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사이토 타카오는 1936년 11월 3일 와카야마현 니시와사시(현재 와카야마시)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43세가 되어서야 자신이 와카야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생 직후 가족은 오사카부 사카이시로 이주하여 이발소를 운영했다.
1.1. 학업 및 초기 영향
사이토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가족을 떠나 사진가나 화가, 조각가를 지망했으나 좌절하고 가출했다.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예술 관련 직업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이토의 눈앞에서 아버지의 그림을 화로에 태우며 "남자가 예술로 먹고살 수 없다"고 말했고, 초등학생 시절 사이토가 지역 미술 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은 그림마저 즉시 태워버렸다.
사이토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싸움도 잘하는 소위 '불량 소년'이었다. 그의 장래 희망은 복서나 화가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오사카부 회화전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2년 사카이시립 후쿠이즈미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업인 이발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만화에 큰 관심이 없었고 삽화가를 꿈꿨으나, 삽화 업계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당시 몰두했던 영화, 그리고 진주군이 가져온 '10센트 코믹스'에 영향을 받아 스토리 만화를 지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테즈카 오사무의 신 보물섬을 보고 "종이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흥분했으며, 초기에는 테즈카의 영향을 받아 부드러운 터치의 그림을 그렸다.
2. 경력 시작
사이토 타카오는 대여 만화 시장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극화'라는 새로운 만화 장르를 개척하고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자신만의 만화 제작 시스템인 사이토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만화 제작의 효율성을 혁신했다.
2.1. 대여 만화와 극화 운동
1953년 사이토는 가업인 이발소를 누나와 함께 이어받았지만, 1955년 2년 가까이 작업한 스토리 만화 {{lang|ja|空気男爵|쿠키 단샤쿠|Baron Air}}을 오사카의 대여 만화 출판사 히노마루 분코에 가져갔다. 처음에는 수정 요청을 받았으나 1년 간의 재작업 끝에 데뷔가 결정되었고, 이후 히노마루 분코의 간판 만화가로 여러 단행본을 발표했다.
1956년 만화에 전념하기 위해 이발소를 그만두자 어머니는 크게 분노했고, 이후 사이토의 만화를 평생 외면했다. 사이토는 자신이 유명 만화가가 된 후에도 어머니가 자신의 책을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그는 타츠미 요시히로, 마츠모토 마사히코 등과 같은 아파트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카와사키 노보루가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나, 사이토의 혹독한 작업 방식으로 인해 일찍이 그만두었다.
1958년 선배 만화가 쿠로다 마사미의 권유로 도쿄로 상경한 사이토는 1959년 도쿄 고쿠분지시에 거주하던 히노마루 분코 계열의 극화가 8명과 함께 극화 제작 집단 '극화 공방'을 결성했다. 이들은 많은 대여 극화 단편집을 출판하며 인기를 얻었으나, 조직 운영 및 수익 분배 문제로 갈등을 겪어 1960년 봄 단기간에 해체되었다.
2.2. 사이토 프로덕션 설립
극화 공방 해체 후, 사이토는 사토 마사아키, 카와사키 노보루 등과 함께 '신 극화 공방' 설립을 계획했으나 무산되었다. 이 계획을 바탕으로 1960년 4월, 사이토는 도쿄 고쿠분지시에 자신의 만화 제작 회사 '사이토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사이토의 조직론에 공감한 이시카와 후미야스 등이 스태프로 합류했으며, 사이토의 형인 사이토 하츠지가 매니저를 맡았다. 이후 사이토 프로덕션은 수많은 대여 극화를 출판했으며, 특히 {{lang|ja|台風五郎|타이후 고로|Typhoon Goro}}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었다.
1962년에는 대여 극화가 유지를 중심으로 '극화 집단'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만화 제작보다는 극화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일반 독자 회원들에게도 회보를 발행하는 등 교류를 목적으로 했다.
2.3. 분업 제작 시스템
사이토 프로덕션은 만화 제작에 영화 제작 방식을 차용하여 분업 시스템을 도입한 최초의 만화 제작사로 평가받는다. 이는 만화 제작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장기 연재를 가능하게 하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당시 만화 어시스턴트는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이었으나, 사이토 프로덕션은 스태프들의 처우에 신경을 써 좋은 대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예를 들어, 테즈카 오사무의 테즈카 프로덕션 작품에는 주로 테즈카 오사무 개인의 이름만 작가명으로 표기되었지만, 사이토 프로덕션의 작품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영화처럼 스태프 목록이 크레딧으로 명시되었다. 다만, 단행본에서는 이러한 크레딧이 삭제되어 여백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2.3.1. 작화 과정 및 스태프
사이토 프로덕션의 작화 과정은 철저한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오니헤이 한카초의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사이토 프로덕션에는 총 10명의 작화 스태프가 있으며, 별도로 히키노 신지가 오니헤이 한카초의 스크립트를 읽고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다.
- 이 밑그림은 작화 치프인 후지와라 요시히데와 그의 쌍둥이 형제 후지와라 테루미가 검토하며, 구도를 '오니헤이류'에 맞게 수정한다.
- 구도가 결정되면, '배경' 담당인 시라카와 슈지, '주요 캐릭터' 담당인 기무라 슈지, '조연 캐릭터' 담당인 우라 나오코에게 원고가 전달된다. 시라카와와 우라를 중심으로 각 스태프에게 작화가 분배된다.
- 캐릭터와 배경 작업이 모두 끝나면, 마지막으로 모든 스태프가 스크린톤 붙이기, 베타 칠하기, 수정 작업을 진행한다. 밑그림부터 원고 완성까지 약 7일이 소요된다.
이러한 분업 시스템 덕분에 사이토 타카오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작품들은 계속 연재될 수 있었다. 현재는 작화 스태프들이 캐릭터의 얼굴을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미리 그려둔 얼굴들을 트레이싱하여 작업하고 있다. 한편, "사이토 타카오가 주인공의 눈만 그린다"는 이야기는 아키모토 오사무의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에 등장하는 만화가 캐릭터와 아키모토 본인이 사이토의 열렬한 팬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도시전설이다.
- 현재 주요 스태프:**
- 과거 주요 스태프 및 어시스턴트:**
3. 주요 작품 활동
대여 만화 업계가 기울기 시작한 1963년, 사이토는 보이즈 라이프에 연재된 007 만화화를 계기로 일반 만화 잡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1967년에는 시대극 액션 극화 {{lang|ja|無用ノ介|무요노스케|Muyonosuke}}를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하며 극화 노선의 매거진을 대표하는 히트작이 되었다.
3.1. 고르고 13
1968년 10월부터 빅 코믹에 연재를 시작한 고르고 13은 사이토 타카오의 대표작이자 일본 '극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사망 이후에도 연재가 계속되고 있는 장수 만화이며, 2021년 7월 201권이 발행되면서 "단일 만화 시리즈 중 가장 많은 권수가 출판된 작품"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사이토는 2013년 "이 만화는 너무 오래 지속되어 더 이상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들의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작품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고르고 13은 두 편의 실사 영화,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의 OVA,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그리고 여러 비디오 게임으로 각색되었다. 1971년부터 사이토는 만화 그리기 강좌도 진행했다.
3.2. 기타 주요 작품
사이토 타카오는 고르고 13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남겼다.
- {{lang|ja|空気男爵|쿠키 단샤쿠|Baron Air}} (1955)
- {{lang|ja|台風五郎|타이후 고로|Typhoon Goro}} (1958)
- {{lang|ja|デビルキング|데비루 킹|Devil King}} (1964)
- 007 (1964-1967):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각색한 만화.
- {{lang|ja|無用ノ介|무요노스케|Muyonosuke}} (1967)
- {{lang|ja|影狩り|카게 가리|Kage Gari}} (1969)
- バロム・1 (1970)
- 일본 침몰 (1970): 코마츠 사쿄의 소설을 만화화.
- {{lang|ja|怪盗シュガー|카이토 슈가|Master Thief Sugar}} (1972): 미발매 NES 비디오 게임 시크릿 타이즈로 각색될 예정이었다.
- {{lang|ja|ホーキング|호킹|Hawking}} (1974)
- サバイバル (1976-1980)
- {{lang|ja|ホテル探偵DOLL|호테루 탄테이 도루|Doll: The Hotel Detective}} (1980)
- {{lang|ja|雲盗り暫平|쿠모토리 잔페이|Kumotori Zanpei}} (1983-1988)
- 鬼平犯科帳 (1993-현재): 이케나미 쇼타로의 소설 시리즈를 만화화한 작품으로, 리드사의 코믹 란 잡지에서 연재 중이다. 2019년 9월호에서는 편집부의 실수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한 챕터가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 {{lang|ja|ブレイクダウン|브레이크다운|Breakdown}} (1995)
- 剣客商売 (1998-1999): 소설을 만화화.
- {{lang|ja|仕掛人 藤枝梅安|시카케닌 후지에다 바이안|Shikake Jin Fujieda Baian}} (2002-2016): 2015년 작가의 체력적 부담으로 휴재를 결정했으며, 2016년 3월 연재 종료를 알렸다.
- {{lang|ja|銃器職人・デイブ|총기 장인 데이브|Gunsmith Dave}}: 2021년 7월부터 빅 코믹 증간호에서 연재를 시작한 고르고 13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4. 창작 철학 및 방식
사이토 타카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극화'로 정의하며, 일반적인 만화와는 차별화된 독자적인 창작 철학과 방식을 고수했다.
4.1. 극화 작가로서의 정체성
사이토는 자신을 '만화가'보다는 '극화가'로 불리기를 선호했다. 그는 초기에는 SF 장르에 대한 지향이 있었으나, 당시 대여 만화의 주 고객층이었던 젊은 노동자들이 SF를 잘 받아들이지 않자 액션 만화를 주력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만화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깊이 있는 스토리와 현실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예술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4.2. 작화 기법 및 과정
사이토는 과거 G펜을 사용했으나, 이후에는 굵기가 다른 사인펜으로 펜 터치를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그는 콘티 작업 후에는 기본적으로 밑그림 없이 바로 펜 터치에 들어갔다. 캐릭터를 그릴 때는 눈썹이나 구레나룻과 같은 특징적인 부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속 대사에서 숫자는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모두 한자 숫자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5. 수상 및 영예
사이토 타카오는 일본 만화계와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5.1. 주요 수상 경력
- 1976년 1월: 제21회 쇼가쿠칸 만화상 청년 일반 부문 (고르고 13)
- 2002년: 일본 만화가 협회상 대상 (고르고 13)
- 2005년 1월: 제50회 쇼가쿠칸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 (고르고 13)
- 2017년 11월: 제2회 만화향 이와테 특별상 (이와테현에 거주지를 두고 고르고 13에 현 출신 캐릭터를 등장시킨 공로)
- 2018년 1월: 와카야마현 문화표창 문화상
- 2019년 9월: 도쿄도 명예 도민 (예술 분야 공헌)
- 2019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특별상 (수십 년간 만화에 기여한 공로)
5.2. 정부 훈포 및 사후 영예
- 2003년 11월: 자수포장 (예술 분야 공헌)
- 2010년 4월: 욱일장 4등 욱일소수장
- 2021년 10월 6일: 사망 후 정6위에 추서
6. 사이토 타카오상
사이토 타카오 극화 문화 재단은 2017년 '사이토 타카오상'을 제정했다.
6.1. 설립 배경 및 취지
사이토 타카오상은 사이토가 만화 제작에 도입한 분업 시스템, 즉 만화의 글과 그림을 분리하여 제작하는 방식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18년 1월 첫 시상이 이루어졌으며, 수상작의 시나리오 작가, 작화가, 그리고 편집자/편집부에 상이 수여된다. 수상자에게는 '고르고 13 트로피'가 주어지며, 작가 및 작화가 부문 수상자에게는 각각 50.00 만 JPY의 상금이 지급된다. 후보작은 전문 만화 편집자만이 제출할 수 있으며,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완전한 오리지널 작품이어야 한다. 사이토 타카오(사망 전까지), 이케가미 료이치, 야마사키 주조, 작가 사토 마사루가 최종 심사위원회에 참여했다.
6.2. 역대 수상작 및 작가
연도 | 작품명 | 작가 | 작화가 | 편집자 |
---|---|---|---|---|
2018 | Abracadabra ~Ryōki Hanzai Tokusōshitsu~아브라카다브라 ~료키 한자이 토쿠소시츠~영어 | 리처드 우 | 요시자키 세이무 | 나카야마, 히라이 (빅 코믹 오리지널) |
2019 | Issak | 마카리 신지 | 더블-S | 아라이 히토시 |
2020 | Reiri레이리영어 | 이와아키 히토시 | 무로이 다이스케 | 사와 타카후미 |
2021 |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시상되지 않음; 부론손에게 "특별상" 수여. | |||
2022 | Shrink ~세이신카이 요와이~ | 나나미 진 | 츠키코 | 야마사토 나오히로 |
2023 | ケーキの切れない非行少年たち케키노 키레나이 히코 쇼넨타치일본어 | 미야구치 코지 | 스즈키 마사카즈 | 이와사카 토모아키 |
2024 | ABURA아부라일본어 | 넘버 8 | 바쿠 사쿠조 | 코바야시 쇼, 와다 신페이 |
2025 | 平和の国 島崎へ헤이와노 쿠니 시마자키에일본어 (Shimazaki in the Land of Peace) | 하마다 고텐 | 세시모 타카시 | 타부치 코지, 하라 유지 |
7. 개인 생활
사이토 타카오는 만화 작업 외에도 다양한 개인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7.1. 가족
사이토는 전 부인 세츠코 야마다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 이 자매들은 '장구루도'라는 공동 필명으로 동인지와 상업지(친족이 경영하는 리드사의 코믹 란 포함)에 만화를 그리고 있다.
사이토의 어머니는 그가 만화가가 되기 위해 이발소를 그만두자 크게 분노했으며, 이후 어머니는 만화와 만화가를 평생 증오했다. 사이토가 만화가로 크게 성공한 후에도 어머니는 그가 보낸 고르고 13 단행본을 보지도 않고 즉시 불태웠으며, 임종의 순간에도 단행본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고 시야에서 돌려세우는 등, 사이토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았다. 사이토는 이 사실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그의 집필실에는 작업하는 자신을 마주 보게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이토의 형인 사이토 하츠지도 마찬가지로, 그가 사이토 프로덕션 및 리드사의 대표이사 사장이 된 후에도 자녀들에게 "만화 따위는 읽지 마라"고 훈계했다고 한다.
7.2. 취미 및 개인적 성향
사이토는 TV와 영화 감상을 즐겼으며, 젊은 시절부터 스모의 열렬한 팬이었다. 전 스모 선수 미하마 히로토시아키는 그의 외가 친척이다. 1980년대에는 골프에 열중했으며, 이시노모리 쇼타로, 키타미 켄이치, 치바 테츠야, 츠노다 지로, 후지코 후지오 A, 후루야 미츠토시 등 친분이 깊은 만화가 동료들과 함께 쓴 방명록이 야마나시의 후지노야 별관에 액자로 보관되어 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애연가로, "담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무엇이든 피워봤다"고 말하며 과거에는 시가나 파이프 담배도 피웠다고 한다. 집필 중에도 흡연을 했으며, 한때는 하루 흡연량이 상당한 체인 스모커였으나, 말년에는 하루 40개비 정도로 줄었다고 전해진다.
사이토는 28세에 망막 박리를 겪었고, 48세에는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그는 동료 만화가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노미 마사히코가 주창한 혈액형 성격설의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혈액형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판하기도 했다.
7.3. 멘토와 영향
사이토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은 중학교 시절의 '토고' 선생이다. 사이토는 중학생 시절, "이런 건 단순한 퀴즈일 뿐 시험도 아니다. 개인의 능력을 알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여 시험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선생님이 담당이 되었을 때, 평소처럼 답안지를 백지로 돌려주자 그 선생님은 사이토의 답안지를 들고 와 책상에 놓으며 "이것을 백지로 내는 것은 너의 뜻이니 상관없지만, 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은 너의 의무이니, 자신의 책임의 증명으로 이름만은 써라"고 훈계하여 감명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인간의 약속과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선생님의 성이 '토고'였으며, 이는 고르고 13의 주인공이 사용하는 이름(듀크 토고)의 일부가 되었다.
8. 리드사
리드사는 사이토 프로덕션의 출판 부문이 분사하여 설립된 회사이다. 사이토의 형인 사이토 하츠지가 리드사 및 사이토 프로덕션의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 하츠지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이자 당시 전무이사였던 사이토 테츠토가 사장직을 이어받았다.
리드사가 설립될 당시 대형 출판사들은 주로 만화 잡지 출판에 집중하고 단행본 출판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사이토의 만화는 다른 회사 잡지에 연재된 작품이라도 단행본은 리드사에서 출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고르고 13은 쇼가쿠칸의 빅 코믹에 연재되었지만, 단행본은 리드사에서 출판되며, 쇼가쿠칸에서도 일부 재출판되었다.
9. 사망
사이토 타카오는 2021년 9월 24일 84세의 나이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5일 뒤인 9월 29일 쇼가쿠칸을 통해 발표되었다.
9.1. 작품의 지속
사이토는 사망 전 "자신 없이도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연재 중이던 고르고 13은 사이토 프로덕션의 작화 스태프, 각본 스태프, 그리고 연재처인 빅 코믹 편집부의 협력 체제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또 다른 연재작인 오니헤이 한카초 역시 2021년 9월 30일 리드사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연재 지속이 발표되었다. 사이토가 확립한 만화 제작 분업 시스템은 그의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형태로 완성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일본 정부는 사이토에게 사후 정6위를 추서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의 바이쇼인에 있다.
10. 유산 및 영향력
사이토 타카오는 일본 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유산으로 남았다.
10.1. 만화계에 끼친 영향
사이토는 만화 제작에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만화 산업의 생산 방식을 혁신했다. 이는 영화 제작 방식을 만화에 적용한 것으로, 작가 개인이 모든 작업을 도맡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스태프가 각자의 전문 분야를 담당하여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고르고 13과 같은 초대형 장기 연재 작품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일본 만화 산업의 발전과 대규모 제작 시스템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극화'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대중화함으로써 만화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고 성인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2. 문화적 기여
사이토 타카오의 작품, 특히 고르고 13은 일본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이발소나 정식당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화로, 이는 한 편으로 완결되는 구성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읽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며, 작가가 이발소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친근함을 느끼는 가게들도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오락을 넘어 사회 현상과 국제 정세를 다루며 독자들에게 폭넓은 지식과 시사점을 제공하여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사이토의 이러한 기여는 일본 만화가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문화 콘텐츠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