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출생과 가족 배경
순시 내친왕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인 1311년 3월 13일(延慶엔쿄일본어 4년 2월 23일)에 지묘인 왕통의 고후시미 천황과 그의 정실인 고기몬인 사이온지 네이시 사이에서 첫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출생지는 교토의 도키와이덴이었다. 그녀는 후에 북조의 천황이 되는 동복 동생 고곤 천황과 고묘 천황의 누나이기도 하다.
어머니 사이온지 네이시는 당시 조정을 대표하여 가마쿠라 막부와의 교섭을 담당했던 간토 모시쓰기를 역임한 유력 공가 사이온지 가문의 당주 사이온지 긴히라의 딸이었다. 긴히라는 순시 내친왕의 출산 기록인 '고기몬인 어산우기'를 남겼는데, 이는 사이온지 가문에서 오랜만에 국모(천황의 어머니)가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 하에 미래의 황자 탄생을 위한 지침서로 작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순시 내친왕의 출산은 고후시미 천황과 사이온지 가문 양측의 큰 기대를 받았다.
당시 일본 황실은 지묘인 왕통과 다이카쿠지 왕통이라는 두 개의 계승 라인으로 분열되어 황위가 교대로 계승되는 양통질립의 대립 구도에 있었다. 순시 내친왕은 지묘인 왕통의 적통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로서,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그녀의 삶과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2. 어린 시절과 특별 대우
순시 내친왕은 비록 황녀로 태어났지만, 고후시미 상황의 정실 소생 첫 자녀로서 깊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공경 도인 긴카타의 일기인 『엔타이랴쿠』에 따르면, 그녀는 황녀임에도 불구하고 황자에게 행해지는 어검 의식(御剣の儀式)이 거행되는 등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녀는 태어난 해인 1311년 6월 15일에 내친왕 선하를 받았고, 1318년 2월 21일에는 일품(一品)에 서임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지묘인 왕통 내에서 동복 동생이자 지묘인 왕통의 적자인 양인 친왕(훗날의 고곤 천황) 다음가는 존재로 여겨졌다.
2. 정치적 활동 및 결혼
2.1. 시대적 배경
순시 내친왕의 결혼은 일본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인 겐코 전쟁 이후 겐무 신정이 시작되고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도래하던 때에 이루어졌다. 1318년, 다이카쿠지 왕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했으나, 1331년 겐코 전쟁 중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려던 그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막부에 의해 폐위되고 지묘인 왕통의 고곤 천황이 즉위했다. 그러나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와의 오랜 갈등 끝에 다시 황위를 되찾았고,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신정 초기, 고다이고 천황은 오랜 정적인 지묘인 왕통과의 화해와 융합을 꾀했다. 그는 지묘인 왕통의 소유지를 안도하고, 하나조노 상황이 숭배하던 다이토쿠지에 대한 우대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은 현실적인 정책을 통해 신정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2.2. 고다이고 천황과의 결혼
1333년 10월 12일, 고다이고 천황의 20년 이상을 함께한 가장 사랑하는 정실인 황태후 사이온지 기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고다이고 천황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 공석이 된 중궁(황후)의 자리에 같은 해 12월 7일(1334년 1월 13일), 순시 내친왕이 책봉되었다. 당시 고다이고 천황은 46세, 순시 내친왕은 23세였다.
이 결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고다이고 천황이 고곤 천황과 지묘인 왕통의 잠재적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순시 내친왕의 책봉과 같은 달에, 고다이고 천황은 순시 내친왕의 동복 동생인 고곤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를 바치고, 자신의 딸인 간시 내친왕을 고곤 상황에게 시집보내는 등 대규모의 지묘인 왕통 회유 정책을 펼쳤다. 이는 두 왕통의 융화를 위한 고다이고 천황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순시 내친왕의 외가인 사이온지 가문은 당시 유력 공가였으나, 막부가 멸망하면서 간토 모시쓰기였던 당주 사이온지 기미무네의 권세가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순시 내친왕과의 결혼은 사이온지 가문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이듬해 1월에는 고다이고 천황과 측실 아노 렌시 사이의 황자 쓰네나가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쓰네나가 친왕이 임시 황태자였으며, 고다이고 천황이 순시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날 황자를 정통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2.3. 정치적 역할과 의미
순시 내친왕과 고다이고 천황의 결혼은 21세기 초까지 일본사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겐무 정권의 존속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대규모 정략결혼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 결혼은 고다이고 천황이 아버지 고우다 천황의 정책을 본받은 것으로도 해석된다. 고우다 천황은 재위 중이던 1285년에 지묘인 왕통의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녀 레이시 내친왕을 황후로 삼는 이례적인 책봉을 단행했는데, 이는 지묘인 왕통에 대한 융화 정책의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처럼 순시 내친왕의 결혼은 당시 여성들이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어떻게 도구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녀는 황실의 안정과 두 왕통의 화합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그 제약 속에서도 그녀의 삶은 황실의 미래와 국가의 운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 임신과 출산
3.1. 임신과 의례
고다이고 천황과 순시 내친왕의 결혼 이듬해, 순시 내친왕은 임신했다. 1334년 10월 16일, 임신 5개월째에 행해지는 착대 의식(帯祝い, 산모의 건강과 순산을 기원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천황이 황비에게 기울이는 애정을 측정하는 척도 중 하나는 출산 기원 의식(御産祈祷)의 횟수이다. 고다이고 천황이 순시 내친왕을 위해 승려들에게 행하게 한 출산 기원 의식의 횟수는 무려 66회로, 이 시기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이 순시 내친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정중하게 대했는지를 증명한다.
다음은 이 시기 역대 천황들이 행하게 한 출산 기원 의식의 횟수이다.
일본 연호 | 서력 | 대상 | 여원호 | 배우자 | 횟수 |
---|---|---|---|---|---|
고초 2년 | 1262년 | 사이온지 기미코 | 도니조인 | 고후카쿠사 | 27 |
고초 2년 | 1262년 | 도인 킷시 | 교고쿠인 | 가메야마 | 27 |
분에이 2년 | 1265년 | 도인 킷시 | 교고쿠인 | 가메야마 | 10 |
분에이 2년 | 1265년 | 사이온지 기미코 | 도니조인 | 고후카쿠사 | 26 |
분에이 4년 | 1267년 | 도인 킷시 | 교고쿠인 | 가메야마 | 15 |
분에이 7년 | 1270년 | 사이온지 기미코 | 도니조인 | 고후카쿠사 | 15 |
겐지 2년 | 1276년 | 고노에 이시 | 신요메이몬인 | 가메야마 | 25 |
고안 2년 | 1279년 | 고노에 이시 | 신요메이몬인 | 가메야마 | 9 |
겐겐 2년 | 1303년 | 사이온지 에이시 | 쇼쿤몬인 | 가메야마 | 36 |
엔쿄 3년 | 1311년 | 사이온지 네이시 | 고기몬인 | 고후시미 | 51 |
쇼와 2년 | 1313년 | 사이온지 네이시 | 고기몬인 | 고후시미 | 34 |
쇼와 3년 | 1314년 | 사이온지 기시 | 고쿄고쿠인 | 고다이고 | 35 |
쇼와 4년 | 1315년 | 사이온지 기시 | 고쿄고쿠인 | 고다이고 | 22 |
쇼와 4년 | 1315년 | 사이온지 네이시 | 고기몬인 | 고후시미 | 16 |
분포 3년 | 1319년 | 사이온지 네이시 | 고기몬인 | 고후시미 | 10 |
겐코 원년 | 1321년 | 사이온지 네이시 | 고기몬인 | 고후시미 | 10 |
가랴쿠 원년 | 1326년 | 사이온지 기시 | 고쿄고쿠인 | 고다이고 | 43 |
겐무 2년 | 1335년 | 순시 내친왕 | 신무로마치인 | 고다이고 | 66 |
겐무 4년 | 1337년 | 간시 내친왕 | 센세이몬인 | 고곤 | 10 |
고다이고 천황과 이전 정실인 사이온지 기시는 금실 좋은 부부로 유명했으며, 그들의 원만한 부부 관계는 『마스카가미』 등의 역사 이야기의 주요 소재로 그려졌다. 실제로 위의 표에서 보듯이, 사이온지 기시를 위한 출산 기원 의식은 평균 33.3회로, 다른 천황들의 평균 횟수를 크게 웃돌았다. 더욱이 고다이고 천황은 진언종의 아사리(스승 승려)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시의 안위를 염려하여 승려에게 맡기지 않고 천황 자신이 직접 출산 기원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순시 내친왕에 대한 출산 기원 의식 횟수는 기시에 대한 평균 횟수의 두 배에 달한다.
기도는 착대 의식 이듬해인 1335년 2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출산 예정일인 3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성대한 출산 기원 의식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친족과 측근뿐만 아니라, 지묘인 왕통의 황족과 사이온지 가문의 대귀족들도 출자자로서 지원했다. 예를 들어, 순시 내친왕의 동복 동생인 고곤 상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사랑하는 딸이자 고곤 상황의 새로운 황비가 된 간시 내친왕 부부도 출자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넷째 황자 무네요시 친왕은 천태좌주로서 출자자이자 기도 실행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특이하게도 아시카가 다카우지나 닛타 요시사다 등 고다이고 천황에게 발탁된 무사들도 출자자로 참여했다.
순시 내친왕의 어머니 쪽 사이온지 가문의 후원이 두터웠다는 것은 '중궁어산어기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출산 기원 의식의 착좌 공경(참여 귀족)은 산조 사네타다, 사이온지 기미무네, 도쿠다이지 긴키요, 도인 사네쓰요, 사이온지 기미시게, 기쿠테이 사네타다 등 6명이었다. 총봉행은 이마데가와 가네스에였고, 어산봉행은 하무로 나가아키였다. 도인 가문과 이마데가와 가문은 사이온지 가문의 분가였다. 이 중 기미무네와 사네타다는 중궁청의 간부이기도 했다.
또한, '중궁어산어기일기'에 따르면, 출산이 도키와이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저택은 사이온지 사네우지의 별저로 지어진 후, 오미야인(고사가 천황 중궁 사이온지 킷시), 가메야마 상황, 쇼쿤몬인(가메야마의 측실 사이온지 에이시), 쓰네아키 친왕(고다이고 천황의 숙부)에게 계승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양 왕통에 의해 원어소(상황의 저택)로 사용되었으며, 1331년에는 지묘인 왕통의 후시미 상황과 고후시미 상황이 센토 어소(상황의 저택)로 사용했다. 순시 내친왕 자신이 태어난 곳도 이곳이었다. 즉, 도키와이덴은 다이카쿠지 왕통, 지묘인 왕통, 사이온지 가문의 결절점이 되는 저택이었다.
'중궁어산어기일기'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이 지묘인 왕통과의 융화 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또 한 가지 발견된다. 그것은 어산봉행에 하무로 나가아키를 기용한 것이다. 이 인물은 고곤 상황의 1337년 6월 24일 원선(간시의 출산 기도를 위한 명령)에서 봉자(奉者)라는 역할을 맡았으며, 이는 고곤의 측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우라 류쇼는 이러한 지묘인 왕통에 가까운 인물에게 순시 내친왕의 출산 기도를 감독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긴 것은 고다이고 천황이 지묘인 왕통에 대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4. 역사적 영향
4.1. 황녀 출산의 결과
1335년 3월 중순, 순시 내친왕은 무사히 출산했다. 정확한 출산일은 '어산어기목록'과 『몬요키』에 3월 14일(4월 8일)로 기록되어 있고, 『어유초』에는 3월 18일(4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순시 내친왕과 고다이고 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황자가 아닌 황녀였다. 황녀의 이름은 사치코 내친왕(幸子内親王사치코 내친왕일본어)으로 추정된다.
출산 3개월 후인 6월 22일, 순시 내친왕의 사촌인 사이온지 기미무네는 고다이고 천황 암살을 계획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기미무네는 과거 가마쿠라 막부와의 교섭역인 간토 모시쓰기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나, 막부 멸망 후 그 권세는 쇠퇴하고 있었다. 사이온지 가문 내에는 가독 다툼도 있었고, 암살 계획의 원인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지만, 권세의 쇠퇴로 인한 불만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자주 지적된다. 그러나 만약 사촌인 순시 내친왕에게 황자가 탄생했다면, 언젠가는 사이온지 가문의 피를 이은 천황이 즉위할 것이므로, 기미무네가 과연 암살 계획을 꾸몄을지는 의문이다.
4.2. 남북조 시대의 서막
사이온지 기미무네의 고다이고 천황 암살 미수 사건과 거의 동시에, 간토에서는 호조 도쿠소케의 유아인 호조 도키유키가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도키유키에게 패배했고, 이를 돕기 위해 다카우지가 동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우여곡절 끝에 고다이고 천황과 다카우지의 전쟁인 겐무의 난이 발생했으며, 결국 다카우지에게 패배한 겐무 정권은 붕괴했다. 기미무네 사건은 겐무 정권 붕괴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4.3. 겐무 정권 붕괴와의 연관성
20세기까지 존재했던 겐무 정권의 제도와 정책에 결함이 있었다는 고설은 겐무 정권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붕괴했으므로 "곧바로 붕괴했으니 희대의 악정이었을 것"이라는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는 겐무 정권의 정책 자체는 중세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그 붕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순시 내친왕의 출산 결과는 의도치 않게 겐무 정권의 붕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황녀의 탄생으로 인해 지묘인 왕통과의 융합을 통한 황실 안정화 계획이 좌절되고, 사이온지 가문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국가적 위기로 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사건이 국가의 궤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해석을 제시하며, 겐무 정권의 붕괴 원인을 순시 내친왕의 출산 결과와 연결하여 분석하는 데 기여한다.
5. 말년과 죽음
겐무 정권 붕괴 후, 1337년 1월 23일(延元엔겐일본어 원년 / 겐무 3년 12월 21일)에 발생한 남북조 내란에서 순시 내친왕이 북조의 수도인 교토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고다이고 천황을 따라 남조의 임시 수도인 요시노 행궁으로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북조에서도 약 한 달간은 정식 중궁으로 대우받았으므로 교토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황녀를 사치코 내친왕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이 경우 명목상 북조에 재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순시 내친왕은 1337년 2월 17일(延元엔겐일본어 2년 / 겐무 4년 1월 16일), 북조로부터 '신무로마치인'의 여원호(女院号)를 선하받았다. 이때까지는 북조의 정식 중궁으로 대우받았으나, 여원이 되면서 중궁대부 호리카와 도모치카, 중궁권대부 이마데가와 사네타다, 중궁료 하무로 나가미쓰 등이 사임했다.
같은 해 6월 11일(延元엔겐일본어 2년 / 겐무 4년 5월 12일)에 순시 내친왕은 사망했다. 향년 27세였다. 그녀의 황녀는 당시 아직 3세였다. 2년 후인 1339년 9월 19일(延元엔겐일본어 4년 / 랴쿠오 2년 8월 16일)에는 남편 고다이고 천황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순시 내친왕과 고다이고 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쓰쿠이 나오시게는 『남조황윤소운록』(1785년)에서 이 황녀가 남조의 사치코 내친왕이라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21세기 전반의 역사 연구자 미우라 류쇼 또한 사치코설을 지지한다.
사치코 내친왕은 1365년(正平쇼헤이일본어 20년 / 조지 4년)의 가회(歌会)에 '신참'(いままゐり)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했으므로, 그 해까지 생존했던 것은 확실하다. 만약 순시 내친왕의 딸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향년 31세 이상을 살았으며, 남조의 뛰어난 가인(歌人)으로 성장하여 『신요와카슈』 등에 와카를 남겼다. 특히 『신요와카슈』 권8 기려가(羇旅歌)에서는 권말(巻末)을 장식하는 고다이고 천황의 유명한 노래 바로 앞에 사치코 내친왕의 노래가 배치되어, 아버지 천황의 노래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6. 유산과 문화적 기여
6.1. 고다이고 천황의 애정과 시

정략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순시 내친왕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 예를 들어, 순시 내친왕의 황후 책봉 병풍(중궁이 정해질 때 유력 가인들이 와카를 색지에 써서 병풍에 붙이는 행사)에서는 니조 파의 대가인이었던 고다이고 천황 자신도 와카를 읊었는데, 그 중 한 수는 칙찬와카집 『신슈이와카슈』 및 준칙찬집 『신요와카슈』에, 다른 한 수는 칙찬집 『신센자이와카슈』 및 『신요와카슈』에 각각 중복 수록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고다이고 천황이 순시 내친왕을 생각하며 읊은 와카 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겐코 3년 황후 책봉 병풍에 오세치(五節)를 읊다
소데 카에스 아마쓰 오토메모 오모이 이데즈야 요시노노 미야노 무카시 가타리오
(대략적인 의미: 소매를 휘날리며 춤추는 오세치마이의 천녀와 같은 그대도, 부디 기억해 주오. 요시노 궁의 옛이야기를. 옛날 천황께서 요시노에 내려온 그대의 우아함에 넋을 잃고 "천녀가 천녀답게 춤추는구나, 당옥을 소매에 감고 천녀답게 춤추는구나"라고 높이 읊었던 그 날을.)
(고다이고인 어제, 『신슈이와카슈』 겨울・622; 『신요와카슈』 겨울・501에 거의 동일한 노래)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겐코 3년 황후 책봉 병풍에 가스가 마쓰리
다치요라바 쓰카사즈카사모 코코로세요 후지노 도리이노 하나노 시타카게
(대략적인 의미: 내년 2월 가스가 마쓰리에 칙사로서 가스가타이샤에 들르는 자는 마음을 새겨라. 가스가타이샤의 '등나무 도리이'는 후지와라 씨만이 지나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옆에 피어 있는 매화꽃 그늘 아래에서. 그리고 가스가 마쓰리 의식처럼 장엄한 이 혼례에 들르는 모든 공경백료는 눈여겨보라. 매화꽃이 아니라 그 꽃그늘을. 왜냐하면 후지와라 씨 사이온지 가문의 피를 이어받아 매화꽃조차 그저 들러리가 될 만큼 아름다운 이가 지금 여기에 나의 황후로서 새 출발을 하기 때문이다.)
(고다이고 천황 어제, 『신요와카슈』 신기・594; 『신센자이와카슈』 신기・982)
첫 번째 노래는 『신요와카슈』 판본인 "소데 카에스 아마쓰 오토메모 오모이 이데즈야 요시노노 미야노 무카시 가타리오"가 나라현 요시노군 요시노정의 요시노조 황거터에 노래비로 세워져 있다.
6.2. 역사적 평가
순시 내친왕의 삶은 직접적인 정치 참여보다는 역사적 사건의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로서 평가받는다. 그녀의 결혼과 황녀 출산은 당시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황실의 계승 문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황자 출산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겐무 정권의 붕괴와 남북조 시대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순시 내친왕은 당시 여성들이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어떻게 정략 결혼의 도구로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 어떻게 국가적 운명과 얽혀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녀의 삶은 비록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역학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후대 역사 연구자들에게 겐무 정권 붕괴의 복합적인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