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및 가계
애설레드 1세의 가계는 웨식스 왕조의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그의 조부인 웨식스의 에그버트는 802년에 웨식스 왕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가 지속적인 왕조를 세울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200년 동안 세 가문이 웨식스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 적이 없었다. 에그버트의 조상 중 6세기 후반의 케아울린 이후 웨식스 왕이 된 이는 없었으나, 그는 웨식스 왕조의 시조인 케르딕의 부계 후손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에그버트는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왕자, 즉 '애설링'이 되었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통치 이후에는 케르딕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는 애설링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에그버트가 839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웨식스의 애설울프가 뒤를 이었으며, 이후 모든 웨식스 왕들은 에그버트의 후손이자 왕의 아들이었다.
9세기 초, 잉글랜드는 거의 전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중부 왕국인 머시아는 남부 잉글랜드를 지배했지만, 825년 에그버트가 엘렌둔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면서 머시아의 패권은 막을 내렸다. 이후 두 왕국은 동맹 관계가 되었고, 이는 바이킹의 공격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53년,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은 웨일스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웨식스에 도움을 요청했고, 애설울프는 웨식스 군대를 이끌고 성공적인 공동 작전을 펼쳤다. 같은 해 버그레드는 애설울프의 딸 애설스위드와 결혼했다.
825년, 에그버트는 애설울프를 보내 머시아의 하위 왕국인 켄트를 침공하게 했고, 그곳의 부왕 켄트의 발드레드는 곧 쫓겨났다. 830년까지 에식스, 서리, 서식스 또한 에그버트에게 복속되었고, 그는 애설울프를 켄트의 왕으로 삼아 남동부 영토를 통치하게 했다. 바이킹은 835년에 셰피 섬을 약탈했고, 이듬해에는 서머싯주의 카햄프턴에서 에그버트를 격파했으나, 838년에는 콘월족과 바이킹의 연합군을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물리치고 콘월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애설울프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는 그의 장남인 켄트의 애설스탠 (850년대 초 사망)을 켄트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에그버트와 애설울프는 웨식스와 켄트 간의 영구적인 통합을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이는 그들이 모두 아들들을 부왕으로 임명했고, 웨식스 헌장은 웨식스 귀족들이, 켄트 헌장은 켄트 엘리트들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두 왕은 전반적인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부왕들은 자체 주화를 발행할 수 없었다.
840년대 초 영국 해협 양쪽에서 바이킹의 약탈이 증가했고, 843년 애설울프는 카햄프턴에서 패배했다. 850년, 애설스탠은 샌드위치 해상에서 데인족 함대를 격파하여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해전에서 승리했다. 851년 애설울프와 그의 차남 웨식스의 애설발드는 아클레아 전투에서 바이킹을 물리쳤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지금까지 들은 이교도 약탈군에 대한 가장 큰 학살을 일으키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었다. 애설울프는 858년에 사망했고, 그의 가장 나이 많은 생존 아들인 애설발드가 웨식스 왕으로, 그 다음 아들인 웨식스의 애설베르트가 켄트 왕으로 계승했다. 애설발드는 아버지보다 2년만 더 살았고, 애설베르트는 그 후 처음으로 웨식스와 켄트를 단일 왕국으로 통합했다.
1.1. 조상 및 부모
애설레드는 웨식스의 애설울프 왕의 다섯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오스버는 웨식스 왕족 출신이었다. 역사가 숀 밀러에 따르면, 애설레드는 848년에서 849년 사이에 태어난 그의 동생이자 미래의 알프레드 대왕보다 약 1년 정도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리처드 아벨스는 애설레드가 853년에 약 8세였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는 그가 845년경에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1.2. 형제자매
애설레드에게는 애설발드, 애설베르트, 그리고 알프레드라는 형제들이 있었다. 애설울프 왕은 그의 재산 일부를 세 아들, 즉 애설발드, 애설레드, 알프레드에게 공동으로 남겼으며, 가장 오래 사는 형제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는 조항을 두었다. 860년 애설발드가 사망하자, 아직 어렸던 애설레드와 알프레드는 그들의 몫을 새로운 왕인 형 애설베르트에게 맡기기로 합의했다. 애설베르트는 그 재산을 온전히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애설레드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알프레드는 위탄 (지도자들의 의회) 회의에서 그에게 자신의 재산 몫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애설레드는 여러 번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너무 어려웠다며, 대신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알프레드에게 남기겠다고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유증이 애설울프의 모든 북랜드 (유언으로 남길 수 있는 개인 재산)를 포함하며, 왕권 유지를 위해 북랜드를 왕이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에 애설울프의 조항은 왕위가 형제들에게 차례로 계승될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이 유증이 왕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알프레드 스마이스는 이 유증이 애설울프의 어린 아들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를 위한 것이었으며, 애설발드가 젊은 나이에 사망할 경우 수탁자이자 잔여 수혜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알프레드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애설레드의 어린 아들들의 지지자들은 알프레드가 그들과 재산을 나누었어야 한다고 불평했고, 알프레드는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기 위해 위탄 회의에서 아버지의 유언을 낭독하게 했다. 알프레드는 애설레드의 헌장에 거의 증인으로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둘러싼 논쟁과 함께 그들이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폴린 스태퍼드는 애설레드가 자신의 아들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아내의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헌장에 명시했다고 주장한다.
1.3. 결혼 및 자녀
애설레드는 865년 애설베르트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고, 울프스리드와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결혼했다. 9세기 웨식스 왕들의 아내들은 지위가 낮았으며, 그들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들은 보통 '레기나'(여왕)라는 칭호를 받지 못했는데, 알프레드 대왕은 9세기 초 한 여왕의 부적절한 행위를 이유로 이러한 관행을 정당화했다. 애설레드의 아내 이름은 그녀가 868년 헌장 S 340에 '울프스리드 레기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녀가 다른 왕의 아내들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9세기 왕의 아내 중 유일하게 이 칭호를 받은 다른 인물은 애설울프의 두 번째 아내이자 샤를마뉴의 증손녀인 플랑드르의 주디스였다.
울프스리드와 애설레드 사이에는 두 명의 알려진 아들, 애설헬름과 애설월드가 있었다. 애설레드에게는 오스왈드 또는 오스웨알드라는 세 번째 아들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는 868년 두 개의 헌장에서 '필리우스 레기스'(왕의 아들)로, 875년 알프레드 통치 기간 중 또 하나의 헌장에서 같은 칭호로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데이비드 덤빌은 그가 애설레드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자넷 넬슨은 알프레드의 유언 서문에서 애설레드의 아들들(애설헬름과 애설월드)에 대한 분쟁만이 언급된다는 이유로 이를 일축한다. 울프스리드는 머시아 출신이거나 윌트셔의 울프헤르 백작의 딸이었을 수 있다. 울프헤르는 878년경 알프레드 왕을 버리고 데인족에게 가담했다는 혐의로 토지를 몰수당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자신의 손자 애설헬름의 왕위 주장을 알프레드에 대항하여 바이킹의 지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일 수 있다.
2. 초기 생애
애설레드의 어린 시절과 교육, 그리고 왕위에 오르기 전의 활동에 대해 다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애설레드는 웨식스의 애설울프 왕의 다섯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오스버는 웨식스 왕족 출신이었다. 리처드 아벨스에 따르면 애설레드는 853년에 약 8세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그가 845년경에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애설레드는 834년경에 태어났으며, 아버지 애설울프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어머니 오스버 왕비에 의해 매우 경건하게 양육되었다.
890년대에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필사본 A에 따르면, 853년에 알프레드는 아버지에 의해 로마로 보내져 교황에 의해 왕으로 성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그가 이 어린 나이에 왕으로 성별되었다고 믿지 않으며, 이 의식의 실제 성격은 교황 레오 4세가 애설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되어 있다. 이 편지에는 교황이 알프레드를 "영적인 아들로서, 로마 집정관들에게 관례적인 벨트와 집정관의 예복으로 장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의 브레시아 산 살바토레의 리베르 비타이 (형제회 서적)에는 애설레드와 알프레드 두 형제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두 형제가 모두 로마에 갔음을 나타낸다. 애설레드 또한 교황에 의해 장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의식은 나중에 알프레드의 위대함을 예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연대기 작가나 11세기 교황의 편지 발췌자 모두 덜 알려진 그의 형의 존재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2.2. 왕위 계승 전 활동
애설레드는 854년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헌장에 '필리우스 레기스'(왕의 아들)로서 증인으로 서명했으며, 865년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이 칭호로 증인 역할을 했다. 그는 즉위 전에 부왕으로 활동했을 수도 있는데, 862년과 863년에 그는 서색슨족의 왕으로서 자신의 헌장을 발행했다. 이는 그의 형인 애설베르트 왕의 대리인으로서 또는 부재 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갈등 기록이 없으며, 그는 864년에도 형의 헌장에 왕의 아들로서 계속 증인으로 서명했다.

3. 통치
애설레드의 즉위 과정과 재위 기간 동안의 주요 사건들, 특히 바이킹 침입에 대한 대응과 화폐 발행 정책에 대해 설명한다.
3.1. 즉위
애설레드는 865년 형 애설베르트의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웨식스 왕과 켄트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왕국을 통합 통치했다. 868년, 애설레드는 머시아의 애설링이 증인으로 서명한 헌장을 발행했으며, 그 자신도 그의 누이이자 머시아의 여왕인 애설스위드가 발행한 헌장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애설레드는 자신의 헌장에서 여러 다른 칭호를 사용했다. 그가 증인으로 서명한 애설스위드의 헌장과 자신의 헌장 다섯 개에서는 아버지의 일반적인 칭호인 '렉스 옥시덴탈리움 삭소눔'(서색슨족의 왕)으로 불린다. 두 개의 헌장에서는 "서색슨족과 켄트인의 왕"으로, 각각 한 개의 헌장에서는 "왕"과 "색슨족의 왕"으로 불린다. 애설레드와 그의 형들의 웨식스 헌장은 통일된 양식을 따랐는데, 이는 수년 동안 운영된 단일 기관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3.2. 바이킹 침입과 전쟁
애설레드가 왕위에 오른 해에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 공격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산발적인 약탈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정복과 정착을 목표로 하는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시대인들이 '대이교도 군대'라고 부른 대규모 바이킹 병력이 이스트앵글리아에 상륙했다. 이스트앵글리아의 에드먼드 왕은 공물을 바쳐 평화를 샀고, 바이킹은 1년 동안 머물며 세력을 키웠다. 그들은 이어서 요크로 진격하여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꼭두각시 왕을 세웠다. 867년 말, 그들은 머시아의 노팅엄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애설레드의 매형인 버그레드 왕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애설레드와 알프레드는 대규모 웨식스 군대를 이끌고 노팅엄으로 가서 바이킹을 포위했지만, 그들은 도시 방어의 안전을 벗어나기를 거부했다. 연합된 머시아와 웨식스 군대는 흙으로 된 성벽과 해자를 뚫을 수 없었고, 결국 버그레드는 그들에게 돈을 주고 물러나게 했다. 바이킹은 그 후 요크로 돌아갔다. 874년, 바이킹은 머시아를 장악하고 버그레드와 애설스위드를 망명시켰다.
869년, 바이킹은 이스트앵글리아로 돌아와 왕국을 정복하고 에드먼드 왕을 살해했다. 타이 자료에 따르면, 이스트앵글리아의 소왕 에드먼드는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이스트앵글리아인들은 패배했고 왕은 서퍽주의 혹센으로 도망치던 중 포로로 잡혀 쇠사슬에 묶이고 족쇄가 채워졌다. 에드먼드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는데, 바이킹 신 오딘에게 희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명예롭고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했으며, 확고한 가톨릭 신앙으로 인해 후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수도원은 폐허가 되고 승려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약탈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870년 12월, 바이킹은 바그세그와 하프단 왕의 지휘 아래 웨식스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들은 12월 28일경 레딩을 점령했다. 이 도시는 템스강과 케넷강 사이에 위치하며, 그들은 두 강 사이의 남쪽에 해자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착한 지 사흘 후, 그들은 대규모 약탈대를 보냈는데, 이들은 버크셔의 애설울프 백작의 지휘 아래 지역 징집군에 의해 잉글필드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시 나흘 후, 871년 1월 4일경, 애설레드와 알프레드는 웨식스 주력군을 이끌고 애설울프의 군대와 합류하여 레딩 전투에서 데인족을 공격했다. 웨식스군은 도시로 진격하여 외부에서 발견된 모든 데인족을 학살했지만, 도시 문에 도달했을 때 바이킹이 뛰쳐나와 성공적인 반격으로 웨식스군을 격파했다. 사망자 중에는 애설울프 백작도 있었는데, 그의 시신은 몰래 그의 고향인 더비에 묻혔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제프리 가이마르에 따르면, 애설레드와 알프레드는 지역 지형에 대한 더 나은 지식 덕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트위퍼드의 로던강을 건너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레딩에서 동쪽으로 약 9656 m (6 mile) 떨어진 휘슬리 그린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흘 후, 1월 8일경, 양군은 애슈다운 전투에서 다시 만났다. 전투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딩에서 북서쪽으로 약 20921 m (13 mile) 떨어진 물스포드의 킹스탠딩 언덕일 수 있다. 아서의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은 먼저 전장에 도착하여 능선 꼭대기에 배치되어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들은 병력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두 왕이, 다른 하나는 백작들이 지휘했다. 웨식스군은 이를 보고 진형을 모방하기로 결정했으며, 애설레드는 왕들을, 알프레드는 백작들을 상대했다. 왕은 미사를 듣기 위해 자신의 천막으로 물러났고, 알프레드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 양측 모두 방패벽 진형을 형성했다. 애설레드는 그의 기도 시간을 단축하지 않았고, 알프레드는 덴마크군 전체에 의해 측면이 공격당하고 압도될 위험을 감수했다. 그는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했다. 전투는 작은 가시나무 주위에서 격렬하게 벌어졌고, 마침내 웨식스군이 승리했다. 아서는 승리에서 알프레드의 역할을 강조하고 애설레드가 지체했음을 암시하지만, 군사 역사가 존 페디의 견해로는 애설레드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해질 때까지 전투 참여를 지연시킨 것은 군사적으로 올바른 판단이었다. 바이킹은 바그세그 왕과 시드로크 노인, 시드로크 젊은이, 오스번, 프레나, 해럴드 등 다섯 명의 백작을 포함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웨식스군은 밤이 될 때까지 바이킹의 도주를 추격하며 그들을 베어 넘겼다. 알프레드 스마이스는 애설레드가 데인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하며, 일본어 자료에서도 애설레드가 데인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2주 후, 애설레드와 알프레드는 올드 베이싱의 왕실 영지에서 벌어진 베이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후 두 달 동안의 소강상태가 있었고, 웨식스군과 바이킹은 메레툰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만났다. 3월 22일 전투에서 바이킹은 다시 두 부대로 나뉘었고, 웨식스군은 하루 대부분 동안 우위를 점하며 두 부대 모두를 도주하게 만들었지만, 바이킹은 재정비하여 결국 전장을 장악했다. 웨식스군은 셔본의 헤아흐문드 주교를 포함하여 많은 중요한 인물들을 잃었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메레툰 전투는 결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은 전투였으며, 애설레드는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윔본 근처의 위트햄프턴에서 그 부상으로 사망했다.
3.3. 주화 발행
8세기 후반과 9세기에는 남부 잉글랜드에서 은화인 페니(penny)만 주조되었다. 2007년 기준으로 애설레드 시대에 32명의 조폐관이 주조한 152개의 주화가 기록되었다. 그의 통치는 화폐학자 아드리안 라이언스와 윌리엄 맥케이에 의해 "잉글랜드 화폐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묘사된다. 그의 첫 번째 '네 줄' 주화는 그의 전임자인 애설베르트의 '플로리에이트 크로스' 페니와 양식적으로 유사했지만, 그는 곧 이를 포기하고 그의 매형인 버그레드의 머시아 주화 디자인을 채택하여, 남부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처음으로 통일된 주화 디자인을 만들었다. 역사가이자 화폐학자인 로리 나이스미스는 애설레드가 "지역 전통이 아닌 동시대 머시아에서 유행하던 루넷(Lunettes) 유형에 기반한 새로운 주화 유형을 채택하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865년은 바이킹 대군이 대부분의 앵글로색슨 왕국을 해체하기 위해 도착한 해일 뿐만 아니라, 개별 왕국에서 개별 주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라이언스와 맥케이는 이러한 변화를 더욱 중요하게 보았다. "860년대 후반의 발전은 결국 평화왕 에드거의 통일된 화폐 개혁으로 이어진 필수적인 전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화폐의 통합은 머시아와 웨식스 간의 증가하는 협력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통일된 잉글랜드의 탄생을 예고했다."


단일 주화 디자인은 남부 잉글랜드에 일종의 통화 연합을 만들었으며, 두 왕국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혼합과 바이킹에 대한 군사 동맹을 강화했다. 이전 시기의 개별 주화 디자인을 사용하던 웨식스에서 발견된 주화 매장물에는 비웨식스 주화가 거의 없었지만, 공통된 루넷 디자인 채택 이후에는 웨식스와 머시아의 주화가 두 왕국 모두에서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웨식스 매장물에서도 애설레드 1세의 주화는 전체의 소수 비율을 차지했다. 약 100만에서 150만 개의 애설레드 1세 정규 루넷 주화가 생산되었지만, 이는 머시아보다 현저히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시아 디자인이 채택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루넷 유형이 이미 12년 이상 사용되었고, 디자인의 단순성으로 쉽게 복사할 수 있었으며, 머시아 경제의 더 큰 강점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남아있는 애설레드 1세 주화의 대부분은 정규 루넷 디자인으로, 21명의 조폐관이 주조한 118개의 주화가 있으며, 이 중 6명은 버그레드를 위해서도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주화들은 디자인의 일관성과 뛰어난 주조 품질이 특징이며, 주로 캔터베리 조폐관들에 의해 생산되었고, 일부는 머시아의 런던에서 생산되었다. 웨식스 자체에서 생산된 주화는 단 하나만 알려져 있다. 불규칙 루넷 주화도 있었는데, 이 중 하나는 품질이 저하되고 조악한 변형으로, 아마도 바이킹 공격의 압력 아래 애설레드 통치 말기에 통제력이 약화된 결과일 수 있다. 알프레드는 871년 즉위 후 짧은 기간 동안 루넷 디자인을 유지했지만, 875년경 이후에 매장된 주화에서는 이 디자인이 사라진다.
4. 사망 및 사후
애설레드의 사망과 매장, 그리고 그의 왕위 계승 과정 및 후계 문제에 대해 살펴본다.
4.1. 사망
871년 부활절 직후, 즉 그 해 4월 15일 애설레드는 사망했다. 아세르에 따르면, 그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5년 동안 왕국을 활기차고 명예롭게 다스리다가 모든 육신의 길을 갔다"고 한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애설레드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3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고 한다.
4.2. 매장
애설레드는 도싯주 윔본에 있는 왕실 수도원에 묻혔다. 이 수도원은 그의 조상인 잉길드의 누이인 성 쿠스버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의 장례식에 알프레드가 참석하는 동안, 웨식스군은 레딩에서 또 다른 패배를 겪었고, 알프레드 자신도 윌턴에서 패배했다. 그는 바이킹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고, 바이킹은 런던으로 철수했다.
4.3. 계승
애설레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가 살았다면 알프레드가 왕이 될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알프레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애설헬름은 알프레드보다 먼저 사망했고, 애설월드는 899년 알프레드 사망 후 장로왕 에드워드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애설월드가 반란을 일으킨 두 곳 중 하나는 윔본이었는데, 이곳은 그의 아버지가 묻힌 곳으로서 상징적으로 중요했다.
5. 평가 및 유산
애설레드 1세의 통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논란,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5.1. 긍정적 평가
애설레드 1세의 통치는 바이킹 침략에 대한 저항과 화폐 정책을 통한 잉글랜드 통합의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긍정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이교도 군대의 침공이라는 엄청난 위협에 직면하여 왕국의 방어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웠다. 비록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애슈다운 전투와 같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며 바이킹의 진격을 저지하고 웨식스 왕국의 존립을 지켜냈다. 그의 이러한 군사적 저항은 이후 동생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잉글랜드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선행 조건이 되었다.
또한, 애설레드의 주화 발행 정책은 그의 통치에서 매우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그는 머시아의 루넷 주화 디자인을 채택하여 남부 잉글랜드 전체에 걸쳐 통일된 주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당시 웨식스와 머시아 간의 긴밀한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융합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통화 통합은 단순한 경제적 조치를 넘어, 잉글랜드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였으며, 한 세기 후 평화왕 에드거의 화폐 개혁과 잉글랜드 통일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은 왕국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며, 후대 잉글랜드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5.2. 비판 및 논란
애설레드 1세의 재위 기간은 바이킹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레딩 전투, 베이싱 전투, 메레툰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통치 기간 중 겪었던 어려움을 보여준다. 특히 메레툰 전투에서는 셔본의 헤아흐문드 주교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을 잃기도 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애설레드가 전투에서 지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동생 알프레드에 비해 덜 적극적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애슈다운 전투에서 알프레드가 먼저 전장에 나서 싸우는 동안 애설레드는 미사를 드리며 기다렸다는 기록은 그의 군사적 리더십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군사 역사가들은 애설레드의 이러한 지연이 전술적으로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왕국의 압박은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형성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5.3. 후대에 미친 영향
애설레드의 후손들은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반에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증증손자인 애설웨어드 백작은 자신의 라틴어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자신이 애설레드의 후손임을 기록했다. 이아드위그 왕은 이아드위그의 아내 애설기푸와의 결혼이 혈족 관계(근친혼)로 인해 무효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애설기푸는 애설웨어드의 누이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그녀가 애설레드의 후손이므로 이아드위그의 삼촌의 아들의 딸이 되어 교회에서 금지하는 관계 범위 내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애설웨어드와 그의 아들 애설메르 더 스타우트는 웨식스 서부 지역의 백작으로서 서부 지방을 다스린 주요 귀족들이었다. 이 가문은 1016년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지위와 재산을 잃었으며, 애설메르의 아들 중 한 명은 1017년 크누트에 의해 처형되었고, 사위는 1020년에 추방되었다. 또 다른 아들인 캔터베리의 애설노스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어 1038년까지 살았다. 그의 아들들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알프레드가 왕위를 계승한 것은 웨식스 왕조의 안정과 지속에 기여했으며, 이후 애설월드가 알프레드의 아들 장로왕 에드워드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인 것은 왕위 계승 원칙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애설레드의 통치 방식과 그가 직면했던 도전들은 후대 잉글랜드 왕들이 바이킹 위협에 대처하고 왕국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