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아키야마 노부토모는 다케다 가문을 섬기며 가문의 영토 확장과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러 전투와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1.1. 출생 및 배경
아키야마 노부토모는 1527년 가이국의 쓰쓰지가사키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키야마 노부토우(秋山信任)로 알려져 있으나, '노부(信)'가 다케다 가문의 통자임을 고려할 때, 그의 아버지의 실명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는 다케다 미쓰토모의 후손이자 다케다 가문의 방계 가문 출신이었다.
1.2. 초기 경력 및 다케다 신겐에 대한 봉사
성년이 된 노부토모는 다케다 가문의 당주이자 가이국의 영주인 다케다 신겐을 섬기기 시작했다. 1547년 이나군 전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현재의 나가노현 가미이나군에 해당하는 이나 북부 지역의 봉토를 하사받았다.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초기 기록은 1549년 5월에 사코지 신베에노조에게 말 세 필에 해당하는 분국 제관소역 면허를 부여한 다케다 가문의 주인장의 주자(奏者)로 등장하는 것이다.
1553년 4월, 시나노국 가쓰라오성이 함락된 후, 노부토모는 가쓰라오성에 주둔하며 전후 처리를 담당했고, 다케다 노부시게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연대 미상의 8월 18일자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의 서한에 따르면, 시나노 오시마성에 주둔하던 무로즈미 토라미쓰(室住虎光)와 '아키야마 젠에몬노조(秋山善右衛門尉)'가 미노국의 사이토 도산이 국경 부근에서 군세를 움직이자 오시마성에서 정세를 하루노부에게 보고했고, 하루노부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이 문서는 1561년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전사한 무로즈미 토라미쓰의 사망 시점을 고려할 때, 1555년 또는 1561년경으로 추정되며, '아키야마 젠에몬노조'는 토라시게(노부토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미노국의 도야마 가문을 지원하기 위해 동국 나에기성에 주둔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556년 3월 1일, 신겐이 미나미시나노 이나군으로 출진하여 지역 호족들을 복속시켰을 때, 노부토모는 이나군의 군다이(郡代)로 임명되어 오시마성의 성대(城代)를 맡았다. 그의 휘하에는 사카니시 슈지(坂西周次)와 지쿠 요리모토(知久頼元)가 있었으며, 그들의 세력은 250여 기에 달했다. 또한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상비(相備)로 배치되어 500여 기의 병력을 이끌었다. 1559년 12월에는 이나군의 하루치카슈(春近衆)인 아카스 마사타메의 소유지 분쟁 해결에도 관여했다.
『고료군감』에 따르면, 노부토모는 처음에는 다카토성에서 '가미이나 군다이'를 맡았으나, 1562년 신겐의 넷째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가 다카토 성주가 되자 이이다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노부토모가 다카토성에 주둔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 이 기록은 의문시된다. 그는 주로 이나군에서 미노, 도토미국, 미카와국 방면의 군사 및 외교 활동에 관여했으며, 이 시기에 '다케다의 맹우' (武田の猛牛다케다노 모규일본어, 문자 그대로 '다케다 가문의 사나운 황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1559년부터 1565년경에는 수령명 '호키노카미(伯耆守)'를 받았으며, 같은 해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협상에서 취차 역할을 수행했다. 1565년에는 미노 도키군의 다카노구치(가노성 부근)에서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다 측(모리 나가요시) 양군 간의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다카노구치 전투). 이때 노부토모는 휘하의 니키(야마나카) 도쿠로에게 150기를 주어 사찰들을 불태우게 했으며, 이로 인해 도키군의 정림사, 천복사, 명백사가 소실되어 한때 폐사되었다. 1568년에는 노부나가가 본거지를 둔 기후를 방문하기도 했다.
1.3. 주요 군사 작전 및 사건
1568년 12월, 신겐은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인 스루가국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스루가 침공). 이때 신겐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안했는데, 『미카와 이야기』에 따르면 도쿠가와 측은 이마가와 영지를 스루가는 다케다령, 도토미는 도쿠가와령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토모가 이나군 병력을 이끌고 도토미로 침공하자, 도쿠가와 측은 이에 항의했다. 신겐은 노부토모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사건 이후 다케다-도쿠가와 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1570년 12월, 노부토모가 이끄는 가이와 시나노의 군세가 도쿠가와 씨의 본거지인 미카와로 진군하던 중, 히가시미노 국인 도야마씨의 영지인 에나군 가미무라(현재 기후현 에나시 가미야하기초)에 침입했다. 그는 도야마 씨 및 도쿠가와 씨 산하의 야마가 삼방중·미카와 병력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가미무라 전투).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세와 오다코무라에서 싸운 후 이나군으로 철수했다. 1571년 2월에는 시모이나군 여러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여 오시마성의 축성을 명령받아, 오시마성의 성대였음이 확인된다.
1572년 10월, 신겐은 서상 작전을 개시했다. 『당대기』에 따르면, 노부토모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오쿠미카와로 침공했다. 미카와의 오쿠다이라씨와 스가누마씨 등 국인들의 여러 성을 함락시킨 후, 신겐 본대와 합류했다. 같은 해 말, 히가시미노 국인 도야마 씨가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이탈하여 다케다 씨에 귀속되자, 노부토모는 미노 방면을 담당했다.
1.3.1. 이와무라 성 공성전 및 결혼
1572년, 노부토모는 이와무라성 공성전을 벌였다. 이와무라 성주 도야마 가게토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하자, 수비군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가게토의 미망인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인 오츠야노카타가 노부토모와 협상에 나섰다. 그들은 조약을 맺고, 성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했으며, 오츠야노카타는 노부토모와 결혼하여 자신의 보호와 수비군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전리품 중에는 당시 7세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친아들이자 가게토의 양아들이었던 고보마루(御坊丸, 훗날 오다 가쓰나가)가 포함되었다. 노부토모는 그를 인질로 가이국으로 보냈다. 조약 조항이 이행되면서 노부토모는 이와무라성을 자신의 본부이자 다케다 가문을 지원할 수 있는 최전선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1573년 3월 6일, 노부토모는 신겐의 명으로 히가시미노로 향하여 이와무라성에 입성했다. 이후 노부토모는 오시마 성대와 이와무라 성대를 겸임하는 입장이 되었다. 『고료군감 다케다 홋쇼인 신겐 공 어대 총인수사』에 따르면, 노부토모는 이와무라에 주둔하며 하루치카슈 50기를 이끌었고, 그 외에 사카니시 씨, 지쿠 씨, 자코지 씨 등 시모이나 국인들을 지휘하여 총 305기의 병력을 통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한 봉사
1573년 봄, 다케다 신겐이 사망한 후에도 노부토모는 신겐의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를 계속 지원하며 그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573년 12월 25일, 노부토모는 다케다 가문의 후다이 가로인 가네마루 치쿠젠노카미의 셋째 아들 소쿠로(마사노리)를 사위이자 양자로 맞이했다. 이는 이와무라 성대를 겸임하는 입장에서 아들이 없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사노리는 1579년 7월 23일 병사했고, 치쿠젠노카미의 일곱째 아들 겐자부로(치카히사)가 아키야마 씨를 계승했다.
1.5. 나가시노 전투와 죽음
1575년 5월 21일,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하여 다케다 가문에 큰 재앙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이와무라성에 있던 노부토모는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다케다 씨에 대한 반격을 강화했으며, 그矛끝은 다케다 씨가 지배하던 오쿠미카와, 히가시미노, 도토미의 여러 성으로 향했다. 6월 25일에는 미카와 부세쓰성이 함락되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적남인 오다 노부타다에게 명하여 이와무라성을 포위하게 했다. 노부토모는 하루치카슈와 이와무라슈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으며, 가쓰요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7월 19일에는 다케다 노부토요와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후속 지원군으로 출진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가쓰요리가 도토미 방면의 방어에도 바빴기 때문에 지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8월 10일에는 휴가 토라아타마가 오시마성으로 파견되어, 노부토모의 동심중이 오야마다 마사나리와 호시나 마사나오의 지시에 따를 것을 전달했다.
11월, 가쓰요리는 이와무라성을 향해 출병했으나, 오다군은 이와무라성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이와무라성 전투). 노부토모는 성의 병사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노부타다에게 항복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노부나가 측은 이 조약을 파기하고, 노부토모와 그의 아내 오츠야노카타(노부나가의 숙모), 그리고 성의 수비대 병사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1575년 11월 21일, 노부토모는 붙잡혔고, 11월 26일 기후로 끌려가 나가라강 강변에서 아내 오츠야노카타, 그리고 가로인 오시마 나가토시와 자코지 에치고노카미와 함께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향년 49세였다. 『혼토지 과거장』과 『가이국지』에 인용된 아키야마 씨의 보리사인 『세이운지 과거장』에 따르면 노부토모의 법명은 '조코쿠(浄国)'이며, 『가이젠지 과거장』에서는 '슈하쿠추기젠조몬(秋伯忠義禅定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이름과 정체성
아키야마 노부토모의 본명에 대해서는 『가이국지』에 따른 '노부토모(信友)'나 근세 군기물에 의한 '하루치카(春近)', '노부치카(信近)' 등의 설이 있었다. 『간세이 중수 제가 계보전』에도 '하루치카(晴近)'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최근 구로다 모토키의 연구 등 『센고쿠 유문』, 『야마나시현사』 등의 편찬 사업에 따른 문서 조사를 통해 다케다 가신들의 실명 확정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확실한 본명은 서판(署判) 부분의 필사본에 의해 '토라시게'(虎繁)'임이 지적되었다. '토라(虎)'는 다케다 노부토라로부터 받은 편휘로 여겨진다. 또한, 실명의 오해 중 '하루치카'는 노부토모의 동심중(同心衆)인 '하루치카슈(春近衆)'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유산 및 기념
아키야마 노부토모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후대에 걸쳐 그의 삶과 충성심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추모되었다.
3.1. 사후 추모
에도 시대 전기인 1657년, 이와무라 번주가 된 니와 우지스미는 처형된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그의 아내 오츠야노카타의 저주로 인해 역대 이와무라 번주들이 조난당하거나 후계자들이 요절한다는 속설이 돌자, 그 저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묘호지 경내에 천태종의 게이쇼잔 고부쓰지(恵照山五佛寺)를 세웠다. 고부쓰지는 니와 씨가 영지를 옮기면서 폐사되었으나, 현재 묘호지 경내에는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츠야노카타를 추모하는 마쿠라즈카(まくら冢, 베개 무덤)가 남아 있다.
2024년, 노부토모와 오츠야노카타의 450주기 원기(遠忌)를 맞아, '하루치카 고인중 이노우에 세이게쓰 연구회' 발기인인 미야시타 겐바의 주도로 마쿠라즈카 근처에 두 사람의 공양탑이 건립되었으며, 12월 24일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미야시타는 같은 달 14일 나가노현 고마가네시의 조슌지(長春寺)에도 공양탑을 건립했다.
3.2. 자손 및 가계
가네마루 치쿠젠노카미의 아들 아키야마 마사노리는 노부토모의 양자가 되었으나 1579년 7월 23일 병사했다. 이후 치쿠젠노카미의 일곱째 아들 겐자부로(요시키요)가 마사노리의 유언에 따라 아키야마 씨를 계승했다. '아키야마 가문 문서'에 따르면, 겐자부로는 이나군의 국인 시모조 효고스케의 딸과 결혼하여 아키야마 씨를 계승했으며, 효고스케에게 노부토모의 딸이 시집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겐자부로는 1582년 3월 11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다케다령 침공(고슈 정벌) 당시 가쓰요리를 따라 전사했다. 그의 시나노 영지는 장남 아키야마 가쓰히사에게 계승되었다.
『간에이 제가 계보전』에 따르면, 겐자부로에게는 세 살 된 아들이 있었는데, 모계의 인연을 의지하여 이즈국 오히라의 쓰치야 씨에게로 피신했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이 아들은 요베에(与兵衛)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이즈국 기미사와군 안큐무라에 정착하여 1636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아키야마 씨의 가전 문서를 전한 자손가로 아키야마 헤이다유(秋山平太夫) 가문이 있으며, 도쿠가와 쇼군가의 후다이 다이묘인 미즈노씨를 섬겼다. 이 가문에는 '아키야마 가문 문서'(야마가타 대학 부속 박물관 기탁)가 전해지지만, 계보에는 마사노리나 겐자부로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으로 지적된다. 『신편 아이즈 풍토기』에는 1580년의 사료에서 '아키야마 시키부우에몬노조(秋山式部右衛門尉)'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민부우에몬과는 다른 인물이거나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
'아키야마 가문 문서'에 포함된 1704년의 선조서(先祖書)와 『가이국지』에 따르면, 호키노카미(노부토모)의 자손 중에 아키야마 민부우에몬(秋山民部右衛門, 『가이국지』에서는 시키부우에몬노조)이 있었고, 민부우에몬의 손자 아키야마 헤이다유가 가전 문서를 미즈노 가문에 전했다고 한다. 민부우에몬에 대해서는 세대적 관점에서 노부토모의 아버지 또는 형제로 보는 설도 있다.
오츠야노카타와의 사이에 태어난 로쿠다유(六太夫)는 오다 씨에 의한 이와무라성 함락 전에 피신하여 세토 내해의 무라카미 수군을 섬겼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와 연동하여 일어난 이요국 마쓰야마에서의 미쓰하마 야습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에 있으며, 계명은 잇초치뉴신시(一朝智入信士)이다. 현재도 로쿠다유의 자손을 자처하는 인물이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거의 전장에 나가지 않았고, 노부토모가 이와무라로 떠난 후 다카토성을 떠나 나가오카무라 조쇼지로 옮겨갔다고 알려진 다로미쓰치카(太郎光近)의 아들이자 노부토모의 손자로 여겨지는 규자에몬노조 노부요시(九左衛門尉信吉)는 1633년 옛 영지 가이국 이나즈미쇼에서 시나노국 스와군 아루가고로 옮겨 개성(改姓)하고 농업에 종사하며 읍사(邑事)를 관장했다고 한다. 1646년 사망했으며, 계명은 다이겐인 쇼가쿠 에이잔 고지(大源院正岳永山居士)이다. 현재도 노부요시의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3.3. 문화적 영향
아키야마 노부토모는 여러 문학 작품과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며 후대에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소설
- 오니마루 도모히코, 『성장: 다케다의 충신 아키야마 노부토모의 생애』 (야마나시일일신문사 출판부, 2005년)
- 에릭 크리스티안 하우가르드의 소설 『사무라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키야마 노부토모 휘하에서 활동했다.
- 영상
- 영화 『풍림화산』 (1969년, 사가와 뎃쓰로 연기)
- 드라마 『온나 풍림화산』 (1986년, 미야자키 다쓰야 연기)
- NHK 대하드라마 『풍림화산』 (2007년, 이치세 히데카즈 연기)
- 『역사비화 히스토리아』 "천공의 성의 여 성주" (2017년, 무라카미 신고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