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공직 경력
수부라누스는 에퀴테스 계급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공직을 거쳤으며, 그의 공직 경력cursus honorum라틴어은 시리아의 바알벡 (오늘날 레바논)에 세워진 비문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맡았던 가장 초기 직책은 '프레펙투스 파브룸'(prefectus fabrum라틴어)이었다.
q=Baalbek|position=right
다음으로 그는 보조군 기병대 부대인 '알라 타우리나'(ala Taurina라틴어)의 '프레펙투스'(prefectus라틴어)를 역임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부대가 서기 69년 이른 봄에 이탈리카 제1군단과 함께 루구두눔에 주둔했다고 언급한다.
q=Lugudunum|position=left
로널드 심은 이러한 사실과 수부라누스가 로마의 '볼티니아'(Voltinia라틴어) 부족에 속했다는 점에서, 그가 '네 명의 황제의 해'Year of Four Emperors영어 당시 황제위 주장자 술피키우스 갈바의 편에 선 나르보넨시스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고 추론했다.
네 명의 황제의 해 이후 수십 년간 수부라누스는 플라비우스 왕조 황제들을 위해 여러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고위 인사들의 '보좌관'(adiutor라틴어)을 지냈다. 첫 번째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로, 수부라누스는 크리스푸스가 서기 74년부터 79년까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으로 재임할 때 속주의 인구 조사를 도왔다. 두 번째는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praefectus annonae라틴어)이자 후에 이집트의 프레펙투스가 된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였다. 그 뒤 수부라누스는 '아드 메르쿠리움'(ad Mercurium라틴어)의 프레펙투스를 맡았다.
q=Judea (Roman province)|position=right
다음으로 그는 여러 소규모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는데, 여기에는 알페스 코티아이, 페다티우스 티리우스(Pedatius Tyrius라틴어), 감문티우스(Gammuntius라틴어), 레폰티우스(Lepontius라틴어) 등이 포함된다. 이후 그는 유대의 프로쿠라토르를 수행했으며,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 후계자로 지명된 서기 97년에는 다시 갈리아 벨기카의 프로쿠라토르로 임명되었다.
q=Gallia Belgica|position=left
갈리아 벨기카 프로쿠라토르 직책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군사 집단 중 하나인 라인강 국경의 군단들에 대한 재정을 담당했기에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이 시기에 수부라누스는 트라야누스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했으며, 그 결과 트라야누스는 그를 친위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2. 트라야누스 즉위 기여
수부라누스의 친위대 사령관 임명은 네르바 황제의 죽음과 그 이전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트라야누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전임자인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는 이전 황제 네르바를 상대로 일어난 반란의 책임자였다. 네르바 황제가 사망한 뒤, 카스페리우스와 이 반란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은 거짓 초대를 받아 콜로니아 아그리피나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본부로 소환되었고,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의 말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이들을 소멸시켜 버렸다"고 한다.
q=Colonia Agrippina|position=right
역사가 John D. Grainger의 의견에 따르면,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가 처형당한 방식은 친위대의 나머지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장교들과 동료들의 처형, 그리고 이것이 기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분명하게 분노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부라누스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반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친위대를 통제하고, 트라야누스에 대한 신뢰를 다시 구축하며,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인원들을 제거해야 했다. 수부라누스가 이 복잡하고 민감한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트라야누스는 라인강 국경에 머물렀다. 이처럼 수부라누스는 친위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황실 근위대의 충성심을 트라야누스에게 돌리는 데 성공함으로써, 트라야누스가 안정적으로 로마 황제로서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트라야누스가 수부라누스에게 친위대 사령관의 상징인 검을 건네며 "만일 내가 잘 다스린다면, 이 검을 나를 위해 써라. 내가 잘못 다스린다면, 이 검을 나에게 써라"라고 말한 일화는 이러한 수부라누스의 막중한 책임과 트라야누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 후기 정치 경력 및 영예
친위대 사령관으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수부라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법무관 계급'(inter praetores라틴어)으로 편입되면서 에퀴테스 신분에서 원로원 계급으로 승진하는 큰 영예를 누렸다. 그는 서기 101년에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와 함께 보좌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로널드 심은 플리니우스가 서기 100년 9월에 연설을 할 당시 수부라누스가 이미 원로원 의원이었고 집정관직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심은 수부라누스가 로마의 주요 사제단 중 하나인 국가 사제단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수부라누스는 서기 104년에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직권집정관'(consul ordinarius라틴어)으로서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하는 특별한 영예를 누렸다. 이는 그의 정치적 경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가 제국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을 보여준다. 플리니우스는 그의 서한에서 수부라누스를 두 차례 언급하며, 수부라누스가 적어도 서기 107년까지 살아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