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샤를-오귀스탱 드 쿨롱은 1736년 6월 14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806년 8월 23일에 사망한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 군사 공학자, 장교이다. 그는 정전기력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여 전기역학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헌을 기려 전하의 SI 단위가 '쿨롱'으로 명명되었다. 쿨롱은 전기 및 자기 연구 외에도 마찰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여 아몽통-쿨롱 마찰 법칙을 정립하고, 지반 공학 분야에서는 토압 이론을 개발하여 옹벽 설계의 초석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선구적인 기여를 남겼다. 그의 정교한 실험 방법론과 이론적 기여는 18세기 과학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교육
샤를-오귀스탱 드 쿨롱은 1736년 6월 14일 프랑스 앙굴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앙리 쿨롱은 몽펠리에 지역 왕실 영지(royal demesne)의 검사관이었고, 어머니 카트린 바제(Catherine Bajet)는 양모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쿨롱은 생 앙드레 교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한 그는 명문 콜레주 마자랭(Collège Mazarin)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 언어, 문학은 물론 수학, 천문학, 화학, 식물학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특히 피에르 샤를 모니에(Pierre Charles Monnier)로부터 수학을 배우며 수학 및 관련 분야를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1757년부터 1759년까지는 아버지의 고향인 몽펠리에에 머물며 도시 과학 학회 활동에 참여했고, 수학자 오귀스탱 다니지(Augustin Danyzy)의 지도를 받았다. 1759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파리로 돌아와 메지에르 왕립 공병 사관학교(École royale du génie de Mézières) 입학시험에 합격한 후, 1761년에 졸업하고 프랑스 왕립군(French Royal Army)에 공병 장교로 임관하며 소위 계급을 받았다.
2.2. 초기 군사 및 공학 경력
졸업 후 20년 동안 쿨롱은 군사 공학자로서 다양한 지역에 배치되어 구조 공학, 요새 건축, 지반 공학 등 여러 공학 분야에서 활동했다. 첫 근무지는 브레스트였으나, 1764년 2월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로 파견되어 포트 부르봉(Fort Bourbon) 건설 책임자로 1772년 6월까지 8년간 근무했다. 마르티니크에서의 3년간의 근무는 그의 건강에 평생 영향을 미치는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로 귀국 후, 쿨롱은 부셰인으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응용 역학에 대한 중요한 저술을 시작했으며, 1773년에는 첫 논문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에 제출했다. 1779년에는 로슈포르로 파견되어 몽탈랑베르 후작(Marquis de Montalembert)과 협력하여 일데 근처에 완전히 목재로 된 요새를 건설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로슈포르 재직 중, 쿨롱은 특히 로슈포르의 조선소를 실험실로 활용하며 역학 연구를 계속했다. 같은 해, 그는 마찰 법칙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담은 『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re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부품 간의 마찰과 로프의 뻣뻣함을 고려한 단순 기계 이론프랑스어』을 발표했으며, 20년 후에는 유체 저항에 관한 회고록을 발표했다. 대위 계급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라로셸, 일데, 셰르부르 등지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전기 전하와 자극 사이의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이 관계는 나중에 쿨롱의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2.3. 과학 아카데미 활동 및 프랑스 혁명
1774년에 쿨롱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의 통신 회원이 되었고, 1777년에는 자기 컴파스 연구로 아카데미 현상(懸賞)에서 1위를 차지했다. 1781년에는 마찰 연구로 다시 한번 1위를 수상하며 같은 해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81년, 그는 마지막 근무지로 파리에 배치되었다. 1787년에는 자크-르네 테농(Jacques-René Tenon)과 함께 영국 스톤하우스 왕립 해군 병원(Royal Naval Hospital, Stonehouse)을 방문하여 혁신적인 '파빌리온(Pavilion) 설계'에 깊은 인상을 받고 프랑스 정부에 도입을 권고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수도 및 분수 관리관'(intendant des eaux et fontaines) 직을 사임하고 자신이 소유한 블루아의 작은 영지로 은퇴했다.
이후 혁명 정부의 새로운 도량형 제정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파리로 소환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립 학회(French National Institute)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자 1802년에는 공공 교육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건강은 이미 매우 쇠약한 상태였으며, 그로부터 4년 후인 1806년 8월 2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쿨롱은 옹벽 설계에 대한 기여로 지반 공학 분야의 선구자로서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은 에펠탑에 새겨진 72명의 이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3. 주요 과학적 기여
쿨롱은 역학과 전자기학 분야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다. 그의 연구는 물리학의 여러 영역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실험적 엄밀성과 이론적 통찰력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3.1. 비틀림 저울
쿨롱은 1784년 『Recherches théoriques et expérimentales sur la force de torsion et sur l'élasticité des fils de metal금속선의 비틀림 힘과 탄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 및 실험프랑스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비틀림 저울 내 금속선의 비틀림 힘에 대한 쿨롱의 실험 결과가 담겨 있었다. 그의 일반적인 결론은 "동일한 금속으로 된 선의 경우, 토크의 모멘트는 비틀림 각도와 지름의 4제곱에 비례하고, 선의 길이에 반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쿨롱은 이 비틀림 저울을 발명함으로써 매우 미세한 힘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그가 전하와 자극 사이의 힘을 측정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영국 지질학자 존 미첼(John Michell)도 1750년에 독립적으로 비틀림 저울을 발명했지만, 지구의 자기장 측정에 사용하지 못하여 쿨롱의 공로가 더 널리 알려졌다.

3.2. 전기 및 자기 연구: 쿨롱의 법칙
쿨롱은 비틀림 저울을 사용하여 정전기 및 자기장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785년에 그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첫 세 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 "『Premier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 및 자기에 관한 제1회고록프랑스어』": 이 보고서에서 쿨롱은 "금속 선의 비틀림 힘이 비틀림 각도에 비례하는 성질을 기반으로 한 전기 저울(비틀림 저울)의 제작 및 사용 방법"을 설명했다. 또한 그는 "같은 종류의 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가 서로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법칙을 실험적으로 밝혀냈다. 그는 "이 세 가지 실험 결과, 같은 종류의 전기로 대전된 두 구가 서로에게 가하는 반발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명시했다.
- "『Second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 및 자기에 관한 제2회고록프랑스어』": 이 보고서에서 쿨롱은 "자성 및 전기 유체가 반발 또는 인력으로 작용하는 법칙"을 다루었다. 그는 두 개의 반대 전하를 띤 구체 사이의 인력이 구체의 전하량 곱에 비례하고, 구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 "『Trois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 및 자기에 관한 제3회고록프랑스어』": 이 보고서는 "고립된 물체가 일정 시간 동안 덜 습한 공기와의 접촉이나 지지체의 유전 특성에 따라 잃는 전기량"에 대한 내용이다.
이후에도 쿨롱은 다음 네 편의 보고서를 발표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 "『Quatrième Mémoire제4회고록프랑스어』": 전기 유체의 두 가지 주요 특성, 즉 유체가 화학적 친화력이나 선택적 인력에 따라 어떤 물체에 확산되지 않고 접촉된 다른 물체들 사이에 분할되며, 전도체에서는 유체가 안정 상태에 이르면 물체의 표면에 퍼지고 내부로 침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1786년).
- "『Cinquième Mémoire제5회고록프랑스어』": 접촉된 전도체들 사이에 전기 유체가 어떻게 분할되는지, 그리고 이 유체가 물체 표면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1787년).
- "『Sixième Mémoire제6회고록프랑스어』": 여러 전도체들 사이의 전기 유체 분포에 대한 연구의 속편으로, 이 물체들 표면의 여러 지점에서의 전기 밀도 측정에 관한 내용이다 (1788년).
- "『Septième Mémoire제7회고록프랑스어』": 자기에 관한 연구를 다루었다 (1789년).
쿨롱은 전기 전하와 자극 사이의 인력 및 반발력 법칙을 설명했지만, 두 현상 사이의 관계를 찾지는 못했다. 그는 인력과 반발력이 서로 다른 종류의 '유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국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도 독립적으로 쿨롱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그의 연구는 1879년에야 출판되었기 때문에 발견자의 영예는 쿨롱에게 주어졌다. 쿨롱의 연구는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으며, 이는 훗날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Ørsted)와 시메옹 푸아송(Siméon Poisson)에 의해 증명되고 앙드레마리 앙페르(Andre-Marie Ampere)의 전기역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모든 연구는 독창성과 철저하고 끈질긴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3.3. 마찰 및 윤활 연구


쿨롱은 마찰학(Tribology) 분야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기욤 아몽통(Guillaume Amontons)의 발견과 쿨롱의 연구 결과는 오늘날 '아몽통-쿨롱 마찰 법칙(Amontons-Coulomb laws of friction)'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세기에 수행된 마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연구를 완성했으며, 덩컨 다우슨(Duncan Dowson)에 의해 '마찰학의 2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779년에 그는 『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é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부품 간의 마찰과 로프의 뻣뻣함을 고려한 단순 기계 이론프랑스어』이라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여 마찰 법칙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시했으며, 20년 후에는 유체 저항에 관한 회고록을 발표했다. 그의 연구는 기계에서의 마찰 영향을 심도 깊게 다루었으며, 윤활 이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3.4. 토압 이론
쿨롱은 지반 공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는 오늘날 지반 공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1776년, 그는 『Essai sur une application des règles de Maximis et Minimis à quelques Problèmes de Statique, relatifs à l'Architecture건축과 관련된 정역학 문제에 최대 최소 규칙의 적용에 대한 에세이프랑스어』를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에 제출했다. 이 연구는 오늘날 '토압 쐐기 이론'(wedge theory of earth pressure)으로 알려진 개념을 도입했으며, 흙 덩어리의 안정성을 분석하기 위한 몇 가지 핵심 원리를 확립했다.
쿨롱이 제시한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전단 저항 법칙: 쿨롱은 흙의 전단 저항을 점착력(c), 수직 응력(σ), 내부 마찰각(φ)과의 관계로 공식화했다. 그는 전단 저항력(s)이 점착력(c)에 수직 응력(σ)과 내부 마찰각(φ)의 탄젠트 값을 곱한 것을 더한 값과 같다는 것을 밝혔다.
- 능동 및 수동 토압: 그는 흙이 옹벽에 압력을 가하거나 움직임에 저항하는 조건을 설명하는 능동 토압 및 수동 토압 한계의 개념을 도입했다.
- 파괴면: 쿨롱은 흙의 파괴면이 수평면에 대해 45도와 내부 마찰각의 절반을 더한 각도(45° + φ/2)로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 벽면 마찰: 그는 벽면 마찰이 측방 토압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고려한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 임계 높이: 쿨롱은 점착력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수직 흙 제방의 임계 높이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 배수: 그는 물의 축적으로 인해 옹벽에 추가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적절한 배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경험적 검증: 쿨롱은 자신의 이론을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원수의 옹벽과 같은 당시의 건설 관행을 사용하여 검증했다.
쿨롱의 분석은 당대의 실용적인 공학적 해결책을 넘어 흙 안정성 문제에 정역학 및 역학 원리를 체계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의 방법은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정제되었지만, 현대 토질 역학 및 옹벽 설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오늘날에도 지반 공학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의 기여는 토질 역학 이론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윌리엄 존 맥콘 랭킨(William John Macquorn Rankine)과 같은 후속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점성토 및 사질토에 대한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쿨롱의 1776년 논문에 사용된 컬러폰(Colophon)은 동료 평가를 거친 지반 공학 저널 『Géotechnique』의 각 호 표지에 재현되어 있다.
4. 유산 및 평가
샤를-오귀스탱 드 쿨롱은 그의 과학적 업적과 공학적 통찰력으로 인해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산은 단순한 이론적 발견을 넘어, 실용적인 공학 분야에서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4.1. 과학계에 미친 영향
쿨롱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그의 이름을 딴 SI 단위 '쿨롱'이 1880년에 전하의 단위로 채택된 것이다. 이는 그가 전자기학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상징이다. 그의 쿨롱의 법칙은 전기 회로 및 전자기학의 기본 원리가 되어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을 포함한 후속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마찰(마찰학)과 토압 이론(지반 공학) 분야에서도 핵심적인 기여를 하여 이들 분야의 현대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정교한 실험 장치인 비틀림 저울을 개발하여 미세한 힘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실험 물리학의 기준을 높였다.
4.2. 비판 및 한계
쿨롱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전기 유체'와 '자기 유체'라는 별개의 두 가지 유체를 가정했다. 그는 이 두 유체 사이에 명확한 관계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의 유체론은 나중에 전자기학이 단일한 힘의 장으로 통합되면서 한계가 드러났다. 또한, 쿨롱의 법칙은 영국의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가 1771년에 쿨롱과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캐번디시의 연구는 그가 사망한 후 1879년에야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법칙의 명명권은 먼저 발표한 쿨롱에게 주어졌으나, 이러한 독립적인 발견은 쿨롱의 업적이 특정 시대의 과학적 탐구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4.3. 기념 및 영예
쿨롱의 업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전하의 SI 단위인 '쿨롱'으로 명명되어 영구히 기억되고 있다. 또한,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에는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자 및 공학자 7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샤를-오귀스탱 드 쿨롱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어 그의 업적이 프랑스 과학 기술사에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보여준다. 이 외에도 그의 과학적 기여를 기리는 수많은 기념물과 학술적 영예가 존재한다.
5. 둘러보기
- 쿨롱의 법칙
- 전하
- 비틀림 저울
- 마찰
- 토압 이론
- 지반 공학
- 에펠탑에 새겨진 72인의 이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