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소 요시토시의 생애는 쓰시마섬의 지리적 특성상 조선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던 시기에 일본의 대외 정책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과의 국교 재개라는 격동의 시기에 쓰시마 번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1. 출생 및 가계
소 요시토시는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소 마사모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다섯째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의 초명은 아키카게(昭景아키카게일본어)였는데, 이 이름의 '아키(昭)' 자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15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받은 편휘였다. 이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예전 성인 하시바(羽柴)와 이름의 '요시(吉)' 자를 받아 하시바 요시토시(羽柴吉智하시바 요시토시일본어)로 개명했으며, 나중에 요시토시(義智요시토시일본어)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1.2. 가독 상속
소 요시토시가 소씨 가문의 당주가 되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소씨 가문의 제17대 당주였던 양부 소 요시시게는 이복동생 소 마사모리의 장남이자 요시토시의 형인 소 시게나오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물려주었으나, 시게나오는 요절했다. 이에 요시시게는 다시 시게나오의 손아랫동생인 소 요시즈미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주었으나, 요시즈미마저 일찍 사망했다. 결국 덴쇼 7년(1579년) 1월, 소 요시토시가 요시시게의 양자가 되어 소씨 가문의 제19대 당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1580년에 상속받았다고도 한다.)
덴쇼 15년(1587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면서 은거하고 있던 양부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함에 따라 요시토시는 일시적으로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했다. 요시토시는 양부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를 따랐고, 그 결과 쓰시마국 전체를 영지로 인정받았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소씨 가문에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요시토시는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이 소시쓰 등과 함께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덴쇼 16년(1588년) 요시시게가 사망하자, 요시토시는 다시 소씨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2. 조선과의 외교 및 관계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계획에 따라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와 자신의 기만적인 외교 행위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데 일조했다.
2.1. 히데요시의 요구와 협상
덴쇼 15년(1587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 요시시게와 소 요시토시 부자를 만나 소씨 가문의 쓰시마 지배를 인정하면서, 조선 국왕을 일본 교토로 오도록 교섭할 것과 만약 조선이 이를 거부할 경우 조선으로 출병할 수 있음을 밝혔다. 요시토시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막고자 했다. 당시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쓰시마 번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었으므로, 조선과의 갈등은 쓰시마의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요시토시의 집안은 조선과의 특별한 무역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쓰시마는 일본 선박이 조선으로 가는 유일한 검문소였기에 조선과 일본 간의 갈등을 막는 데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전달하는 데 거의 2년 가까이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는 1587년에 실패한 첫 번째 사절단 이후, 히데요시의 두 번째 조선 사절단에 배정되었다.)
덴쇼 16년(1588년) 봄, 소 요시토시는 직접 교토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 자신이 조선에 건너가 교섭하겠다고 밝힌 뒤, 6월에 하카타 세이후쿠지(聖福寺)의 승려 게이테쓰 겐소를 정사, 자신을 부사로 하여 하카타의 상인 시마이 소시쓰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는 한양 창덕궁 인정전에서 선조를 알현하고 교섭한 끝에 1589년 조선측의 조선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11월, 조선의 첨지중추부사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하고 서장관 허성, 수행무관 황진이 포함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히데요시는 이들 사신을 통해 조선이 명나라 정복 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했지만, 조선은 건국 이래 명의 책봉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 정복 사업의 선도역이 곧 조선에 대한 군사적 침략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그 요청을 승낙할 리 없었다.
이들 조선통신사는 히데요시의 생각과 달리 일본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 사절로 파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복속하라고 전하도록 명한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 요시토시는 조선에 복속이 아니라 축하 사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놓고, 히데요시에게는 이를 복속 사절로 속여 알현시킨 것이었다. 또한 조선이 받아들일 리 없는 일본의 명 공격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 전달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놓인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이었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를 가도입명(假途入明, 명으로 가는 길을 주선해 달라)으로 바꾸어 조선에 전했지만, 이마저도 실현되지 않았다.
2.2. 임진왜란 참전
조선과의 교섭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덴쇼 20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대에 속해 일본군의 최선봉으로서 조선 침략에 참여했다. 당시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의 영토적 특성상 조선의 부산과 교역하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조선을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부산진이나 동래를 격파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2.2.1. 초기 공세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명(일부 기록에는 1,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쓰시마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하여 부산진에 상륙했다. 이튿날인 음력 4월 13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부산진을 함락시켰고, 다음날인 음력 4월 14일에는 동래, 음력 4월 15일에는 기장과 경상좌수영을, 음력 4월 16일에는 양산, 음력 4월 17일에는 밀양을 차례로 공략했다. 이후 대구, 인동, 선산을 거쳐 음력 4월 26일에는 경상도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상주에서 격파했다.
음력 4월 27일, 그는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하여 탄금대에서 요격하려던 신립의 조선군을 괴멸시키고 충주를 공략했다. 이어서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를 공략한 후, 음력 5월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동대문) 앞에 도착했고, 음력 5월 3일에는 조선의 수도 한성에 입성했다.
한성에서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마친 후, 음력 5월 11일부터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했다.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북쪽으로 향했다.) 음력 5월 18일에는 임진강에서 김명원 등의 조선군을 격파했으며, 음력 5월 27일에는 개성을 공략했다. 이후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로 공략하며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으로 나아갔다. 일본군은 음력 6월 10일에 대동강 남단에 도달했고, 음력 6월 14일에 평양에 입성한 뒤 다음날인 15일에는 모란봉에 올랐다.
장수 이름 | 병력 |
---|---|
고니시 유키나가 | 11,000명 |
소 요시토시 | 5,000명 |
마쓰라 시게노부 | 3,000명 |
아리마 하루노부 | 2,000명 |
오무라 요시아키 | 1,000명 |
고토 스미하루 | 700명 |
총계 | 18,700명 |
2.2.2. 명과의 교전 및 화의 교섭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음력 7월 16일 평양을 공격해 온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을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하여 명군의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 마세륭 등을 죽였다. 음력 7월 29일 이원익의 조선군이 평양을 공략했지만, 이 또한 격퇴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양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는데, 해상으로 수송하기로 되어 있던 보급 물자가 조선의 전라좌수사 이순신 등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의해 가로막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9월에 명의 유격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서한을 보내 화의를 타진했고,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에 따라 소 요시토시는 승려 겐소와 교대로 심유경을 찾아가 담판했다.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의 요동군제독 이여송이 약 4만의 명군과 조선의 김명원이 거느린 1만 조선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했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로 퇴각했다. 이에 이여송은 "퇴로를 주겠으니 성을 양도하라"고 통보했고, 일본군은 이를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했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으로 어려운 퇴피 행렬이 되었다.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밀고 내려오는 명군에 맞서 일본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이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여송의 명군은 벽제관 패전으로 위축되었고 일본군도 군량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양측은 4월 다시 화의 교섭을 시도했다. (조선측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명의 심유경이 한양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를 찾아와 먼저 교섭을 제의했고, 군감 이시다 미쓰나리도 동의했다. 5월 8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그리고 명의 사절 두 사람이 나고야에 도착하여 23일에 히데요시를 만나 화친 의사를 밝혔다. 이 무렵 일본군은 부산 인근까지 철수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 중이었다.
그러나 양측의 교섭은 우선 히데요시의 과도한 요구(조선의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거나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낸다는 등의) 때문에 성사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애초에 일본에 온 명의 사절도 실제로 명의 황제 신종이 보낸 정식 사절이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등이 조작한 가짜 사절이었다. 이듬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內藤如安)과 소 요시토시의 외교승 겐소를 각각 정사와 부사로 하는 일본 사신단이 명의 수도 북경에 도착했고, 이들이 바친 국서의 내용은 명의 입장을 거스르는 부분을 빼거나 뜯어고친 것이었다.
명측 강화 담당자인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러한 기만 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다. 결국 게이초 원년(1596년) 정월, 명 신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한다는 명목으로 보낸 정사 이방정(李方亭) 등이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화의 교섭 자체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등이 주도한 사기극이었음이 탄로가 나는 바람에 교섭은 결렬되었다.
2.2.3. 정유재란 시기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다시 참전했다. 5월 1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남부의 거제도를 소 요시토시에게 영지로 주었다. 일본군은 우선 서쪽으로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목표로 진격하여,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했고, 4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남원성 전투). 이어서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했다. 하지만 그 후, 겨울을 앞두고 후퇴해야 했고, 소 요시토시는 12월 거제를 떠나 남해 왜성에 머물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 왜성에 머물렀다.) 명군에게 요충지를 제압당한 데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울돌목 전투 이후 조선의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에 의해 다시금 바닷길을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군은 부산진을 중심으로 영남 해안에 수축된 왜성에서 농성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성에서 사망했다.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오대로의 연명으로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에 대한 음력 10월 15일부로의 귀국 명령이 하달되었다. 철수 명령이 내려지기 전인 9월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던 순천 왜성은 명군에게 공격당했고, 울산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도 조명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등 5명의 장수는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를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과 함께 수군을 편성하여 순천에 갇힌 일본군을 구원하러 출진했다. 이들은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했고(노량해전), 그 틈을 이용해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탈출에 성공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이로써 7년에 걸친 조선 출병은 종결되었다.
3. 세키가하라 전투와 전후 처리
임진왜란 이후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일본 내부의 대규모 정치적 격변을 겪었으며, 이후 단절된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기만적인 외교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3.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입장
게이초 5년(1600년),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 그는 후시미 성 공격에 참전했으며,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본전에서는 자신의 가신을 대리 출진시켰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하고 서군의 다이묘 대부분은 영지를 몰수당하거나 처형당했다. 요시토시의 장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서군 소속 다이묘인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등과 함께 조리돌림당하고 참형에 처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소 요시토시를 특별히 살려주는 대신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과 함께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구했다. 이에 소 요시토시는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다에(妙, 세례명 마리아)와 이혼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이에야스가 유키나가의 일족을 멸하려 했기 때문에, 요시토시는 그 화가 쓰시마에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다에와의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3.2. 조선과의 국교 재개 노력
쓰시마로 철수한 직후,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대한 국교 재개 요청에 매달렸다. 일본군 철수가 완료되자 가신 가게하시 시치다유(梯七大夫)와 요시조에 사콘(吉副左根)을 조선에 특사로 파견했지만 이들은 명군에 붙들려 돌아오지 못했고, 게이초 2년(1597년) 유타니 야스케 외 결사대 8명을 다시 보냈지만 이들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로 보낸 사절 이시다 진고에몬이 받은 조선측 변장의 답장에는 명군이 조선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가진 채 지배하고 있는 조선군 사정과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조선측의 뿌리박힌 원한이 전해졌을 뿐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도요토미 가문의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진 직후, 단절된 외교 관계를 재수립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초기 제스처로 쓰시마섬에서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유정을 단장으로 하는 소규모 사절단이 교토로 파견되어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소 요시토시의 도움으로 유정은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할 수 있었다.
게이초 6년(1601년) 쓰시마에서 보낸 다치바나노 도시마사(橘智正)가 이듬해 정월 조선에서 사신 손문욱을 파견했고, 게이초 9년(1604년) 8월 조선에서 회답 겸 쇄환사로써 승려 유정(사명당)과 손문욱이 쓰시마에 와서 쓰시마 사람이 부산에 와서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유정은 이듬해 4월 교토의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회견하였고, 가을에 소 요시토시는 다시 부산에 사절을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음을 전했다.
조선 조정은 전계신을 쓰시마에 보내 통신사 파견의 조건으로 이에야스가 먼저 국서를 보낼 것과 앞서 조선에서 선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일본측이 먼저 조선에 국서를 보낸다는 것은 일본측에서 화해를 요청하는 것으로 일본측이 일으킨 전쟁을 조선측에 사죄한다는 의미였고, 선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11월 12일 쓰시마측의 다치바나노 토모마사가 이에야스의 서계와 함께 마고사구(麻古沙九)와 마다화지(麻多化之) 두 사람을 선정릉을 도굴한 범인으로 잡아 보냈는데, 공초에서 이들은 자신들은 조선에 와본 적도 없고, 조선에 오기는 했지만 부산 바깥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는데 토모마사가 자신들을 범릉(犯陵) 죄인으로 속여 보냈다고 밝혔지만, 조선측은 더 문제삼지 않고 이들을 처형하고 일본에 회답 겸 쇄환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4. 에도 시대의 쓰시마 번주 및 외교
소 요시토시는 에도 시대에 쓰시마 후추번의 초대 번주로서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영지를 보전하는 데 힘썼다. 특히 그는 조선과의 지속적인 외교 및 무역 관계를 통해 쓰시마 번의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했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외교적 기만 행위는 일본의 대외 정책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4.1. 막부와의 관계 및 영지 보전
게이초 15년(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막부를 수립하자,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국의 후추 번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0만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를 수복하라는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아, 게이초 14년(1609년)에 조선과의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을 이에야스로부터 인정받아 소씨 가문은 막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으로서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 권리를 인정받았다. 또한 소 요시토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다른 다이묘들에게 1년에 한 번으로 정해진 참근교대를 3년에 한 번 하도록 특례를 받기도 했다. (다만 이는 요시토시 이후의 후추 번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소씨 가문은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내내 막부의 조선과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득을 취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대표자이자 대변인으로서 소씨 가문은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지속적으로 파견되도록 도왔다. 이러한 사절단은 막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선전 효과를 가져왔으며,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이상적인 국제 질서 구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4.2. 조선과의 조약 체결 및 외교적 문제
게이초 12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 경섬을 부사, 정호관을 서장관으로 하는 조선의 회답 겸 쇄환사는 2월 말에 부산을 출발, 3월 3일에 후추에 도착했다. 이들은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5월 하순에 에도에 도착하여 6월 6일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했다. 11일에 쇼군 히데타다의 조선 국왕에 대한 회답 서계가 조선 사절의 숙소로 전달되었는데, 거기에는 원수충(源秀忠)이라는 붉은 도장만 찍혀 있을 뿐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는 쓰여 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쓰시마를 거쳐 조선에 전달된 이에야스의 국서는 일본국왕이라는 도장과 함께 원가강(源家康)이라는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과거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쇼군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일본국왕과 조선국왕을 대등하게 다룬 교린의 형태이자 쓰시마에서 아시카가 쇼군이 대조선 외교에서 과거 사용했던 도장과 조선 국왕의 국서에 찍힌 도장을 위조해 꾸민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들 조선측 회답 겸 쇄환사와 일본측 사이에 게이초 14년(1609년) 기유약조가 맺어지고, 양국의 국교는 정상화되었다.
1617년과 1624년의 조선측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의 발단이 된 서계 역시 쓰시마에서 위조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쓰시마 후추번의 가신이었던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아들인 도시나가(智永)와 그 가신인 마쓰오 시치우에몬(松尾七右衛門), 시마가와 다쿠미(島川內匠) 그리고 조선측 사절 가운데 박대근(朴大根)이라는 인물이 관계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36년에 이르러서야 쓰시마에서 양국 국서를 위조해온 것이 발각되었고, 국서 위조의 책임자로 지목된 도시나가의 아들 시게오키(調興)는 쓰가루 지역으로 유배되었으며 시마가와 다쿠미와 마쓰오 시치우에몬은 사형에 처해졌고, 야나가와 집안의 보리사였던 류방원도 폐쇄되고 그곳에 모셔져 있던 야나가와 시게노부, 도시나가 부자의 묘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야나가와 잇켄).
5. 말년과 사망
소 요시토시는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양력 1월 31일)에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는 장남 소 요시나리가 이었다.
6. 사상 및 신앙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을 받아 기리시탄(가톨릭) 신앙을 가졌으며, 세례명은 다리오(ダリオ다리오일본어)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군종 사제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소 요시토시에 대해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된 뒤에는 가톨릭 신앙을 더 이상 믿지 않았으며, 유키나가의 딸이었던 고니시 다에와도 이혼했다. 쓰시마 도주는 일본어와 조선어 모두 능해야만 하는 쓰시마의 이중국적지 특성 때문에, 소 요시토시 역시 조선어를 할 줄 알았다.
7. 개인사 및 가족 관계
소 요시토시의 개인사는 그의 정치적, 외교적 행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부친: 소 마사모리
- 모친: 류안인(竜安院), 다테이시 다카히로의 딸
- 양부: 소 요시시게(1532년~1589년)
- 정실: 묘(妙, ?~1605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세례명 마리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혼.
- 계실: 위덕원(威徳院), 가와무라씨 또는 아비루씨
- 장남: 소 요시나리(1604년~1657년)
- 측실: 양복원(養福院), 다테이시 모리하루의 딸
- 딸: 스기무라 도모쓰구의 부인
- 딸: 야나가와 조코의 정실
- 딸: 소 나리치카의 부인
- 딸: 후루카와 나리노리의 부인
- 딸: 우치노 스케나리의 부인
8. 평가 및 논란
소 요시토시의 생애와 활동은 조선과의 관계 복원 노력과 쓰시마 번의 안정적 운영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임진왜란 참전 및 조선 외교에서의 기만 행위라는 비판적 논란을 동시에 안고 있다.
8.1. 긍정적 평가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얻는 이익 외에도 쓰시마 섬이 전쟁의 중간 기착지가 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을 회피하려 했다. 이는 소 요시토시 개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쓰시마 번주의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것이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에도 시대에 조선과의 평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소씨 가문의 쓰시마 번이 번영하는 데 기여했다.
8.2. 비판 및 논란
조선측 기록에서는 대체로 쓰시마나 그 영주인 소씨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년) 6월 9일자 기록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의 일본 정세를 언급하면서 소 요시토시에 대해 혹평하고 있다. 실록은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는데 제 아내를 내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서 붙었고,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모주(謀主)였기로 어떤 일을 기회로 납총(納寵)하려 하여 이에야스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를 오가며 갖은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소 요시토시와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왜적들 중에서도 매우 교활한 자들로, 거주하고 있는 곳도 우리의 지경과 밀접하게 가깝습니다. 강화 요청을 핑계삼아 자주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 간곡한 정성을 다하기도 하고 멋대로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하며, 몰래 쾌속선을 내보내 사람을 약탈하기도 하고 그들 섬의 왜인들로 하여금 투항해서 굶주리고 있음을 고하게도 하여, 변태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더욱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탐색이 갈수록 급박해지고 말을 바꾸어 가면서 계책을 더욱 깊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꺼리면서 은밀히 물어보는 것은 매양 중국 장수들이 어느 땅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과 중국군이 과연 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수(防戌)하느냐는 것이니, 이런 때에 천조(명나라)에서 힘을 내어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여 큰 실패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기록하며 그의 기회주의적이고 기만적인 외교 행태를 비판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조선과의 조약으로 소씨 가문이 번영하였지만, 조선과의 교섭을 성급하게 처리하고 국서를 위조하는 등 기만 행위를 벌였기 때문에,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에 와서 국서 위조가 발각되어 소씨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야나가와 잇켄).
9. 영향
소 요시토시의 활동은 쓰시마섬 지역의 운명, 일본의 대외 정책, 그리고 일본-조선 관계에 지대한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쓰시마 번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조선과의 관계 유지를 필사적으로 추구했으며, 이는 쓰시마가 에도 시대 내내 일본과 조선 사이의 유일한 공식 외교 및 무역 창구 역할을 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기유약조 체결로 이어져 양국 간의 국교를 재개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국서 위조와 같은 기만 행위는 양국 관계에 불신을 남겼고, 후대 야나가와 잇켄 사건의 원인이 되어 쓰시마 번에 큰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 요시토시의 후손들은 한 체제가 폐지될 때까지 쓰시마를 통치했으며, 소씨 가문은 막부의 조선과의 중개자 역할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지속적으로 얻었다. 이는 에도 막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일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제 질서의 중심에 자신들을 위치시키는 데 기여했다.
10. 관련 항목
- 쓰시마섬
- 쓰시마국
- 쓰시마 후추번
- 조선통신사
- 일조 관계사
- 야나가와 잇켄
- 고니시 유키나가
- 사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