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에드워드 크레인은 1862년 5월 27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힘을 가진 인물로 알려졌다. 전성기에 크레인은 "체력과 체격 면에서 거인"이라고 묘사될 정도로 강인한 신체를 자랑했다. 그는 당대 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어깨를 가지고 있었는데, 야구공을 무려 135 yd나 던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 시대에 야구를 했던 어떤 선수보다도 멀리 던진 기록이었다.
2. 선수 경력
에드 크레인의 야구 선수 경력은 1884년부터 1896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리그와 팀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겪었다.
2.1. 데뷔 및 초기 경력 (1884-1887)
크레인은 1884년 4월 유니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보스턴 레드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보스턴 레드에서 101경기에 출전했으며, 이 중 57경기는 외야수로, 42경기는 포수로 뛰었다. 루키 시즌에 그는 유니언 어소시에이션 리그의 주요 타격 부문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홈런 12개로 리그 2위, 장타율 .451로 4위, 총 루타 193개로 4위, 장타 41개로 5위, 득점 59점으로 7위, 안타 122개로 8위, 타율 .285로 10위를 기록하며 유망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유망했던 루키 시즌 이후, 크레인은 내셔널 리그로 이적하면서 부진을 겪었다. 1885년에는 프로비던스 그레이스와 버펄로 바이슨스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14경기에만 출전했으며, 모두 외야수로 뛰었다. 1886년에는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80경기에 출전했는데, 이 중 68경기는 외야수로, 10경기(70이닝)는 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타격 성적은 급격히 하락하여 타율이 .171로 떨어졌고 54개의 삼진을 당했다. 투수로도 1승 7패, 방어율 7.20을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을 보였다.
1886년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크레인은 1887년 메이저 리그에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국제 리그 (19세기) 소속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엄청난 시즌을 보냈다. 1887년 국제 리그 타율왕을 차지하며 .428의 타율을 기록했다(당시 국제 리그에서는 볼넷이 안타로 계산되었다). 그의 1887년 .428 타율은 여전히 프로 야구 역사상 투수가 기록한 최고 타율로 남아있다. 또한 그는 33승을 기록하며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역사상 최다승 기록을 세웠고, 팀을 첫 국제 리그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었다. 1887년 한 번은 토요일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경기에서는 결승 홈런까지 쳐내며 팀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2. 뉴욕 자이언츠와 주요 업적 (1888-1890)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크레인은 1888년과 1889년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했다. 1888년 시즌, 그는 초기 월드 시리즈 우승팀인 자이언츠에서 5승 6패를 기록했다. 크레인은 1888년에 두 가지 야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달성했다.
1888년 9월 27일, 크레인은 뉴욕 자이언츠 역사상 최초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7이닝 경기에서, 크레인은 어둠 때문에 경기가 중단되기 전까지 세너터스 타선을 무안타로 막아내며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 크레인은 6명의 타자를 자신에게 오는 땅볼로 처리했고, 5명의 세너터스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그 다음 주 1888년 10월 4일, 크레인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단일 이닝 4탈삼진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
1889년 시즌, 크레인은 29경기(선발 25경기)에 등판하여 14승 10패로 훨씬 향상된 기록을 세웠고, 230이닝 동안 2.43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크레인의 경력은 1889년 월드 시리즈에서 정점에 달했는데, 그는 마운드와 타석 모두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마운드에서는 5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승을 거두었고, 38이닝 동안 3.79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타석에서는 5타점, .611의 장타율, 3득점, 1개의 2루타, 1개의 3루타, 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889년 10월 뉴욕 월드지는 크레인의 월드 시리즈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뚱뚱하고 유쾌한 에드 크레인이 뉴욕의 투수 마운드에 올랐다... 에드는 엄청난 속도로 공을 던졌고, 그의 무적의 '커브'와 '슈트'에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 선수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것을 본 뉴욕 시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2.3. 월드 투어 참가와 알코올 의존
1889년 월드 시리즈에서 경력의 정점을 찍은 후, 그해 가을부터 크레인의 삶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9년 시즌이 끝난 후, 크레인은 유명한 스팔딩 월드 투어에 참가하면서 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 투어는 야구계 최고의 선수 20명이 참여했으며,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1890년 4월 초까지 이어졌다.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때까지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일행이 파리에 도착하자 크레인은 무너졌다... 그가 다시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샴페인을 마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덜 비싼 술에도 맛을 들였다." 이 월드 투어는 크레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전해지며, 결국 음주는 그를 "직업 없이 무능력한 상태"로 만들었다. 크레인의 스팔딩 월드 투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크 램스터의 저서 "스팔딩의 월드 투어: 야구를 전 세계로 가져가 미국의 스포츠로 만든 대서사적 모험"(Spalding's World Tour: The Epic Adventure that Took Baseball Around the Globe-and Made It America's Game영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2.4. 후기 경력 및 리그 이동 (1891-1893)
스팔딩 투어에서 돌아온 후, 크레인은 1890년 선수들이 직접 결성한 경쟁 리그인 플레이어스 리그 운동에 합류하여 새로 창단된 뉴욕 자이언츠에서 많은 옛 동료들과 함께 뛰었다. 그는 16승 19패를 기록했고, 330과 3분의 1이닝 동안 3.68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1890년부터 크레인의 제구력은 무너지기 시작하여 역사적인 수준으로 볼넷을 허용했다. 1890년에는 210개의 볼넷을 내주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13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그는 1891년에 203개, 1892년에 189개의 볼넷을 기록했는데, 이 두 해의 기록 또한 역대 단일 시즌 볼넷 기록 중 상위권에 속한다.
1891년, 크레인은 켈리의 킬러스에서 뛰며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19세기)에서 2.45의 방어율과 250이닝 동안 25번의 완투를 기록하며 리그를 이끌었다. 그는 1891년 시즌 후반부를 신시내티 레즈에서 보냈고, 그 해를 18승 22패로 마무리했다. 1892년에는 뉴욕 자이언츠에서 24패를 기록했다. 31세였던 1893년, 크레인은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그룸스 사이에서 시즌을 나누어 뛰었으며, 이 해를 끝으로 그의 메이저 리그 경력은 막을 내렸다.
2.5. 선수 생활의 마지막 (1894-1896)
브루클린에서 방출된 후, 크레인은 토론토에서 뛰었고 이어서 프로비던스와 로체스터에서 활동했다. 1896년 시즌은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는데, 로체스터에서 "그는 실패했지만 시즌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부고에 따르면, "그의 팔 상태가 좋지 않았고", 로체스터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스프링필드에서 뛰었지만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로체스터에서 몇 경기를 심판으로 뛰기도 했으나, 리그 회장에 의해 해고되었다.
3. 개인적 특성과 별명
에드 크레인은 그의 큰 체구 때문에 '캐논볼'(Cannonball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89년 월드 시리즈 활약에 대한 신문 기사에서는 그를 "뚱뚱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식사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키 1.5 m (5 ft) 0.3 m (10 in)에 몸무게 93 kg (204 lb)에 달했다. 한 책에서는 크레인을 "엄청난 대식가"라고 묘사하며, 그가 가장 좋아했던 간식은 "수프 그릇에 담아 나오는 삶은 달걀 12개 한 접시였고, 그 위에 조개 24개 한 접시를 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사망
선수 생활을 완전히 마친 후, 34세의 크레인은 생의 마지막 몇 주를 "시골을 돌아다니며" 잡일을 하고 "점점 더 심하게 술을 마시며" 보냈다. 사망 전날, 그는 로체스터의 한 호텔에서 다음 날 방을 비워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하루 종일 술을 심하게 마셨고, 잠자리에 들 때 "매우 우울해 보였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크레인은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검시관 조사가 진행되었고, 공식적인 사인은 "신경과민으로 인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처방약의 우발적 과다 복용"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검시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크레인이 산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내와 자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5. 문학에서의 재조명
1996년 캐나다 시인 브루스 마이어는 "굿바이 미스터 스팔딩"(Goodbye Mr. Spalding영어)이라는 시집을 출판했는데, 이 시집에는 "선라이트 파크"(Sunlight Park영어)라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선라이트 파크는 토론토에 있었던 최초의 야구장 이름이다. 마이어는 이 이야기에서 1887년 토론토의 첫 야구 챔피언십 페넌트 우승을 이끈 캐논볼 크레인의 활약을 기록하고, 한 세기 후에는 십대 아들의 죽음을 직면하지 못하는 한 슬픔에 잠긴 아버지가 캐논볼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들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다룬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직면하는 대신, 크레인의 마지막 날들의 비밀을 풀기로 결심한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그를 시간 여행을 통해 캐논볼과의 상상 속 만남으로 이끌고, 그들의 "인터뷰"는 크레인의 명백한 자살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