까지 끌어올렸다.
1964년 시즌 초, 크레인풀은 하크니스, 딕 스미스, 프랭크 토마스와 1루를 공유하면서 대부분의 출전 시간을 우익수로 소화했다. 5월 24일, 조 크리스토퍼가 타율 .303을 기록하며 우익수 주전 자리를 꿰찼고, 크레인풀은 타율 .139를 기록한 채 버팔로로 강등되었다. 버팔로에서 15경기 동안 3홈런과 타율 .352를 기록한 후, 그는 다시 메츠로 승격되었다. 버팔로에서의 마지막 날, 크레인풀은 더블헤더 (야구) 18이닝 전체를 소화한 후, 다음 날 두 경기가 예정된 셰이 스타디움으로 호출되었다. 5월 31일 일요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1루수로 출전했다. 크레인풀은 23이닝까지 진행된 더블헤더 2차전에서도 1루수로 뛰었다. 그는 총 23이닝을 모두 소화하며 두 경기에서 14타수 4안타를 기록했다. 이틀 동안 총 50이닝을 뛴 셈이다. 그는 나중에 거의 10시간 동안 진행되어 밤 11시 20분에 끝난 이 기록적인 더블헤더에 대해 "40분만 더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그럼 5월에 시작해서 6월에 끝난 경기를 뛰었다고 항상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라고 덧붙였다. 이 두 경기는 크레인풀의 타율을 .264로 끌어올린 13경기 연속 안타의 시작이었다. 시즌 전체적으로 크레인풀은 타율 .257, 10홈런, 45타점을 기록했다.
1965년 시즌 시작 전, 메츠는 미래의 명예의 전당 투수 워렌 스판을 밀워키 브레이브스로부터 영입했다. 크레인풀은 스판이 평생 달았던 등번호 21번을 그에게 양보하고 등번호 7번을 달기 시작했다. 시즌 중반까지 크레인풀은 타율 .287, 7홈런, 37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196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의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에 메츠의 유일한 대표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시즌이 끝날 무렵, 크레인풀의 타율은 .253으로 떨어졌지만, 이는 여전히 메츠 팀 내에서 가장 높은 타율이었다. 그 시즌 메츠는 112패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10개 팀 중 최하위로 마쳤다. 그는 또한 팀 내 최다인 133안타와 242루타를 기록했다.
1966년, 크레인풀은 개인 최고 기록인 16홈런으로 메츠의 공격을 이끌며, 팀이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최하위와 100패를 면하는 데 기여했다(95패).
3.3. 1969년 미라클 메츠 시즌
1969년, 크레인풀은 아모스 오티스와 밥 하이세와 함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조 토레를 영입하려는 메츠의 트레이드 제안 패키지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토레는 대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했다.
1969년 5월 21일, 메츠는 시즌 36경기 만에 처음으로 3연승을 거두며 5할 승률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후 5연패를 당하며 새로 재편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4위로 떨어졌다. 메츠는 이어서 11연승을 달렸고, 이 기간 동안 크레인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2홈런을 기록했다. 연승이 끝날 무렵, 메츠는 시카고 컵스에 7경기 뒤진 2위를 기록했다.
7월 8일, 크레인풀은 페르가슨 젠킨스를 상대로 5회에 홈런을 쳐 메츠에 1-0 리드를 안겼다. 그러나 메츠가 9회에 타석에 들어설 때쯤, 선두 컵스는 3-1로 앞서 있었다. 메츠는 9회에 3점을 득점하여 경기를 승리했고, 클레온 존스가 크레인풀의 단타로 결승 득점을 올렸다.
크레인풀은 톰 시버, 제리 쿠스만 등의 활약과 함께 메츠의 놀라운 '미라클' 1969 시즌을 완성했으며, 팀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크레인풀은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홈런을 쳐 메츠의 5-0 승리에 기여했다.
3.4. 후기 경력 및 역할 변화 (1970-1973년)
기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70년까지 | .246 | .298 | .358 | .656 |
1970년 이후 | .278 | .333 | .398 | .732 |
1970년 6월 23일, 크레인풀은 타율 .118에 불과했고, 메츠의 트리플 A 계열사인 타이드워터 타이드로 강등되었다. 그는 은퇴를 고려했지만, 대신 재배치를 받아들여 타이드워터에서 47경기 동안 타율 .310을 기록했다. 그는 8월 중순에 메츠로 복귀했지만, 출전 시간은 매우 적었다. 이 시즌 크레인풀은 43경기에서 52타석만을 소화했다.
크레인풀은 1971년 아마도 그의 경력 중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타율 .280, 14홈런, 58타점, 그리고 123의 조정 OPS를 기록하며 반등했다. 그는 또한 .998의 수비율로 내셔널 리그 1루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 경력 후반의 강등은 크레인풀에게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는 특정 풀타임 역할을 맡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타자와 1루수/외야수로 자리매김했다.
1973년, 크레인풀은 존 밀너에게 1루수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인풀은 100경기에 출전하여 밀너의 1루수 백업과 클레온 존스의 좌익수 백업으로 320타석을 소화했다. 메츠는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1973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와 맞붙었다. 크레인풀의 유일한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출전은 5차전이었고, 그는 메츠의 시리즈 확정 승리에서 첫 두 점을 타점하며 팀을 1973년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그는 1973년 월드 시리즈 4경기에 출전했지만, 3타석에서 무안타에 그쳤다.
3.5. 프랜차이즈 선수 및 마지막 시즌 (1974-1979년)
크레인풀은 1974년과 1975년 연속으로 타율 .300을 기록하며 밀너와 데이브 킹맨과 함께 1루수 임무를 공유했다. 1975년 10월 4일 메츠 구단주 조안 페이슨이 사망하자, 그녀는 팀을 남편 찰스에게 남겼다. 조안이 메츠의 원동력이었지만, 그녀의 유족들은 야구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찰스는 세 딸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딸들은 야구 관련 업무를 구단 회장 M. 도널드 그랜트에게 맡겼다. 크레인풀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페이슨 여사의 장례식에 초대받은 유일한 메츠 선수였다.
메츠는 1976년 프랜차이즈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승률(86승 76패)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3위로 마쳤다. 크레인풀은 그 시즌에도 메츠의 주전 1루수로 활약하며 타율 .292, 10홈런, 49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1974년부터 1977년까지 431경기에서 타율 .299, 28홈런, 156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인기 있는 중견수 리 매질리가 구단의 얼굴이 되었다. 크레인풀은 비록 경력 후반에 대타 역할로 제한되었지만, 메츠의 과거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크레인풀은 대타로 타율 .396을 기록했으며, 특히 1974년에는 대타로 35타수 17안타(타율 .486)를 기록하여 여전히 메이저 리그 단일 시즌 대타 타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8년 시즌이 끝난 후 메츠가 제리 쿠스만을 트레이드하자, 크레인풀은 1969년 '미라클 메츠'의 마지막 남은 선수가 되었다.
1979년 시즌이 끝난 후 34세의 나이로 은퇴했을 때, 그는 메츠 역대 8개 공격 부문에서 선두를 달렸지만(모두 이후에 경신됨), 2024년 시즌까지도 메츠 최다 출전 경기(1,853경기)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18시즌 동안 뛰면서 메츠 팬들 사이에서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그는 1962년 메츠 창단 멤버 중 팀에 마지막까지 남았고, 메이저 리그에서 은퇴한 마지막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비교적 젊었지만, 대타로서 안타를 계속 쳐낼 때만 유용했다. 또한 어머니 조안 페이슨 사망 후 팀을 운영하던 로린다 드룰레(Lorinda DeRoulet)가 이끄는 구단주 그룹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시즌 후 팀이 넬슨 더블데이 주니어와 프레드 윌폰이 이끄는 그룹에 매각되었을 때, 크레인풀은 팀 인수를 시도했던 그룹 중 하나였지만 실패했다.
3.6. 통산 성적 및 수비
에드 크레인풀의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시즌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62 | 3 | 6 | 6 | 0 | 1 | 1 | 0 | 0 | 2 | 0 | 0 | 0 | 0 | 0 | 0 | 0 | 1 | 0 | .167 | .167 | .333 | .500 | ||
1963 | 86 | 294 | 273 | 22 | 57 | 12 | 2 | 2 | 79 | 14 | 4 | 2 | 1 | 2 | 18 | 0 | 0 | 50 | 10 | .209 | .256 | .289 | .545 | |
1964 | 119 | 461 | 420 | 47 | 108 | 19 | 4 | 10 | 165 | 45 | 0 | 1 | 3 | 4 | 32 | 2 | 2 | 50 | 9 | .257 | .310 | .393 | .703 | |
1965 | 153 | 575 | 525 | 44 | 133 | 24 | 4 | 10 | 195 | 53 | 1 | 4 | 1 | 8 | 39 | 7 | 2 | 71 | 13 | .253 | .303 | .371 | .675 | |
1966 | 146 | 512 | 464 | 51 | 118 | 15 | 2 | 16 | 185 | 57 | 1 | 1 | 0 | 4 | 41 | 9 | 3 | 66 | 5 | .254 | .316 | .399 | .715 | |
1967 | 141 | 516 | 469 | 37 | 126 | 17 | 1 | 10 | 175 | 54 | 0 | 4 | 5 | 4 | 37 | 15 | 1 | 51 | 13 | .269 | .321 | .373 | .694 | |
1968 | 127 | 405 | 373 | 29 | 86 | 13 | 1 | 3 | 110 | 20 | 0 | 3 | 10 | 1 | 19 | 5 | 2 | 39 | 6 | .231 | .271 | .295 | .566 | |
1969 | 112 | 396 | 353 | 36 | 84 | 9 | 2 | 11 | 130 | 49 | 3 | 2 | 2 | 4 | 37 | 7 | 0 | 32 | 10 | .238 | .307 | .368 | .675 | |
1970 | 43 | 52 | 47 | 2 | 8 | 0 | 0 | 0 | 8 | 3 | 0 | 0 | 0 | 0 | 5 | 0 | 0 | 2 | 0 | .170 | .250 | .170 | .420 | |
1971 | 122 | 467 | 421 | 61 | 118 | 20 | 4 | 14 | 188 | 58 | 0 | 4 | 5 | 2 | 38 | 6 | 1 | 33 | 7 | .280 | .340 | .447 | .786 | |
1972 | 122 | 368 | 327 | 28 | 88 | 15 | 1 | 8 | 129 | 34 | 1 | 0 | 2 | 4 | 34 | 13 | 1 | 35 | 11 | .269 | .336 | .394 | .731 | |
1973 | 100 | 320 | 284 | 28 | 68 | 12 | 2 | 1 | 87 | 35 | 1 | 0 | 4 | 2 | 30 | 4 | 0 | 28 | 7 | .239 | .310 | .306 | .616 | |
1974 | 94 | 237 | 217 | 20 | 65 | 11 | 1 | 4 | 90 | 24 | 1 | 0 | 0 | 2 | 18 | 0 | 0 | 14 | 5 | .300 | .350 | .415 | .765 | |
1975 | 106 | 357 | 325 | 42 | 105 | 16 | 0 | 4 | 133 | 43 | 1 | 1 | 0 | 5 | 27 | 6 | 0 | 21 | 12 | .323 | .370 | .409 | .779 | |
1976 | 123 | 455 | 415 | 47 | 121 | 17 | 1 | 10 | 170 | 49 | 1 | 0 | 2 | 3 | 35 | 4 | 0 | 38 | 10 | .292 | .344 | .410 | .754 | |
1977 | 108 | 309 | 281 | 28 | 79 | 17 | 0 | 10 | 126 | 40 | 1 | 4 | 0 | 5 | 23 | 7 | 0 | 20 | 10 | .281 | .330 | .448 | .778 | |
1978 | 66 | 93 | 81 | 7 | 17 | 2 | 0 | 3 | 28 | 19 | 0 | 0 | 0 | 3 | 8 | 2 | 1 | 12 | 4 | .210 | .280 | .346 | .625 | |
1979 | 82 | 174 | 155 | 7 | 36 | 5 | 0 | 2 | 47 | 17 | 0 | 1 | 0 | 5 | 13 | 2 | 1 | 18 | 6 | .232 | .287 | .303 | .591 | |
MLB:18년 | 1853 | 5997 | 5436 | 536 | 1418 | 225 | 25 | 118 | 2047 | 614 | 15 | 27 | 35 | 58 | 454 | 89 | 14 | 581 | 138 | .261 | .316 | .377 | .693 |
크레인풀은 1루수로 통산 수비율 .994, 외야수로 .975를 기록했다. 전체적으로 그는 통산 수비율 .993으로 경력을 마쳤다. 대타로서 그의 경력은 325타수 90안타(타율 .277), 6홈런, 55타점을 기록했다.
4. 미디어 출연 및 대중적 인정
1978년 질레트 포미 쉐이빙 크림의 텔레비전 광고는 크레인풀이 삼진을 당하는 흑백 필름 영상으로 시작하며, 아나운서는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에드 크레인풀은 타율 .227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에드는 질레트 포미로 바꿨습니다."라고 말했다. 광고는 크레인풀이 거울 앞에서 거품을 내고 면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가 우익선상을 따라 공을 치는 컬러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아나운서는 "1971년 이후 에드는 타율 .283을 기록했습니다! 에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야구 선수들이 오랫동안 미신에 대한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광고는 크레인풀이 유니폼을 입고 덕아웃에 서서 포미 캔을 들고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매 이닝마다 면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내레이션은 "포미: 뉴욕의 강타자들에게 충분히 두껍고 풍부합니다."였다.
또 다른 질레트 광고에서는 크레인풀이 욕실에서 촛불을 켜고 정전 중에 포미를 사용하여 면도를 시도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광고는 전 시즌인 1977년 7월 13일 셰이 스타디움에서 메츠 홈 경기 중에 발생한 뉴욕 시 정전 (1977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크레인풀은 또한 제리 쿠스만과 함께 스포츠폰 광고에도 출연했다.
크레인풀은 1986년 뉴욕 (주) 상원의원 앨폰스 디아마토를 위한 선거 운동 광고에서 뉴욕 메츠 유니폼을 입고 출연하여 비난을 받았다. 메츠 구단주의 항의에 따라 광고는 빠르게 철회되었다. 크레인풀은 또한 1979년 봄 훈련 중에 촬영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한 촌극에서 빌 머레이가 인터뷰하는 카메오로 출연했다. 이 촌극은 개릿 모리스가 연기한 치코 에스쿠엘라(Chico Escuela)의 폭로 서적 배드 스터프 어바웃 더 메츠(Bad Stuff 'bout The Mets)에 관한 것이었다(이 책은 스파키 라일의 뉴욕 양키스에 대한 폭로 서적 브롱크스 주의 패러디였다). 그는 1999년 에브리바디 러브스 레이몬드 에피소드에 1969년 메츠의 다른 여러 멤버들과 함께 본인으로 출연했다.
5. 은퇴 후 생활 및 사업 활동
은퇴 후 크레인풀은 주식 중개인, 레스토랑 경영자로 일했으며, 신용카드 처리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1990년, 그는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메츠 역대 최다 안타 목록에서 1,418안타로 3위에 올랐지만, 이후 데이비드 라이트의 1,777안타와 2017년 호세 레예스의 1,534안타에 의해 추월당했다. 그는 은퇴 후 메츠 구단 인수를 시도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뉴욕주 올드 웨스트버리에 거주했다.
6. 건강 및 개인 생활
크레인풀은 은퇴 직후 당뇨병을 앓게 되었다. 2017년에는 감염된 농양으로 인해 발가락 하나를 절단해야 했다. 당시 그의 양쪽 신장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어 감염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그는 신장 이식 대기자 명단에 올랐다. 2019년 5월 7일, 크레인풀은 스토니브룩 대학교 병원에서 살아있는 기증자로부터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크레인풀의 자서전인 마지막 기적: 어메이징 뉴욕 메츠와 함께한 나의 18년 여정(The Last Miracle: My 18-Year Journey with the Amazin' New York Mets더 라스트 미라클: 어메이징 뉴욕 메츠와 함께한 나의 18년 여정영어)은 2023년 8월에 출판되었다.
7. 사망
에드 크레인풀은 2024년 9월 8일 플로리다주 보카 라톤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8. 유산 및 영향력
에드 크레인풀은 뉴욕 메츠 팬들에게 영원히 사랑받는 전설적인 선수로 기억된다. 그는 메츠 창단 멤버로서 팀의 초기 역사를 함께했고, 특히 1969년 '미라클 메츠'의 기적적인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메츠에서만 18시즌을 뛰며 보여준 그의 팀에 대한 충성심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는 그가 은퇴 후에도 지속적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메츠 역사와 야구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팀의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함께한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9. 관련 항목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선수 목록 (K)
- 한 프랜차이즈에서 모든 경력을 보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