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아빌라의 요한은 1499년 1월 6일, 오늘날의 시우다드레알 주 알모도바르 델 캄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알폰소 데 아빌라와 카탈리나 히혼(또는 시혼)은 부유하고 경건한 부부였으며, 특히 알폰소 데 아빌라는 유대계 컨버소 혈통이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출생 연도를 1500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1513년, 14세의 나이로 살라망카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으나, 1517년에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3년간 엄격한 경건 생활을 실천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경건함에 감명받은 한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조언에 따라, 그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 등록하여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저명한 도미니코회 수사인 도밍고 데 소토를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을 누렸다. 요한은 알칼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이나, 실무 학위 요건을 마치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요한이 아직 학생이던 시절에 부모가 모두 사망했고, 1526년 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는 부모가 묻힌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이후 그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이러한 세속적 인연의 단절에서 해외 선교에 대한 소명을 보았고, 멕시코로 떠날 준비를 했다. 1527년 1월, 그는 틀락스칼라 대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된 도미니코회 수사 훌리안 가르세스와 함께 인도 제도로 떠나기 위해 세비야로 향했다. 세비야에서 체류하는 동안, 미사를 집전할 때의 비범한 헌신과 교리 문답 및 설교 능력은 지역 사제 에르난도 데 콘트레라스의 주목을 받았다. 콘트레라스는 그를 세비야 대교구의 대주교이자 총 종교 재판관이었던 알론소 만리케 데 라라에게 소개했다. 대주교는 이 젊은 성직자에게서 안달루시아 지역의 신앙을 일깨울 강력한 도구를 보았고, 상당한 설득 끝에 요한은 아메리카로의 여정을 포기하게 되었다.
1526년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요한은 세비야의 작은 집에서 다른 사제(아마도 콘트레라스)와 함께 살았으며, 느슨한 형태로 공동체를 형성한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1527년, 이 제자들 중 한 명의 여동생 산차 카리요의 요청으로 그는 아우디 필리아(Audi, filia, "들어라, 딸아")를 쓰기 시작했고, 이 작품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확장되고 편집되었다.

2. 사목 활동 및 설교
아빌라의 요한은 설교가로서 안달루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한 사목 활동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교육 기관 설립과 제자 양성에 힘쓰며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2.1. 안달루시아의 사도
요한의 첫 설교는 1529년 7월 22일에 있었으며, 즉시 그의 명성을 확립시켰다. 안달루시아에서 9년간의 선교 활동 동안, 그의 모든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이 교회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개혁 요구와 귀족들의 행태에 대한 비난은 1531년 세비야 종교 재판소에 고발되는 결과를 낳았고, 1532년 여름에는 투옥되었다. 그는 재물의 위험을 과장하고 부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닫는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혐의들은 반박되었고, 그는 1533년 7월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개혁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534년 말이나 1535년 초 무렵, 아빌라의 요한은 코르도바 교구에 교적을 등록하여 작은 성직록을 받았다. 이 도시는 그가 제자들을 지도하고 안달루시아 전역을 오가며 설교하고, 그라나다, 바에사, 몬티야, 사프라와 같은 여러 인근 도시에 학교와 대학을 설립하는 본부가 되었다. 이 시기인 1538년경 그라나다에서 아빌라가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며 많은 이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기여했다.
2.2. 교육 기관 설립 및 활동
특히 중요한 것은 교황 바오로 3세의 교황 교서에 의해 1538년에 설립된 바에사 대학교였다. 아빌라는 이 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이 대학은 이후 신학교와 예수회 학교들의 모델이 되었다.
아빌라는 1538년부터 1539년까지 그라나다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어떤 종류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1546년부터 1555년까지 요한은 코르도바에서 약 20명의 제자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는 그가 사도적 사제들의 어떤 공식적인 기초를 시작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회의 설립과 빠른 확장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결실을 맺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1551년 초, 아빌라가 건강 악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그는 예수회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총 30여 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기 시작했다.
3. 저술 및 신학
아빌라의 요한은 영적 지도서, 설교, 서한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신학적 사상은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을 특징으로 한다.
3.1. 주요 저서 및 서한
1970년에 출판된 스페인어 비평판은 아빌라의 작품을 6권으로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가 편집한 아우디 필리아 두 개 판본, 82편의 설교와 영적 강론, 몇몇 성경 주해, 257편의 서한(1538년부터 그의 사망까지의 기간을 대표함), 여러 개혁 관련 논문 및 기타 소규모 논문들이 포함된다. 요한은 그에게 조언을 구한 그라나다 대주교 페드로 게레로와 훗날 시성된 발렌시아 대주교 후안 데 리베라, 빌라노바의 토마스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또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 하느님의 요한, 아빌라의 테레사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아빌라의 작품은 1618년, 1757년, 1792년, 1805년에 마드리드에서 수집 및 출판되었으며, 댄딜리(D'Andilly)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1673년 파리에서, 셔머(Schermer)의 독일어 번역본은 1856년부터 1881년 사이에 레겐스부르크에서 6권으로 발행되었다.
아우디 필리아는 1620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조안 프랜시스 고믈리가 2006년에 현대적인 번역본을 출판했다. 그의 서한 중 일부는 영적 서한(Spiritual Letters영어)이라는 제목으로 163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1970년에 영인본이 출판되었다.
3.2. 신학적 사상
아빌라의 신학적 사상은 그의 설교와 저술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그는 깊이 있는 성경 지식과 열정적인 선교 정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아빌라의 요한을 "성경에 대한 심오한 전문가이자 불타는 선교 정신을 부여받은 인물"이라고 묘사하며,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독특하고 심오한 방식으로 꿰뚫어 볼 줄 알았다.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사도적 행동을 결합시켰다. 그는 설교와 성사의 더 빈번한 실천에 헌신했으며, 교회의 결실 있는 개혁을 목표로 사제직 후보자, 수도자, 평신도의 양성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고 평가했다.
'교회의 의사' 선포를 위한 교황 교서에 따르면, 아빌라의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시작되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표현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존경받는 교수라기보다는 주로 설교가였으며,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절친한 친구였다. 아빌라의 요한은 "기도적이며 지혜로운" 신학을 저술했으며, 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은총의 우위"에 기반을 두었다. 그는 체계적인 신학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신학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면서도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깊이와 명확성으로 인해 훗날 '교회의 의사'로 선포되는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4. 영향 및 관계
아빌라의 요한은 종교 개혁 시기에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교류하며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1. 종교 개혁 및 사회에 미친 영향
아빌라의 요한의 성인다운 명성, 그리고 성직자 개혁, 학교 및 대학 설립, 평신도 교리 교육을 위한 그의 노력은 많은 후대 개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특히 예수회에 의해 크게 존경받는다. 스페인에서 예수회의 발전은 그의 우정과 지원 덕분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 중 약 30여 명이 예수회에 합류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그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고 많은 이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스페인 사회에 큰 종교적,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활성화에 기여했다.
4.2. 주요 인물과의 관계
아빌라의 요한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하느님의 요한, 빌라노바의 토마스, 후안 데 리베라, 프란치스코 보르하 등 당대 여러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그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저명한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도밍고 데 소토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관계들은 그의 사목 활동과 신학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 사망
1551년 초부터 아빌라의 요한은 지속적인 건강 악화를 겪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코르도바 주 몬티야 마을에서 반은퇴 상태로 보냈다. 그는 1569년 5월 10일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몬티야에 있는 예수회 강생 교회에 묻혔다. 이 교회는 현재 그의 기념 성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망 전 18년 동안 지속적인 병환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6. 공경 및 칭호
아빌라의 요한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과 시성 절차를 거쳐 성인으로 공경받게 되었고, 후에 '교회의 의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6.1. 시복 및 시성
아빌라의 요한은 1759년 2월 8일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이후 1894년 1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그의 시성을 위한 절차는 1952년 3월 14일에 시작되었고, 1970년 5월 31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6.2. 교회의 의사
2012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아빌라의 요한을 교회의 의사로 선포했다. 이 선포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신자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강론에서 아빌라의 요한이 "성경에 대한 심오한 전문가였고, 불타는 선교 정신을 부여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독특하고 심오한 방식으로 꿰뚫어 볼 줄 알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사도적 행동을 결합시켰고, 설교와 성사의 더 빈번한 실천에 헌신했으며, 교회의 결실 있는 개혁을 목표로 사제직 후보자, 수도자, 평신도의 양성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교회의 의사' 선포를 위한 교황 교서에서는 아빌라의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은 삼위일체의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되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표현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는 존경받는 교수라기보다는 "아버지 스승 아빌라"로 불렸던 주로 설교가이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절친한 친구였다. 아빌라의 요한은 "기도적이며 지혜로운" 신학을 저술했으며, 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은총의 우위"에 기반을 두었고 "성경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보여주었지만 체계적인 종합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경신성사성은 그의 선택적 기념일을 5월 10일로 지정했다.
7. 기념 및 유산
아빌라의 요한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는 그에게 헌정된 산 후안 데 아빌라 성당이 있다. 또한 살라망카의 콜레히오 마에스트로 아빌라 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유산은 가톨릭 교회의 영적 및 지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스페인의 종교 교육과 성직자 양성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