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아마추어 경력
아마치 슌이치는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선수 및 심판으로 활약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1. 유년기 및 교육
아마치 슌이치는 1903년 12월 30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학창 시절은 다소 파란만장했다. 처음에는 구제 고요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2학년 때 구제 교쿠샤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후 구제 메이지 대학 예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당시 중학교 3년 졸업생은 입학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구제 시모노 중학교 (현재의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에 재진학하여 4년을 더 수학했다. 이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메이지 대학 예과에 진학할 자격을 얻어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다. 메이지 대학 재학 중에는 포수로 활약했으며, 훗날 마이니치 오리온스 감독을 역임한 유아사 요시오와 배터리를 이뤘다.
1.2. 아마추어 야구 활동
대학 시절, 아마치는 1년 선배인 니데가와 노부아키로부터 야구 규칙에 대한 매일 10문제씩의 '숙제'를 받으며 훈련을 통해 규칙을 완벽하게 숙지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29년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전속 심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을, 쇼와 천황이 처음으로 메이지 진구 야구장을 방문하여 관전했던 와세다 대 게이오전의 구심을 맡기도 했다. 전속 심판직에서 사임한 후에는 호치 신문 기자로 근무하면서도 고시엔 대회 등 아마추어 야구 심판 활동을 이어갔다. 1939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가이소 중학교의 시마 세이이치가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던 결승전의 주심을 맡았다. 시마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하자, 합숙소 근처에 살던 아마치는 시마와 친분을 쌓았고 시마는 그를 친근하게 '아맛 상'(あまっさん일본어)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주니치 감독 취임 이전 주로 아마추어 야구 심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문부성 주최로 열린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일명 '환상의 고시엔')에서 헤이안 중학교와 도쿠시마 상업학교 간의 결승전 주심을 맡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구제 데이쿄 상업학교 (현재의 데이쿄 대학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 겸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시기에 그의 제자였던 투수 스기시타 시게루를 개인적으로 지도했으며, 1922년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야구단으로부터 배웠던 포크볼을 스기시타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1.2.1. 야소카와 보크 사건 및 사임
아마치의 심판 경력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1931년 봄에 발생한 '야소카와 보크 사건'이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소속 전속 심판 6명이 총사퇴했는데, 아마치 역시 이에 동참하여 심판직에서 물러났다.
2. 프로 야구 감독 경력
아마치 슌이치는 프로 야구 감독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2.1. 초기 감독 재임기

1949년, 그의 제자인 스기시타 시게루가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자 아마치 슌이치도 주니치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프로 야구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1950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를 이끌었으며, 1951년에는 나고야 드래건스의 감독을 맡았다. 1952년에는 실권이 없는 총감독 자리로 이동하며 잠시 현장에서 물러났다.
2.2. 1954년 일본 시리즈 우승
1954년, 아마치는 다시 주니치 드래건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는 팀을 이끌고 그해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나아가 역사적인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구단 창단 이래 첫 일본 제일의 영광을 안겼다. 일본 시리즈 우승이 확정되자 아마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을 때도 눈물을 닦고 있었다. 선수들 또한 '인정파 감독'으로 불리던 아마치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깊이 감격하여 대부분이 눈물을 흘렸다. 이 우승은 프로 선수 경력이 없는 감독이 이끄는 구단이 일본 시리즈를 제패한 유일한 사례로 현재까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감독직에서 물러난 것은 아마치가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1955년 구단 부대표에 취임하는 형태로 감독직을 이임했다. 훗날 아키야마 고지 또한 2014년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이끌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직후 감독직에서 물러나 유사한 사례를 남겼다.

2.3. 후기 역할 및 감독직 은퇴
아마치는 1957년에 세 번째로 주니치 드래건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는 베테랑 선수였던 니시자와 미치오와 고다마 도시카즈의 간곡한 요청으로 성사되었다. 당시 그의 제자였던 스기시타 시게루는 아마치의 간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1954년 일본 시리즈 우승 직후 아마치에게 "몸을 위해 빨리 (감독직을) 그만두시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아마치는 195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2년간은 선수 겸임 감독이었던 스기시타 시게루와 함께 수석 코치로서 시즌을 보냈다. 이후 그는 호치 신문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명망 높은 야구 평론을 이어갔다. 메이저리그에도 정통했던 아마치는 행크 에런이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넘어섰을 때조차 윌리 메이스가 최고의 외야수라는 자신의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스기시타 시게루가 1964년 한신 타이거스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하게 된 것도 아마치의 조언 덕분이었다. 아마치는 스기시타를 도쿄 신바시의 한 요정으로 불러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과 함께 자리하여 "야구는 내 야구만이 아니다. 후지모토 씨의 야구를 배우고 오라"고 말하며 취임을 권유했다. 또한, 스기시타가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한 배경에도 아마치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V9 전사들의 기량 저하로 전 시즌 구단 역사상 첫 최하위를 기록했던 것에 우려를 표하던 센트럴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가 스기시타에게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든 해 주게"라고 부탁한 것과 더불어, 아마치 사망 직전인 1976년 3월에 스기시타가 병문안을 갔을 때 "나가시마 시게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마치가 "힘든 것은 알지만, 나가시마를 도와주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스기시타는 아마치에게 "힘든 것을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3. 사망
아마치 슌이치는 1976년 3월 12일에 사망했다. 향년 72세였다.
4. 유산 및 평가
아마치 슌이치는 일본 야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독특한 경력은 야구계에 큰 유산으로 남았다.
4.1.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아마치 슌이치는 1970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경기자 표창' 부문을 통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는데, 이는 주로 스포츠 기자단의 투표에 의해 이루어지는 영예이다. 이 헌액은 그의 일본 야구계에서의 공헌과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2. 긍정적 평가 및 영향
아마치 슌이치는 프로 선수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 유일하게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의 뛰어난 지도력과 전략적 역량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인정파 감독'으로 불리며 선수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를 중시했고, 이러한 리더십은 팀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제자 스기시타 시게루에게 포크볼을 전수하고, 그의 프로 선수 및 코치 경력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조언과 멘토링을 제공함으로써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투수이자 지도자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기시타의 한신 타이거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취임에도 아마치의 깊은 관계와 조언이 있었음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5. 상세 경력 정보 및 통계
아마치 슌이치의 학력, 감독 성적, 수상 및 영예, 그리고 등번호에 대한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5.1. 학력
- 구제 시모노 중학교 (현재의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
- 구제 메이지 대학
5.2. 감독 성적
아마치 슌이치의 프로 야구 감독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
1949년 | 주니치 | 5위 | 137 | 66 | 68 | 3 | .493 |
1950년 | 2위 | 137 | 89 | 44 | 4 | .669 | |
1951년 | 나고야 | 2위 | 113 | 62 | 48 | 3 | .564 |
1954년 | 주니치 | 1위 | 130 | 86 | 40 | 4 | .683 |
1957년 | 3위 | 130 | 70 | 57 | 3 | .550 | |
1958년 | 3위 | 130 | 66 | 59 | 5 | .527 | |
통산: 6년 | 777 | 439 | 316 | 22 | .581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5.3. 수상 및 영예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70년)
5.4. 등번호
아마치 슌이치가 프로 야구 경력 동안 착용했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30 (1949년 ~ 1951년, 1954년, 1957년 ~ 1958년)
- 60 (1959년 ~ 1960년)
6. 같이 보기
- 효고현 출신 인물 목록
- 메이지 대학의 인물 목록
- 아마치 시게루 - 나고야시 출신 배우. 그의 예명은 아마치 슌이치의 성과 투수 스기시타 시게루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시무라 다카시 - 아마치 슌이치를 모델로 한 감독이 주인공인 영화 '사나이 있으매'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