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버트 리 쇤베르거(Robert Lee Schoenberger, Robert Lee Schoenberger영어, 1945년 8월 25일 ~ 1975년 2월 20일)는 바비 셰인(Bobby Shane)이라는 링네임으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프로레슬러이다. 그는 또한 바비 쇼엔(Bobby Schoen)과 더 챌린저(The Challeng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신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NWA 플로리다 지부에서 주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셰인은 초기에는 아이돌형 베이비페이스로 활동했으나, 이후 쇼맨십이 강한 힐로 전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NWA에서 저명한 힐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사망 당시에는 미래의 프로레슬링 스타로 크게 촉망받고 있었다. 1975년 2월 20일, 불과 29세의 나이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빛나는 경력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2. 생애 및 배경
바비 셰인, 본명 로버트 리 쇤베르거는 1945년 8월 25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인트루이스 지역의 저명한 프로레슬링 심판인 거스 쇤베르거(Gus Schoenberger)였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셰인은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프로레슬링 팬이었다. 8세부터 아마추어 레슬링 훈련을 시작하며 일찍이 레슬링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지역 프로모터였던 샘 머치닉의 눈에 띄어 세인트루이스 레슬링 클럽의 사무실 보조원으로 일하며 프로레슬링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전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와일드 빌 롱슨으로부터 직접 코칭을 받으며 프로레슬러로서의 기량을 갈고닦았다.
2.2. 프로레슬링 입문
바비 셰인은 1963년에 프로레슬러로 정식 데뷔했다. 초기에는 '원더 보이'(Wonder Boy)라는 별명을 가진 젊은 베이비페이스로 활동했으며, 링네임은 '바비 쇼엔'(Bobby Schoen)을 사용했다. 이후 '바비 셰인'(Bobby Shane)으로 개명하고 주로 미국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의 프로레슬링 경력은 AWA의 미네소타주 지부에서 시작되었다.
3. 프로레슬링 경력
바비 셰인의 프로레슬링 경력은 다양한 지역과 단체를 넘나들며 전개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베이비페이스로 활동했으나, 이후 힐로 전환하며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3.1. 데뷔 및 초기 활동
1963년 프로레슬링에 데뷔한 바비 셰인은 '원더 보이' 바비 쇼엔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미국 중서부에서 활동하며 여러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5년 3월 21일, 아이오와주 워털루에서 로키 해밀턴을 꺾고 NWA US 헤비급 챔피언십 (센트럴 스테이츠 버전)을 획득했다. 1967년 3월 4일에는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데일 루이스를 상대로 네브래스카 헤비급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또한 하와이주에도 진출하여 베이비페이스 시절의 닉 보크윙클과 태그팀을 결성, 1969년 3월 12일 리퍼 콜린스와 루크 그레이엄으로부터 NWA 하와이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하기도 했다.
3.2. 주요 활동 지역 및 단체
1968년부터 셰인은 조지아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 4월부터는 '더 챌린저'(The Challenger)라는 복면 레슬러로 일시적으로 변신하여 활동했다. 그는 더 프로페셔널이라는 링네임의 더그 길버트와 복면 태그팀을 결성하여 디 어쌔신스와 NWA 조지아 태그팀 챔피언십을 놓고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이후 다시 맨얼굴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15일, 하와이에서 파트너였던 닉 보크윙클을 꺾고 NWA 조지아 텔레비전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1971년 11월부터는 힐로 전환하여 플로리다주의 CWF에 정착하며 큰 이름이 되었다. 그는 1971년 11월 23일 NWA 서던 헤비급 챔피언십 (플로리다 버전)을 조지 가이저로부터 획득했다. 챔피언 재임 기간 동안 히로 마츠다, 보리스 말렌코, 조니 워커, 밥 룹, 팀 우즈 등과 방어전을 치렀다. 1972년에는 밥 룹과 팀 우즈를 상대로 두 차례 NWA 플로리다 텔레비전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크리스 마르코프, 베어캣 라이트, 고저스 조지 주니어와 팀을 이루어 NWA 플로리다 태그팀 챔피언십을 세 차례나 차지했다. 1972년 1월 12일 마이애미 비치에서는 도리 펑크 주니어의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호주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으로 건너가 마리오 밀라노와 대립했다. 셰인은 플로리다를 주 활동 무대로 삼아 고저스 조지 주니어와 '금발 콤비'로 활약하는 등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다.
3.3. 캐릭터 및 별명
바비 셰인은 경력 초기에 '원더 보이'라는 별명과 함께 베이비페이스로 활동했다. 이후 1971년 11월 플로리다주 CWF에 정착하면서 힐로 전환했다. 1972년부터는 자신을 '매트의 군주'("Monarch of the Mat"영어)라고 칭하며 왕관과 망토를 링 코스튬으로 사용하는 등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이러한 '왕' 캐릭터는 훗날 제리 롤러와 할리 레이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상징적인 페르소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셰인은 또한 '레슬링의 왕'("King of Wrestling"영어)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3.4. 일본 프로레슬링 참가
1971년 2월, 바비 셰인은 밀 마스카라스, 스파이로스 아리온, 얼 메이너드, 그리고 조지아에서의 파트너였던 더그 길버트 등과 함께 일본 프로레슬링의 '다이내믹 빅 시리즈'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이 투어에서 오키 긴타로, 야마모토 고테츠, 호시노 간타로, 그레이트 고지카, 오쿠마 겐지 등 일본의 유명 레슬러들과 싱글 매치를 가졌다. 또한 밀 마스카라스와 팀을 이루어 안토니오 이노키와 태그 매치에서 대결하기도 했다.
3.5. 주요 라이벌리
바비 셰인은 그의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여러 주요 선수들과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조지아주에서 '더 챌린저'로 활동할 당시에는 더 프로페셔널과 태그팀을 이루어 디 어쌔신스와 NWA 조지아 태그팀 챔피언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플로리다주 CWF에서는 NWA 서던 헤비급 챔피언십을 방어하며 히로 마츠다, 보리스 말렌코, 조니 워커, 밥 룹, 팀 우즈 등과 맞섰다. 또한 잭 브리스코가 보유하고 있던 NWA 플로리다 헤비급 챔피언십에 여러 차례 도전하며 그와 대립각을 세웠다. 1974년 호주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에서는 마리오 밀라노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4. 레슬링 스타일 및 기술
바비 셰인은 그의 링 캐릭터처럼 쇼맨십이 강한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주요 피니시 기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롤링 크레이들
- 피겨 포 레그락
- 어브도미널 스트레치 (코브라 트위스트)
5. 타이틀 및 업적
바비 셰인은 그의 짧은 경력 동안 여러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다양한 타이틀을 획득하며 뛰어난 실력을 입증했다.
| 단체 | 타이틀 | 획득 횟수 | 파트너 (태그팀 타이틀의 경우) |
|---|---|---|---|
| 아메리칸 레슬링 어소시에이션 | AWA 미드웨스트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 올스타 레슬링 | 네브래스카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 콜리플라워 앨리 클럽 | 사후 공로상 | 2006년 | |
| 하트 오브 아메리카 스포츠 어트랙션스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급 챔피언십 (센트럴 스테이츠 버전) | 3회 | |
| NWA 아이오와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론 에치슨 | |
| NWA 미드-퍼시픽 프로모션스 | NWA 하와이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닉 보크윙클 |
| 조지아 챔피언십 레슬링 | NWA 조지아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 NWA 조지아 텔레비전 챔피언십 | 1회 | ||
| 모빌 시티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 NWA 조지아 태그팀 챔피언십 | 3회 | 더 프로페셔널, 더그 길버트, 고저스 조지 주니어 | |
| NWA 메이컨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고저스 조지 주니어 | |
| 걸프 코스트 챔피언십 레슬링 | NWA 앨라배마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 챔피언십 레슬링 프롬 플로리다 | NWA 서던 헤비급 챔피언십 (플로리다 버전) | 1회 | |
| NWA 플로리다 텔레비전 챔피언십 | 2회 | ||
| NWA 플로리다 태그팀 챔피언십 | 3회 | 베어캣 라이트, 크리스 마르코프, 고저스 조지 주니어 | |
|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오스트레일리아) | NWA 오스트라-아시안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오리지널 미스터 레슬링 |
| 슈퍼스타 챔피언십 레슬링 | SCW 웨스턴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리키 깁슨 |
6. 죽음
1975년 2월 20일, 바비 셰인은 게리 하트, 오스틴 아이돌, 그리고 직접 세스나 182 경비행기를 조종하던 버디 콜트와 함께 마이애미의 오파-로카 공항을 이륙하여 탬파의 피터 O. 나이트 공항으로 향하던 중 비극적인 사고를 당했다. 버디 콜트가 착륙 복행을 시도하던 중 실속하여 비행기가 탬파만에 추락한 것이다.
사고 직후 탬파 경찰국은 물속에서 비행기를 인양했으며, 셰인의 시신을 발견하고 익사로 사망했음을 발표했다. 그의 발이 비행기 잔해에 걸려 탈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셰인은 불과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레슬러들은 경미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특히 셰인의 키가 1.5 m (5 ft) 0.2 m (9 in) 정도로 비교적 작았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이 사고로 게리 하트는 비행기 밖으로 튕겨져 나가 팔, 손목, 무릎, 등, 흉골, 쇄골, 척추 골절과 오른쪽 눈 이탈, 코 부분 절단, 머리 외상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스틴 아이돌을 찾아 해안까지 헤엄쳐 구조했고,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 버디 콜트까지 구해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물에 뛰어들었을 때는 셰인을 찾을 수 없었다. 게리 하트는 이 기억에 오랫동안 시달렸으며, 수십 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지 자문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는 프로레슬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버디 콜트와 게리 하트는 이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인해 현역에서 은퇴해야 했으며, 오스틴 아이돌(본명 마이크 매코드)은 3년 후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셰인의 마지막 경기는 사고 전날인 2월 19일, 마이애미 비치 오디토리움에서 버디 콜트와 팀을 이루어 도미니크 드누치와 토니 파리시를 상대로 치러진 태그 매치였다.
7. 영향 및 평가
바비 셰인은 사망 당시 미래가 촉망되던 프로레슬링 스타로 평가받았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프로레슬링계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가 사용했던 '왕' 캐릭터와 왕관, 망토 등의 상징물은 그의 사후 제리 롤러에게 전해지며 롤러가 '더 킹'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셰인은 비행기 추락 사고 직전,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제리 롤러에게 자신의 왕관과 망토를 사용하도록 넘겨주었으며, 이는 롤러가 '더 킹' 제리 롤러로 불리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셰인의 '왕' 캐릭터는 제리 롤러뿐만 아니라 할리 레이스 등 후대 레슬러들의 유사한 캐릭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경력은 프로레슬링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