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배희한의 생애는 그의 유년기부터 노년까지, 그리고 전통 목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 배경과 주요 활동,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의 모습까지 아우른다.
1.1. 유년기 및 교육
배희한은 1907년 6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다만 호적에는 1909년생으로 기재되었다.) 그의 집안 형편은 비교적 여유로웠다고 전해지나, 그는 학업보다 목수 일에 대한 강한 열정을 품었다. 17세가 되던 1923년, 다니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일본인 목수 오다 밑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목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학업을 중단하기 전인 1921년부터 이미 조선총독부 철도국 목수로서 활동하며 실무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2. 초기 활동 및 경력
배희한은 18세 되던 해 대조전 해체 현장에서 당시 궁궐 대목수였던 최원식에게서 전통적인 궁궐 건축 기술과 목수 수업을 사사받았다. 최원식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령목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배희한이 '마지막 조선 목수'로 불리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후 배희한은 삼청동의 민영휘 집 사랑채를 비롯하여 여러 고관대작들의 저택 건축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다. 1939년, 31세의 나이로 내시였던 송성진의 집인 서울 돈암장을 지었다. 이 돈암장은 해방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약 2년간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1.3. 주요 활동과 대목장 지정
해방 이후 배희한은 한국 전통 건축 복원과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59년에는 경복궁의 하향정과 향원정을 수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여 손상된 궁궐 건물을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이외에도 여러 사찰 건물들을 건축하며 전통 건축 기술의 명맥을 이었다. 1980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목공특별연장전》을 통해 그의 탁월한 전통 목공 기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인정에 힘입어, 1982년에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며 국가적인 장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1.4. 말년 및 사망
배희한은 노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전통 건축의 계승에 힘썼다. 그는 1997년 11월 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배희한은 스승이나 선배 대목장들과는 달리 투전(도박)을 하거나 술을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큰 부를 축적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죽은 나무 깎아 먹고 사는 사람에게 원래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목수로서의 삶과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소박하고 강직한 성품은 그의 건축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주요 작품과 건축 세계
배희한은 수많은 전통 건축물을 직접 짓거나 수리하며 한국 전통 건축의 명맥을 이었다. 그의 건축은 소박하면서도 견고하고 빈틈없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2.1. 건축 특징
배희한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령목수였던 최원식의 문하였기 때문에 흔히 "마지막 조선 목수"라고 불렸다. 이는 그가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건축 기술과 정신을 계승하고 현대에 구현한 마지막 세대의 장인임을 의미한다. 화가 김병종은 배희한의 건축에 대해 "소박하지만 단단하고 빈틈없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건축물이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내실 있는 구조와 정교한 짜임새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재료의 미를 살리면서도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함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2.2. 대표작 목록
배희한이 직접 지었거나 수리한 주요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그의 작품들은 개인 주택부터 사찰,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1927년 김익배 형제 가옥
- 1935년 김재은 가옥
- 1936년 노유성 별장
- 1939년 돈암장(송성진 가옥)
- 1940년 최기태 가옥
- 1942년 최창학 가옥
- 1966년 경기도 과천 염불암
- 1967년 서울 성북동 오래사
- 1969년 봉천동 구암사
- 1974년 해군사관학교 호국사
- 1976년 서세옥 가옥
3. 평가 및 유산
배희한은 한국 전통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기술과 정신을 후대에 전수하며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3.1. 제자 양성
배희한은 그의 뛰어난 목수 기술과 장인 정신을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의 여러 제자들 중 고택영은 배희한에게 목수 기술을 전수받아 스승의 뒤를 이어 1997년에 대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고택영과 같은 제자들의 활동은 배희한의 건축 세계와 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한국 전통 건축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를 통해 배희한의 유산은 실질적인 기술 전수와 함께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3.2. 예술적 평가 및 정신
배희한은 단순한 목수를 넘어선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조선 왕실 대목수 최원식에게서 배운 전통 기술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한옥 건축을 실현하며 한국 전통 건축의 명맥을 잇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건축물들은 소박함 속에 견고함과 빈틈없는 짜임새를 지니고 있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죽은 나무 깎아 먹고 사는 사람에게 원래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물질적 이득보다는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기술 보전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배희한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한국 전통 건축의 정수를 지켜내고 후대에 전달한, 한국 건축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장인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