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마즈 히사미쓰(島津 久光시마즈 히사미쓰일본어, 1817년 11월 28일 ~ 1887년 12월 6일)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사무라이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흔히 시마즈 사부로(島津 三郎시마즈 사부로일본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사쓰마번의 10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오키의 다섯째 아들이자, 11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사쓰마 번의 12대이자 마지막 번주가 된 어린 아들 시마즈 다다요시의 후견인으로서 사쓰마 번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이자 강력한 권력자였다.
막말 시대에 그는 조정과 막부의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는 공무합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좌절되면서 최종적으로는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는 도막 노선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마무기 사건과 그로 인한 사쓰마-영국 전쟁과 같은 중대한 사건들 또한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쓰마 번과 조슈번, 도사번의 연합을 통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그는 신정부에서 내각고문과 좌대신 등 중요한 직책을 맡았지만, 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반대하는 등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마찰을 겪기도 했다. 특히 폐번치현에 대한 그의 불만은 당시 구 다이묘 중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의 위계와 훈등, 작위는 종1위, 대훈위국화대수장, 공작에 이르렀다. 그의 호는 어린 시절에는 덕양(徳洋), 이후에는 대간(大簡), 소송(叟松), 완고도인(玩古道人), 무지옹(無志翁) 등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호를 딴 다마자토 시마즈 가문의 초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고준 황후의 증조부이자 아키히토 상왕의 고조부이기도 하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시마즈 히사미쓰는 어린 시절부터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 성장했으며, 학문적 깊이를 쌓는 동시에 시마즈 가문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이복형과의 가독 승계 분쟁은 그가 실질적인 번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히사미쓰는 문화 14년(1817년) 10월 24일,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의 가고시마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모는 10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오키의 첩인 오유라(お由羅の方)였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가네노신(普之進)이었다. 생모인 오유라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분세이 원년(1818년) 3월 1일 잠시 다네가시마씨의 양자로 보내져 번주의 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분세이 8년(1825년) 3월 13일 시마즈 종가로 복귀하였고, 같은 해 4월에는 마타지로(又次郎)로 개명하였다.
1825년 11월 1일, 시마즈 일문가 필두인 시게토미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이자 숙부인 시마즈 다다히로의 딸인 시마즈 지요코와 혼인하여 이 가문의 양자가 되었고, 덴포 10년(1839년) 11월 시게토미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아 1871년까지 당주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가고시마성에서 성하의 시게토미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2.2. 교육과 초기 활동
분세이 11년(1828년) 2월 19일, 나리오키가 에보시친이 되어 원복을 올렸고, 그때 다다유키(忠教)라는 휘를 받았다. 덴포 7년(1836년) 2월에는 지요코와 혼례식을 올렸고, 고카 4년(1847년) 10월에는 통칭을 야마시로(山城)에서 스오(周防)로 다시 변경하였다.
그는 이복형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서양학을 선호했던 나리아키라와 달리, 히사미쓰는 국학에 조예가 깊었다. 고카 4년(1847년), 그는 나리아키라로부터 군역방 명대(軍役方名代)를 명령받아 해안 방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2.3. 오유라 소동과 가독 승계
나리오키의 후계 자리를 놓고 나리아키라와 히사미쓰(당시 다다유키)를 옹립하는 파벌이 대립하여 오유라 소동이라는 가족 소동으로 발전했다. 이 소동은 막부의 개입을 초래했고, 결국 가에이 4년(1851년) 2월 2일 나리오키가 은퇴하고 나리아키라가 사쓰마 번주가 되었다.
비록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놓고 다투는 형태가 되었지만, 다다유키 본인은 반 나리아키라 파벌에 의해 추대된 측면이 강했으며, 나리아키라와 다다유키의 개인적인 관계는 줄곧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세이 5년(1858년) 5월 13일 막부 군함 간린마루가 가고시마를 방문했을 때, 나리아키라는 가쓰 가이슈에게 다다유키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안세이 5년(1858년) 7월 16일 나리아키라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다다유키의 친아들 다다노리(忠徳)가 12월 28일 번주에 취임하였다 (다다노리는 이듬해 2월 도쿠가와 이에모치 장군에게 배알하고 그의 편휘를 받아 모치히사로 개명했으며, 나중에 시마즈 다다요시로 다시 개명했다). 모치히사의 후견을 맡았던 나리오키가 안세이 6년(1859년) 9월 12일 사망하자, 번주의 실부(実父)로서 모치히사의 번내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분큐 원년(1861년) 4월 19일, 다다유키는 종가로 복귀하여 "국부(国父)"의 예우를 받게 되면서 번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4월 23일, 그는 통칭을 이즈미(和泉)에서 히사미쓰(久光)로 개명하였다. 분큐 2년(1862년) 2월 24일, 그는 시게토미 저택에서 새로 지은 가고시마성 니노마루(二の丸) 저택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번내에서는 "부성공(副城公)"이라고도 불렸다.
3. 사쓰마 번 내 권력 장악
히사미쓰는 번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하급 번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한편, 자신과 대립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제압하며 실질적인 번의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번 내에서 권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그는 고마쓰 기요카도 등과 함께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쇼 아쓰시, 이치지 사다카, 이와시타 미나미히라, 가이에다 노부요시, 요시이 도모자네 등 중하급 번사들로 구성된 유신 지사 그룹인 '세이추구미'의 핵심 멤버들을 발탁하였다. 이들 중 오쿠보와 이치지는 분큐 원년(1861년) 10월에 오코나도야쿠(御小納戸役)로 발탁되었고, 이와시타는 군역봉행 겸 슈호가타카카리(軍役奉行兼趣法方掛)로, 가이에다와 요시이는 가치메쓰케(徒目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세이추구미의 중심 인물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평생 동안 불화가 심했다. 분큐 2년(1862년) 사이고가 무단으로 상경하자, 히사미쓰는 그를 꾸짖으며 도쿠노시마로 유배를 보냈고, 나중에는 오키노에라부섬으로 다시 유배시켰다. 겐지 원년(1864년) 번내 유신 지사들의 탄원으로 사이고를 사면할 때에도, 히사미쓰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물고 있던 은 곰방대의 흡입구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고 평생 동안 완전한 관계 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히사미쓰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에도로 이치지 사다카를 파견했다. 이치지는 분큐 원년(1861년) 12월, 시바(芝)의 번저를 불태워 산킨코타이가 불가능하다고 변명하고, 유력 다이묘들을 통해 히사미쓰를 무위무관의 '시마즈 사부로'에서 대우를 개선하도록 요청했다. 이 모든 것은 상경 공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고노에 다다히로와 고노에 다다후사에게 칙명 획득을 의뢰했고, 가신 나카야마 쇼노스케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교토로 보냈다. 나카야마는 하난 나오야스의 검을 조정에 바쳤으나, 안세이 대옥으로 막부의 탄압을 받았던 다다후사는 소극적으로 거절했다. 오쿠보도 교토에서 공작을 벌였지만 칙명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상경을 결심했다. 나카야마의 복명 시에는 고메이 천황의 친필 서한과 어제의 와카가 전달되었다.
4. 정치 활동
히사미쓰는 막말 시대에 공무합체 운동을 주도하며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으나, 이 운동이 좌절된 후에는 도막 노선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4.1. 공무합체 운동
분큐 2년(1862년), 히사미쓰는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다 (3월 16일 가고시마 출발, 4월 16일 교토 도착). 그의 상경은 조정과 막부, 그리고 웅번들의 정치적 제휴를 기획하려는 의도였으며, 이는 사망한 형 나리아키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여겨졌다. 교토에 체류하던 4월 23일, 그는 후시미구의 데라다야에 집결한 자번의 존왕양이파 급진 분자들인 아리마 신시치 일파를 숙청하는 데라다야 소동을 일으켰다.
조정에 대한 히사미쓰의 노력으로 5월 9일,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을 포함한 막정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칙사를 에도로 파견하기로 결정되었고, 히사미쓰는 칙사 수행을 명받았다. 막부에 대한 요구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삼사책(三事策)"이 결정되었다. (1.은 조슈번, 2.는 이와쿠라 도모미, 3.은 사쓰마 번의 의견을 채택한 것)
- 도쿠가와 이에모치 장군의 상경
- 연안 5대 번(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센다이번, 가가번)으로 구성되는 오대로(五大老) 설치
-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후견직과 전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대정총재직 취임
에도 출부에 앞서 5월 12일, 그는 통칭을 이즈미에서 사부로(三郎)로 변경했다. 이는 로주 미즈노 다다키요의 무가관위인 이즈미노카미(和泉守)와 동명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알려져 있다. 5월 21일,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를 수행하여 교토를 출발, 6월 7일 에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칙사와 함께 막부 각료들과 교섭하여 7월 6일 요시노부의 장군 후견직 취임, 7월 9일 슌가쿠의 정사총재직 취임을 실현시켰다 (이는 분큐의 개혁으로 이어진다).
4.2. 나마무기 사건과 사쓰마-영국 전쟁
칙사의 에도 방문 목적을 달성한 히사미쓰(사쓰마 번)는 8월 21일 에도를 출발, 도카이도를 따라 교토로 돌아오는 도중 무사시국 다치바나군 나마무기촌(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쓰루미구 나마무기)에서 영국인 민간인 4명과 마주쳤다. 히사미쓰 일행의 행렬 통행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수행하던 사쓰마 번사가 영국인을 살상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전에 미국인 무역상 유진 밴 리드도 히사미쓰의 행렬과 마주쳤으나, 그는 일본의 관습에 능통했기 때문에 행렬에 길을 터주고 말에서 내려 탈모하고 경의를 표했기에 큰 일은 없었다.
히사미쓰는 윤 8월 6일 교토에 도착, 9일 입궁하여 막정 개혁의 성공을 복명한 후 23일 교토를 출발하여 번으로 돌아갔다 (9월 7일 가고시마 도착). 영국인 살상 사건은 결과적으로 이듬해 분큐 3년(1863년) 7월 사쓰마-영국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4.3. 공무합체 운동의 좌절과 도막 노선 전환
분큐 3년(1863년) 3월 두 번째로 상경(3월 4일 가고시마 출발, 14일 교토 도착)했으나, 조슈 번을 배경으로 한 존황양이 급진파의 전횡을 막지 못하고, 5일간의 교토 체류 후 번으로 돌아갔다 (18일 교토 출발, 4월 11일 가고시마 도착). 그러나 귀번 후에도 존황양이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나카가와노미야와 고노에 다다히로·다다후사 부자, 그리고 존황양이파의 언동에 비판적이었던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여러 차례 상경 요청을 받았다. 조슈 번의 세력을 교토에서 추방하기 위해 사쓰마 번과 아이즈번이 중심이 되어 계획하고 천황의 지지를 얻어 단행된 팔월 십팔일의 정변이 성공한 후, 세 번째 상경을 이루었다 (9월 12일 가고시마 출발, 10월 3일 교토 도착).
히사미쓰의 건의로 조정 회의(조의)에 유력 제후들을 참여시키기로 결정되었고, 12월 3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슌가쿠,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전 우와지마번주 다테 무네나리,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교토 수호직)가 조의 참예를 명받았다. 히사미쓰 자신은 이듬해 겐지 원년(1864년) 1월 14일 참예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종사위하와 사콘에곤쇼쇼에 서임되었다. 이 관위는 역대 사쓰마 번주와 동등한 격식에 해당한다. 관위를 얻기 전까지 히사미쓰는 사쓰마 번의 최고 권력자였지만, 형식적으로는 막부나 조정에서 볼 때 평범한 가신에 불과했다.
이로써 사쓰마 번의 공무합체론을 구현한 참예회의가 성립되었으나, 고메이 천황이 희망하는 요코하마 항 폐항 문제를 놓고, 한정 양이론 (폐항 지지)의 요시노부와, 무비 충실론 (폐항 반대)의 히사미쓰·슌가쿠·무네나리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히사미쓰 등 3명의 제후가 요시노부에게 양보하여 막부의 폐항 방침에 합의했으나, 양측의 불화는 해소되지 않아 참예회의는 기능 부전에 빠져 해체되었고, 사쓰마 번이 추진한 공무합체 운동은 좌절되었다. 히사미쓰는 3월 14일 참예직을 사임하고 고마쓰 다테와키와 사이고 다카모리 등에게 후사를 맡긴 후 4월 18일 교토를 떠났다 (5월 8일 가고시마 도착).
히사미쓰가 번에 머물러 있던 약 3년간 중앙 정국은 겐지 원년(1864년)의 금문의 변(7월 19일), 제1차 조슈 정벌, 게이오 원년(1865년)의 쇼군 진발(5월 16일), 안세이 5개국 조약 칙허(10월 5일), 게이오 2년(1866년) 1월 21일의 삿초 동맹 체결, 제2차 조슈 정벌,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망(7월 2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12월 5일), 고메이 천황의 붕어(같은 달 25일), 게이오 3년(1867년)의 유궁 무쓰히토 친왕(메이지 천황)의 즉위(1월 9일) 등으로 흘러갔다. 이 기간 중, 게이오 2년(1866년) 6월 16일부터 20일까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 일행을 가고시마에 맞이하여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다다요시)와 함께 환대하며, 사쓰마-영국 전쟁의 강화 이후 지속된 사쓰마 번과 영국의 우호 관계를 확인했다.
게이오 3년(1867년)의 네 번째 상경(3월 25일 가고시마 출발, 4월 12일 교토 도착)에서는 마쓰다이라 슌가쿠, 야마우치 요도, 다테 무네나리와 함께 사후회의를 열어, 개항 예정 공표 기한이 다가오던 효고(현 효고현 고베시) 개항 문제와 사실상 막부의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전년 9월 휴전 이래 보류된 조슈 번 처리 문제를 놓고 4명의 제후들이 연대하여 쇼군 요시노부와 협의하기로 확인했다. 그러나 5월 14일, 19일, 21일 니조성에서 요시노부와의 회담에서, 관대한 처분을 의도하고 문제의 선결을 주장하는 4명의 제후에 대해 요시노부는 대외 관계를 이유로 효고 개항 문제의 선결을 주장했다. 같은 달 23일, 24일 이틀에 걸친 조의 결과는 두 문제를 동시에 칙허한다는 것이었지만, 요시노부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조슈 처분의 구체적인 내용은 불명확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요시노부와의 정치적 타협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단념한 히사미쓰의 결단으로 사쓰마 번 수뇌부는 무력 도막 노선을 확정했다.

병든 몸의 히사미쓰는 8월 15일 오사카로 옮겨갔고, 9월 15일 번으로 돌아갔다 (21일 가고시마 도착). 10월 14일 히사미쓰·모치히사에게 도막의 밀칙이 하달되었고, 또한 같은 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 주청을 받아 다음 날 15일, 조정으로부터 히사미쓰에게 상경이 명해졌으나, 병 때문에 이에 응할 수 없었다. 대신 번주 모치히사가 11월 13일 번병 3,000명을 이끌고 가고시마를 출발, 도중 스오국 미타지리(현 야마구치현 호후시)에서 18일 조슈 번 세자 모리 모토노리와 회견하여 사쓰마, 조슈, 게이슈 3번 연합 출병을 협정하고, 23일 입경하였다. 이후 중앙 정국은 왕정복고와 보신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에도 시마즈 히사미쓰는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했지만, 신정부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5.1. 신정부에서의 역할
메이지 유신 후에도 그는 가고시마 번(사쓰마 번)에서 권력을 계속 쥐고 있었으나,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나아가는 신정부가 추진하는 급진적 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번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가와무라 스미요시, 노쓰 미치쓰라, 이주인 가네히로 등 하급 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보신 전쟁의 개선 장병들과 대립했으나, 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결과 번 행정권을 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메이지 2년(1869년) 2월, 칙사 야나기하라 사키미쓰가 오쿠보 도시미치를 대동하고 가고시마로 내려와, 그의 요청에 응하여 상경했다 (2월 26일 가고시마 출발, 3월 2일 교토 도착). 3월 3일 입궁하여, 3월 6일 종3위와 참의 겸 사콘에곤추조에 서임되었다 (3월 13일 교토 출발, 21일 가고시마 도착).
메이지 3년(1870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상경하여 정부에 협력하도록 히사미쓰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설득하기 위해 오쿠보가 도쿄에서 번으로 돌아왔으나, 자신은 이용당했을 뿐이며, 기만당한 형태로 만들어진 정부에 불만을 품은 히사미쓰와 사이고를 설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같은 해 12월, 칙사 이와쿠라 도모미가 오쿠보 등과 함께 가고시마로 내려와 히사미쓰와 사이고에게 상경을 요청했다. 사이고는 상경에 동의했으나, 히사미쓰는 병을 이유로 유예를 청했다. 메이지 4년(1871년) 2월 가고시마, 야마구치, 고치 3개 번의 병력으로 편성되는 고신페이 설치가 결정되자, 출병 준비를 위해 사이고가 도쿄에서 번으로 돌아왔고, 히사미쓰를 대신하여 지번사 시마즈 다다요시가 4월에 사이고와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히사미쓰 입장에서는 권력의 원천인 병사를 고신페이에게 빼앗긴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5.2. 개혁 반대와 폐번치현
사이고와 오쿠보 등이 주도하는 형태로, 같은 해 7월 14일 기습적으로 폐번치현이 단행되자, 히사미쓰는 이에 격노하여 항의의 뜻을 담아 자택 정원에서 밤새도록 불꽃놀이를 터뜨리게 했다. 이는 구 다이묘층 중에서 폐번치현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출한 유일한 사례로, 그의 보수적이고 전통 중시적인 성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행정권은 하급 사족층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항의밖에 할 수 없었으며,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같은 해 9월 10일 정부로부터 분가(分家)할 것을 명받아, 시마즈 다다요시의 상전록 10만 석 중 5만 석을 가록(家禄)으로 분사받으며 다마자토 시마즈 가문의 초대 당주가 되었고, 사망 시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1월 14일 미야코노조현이 설치되어 구 번령이 가고시마현과 미야코노조현으로 크게 분단되자, 히사미쓰는 "사쓰마-오스미 분현"이 조슈의 음모라고 의심했으며, 자신의 가고시마 현령 취임을 희망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의 중재로 이 요청은 무산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 6월 22일부터 7월 2일까지 메이지 천황이 주고쿠 순행의 일환으로 가고시마에 체류했다. 이 순행의 최대 목적은 히사미쓰를 위무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순행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해 사이고 쓰구미치, 가와무라 스미요시, 요시이 도모자네,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등 가고시마 번 출신자가 다수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히사미쓰에게 인사가 없자 그의 분노를 샀다. 히사미쓰에게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가 같은 해 11월 귀향하여 이듬해 5월까지 도쿄를 떠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28일, 히사미쓰는 정부의 개혁 방침에 반하는 수구적인 내용이 포함된 14개조의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 대해 이듬해 6월 22일 히사미쓰가 정부에 주석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주석서가 제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메이지 6년(1873년) 3월, 칙사 가쓰 가이슈와 니시요쓰쓰지 기미나리가 가고시마로 내려와, 그 요청에 응하여 상경했다 (4월 17일 가고시마 출발, 23일 도쿄 도착). 5월 10일, 자광간지고로 임명되었다. 12월 25일, 내각고문에 취임했다. 메이지 7년(1874년) 2월, 사가의 난이 발발하자,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사이고를 위무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귀향했다 (2월 14일 도쿄 출발, 20일 가고시마 도착).
4월, 칙사 마리코지 히로후사와 야마오카 뎃슈가 가고시마에 파견되었고, 그 명에 따라 귀경했다 (4월 15일 가고시마 출발, 21일 도쿄 도착). 같은 달 27일 좌대신이 되었고, 5월 23일에는 구습 복귀를 건백했으나, 정부의 의사 결정에서는 실질적으로 배제되었다.
6. 만년과 죽음
히사미쓰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 은거 생활을 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으나,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6.1. 은거 생활과 저술 활동
메이지 8년(1875년) 10월 22일, 히사미쓰는 좌대신 사표를 제출했고, 27일 인가되었다. 11월 2일, 다시 자광간지고에 임명되었다. 메이지 9년(1876년) 4월, 가고시마로 귀향했다 (4월 3일 도쿄 출발, 13일 가고시마 도착).
이후 가고시마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시마즈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사료를 수집하고, 역사서('통속국사' 등)를 저술 및 편찬하는 데 전념했다. 다마자토 가문에 전해진 사료와 전적은 나중에 "다마자토 문고"로 가고시마 대학 부속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또한 그는 여전히 정부의 폐도령 등 문명개화 정책에 대해 반발을 계속하며, 평생 동안 상투를 자르지 않고 칼을 차고 화복을 고수했다.
메이지 10년(1877년) 2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봉기하여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히사미쓰의 동향을 우려하여 칙사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가고시마에 파견하여 상경을 재촉했으나, 히사미쓰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에게 올린 상서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대신 넷째 아들 시마즈 우즈히코와 다섯째 아들 시마즈 다다카타를 교토에 파견했다. 또한 전화를 피하기 위해 사쿠라지마에 일시 피난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히사미쓰의 처우에 고심하며, 서위와 서훈, 작위 부여에 있어 최고급으로 대우했다. 정부는 히사미쓰에게 신경을 썼지만, 사이고와 오쿠보가 사망한 후에는 그러한 배려도 사라졌다. 히사미쓰는 죽을 때까지 "사이고는 오쿠보에게 속았다"고 계속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6.2. 죽음과 장례

히사미쓰는 메이지 20년(1887년) 12월 6일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시모이시키촌(현재 가고시마시 다마자토초)의 다마자토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였다.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나, 도쿄가 아닌 가고시마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장례를 위해 도로가 정비되었고, 구마모토 진대에서 의장대 1개 대대가 파견되기도 했다. 그의 사후 다마자토 가문(공작)은 일곱째 아들 시마즈 다다나리가 계승했다.
그의 묘소는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의 시마즈 가문 묘지에 있다. 가고시마시 데루쿠니초에 위치한 데루쿠니 신사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7. 영전과 관직 경력
시마즈 히사미쓰는 그의 생애 동안 다양한 관직과 위계, 그리고 훈장 및 작위를 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날짜는 메이지 4년까지는 음력 기준이다.
- 분큐 4년(1864년)
- 1월 14일, 종사위하에 서임되고, 사콘에곤쇼쇼에 임명됨.
- 2월 1일(3월 8일), 오스미노카미 겸임.
- 4월 11일(5월 16일), 종사위상에 서임되고, 사콘에곤추조에 임명됨.
- 메이지 2년(1869년)
- 3월 6일, 종3위에 서임되고, 참의에 임명됨.
- 6월 2일(7월 10일), 종2위와 곤다이나곤에 추임되었으나 사퇴.
- 메이지 4년(1871년) 9월 13일, 종2위에 서임됨.
- 메이지 6년(1873년)
- 5월 10일, 자광간지고가 됨.
- 12월 25일, 내각고문에 취임.
- 메이지 7년(1874년) 4월 27일, 좌대신에 취임.
- 메이지 8년(1875년)
- 10월 27일, 좌대신 사임.
- 11월 2일, 자광간지고가 됨.
- 메이지 12년(1879년) 6월 17일, 정2위에 서임됨.
- 메이지 14년(1881년) 7월 15일, 훈1등욱일대수장을 수훈.
-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공작 작위를 받음.
- 메이지 20년(1887년)
- 9월 21일, 종1위에 서임됨.
- 9월 29일, 황수포장을 수훈.
- 11월 5일, 대훈위국화대수장을 수훈.
8. 평가와 유산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말과 메이지 시대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동시대의 정치인들과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그는 때로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인물로 비판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학식과 도덕성을 갖춘 선견지명을 지닌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8.1. 역사적 평가
동시대 인물들이 그에 대해 남긴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마쓰다이라 슌가쿠: "히사미쓰 경은 매우 인순(因循)한 인물로, 옛 법도를 고지식하게 지키는 사람이라고들 했다. 막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다. 악평도 있지만, 그는 재주보다는 도덕을 중시했으며, 존왕(尊王)의 뜻은 오히려 나리아키라 공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공은 육군보다는 해군 쪽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공의 담화에서도 매우 감패(感佩)하고 경복(敬服)할 만한 점이 많다."
- 기도 다카요시: "시마즈는 낡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완고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마즈의 말에 '아무래도 화족(華族) 중에 인물이 없어 곤란하다.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가 있다면 대화가 통할 텐데, 이미 사망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에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귀하와 야마우치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하자, 시마즈는 '아니다, 과연 자신과 야마우치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어떤 때 교토 니조성에서 국사에 관한 의견을 옛 막부 각료에게 건의하려 했다. 그때 자신의 의견과 야마우치의 의견이 대동소이했다. 작은 차이가 있음에도 야마우치가 자신과 함께 니조성으로 가자고 하니, 각자 별도로 각료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마우치가 왜 동행할 수 없느냐며 즉시 멱살을 잡고 한 길 남짓 끌고 갔다. 야마우치와 자신은 의리상 숙질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난폭하게 굴어,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곰방대로 그의 손을 심하게 때리니, 야마우치가 안색을 바꾸고 떠났다'고 이야기했다. 시마즈는 완고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이름값 하는 인물이다."
- 이토 히로부미: "세간에서는 시마즈 공을 완고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공은 예전에 '나는 양이(攘夷)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이고 등이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서양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싫어하는 듯했다."
- 오쿠마 시게노부: "과연 그는 대번의 군주였다. 영준하다는 명성이 높았던 만큼, 풍채와 언동도 보통 군주와 동시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는 완고하고 변치 않는 사람도 아니며, 또한 강직하여 굽히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사령(辞令)에 능통하고, 겸하여 학문이 풍부하며, 흉도(胸度)가 쾌활하고 심술(心術)이 솔직하여, 다른 평범한 무리들과는 현저히 그 선택이 달라, 당시의 명군이자 일세의 영웅으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듯했다. 깊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평가) "다이묘로서는 용모와 태도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보고 군주가 아니라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근본은 선량한 사람이지만, 다이묘 출신이라 제멋대로였다. 특히 명예로운 시마즈 가문의 전통적 정신을 계승하여 상당히 완고한 사람이었으며, 다루기 힘든 고집이 있었으나, 학문이 있었다. 한적(漢籍)으로 머리를 단련했기에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8.2. 비판과 논란
시마즈 히사미쓰의 정치적 행보와 이념은 여러 비판과 논란을 낳았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관계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복잡한 시각을 보여준다.
-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불화: 히사미쓰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평생 동안 깊은 불화를 겪었다. 그는 사이고의 독단적인 행동을 비판하며 두 차례 유배를 보내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사이고를 사면할 때의 일화처럼,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히사미쓰는 죽을 때까지 "사이고가 오쿠보에게 속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보수적인 입장과 사이고의 진취적인 개혁 사상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 급진적 개혁에 대한 반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급진적인 서구화 및 중앙 집권화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폐번치현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반발(밤샘 불꽃놀이 시위)은 구 다이묘들 중 유일한 사례로, 그의 보수적이고 전통 중시적인 성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그의 저항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정부 정책에서의 배제: 좌대신에 임명된 후에도 구습 복귀를 건의하는 등 자신의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정부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그가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명성과 가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수성은 신정부의 흐름과 맞지 않아 점차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9. 가족과 후손
시마즈 히사미쓰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통해 수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연결된다.
9.1. 가족 관계
- 아버지**: 시마즈 나리오키 (사쓰마 번 10대 번주)
- 어머니**: 오유라(お由羅の方) (나리오키의 첩)
- 이복형**: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쓰마 번 11대 번주)
- 정실**: 시마즈 지요코 (시게토미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다다히로의 딸이자 히사미쓰의 사촌)
- 사망: 고카 4년 5월 10일 (1847년 6월 22일)
- 자녀 (지요코 소생)**:
- 장녀**: 오쓰마(於儔, 1837년 1월 14일 ~ 1837년 9월 23일)
- 차녀**: 오사다(於定, 1838년 2월 14일 ~ 1867년 4월 15일). 시마즈 히사시즈의 부인.
- 삼녀**: 오테쓰(於哲, 1839년 3월 24일 ~ 1862년 7월 30일). 이리키인 기미히로의 부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계계실 후보 중 한 명이었으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선발로 덴쇼인이 추대되어 제외되었다.
- 장남**: 시마즈 다다요시 (시마즈 종가 29대 당주, 사쓰마 번 12대 번주)
- 차남**: 시마즈 히사하루 (미야노조 시마즈 가문 계승)
- 삼남**: 호아쓰지로(包次郎, 1842년 9월 4일 ~ 1843년 5월 6일)
- 사녀**: 오칸(於寛, 1843년 10월 29일 ~ 1862년 8월 22일). 기이레 히사히로의 부인.
- 사남**: 시마즈 우즈히코 (시게토미 시마즈 가문 계승)
- 오남**: 시마즈 다다카타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 계승)
- 자녀 (지요코 소생)**:
- 사망: 고카 4년 5월 10일 (1847년 6월 22일)
- 측실**: 야마자키 무라코(山崎武良子)
- 자녀 (무라코 소생)**:
- 오녀**: 오사토(於郷, 1849년 10월 2일 ~ 1850년 1월 26일)
- 육남**: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経, 1851년 12월 1일 ~ 1881년 3월 11일)
- 칠남**: 시마즈 다다나리 (다마자토 시마즈 가문 계승)
- 칠녀**: 오쓰(於住, 1857년 2월 13일 ~ 1858년 7월 9일)
- 팔녀**: 오토(於俊, 1859년 1월 8일 ~ 1875년 10월 27일)
- 팔남**: 요시노신(芳之進, 1860년 11월 28일 ~ 1862년 5월 18일)
- 구녀**: 오타미(於民, 1865년 6월 9일 ~ 1866년 6월 14일)
- 자녀 (무라코 소생)**:
- 양녀**:
- 도미코(富子)**: 친부 다테 무네노리.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비. (1862년 10월 1일 ~ 1936년 3월 20일)
- 슈코(輯子)**: 친부 다케우치 하루노리. 사나다 유키타미의 부인. (1864년 5월 16일 ~ 1928년 10월 15일)
시마즈 히사미쓰는 고준 황후의 증조부이자, 아키히토 상왕의 고조부에 해당한다.
9.2. 주요 가계도
시마즈 히사미쓰를 중심으로 한 주요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 시마즈 나리노부
- 시마즈 나리오키
- 시마즈 나리아키라 (이복형)
- 시마즈 히사미쓰
- 시마즈 다다요시 (장남)
- 시마즈 다다시게
- 시마즈 다다히데
- 시마즈 다다나가
- 시마즈 아키코
-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황후 고준 황후 (증손녀)
- 아키히토 상왕 (고손자)
- 나루히토 천황
- 아키히토 상왕 (고손자)
- 아키히토 (고손자)
-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황후 고준 황후 (증손녀)
- 시마즈 다다히데
- 시마즈 다다시게
- 시마즈 히사하루 (차남, 미야노조 시마즈 가문 계승)
- 시마즈 우즈히코 (사남, 시게토미 시마즈 가문 계승)
- 시마즈 다다카타 (오남,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 계승)
- 시마즈 다다나리 (칠남, 다마자토 시마즈 가문 계승)
- 시마즈 다다요시 (장남)
- 시마즈 나리오키
9.3. 조상
시마즈 히사미쓰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
- 1. 시마즈 히사미쓰
- 2. 시마즈 나리오키, 사쓰마 번 10대 번주 (1791-1859)
- 3. 오카다 유라 (1795-1866)
- 4. 시마즈 나리노부, 사쓰마 번 9대 번주 (1774-1841)
- 5. 스즈키
- 6. 오카다 도시타케
- 8. 시마즈 시게히데, 사쓰마 번 8대 번주 (1745-1833)
- 9. 쓰쓰미 슌코인 (1747-1811)
- 10. 스즈키 가쓰노리
- 16. 시마즈 시게토시, 사쓰마 번 7대 번주 (1729-1755)
- 17. 시마즈 도미 (1727-1745)
- 18. 쓰쓰미 시로나가 (1716-1783)
10. 저서
시마즈 히사미쓰는 은거 생활 동안 시마즈 가문의 역사서 편찬에 몰두하며 여러 저서를 남겼다.
- 시마즈 히사미쓰 이력(島津久光履歴시마즈 히사미쓰 리레키일본어)
- 시마즈 히사미쓰 공 실기(島津久光公実紀시마즈 히사미쓰코 짓키일본어) (1977년, 사후 출판)
- 통속국사 (그가 저술 또는 편찬한 역사서)
11. 대중문화 속의 모습
시마즈 히사미쓰는 일본의 격동기인 막말과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역사 드라마, 소설, 만화 등 대중문화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텔레비전 드라마**
- 다바루자카 (1987년) - 쓰유구치 시게루 연기
- NHK 대하드라마**
- 료마가 간다 (1968년) - 도다 고큐 연기
- 날아오르다 (1990년) - 다카하시 히데키 연기
- 도쿠가와 요시노부 (1998년) - 에모리 도루 연기
- 아쓰히메 (2008년) - 야마구치 유이치로 연기
- 하나 모유 (2015년) - 에구치 나오토 연기
- 사이고돈 (2018년) - 아오키 무네타카 연기
- 청천을 찔러라 (2021년) - 이케다 나루시 연기
- NHK 대하드라마**
- 다바루자카 (1987년) - 쓰유구치 시게루 연기
- 소설**
- 시바 료타로 여우 말 (취하여 기다리다 수록)
- 시바 료타로 날아오르다
- 하야시 마리코 사이고돈! (2017년, KADOKAWA)
- 만화**
- 미나모토 타로 풍운아들 막말편
-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E텔레) - 시라이 유스케 목소리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