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세바스티안 온토리아 에스콜라자는 스페인 바스크주 기푸스코아도의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의 출생지이자 고향인 산세바스티안은 그가 선수 생활 중 중요한 시기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이다.
1.1. 출생 및 성장
세바스티안 온토리아 에스콜라자는 1920년 1월 20일, 스페인 바스크주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인 산세바스티안은 그가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돌아오게 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1.2. 스페인 내전 시기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온토리아의 개인사는 급변했다. 그는 반란 초기 바스크군의 '라라냐가' 인민 전선이라는 공산주의 대대에 입대하여 내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내전 말기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사라고사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 동안의 경험은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감에서 풀려난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축구 경력을 이어가게 된다.
2. 클럽 경력
세바스티안 온토리아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클럽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공격수로 시작했지만, 이후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1. 레알 사라고사
온토리아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적 초기 두 시즌 동안 라리가에서 단 7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으며, 1940-41 시즌에는 팀이 하부 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
2.2. 레알 소시에다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추방 이후 고향인 산세바스티안으로 돌아온 온토리아는 레알 소시에다드와 계약했다. 그는 이 팀에서 14년 동안 활약하며 아토차 스타디움의 상징적인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1941-42 시즌, 1943-44 시즌, 그리고 1947-48 시즌에 걸쳐 세 차례나 강등을 경험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온토리아는 본래 공격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베니토 디아스 감독의 지도 아래 미드필더로 전향했다. 또한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으며, 모든 대회를 통틀어 374경기에 출전하여 114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51년에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FC 바르셀로나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3. 말년 클럽 경력
레알 소시에다드에서의 긴 활약 이후, 온토리아는 1957년 37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전 그는 세군다 디비시온의 두 팀에서 각각 1년씩 뛰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는 SD 인다우추와 바라칼도 CF에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세바스티안 온토리아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단 한 차례의 국제 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팀 경기는 1950년 4월 9일, 1950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원정 경기를 치른 것이었다. 이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스페인 대표팀은 앞서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5-1 대승을 거둔 덕분에 브라질에서 열린 본선 대회 진출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4. 은퇴와 사망
세바스티안 온토리아는 1957년, 37세의 나이로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그는 축구계와는 거리를 두며 조용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4년 8월 12일, 자신의 고향인 산세바스티안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