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시아 플린트(Althea Flynt, 본명: Althea Leasure, Althea Leasure앨시아 리저영어)는 1953년 11월 6일 출생하여 1987년 6월 27일 사망한 미국의 공동 발행인이다. 그녀는 포르노 잡지인 《허슬러》의 공동 발행인이자, 논란의 인물인 래리 플린트의 네 번째 아내로 알려져 있다. 알시아 플린트의 삶은 불우한 유년기부터 심각한 건강 문제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고통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가정사 이후 고아원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래리 플린트와의 만남을 통해 《허슬러》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특히 래리 플린트가 부재하거나 어려운 시기에 잡지의 운영을 도맡아 유지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말년에는 약물 중독과 에이즈로 인한 건강 악화로 고통받았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재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2. 유년기 및 배경
알시아 플린트의 유년기는 극심한 불우함과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인 가정 환경에 노출되었고,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안고 성장해야 했다.
2.1. 출생 및 가정 환경
알시아 리저(Althea Leasure)는 1953년 11월 6일 미국 오하이오주 마리에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셰리(Sherry), 데비(Debbie), 마샤(Marsha) 세 명의 여동생과 리처드(Richard)라는 형제와 함께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알시아가 8살이던 1962년 2월 27일, 그녀의 아버지 리처드는 알시아의 어머니 준(June)과 외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웃을 총으로 쏴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당시 알시아의 외할머니는 인근 개울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2.2. 고아원 생활
아버지의 살인-자살 사건 이후, 알시아는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오하이오주 제니아에 위치한 OSSO 홈(Ohio Soldiers and Sailors Orphanage, 오하이오 군인 및 선원 고아원)에 맡겨졌다. 고아원 생활 중 알시아는 잠재적인 입양 가정으로 보내졌을 때 성적 학대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 고아원을 탈출하기도 했다. 1996년 영화 《래리 플린트》에서는 그녀가 고아원 수녀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내용이 암시되기도 한다.
3. 래리 플린트와의 만남과 직업 활동
알시아 플린트는 래리 플린트를 만나면서 그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허슬러》 잡지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허슬러 입사 및 결혼
1971년, 알시아는 17세의 나이로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위치한 래리 플린트의 허슬러 클럽에 고고 댄서로 취직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그를 처음 만났다. 래리는 다른 스트리퍼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알시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흥미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1976년 8월 21일에 결혼했다. 알시아는 《허슬러》 잡지 최초의 실물 크기 전신 사진이 실린 중앙 접지 모델이었으며, 당시 접지 페이지에는 "Name's Leasure, rhymes with pleasure" (이름은 리저, 즐거움(pleasure)과 운율이 같아요)라는 문구가 실리기도 했다.
3.2. 공동 발행인으로서의 역할
알시아는 11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잡지의 발행인 및 편집자로서 《허슬러》의 개발, 경영, 그리고 발행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는 잡지 경영과 발행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특히 래리 플린트가 어려움을 겪을 때 잡지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7년 래리 플린트가 양극성 장애로 인한 정신병적 조증 삽화로 잠시 '거듭난 신앙인'이 되었을 때, 그리고 1978년 조지아주에서 총격을 당해 거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 그리고 그의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을 포함한 여러 번의 양극성 장애 발작 기간에도 알시아는 《허슬러》 잡지의 발행을 계속하며 잡지가 파산하지 않도록 지탱했다.
3.3. 기타 사업 구상
1980년대 중반, 알시아는 《허슬러》 외에 펑크 서브컬처에 초점을 맞춘 비포르노 잡지인 '더 레이지(The Rage더 레이지영어)'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잡지는 래리 플린트의 1984년 대통령 선거 운동 비용 때문에 결국 발행이 무산되었다.
4. 건강 문제 및 개인적인 어려움
알시아 플린트는 말년에 심각한 건강 문제와 개인적인 고통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4.1. 약물 중독
1978년 래리 플린트가 총격을 당한 후 진통제를 처방받아 사용하기 시작하자, 1982년부터 알시아 역시 그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결국 약물 중독에 빠졌다. 이 약물 중독은 그녀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4.2. 에이즈 진단
1983년, 알시아 플린트는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래리 플린트는 알시아가 자궁절제술 도중 오염된 수혈을 통해 에이즈에 감염되었으며, 약물을 사용할 때는 항상 깨끗한 주사 바늘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에이즈 진단 이후 그녀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으며, 이로 인해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되었다.
5. 사망
알시아 플린트는 1987년 6월 27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부부의 벨에어 저택 욕조에서 익사했다. 초기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처방약 과다 복용으로 인해 의식을 잃고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래리 플린트는 당시 알시아가 이미 에이즈 말기 단계에 있었고, 어차피 1년 이내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래리는 사망 당시 알시아를 직접 돌보고 있었으며, 그녀가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는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알시아 플린트는 원래 켄터키주 살리어스빌(Salyersville)의 레이크빌(Lakeville)에 있는 플린트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2021년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오하이오주로 옮겨졌다.
6. 대중문화 속의 알시아 플린트
알시아 플린트의 삶은 1996년 개봉한 영화 《래리 플린트》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영화에서 알시아는 배우 코트니 러브가 연기했으며, 코트니 러브는 이 배역으로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았다. 영화는 알시아의 불우한 유년기, 래리 플린트와의 만남, 그리고 그녀가 겪었던 약물 중독과 에이즈 투병 등 비극적인 삶의 단면들을 상세하게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