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 미국의 야구 선수 베니 아그바야니(Benny Peter Agbayani, Jr.)는 뉴욕 메츠와 콜로라도 로키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메이저 리그 외야수로 활동했으며, 이후 일본 프로 야구의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극적인 순간과 팬들의 열렬한 지지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도쿄 돔에서의 만루 홈런과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 결승 홈런 등 중요한 경기에서 클러치 능력을 발휘하며 '하와이안 펀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보비 밸런타인 감독과의 인연으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하여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과 초대 아시아 시리즈 MVP를 이끌며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온화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경기 중 발생한 사구 관련 논란에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교육 보조, 항공사 직원, 소프트볼 코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야구계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베니 아그바야니의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은 그의 성장과 선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하와이에서 학업과 스포츠 활동을 병행했다.
2.1. 출생과 가족 관계
베니 아그바야니는 1971년 12월 28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은 필리핀계, 사모아계, 그리고 하와이 원주민계 등 다양하게 섞여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니엘라(Niela)와 세 자녀(딸 알레이아, 아일라나, 아들 브루인)가 있다.
2.2. 학력 및 유년기 활동
아그바야니는 하와이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 스쿨에 다녔으며, 이후 하와이 퍼시픽 대학교와 오리건 공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6년에는 하와이 윈터 리그에 참여하여 트레이 힐먼 감독이 이끄는 히로 스타즈(Hilo Stars) 소속으로 뛰었다. 당시 신조 쓰요시 선수도 이 팀에 파견되어 아그바야니와 팀 동료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초기 야구 경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3. 야구 경력
베니 아그바야니의 프로 야구 경력은 마이너 리그에서 시작하여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를 거치며 다양한 팀에서 활동하며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었다.
3.1. 마이너 리그
아그바야니는 원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의해 지명되었으나 계약하지 않았다. 이후 1993년 6월 3일 뉴욕 메츠에 의해 MLB 드래프트 30라운드에서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트리플A 마이너 리그 팀인 노퍽 타이즈에서 지역 스타로 성장했다. 1995년 봄, 그는 1994-95년 MLB 파업 당시 40인 로스터에 포함된 대체 선수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그는 메이저 리그 선수 노조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선수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3.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베니 아그바야니는 뉴욕 메츠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후 콜로라도 로키스, 보스턴 레드삭스를 거치며 주요 활약을 펼쳤다.
3.2.1. 뉴욕 메츠 시절
아그바야니는 1998년 6월 17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8회말 수비 교체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틀 뒤인 6월 19일, 그는 플로리다 말린스 투수 브라이언 메도스를 상대로 1회말에 2루수 방면 안타를 기록하며 첫 선발 출장과 함께 첫 안타를 신고했다.
1999년 시즌에는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1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뉴욕 메츠 신인 선수 중 론 스워보다의 15개(1965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홈런을 쳤다. 이는 이후 아이크 데이비스 (2010년 11개)와 같은 기록이었으나, 2019년 피트 알론소가 3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스워보다의 기록을 경신했다.
2000년 8월 12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기억에 남는 플레이에 연루되었다. 4회초 1대0으로 앞선 상황에서 자이언츠는 더블, 실책, 몸에 맞는 공으로 만루를 만들었다. 1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자이언츠의 포수 보비 에스탈렐라가 좌익수 방면 플라이를 쳤고, 아그바야니는 3아웃이라고 착각하여 공을 관중석의 아이에게 던져주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는 다시 관중석으로 달려가 아이로부터 공을 회수하여 홈 플레이트로 던졌지만, 공이 이미 경기장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모든 주자에게 두 베이스씩 진루가 허용되어 자이언츠가 2대1로 역전했다. 다행히 메츠는 3대2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아그바야니는 그 아이에게 다른 공을 선물했다.
그는 2000년 시즌 동안 두 번의 중요한 홈런으로 메츠 팬들에게 깊이 기억되며, 인기 과일 음료의 이름을 따 '하와이안 펀치'(Hawaiian Punch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3월 30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11회초 만루 홈런을 터뜨려 메츠에 시즌 첫 승리를 안기고 2연전을 1승 1패로 나누는 데 기여했다. 이는 2019년 도밍고 산타나가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으로 홈런을 치기 전까지 일본에서 기록된 유일한 메이저 리그 정규 시즌 만루 홈런이었다. 같은 해 10월 7일에는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애런 풀츠를 상대로 13회초 결승 홈런을 쳤다. 또한 아그바야니는 2000년 월드 시리즈에서 메츠가 유일하게 승리한 경기에서도 결승 타점을 올렸다.

3.2.2. 콜로라도 로키스 및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02년 1월 21일, 아그바야니는 뉴욕 메츠, 콜로라도 로키스, 밀워키 브루어스 간의 10명 규모의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뉴욕에서 콜로라도로 이적했다. 그는 로키스에서 48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05에 4홈런, 19타점으로 부진했으며, 8월 말 웨이버 공시되었다. 2002년 8월 26일, 보스턴 레드삭스가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가운데 그를 웨이버 공시에서 영입했다. 그는 레드삭스에서 비교적 좋은 활약을 펼치며 13경기 37타석에서 타율 0.297를 기록하고 8타점을 올렸다. 그의 메이저 리그 마지막 경기는 9월 29일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의 펜웨이 파크 경기였으며, 4타수 1안타 1볼넷 1삼진을 기록하며 레드삭스의 승리에 기여했다.
3.2.3. 케빈 밀러 문제
베니 아그바야니가 일본 프로 야구로 이적하기 전인 2002년 시즌 오프에는 케빈 밀러를 둘러싼 이적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주니치 드래건스는 밀러의 영입을 발표했지만, 아그바야니를 영입했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신사협정을 깨고 웨이버 공시된 밀러에게 입찰했다. 레드삭스 측은 밀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의 대체 선수로 아그바야니를 제시했으나, 주니치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아그바야니의 일본 진출은 당시에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케빈 밀러 문제'로 알려져 있으며, 주니치는 결국 밀러 대신 알렉스 오초아를 영입하게 된다.
3.3. 일본 프로 야구 (NPB)
메이저 리그에서의 경력을 마친 베니 아그바야니는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팀의 역사적인 우승을 이끌었다.
3.3.1. 지바 롯데 마린스 입단
2003년 시즌 오프, 아그바야니는 9년 만에 지바 롯데 마린스 1군 감독으로 복귀하게 된 보비 밸런타인과의 인연으로 지바 롯데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메츠 시절 밸런타인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였다. 그의 등번호는 50번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하와이주가 미국의 50번째 주이기 때문이었다. 이 등번호는 당시 50번을 달고 있던 아사마 게이타 선수가 아그바야니의 희망에 따라 양보해 주었다.
3.3.2. 주요 활약 및 성적
2004년 시즌 개막전인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한 그는 첫 타석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적시타를 기록하며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같은 해 일본에 진출하여 주목받았던 이승엽이 일본 야구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아그바야니는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5월에는 4번 타자로 기용되기 시작했고, 시즌 종료까지 부동의 4번 타자 자리를 지켰다. 최종적으로 타율 0.315, 35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타율, 홈런, 타점 3관왕에 올랐다. 특히 35홈런은 지바 이적 후 팀의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그는 외국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수비와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8월부터는 중견수로 활약하며 팀 내 최다인 8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또한, 우투수에게는 약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좌우 투수를 가리지 않고 좋은 타격을 선보였고 삼진이 적으며 승부처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5년에는 4월 6일과 8일 이틀 연속 만루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5번째, 퍼시픽 리그 역사상 4번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여름에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98경기 출전에 그치며 규정 타석에도 도달하지 못해 전년도보다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일본 시리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대부분 6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9타점을 올리는 맹활약을 펼치며 MVP에 선정되었다. 지바 롯데 마린스는 2005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31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한국, 중국, 대만 챔피언들과 맞붙은 초대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한국의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에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12개 구단 선발팀의 4번 타자로 나섰다. 정규 시즌에서도 7월까지 4번 타자 자리를 지켰으나, 이 해에도 여름에 부상으로 이탈하며 사토자키 도모야에게 4번 타자 자리를 내주었다. 발 부상으로 대부분 지명타자로 출전했지만, 2년 만에 규정 타석에 도달하여 타율 0.281, 17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
2007년에는 교류전에서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나, 부상의 영향으로 122경기 출전, 타율 0.272, 13홈런, 51타점에 그쳤다.
2008년에도 부상과 부진으로 97경기 출전에 그쳤고, 홈런도 5개에 머물며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했다.
연도 | 구단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98 | 뉴욕 메츠 | 11 | 16 | 15 | 1 | 2 | 0 | 0 | 0 | 2 | 0 | 0 | 2 | 0 | 0 | 1 | 0 | 0 | 5 | 1 | .133 | .188 | .133 | .321 |
1999 | 101 | 314 | 276 | 42 | 79 | 18 | 3 | 14 | 145 | 42 | 6 | 4 | 0 | 3 | 32 | 4 | 3 | 60 | 8 | .286 | .363 | .525 | .888 | |
2000 | 119 | 414 | 350 | 59 | 101 | 20 | 1 | 15 | 168 | 60 | 5 | 5 | 0 | 3 | 54 | 2 | 7 | 68 | 6 | .289 | .391 | .480 | .871 | |
2001 | 91 | 339 | 296 | 28 | 82 | 14 | 2 | 6 | 118 | 27 | 4 | 5 | 1 | 1 | 36 | 0 | 5 | 73 | 11 | .277 | .364 | .399 | .763 | |
2002 | 콜로라도 로키스 | 48 | 128 | 117 | 10 | 24 | 5 | 0 | 4 | 41 | 19 | 0 | 0 | 0 | 1 | 10 | 0 | 0 | 35 | 4 | .205 | .266 | .350 | .616 |
보스턴 레드삭스 | 13 | 43 | 37 | 5 | 11 | 1 | 0 | 0 | 12 | 8 | 1 | 0 | 0 | 0 | 6 | 1 | 0 | 5 | 1 | .297 | .395 | .324 | .720 | |
2002 합계 | 61 | 171 | 154 | 15 | 35 | 6 | 0 | 4 | 53 | 27 | 1 | 0 | 0 | 1 | 16 | 1 | 0 | 40 | 5 | .227 | .298 | .344 | .642 | |
2004 | 지바 롯데 마린스 | 130 | 552 | 457 | 89 | 144 | 31 | 1 | 35 | 282 | 100 | 8 | 1 | 0 | 4 | 86 | 12 | 5 | 77 | 10 | .315 | .426 | .617 | 1.043 |
2005 | 98 | 389 | 351 | 49 | 95 | 22 | 0 | 13 | 156 | 71 | 1 | 1 | 0 | 3 | 34 | 0 | 1 | 51 | 15 | .271 | .334 | .444 | .779 | |
2006 | 118 | 473 | 417 | 59 | 117 | 18 | 1 | 17 | 188 | 65 | 4 | 3 | 0 | 4 | 49 | 0 | 3 | 72 | 17 | .281 | .357 | .451 | .808 | |
2007 | 122 | 454 | 390 | 45 | 106 | 21 | 0 | 13 | 166 | 51 | 7 | 4 | 0 | 3 | 53 | 1 | 8 | 86 | 12 | .272 | .368 | .426 | .793 | |
2008 | 97 | 323 | 279 | 35 | 79 | 12 | 3 | 5 | 112 | 42 | 3 | 1 | 0 | 1 | 42 | 0 | 1 | 51 | 8 | .283 | .378 | .401 | .779 | |
2009 | 95 | 320 | 272 | 23 | 72 | 14 | 1 | 7 | 109 | 31 | 0 | 3 | 0 | 3 | 44 | 1 | 1 | 59 | 8 | .265 | .366 | .401 | .767 | |
MLB 5년 | 383 | 1254 | 1091 | 145 | 299 | 58 | 6 | 39 | 486 | 156 | 16 | 16 | 1 | 8 | 139 | 7 | 15 | 246 | 31 | .274 | .362 | .445 | .807 | |
NPB 6년 | 660 | 2511 | 2166 | 300 | 613 | 118 | 6 | 90 | 1013 | 360 | 23 | 13 | 0 | 18 | 308 | 14 | 19 | 396 | 70 | .283 | .374 | .468 | .842 |
3.3.3. 부상 및 은퇴
2009년에도 2008년과 비슷한 기용이 이어졌고, 보비 밸런타인 감독의 퇴임이 결정되자 베니 또한 팀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밸런타인 감독의 배려로 9월 27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 2회말 야마모토 쇼고를 상대로 역전 솔로 홈런을 친 직후인 3회, 하야카와 다이스케와 교체되었다. 경기장 내 아나운스를 통해 "베니 선수, 지금 타석이 마린스에서의 마지막 타석이 되었습니다"라고 팬들에게 갑작스럽게 퇴단이 발표되었다. 그는 당시 밸런타인 감독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95경기 출장에 그쳤다. 10월 7일, 체이스 램빈과 게리 번햄 주니어와 함께 퇴단이 발표되었고, 이로써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의 일본 프로 야구 통산 613안타는 구단 외국인 야수 중 역대 4위 기록이며, 6년간의 지바 롯데 마린스 재적 기간은 지바 이적 후 최장 기록이다.
4. 선수로서의 특징
베니 아그바야니는 유연하고 강한 타격 능력과 더불어 안정적인 수비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는 강점을 보였다.
4.1. 타격 및 주루
아그바야니는 파워와 유연성을 겸비한 타격이 특징이었다. 특히 바깥쪽으로 빠지는 변화구에도 배트가 흔들리지 않아 삼진이 적었고, 팀 플레이에 충실한 타격을 구사했다. 또한, 접전 상황이나 경기 후반의 승부처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2006년에는 1점 차 이내 상황에서 득점권 타율이 4할을 넘었으며, 9회 타율은 0.394를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4.2. 수비 및 포지션
아그바야니는 수비 능력도 좋은 편이었다. 2004년에는 주로 중견수로 기용되었으나, 부상 등의 영향으로 이듬해부터는 좌익수나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의 수비력은 팀에 안정감을 더하는 요소였다.
연도 | 구단 | 좌익수 (LF) | 중견수 (CF) | 우익수 (RF) | 외야수 (O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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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98 | NYM | 2 | 1 | 0 | 0 | 0 | 1.000 | 1 | 0 | 0 | 0 | 0 | ---- | 6 | 5 | 0 | 0 | 0 | 1.000 | - | |||||
1999 | 4 | 6 | 0 | 0 | 0 | 1.000 | 47 | 49 | 1 | 1 | 0 | .980 | 45 | 66 | 1 | 1 | 0 | .985 | - | ||||||
2000 | 3 | 9 | 0 | 0 | 0 | 1.000 | 102 | 142 | 3 | 3 | 0 | .980 | 12 | 9 | 0 | 1 | 0 | .900 | - | ||||||
2001 | - | 84 | 123 | 1 | 6 | 0 | .954 | - | - | ||||||||||||||||
2002 | COL | - | 37 | 52 | 1 | 0 | 0 | 1.000 | - | - | |||||||||||||||
BOS | 1 | 1 | 0 | 0 | 0 | 1.000 | 11 | 20 | 1 | 1 | 0 | .955 | 3 | 3 | 0 | 0 | 0 | 1.000 | - | ||||||
2002 합계 | 1 | 1 | 0 | 0 | 0 | 1.000 | 48 | 72 | 2 | 1 | 0 | .987 | 3 | 3 | 0 | 0 | 0 | 1.000 | - | ||||||
2004 | 지바 롯데 마린스 | - | - | - | 122 | 205 | 4 | 2 | 0 | .991 | |||||||||||||||
2005 | - | - | - | 74 | 92 | 2 | 2 | 0 | .979 | ||||||||||||||||
2006 | - | - | - | 45 | 57 | 2 | 1 | 0 | .983 | ||||||||||||||||
2007 | - | - | - | 91 | 129 | 4 | 2 | 0 | .985 | ||||||||||||||||
2008 | - | - | - | 54 | 63 | 0 | 0 | 0 | 1.000 | ||||||||||||||||
2009 | - | - | - | 39 | 46 | 2 | 0 | 0 | 1.000 | ||||||||||||||||
MLB 5년 | 10 | 17 | 0 | 0 | 0 | 1.000 | 282 | 386 | 7 | 11 | 0 | .973 | 66 | 83 | 1 | 2 | 0 | .977 | - | ||||||
NPB 6년 | - | - | - | 425 | 592 | 14 | 7 | 0 | .989 |
5. 개인 생활 및 인물
베니 아그바야니는 야구 선수로서의 모습 외에도 따뜻한 성격과 가족을 향한 깊은 애정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일화들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5.1. 별명 및 등번호의 의미
하와이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그는 '하와이안 펀치'(Hawaiian Punch영어)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그의 등번호 50번은 하와이주가 미국의 50번째 주라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 입단 당시, 그는 직접 등번호 50번을 희망하여 당시 50번을 달고 있던 아사마 게이타 선수로부터 양보받았다.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그의 응원가는 하와이 민요인 '알로하 오에'를 원곡으로 한다.
5.2. 성격 및 일화
아그바야니는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머리 근처에 위험한 투구가 날아와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2006년 본야나기 가즈야에게 사구를 맞았을 때는 헬멧을 땅에 내리치며 자칫 난투극으로 번질 뻔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본야나기가 강판된 후 아그바야니가 상대 팀 덕아웃 뒤로 가서 사과하며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2008년 9월 2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 4회초 공격에서는 사토자키 도모야와 훌리오 술레타가 사구를 맞고, 이어 아그바야니까지 해당 이닝 세 번째 사구를 맞았다. 이에 분노한 아그바야니는 상대 포수 호소카와 도루에게 목조르기 기술을 걸어 던지면서 양 팀 선수단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큰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아그바야니는 폭력 행위로 퇴장당했다. 그러나 아그바야니는 경기 후 호소카와에게 직접 사과하며 화해했다.
5.3. 가족 관계 및 영향
아그바야니는 아내 니엘라와 세 자녀를 두었다. 두 딸 알레이아와 아일라나는 모두 소프트볼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알레이아는 UC 버클리에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소프트볼 선수로 뛰었으며, 2023년 봄 졸업 후에는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공중 보건학 석사 학위를 준비하며 2024년 시즌에도 소프트볼을 계속하고 있다. 아일라나 역시 2024년 시즌에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소프트볼 선수로 활동했으며, 2025년 시즌을 위해 오클라호마 대학교로 전학했다. 아들 브루인은 현재 세인트루이스 스쿨의 고등학교 야구 스타 선수로, 2025년부터 미시간 대학교에서 야구할 예정이다.
뉴욕 메츠 시절이던 2001년, 그는 팀 동료 신조 쓰요시와 함께 '팀의 주목 선수'로 발탁되어 구단의 TV 광고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동하던 중 팀 동료인 후쿠우라 가즈야의 야구에 대한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태어난 아들의 미들네임에 '가즈야(Kazuya)'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그가 후쿠우라 선수와 나눈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6. 은퇴 후 활동
선수 생활을 마친 베니 아그바야니는 고향 하와이주로 돌아가 다양한 사회 활동을 이어가며 야구계와 인연을 맺고 있다.
2010년부터 오아후섬에 위치한 밀리라니 고등학교에서 교육 보조원으로 일했다. 2019년 기준으로 하와이안항공에서 램프 에이전트(Ramp Agent)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두 딸이 모두 다녔던 호놀룰루의 이올라니 스쿨에서 소프트볼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2016년 서브로의 은퇴 경기와 2019년 후쿠우라 가즈야의 은퇴 경기에 영상 메시지를 보내 팬들에게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기도 했다. 특히 2018년 지바 롯데 마린스가 하와이안항공과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한 이후, 아그바야니는 하와이안항공의 홍보 담당자로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마스코트 '수수께끼의 물고기'와 여러 차례 협업 활동을 펼쳤다.
7. 수상 및 기록
베니 아그바야니는 선수 경력 동안 다양한 개인 수상과 팀 기록을 달성했다.
- 하와이 고등학교 체육 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 1989년
- 그의 딸이자 그가 소프트볼을 지도했던 아일라나 아그바야니는 2022년에 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아시아 시리즈 MVP: 2005년
NPB 주요 기록
- 최초 출장·최초 선발 출장: 2004년 3월 2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
- 최초 타석·최초 안타·최초 타점: 위와 동일, 1회초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중전 적시타
- 최초 홈런: 2004년 3월 30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전, 9회초 엑토르 카라스코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 최초 도루: 2004년 4월 6일,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 2회말 2루 도루 (투수: 라이언 루프, 포수: 다카하시 신지)
- 퍼시픽 리그 최다 볼넷: 2004년 (86개)
등번호
- 39 (1998년)
- 50 (1999년 ~ 2002년, 2004년 ~ 2009년)
8. 평가 및 유산
베니 아그바야니는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클러치 능력과 따뜻한 성격은 야구계에 긍정적인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8.1. 팬들의 인기 및 지지
메이저 리그에서 제한적이고 간헐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그바야니는 특히 뉴욕에서 팬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활약에는 종종 "베니, 베니!"라는 연호와 함께 엘튼 존의 '베니 앤 더 제츠'를 패러디한 "베니 앤 더 메츠"라는 응원가가 따라붙었다. 일본에서도 그는 '알로하 오에'를 원곡으로 한 응원가와 '하와이안 펀치'라는 별명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팬들의 열렬한 지지는 그의 유쾌하고 성실한 플레이 스타일에서 비롯되었다.
8.2. 후대에 미친 영향
아그바야니가 일본 프로 야구에서 기록한 통산 613안타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외국인 야수 중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또한 그가 지바 롯데 마린스에 6년간 재적한 것은 구단이 지바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최장 기록으로, 팀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강한 타격과 클러치 능력, 그리고 팀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는 후대 선수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