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발데마르 1세는 불안정한 시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왕위 계승 분쟁의 중심에 놓였으나, 덴마크 귀족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며 훗날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칠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1.1. 출생과 가계
발데마르 1세는 슐레스비히 공작이자 에리크 1세 국왕의 용감하고 인기 많았던 장남인 크누드 라바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발데마르가 태어나기 며칠 전인 1131년 1월 7일, 스웨덴의 망누스 1세 국왕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키예프의 잉에보르로, 키예프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잉에스도테르의 딸이었다. 잉에보르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발데마르라고 지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발데마르는 링스테드에 위치한 덴마크 귀족 아세르 리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 아세르는 흐비데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발데마르의 아버지 크누드 라바르와 함께 자랐던 인물이다. 발데마르는 아세르의 아들들인 압살론과 에스벤 스나레와 함께 양육되었다. 압살론은 훗날 로스킬레 주교이자 대주교가 되어 발데마르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으며, 에스벤 스나레는 왕실 재상과 십자군 전사로 활동했다. 에스벤과 압살론은 발데마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강력한 동맹을 형성했다.
2. 왕위 계승 투쟁
발데마르 1세는 덴마크 왕위를 둘러싼 오랜 내전 속에서 주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단독 왕으로 등극하며 덴마크의 혼란기를 종식시켰다.
2.1. 내전과 왕위 분쟁
1146년, 발데마르가 15세였을 때 에리크 3세 국왕이 퇴위하면서 덴마크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발데마르는 왕위의 유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왕위 계승 주장자로는 에리크 2세의 아들 스벤 3세 그라테와 망누스 1세의 아들 크누드 5세가 있었으며, 이들 모두 1146년에 스스로 덴마크 국왕을 선언했다. 이 내전은 약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154년, 발데마르는 크누드와 동맹을 맺고 크누드와 함께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157년 7월, 세 명의 경쟁자들은 일시적인 타협을 통해 덴마크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2.2. 권력 통합
1157년 8월, 로스킬레에서 열린 피의 연회에서 크누드 5세가 살해당했다. 발데마르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이후 발데마르는 1157년 10월 23일 그라테 헤데 전투에서 스벤 3세를 격파했다. 스벤은 도주 중에 농민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한 발데마르는 덴마크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덴마크에서 10년 이상 지속되었던 내전이 종식되고 발데마르의 단독 통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3. 통치와 주요 활동
발데마르 1세는 국왕으로서 덴마크의 재건과 방어 체계 강화에 힘썼으며, 활발한 군사 활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국내 안정을 도모하는 데 성공했다.
3.1. 국가 재건 및 방어 체계 구축
1158년, 발데마르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인 압살론이 로스킬레 주교로 선출되었고, 발데마르는 그를 수석 고문으로 임명했다. 국왕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덴마크를 재조직하고 재건했다. 그는 남부의 다네비르케 요새를 강화하고, 알스 해협의 작은 섬에 쇤데르보르 성을 요새화된 성채로 건설했다. 이 섬은 나중에 알스섬과 연결되었다. 또한 그는 남부의 벤트족에 대처하기 위해 옛 바이킹의 습격 전술을 재창조하여 중기병에 최적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 수륙 양용 공격 전술은 그의 후계자인 크누드 6세에 의해 더욱 개선되었다.
3.2. 군사 활동 및 영토 확장
압살론의 권유에 따라 발데마르는 덴마크 해안을 약탈하던 벤트족에게 선전포고했다. 벤트족은 발트해의 포메라니아와 뤼겐섬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덴마크인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로 발트해에서 덴마크에 명백한 위협이 되었다. 이에 덴마크인들도 벤트족 해안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는 뤼겐섬 정복으로 절정에 달했다. 뤼겐섬은 이후 벤트족 영토를 더 많이 약탈하고 정복하기 위한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로써 덴마크의 영향력은 포메라니아와 오보트리트족 연맹에까지 미쳤으며, 이 두 지역은 덴마크인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약탈되었다.
1170년경, 발데마르와 압살론이 이끄는 소규모 덴마크 함대가 오데르강 어귀를 지나 항해하던 중, 포메라니아 공작 카지미르 1세가 이끄는 벤트족 군대와 함대의 기습을 받았다. 율린 다리 전투 (현대 볼린)에서 카지미르는 덴마크의 약탈을 끝내려 했으나, 덴마크인들은 벤트족을 능가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그들의 군대와 함대를 격파했다. 이는 주로 덴마크 함선이 기병을 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75년, 발데마르 국왕은 보르딩보르 성을 방어 요새이자 독일 해안에 대한 추가적인 약탈을 시작하기 위한 기지로 건설했다.
3.3. 국내 정책 및 통치
1180년, 부유한 스코네 지방에 불안이 확산되자, 주민들은 발데마르에게 윌란반도 출신의 "외국인" 총독들을 교체하고,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통치했던 '스쾨넬란드' 지방 귀족을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십일조 납부를 전적으로 거부했다. 발데마르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주민들은 세금과 교회 십일조를 모두 내지 않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수가 너무 많아 발데마르는 자신의 병력뿐만 아니라 블레킹에에서도 병력을 소집해야 했다. 양측 군대는 디시아 전투에서 맞붙었고, 발데마르는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후 그들은 다시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모든 농민군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십일조 납부를 거부했기에, 발데마르는 대신 그들이 교회에 푸짐한 선물과 기부를 하도록 했다. 그들은 십일조는 내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불했으며, 발데마르가 유일하게 양보한 점은 총독들이 스코네인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이었다. 스코네인에 대한 이러한 양보, 즉 윌란반도에서는 윌란인이, 뤼겐에서는 뤼겐인이 통치한다는 원칙은 이후 덴마크 왕국 전역에 최적화되어 적용되었다. 이는 왕국 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훗날 칼마르 동맹으로 확장된 왕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4. 개인 생활
발데마르 1세는 민스크의 소피아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은 당대 왕실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4.1. 결혼과 자녀
발데마르는 스웨덴의 왕비 리케자와 민스크의 볼로다르 글레보비치 공작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민스크의 소피아(약 1141년 ~ 1198년)와 결혼했다. 소피아는 크누드 5세 국왕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발데마르와 소피아는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및 비고 | ||||
---|---|---|---|---|---|---|---|
소피아 | 1159년 | 1208년 | 바이마르-오를라뮌데 백작 지그프리트 3세와 결혼 | ||||
크누드 6세 | 1163년 | 1202년 11월 12일 | 1177년 2월 바이에른의 게르트루트와 결혼 (자녀 없음) | ||||
마리아 | 약 1165년 | 미상 | 1188년 로스킬레에서 수녀가 됨 | ||||
마르가레타 | 약 1167년 | 약 1205년 | 1188년 로스킬레에서 수녀가 됨 | ||||
발데마르 2세 | 1170년 5월 9일 | 1241년 3월 28일 |
>- | 잉에보르 | 1174년 | 1237년 7월 29일 | 1193년 8월 15일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결혼 (자녀 없음) |
헬레나 | 약 1176년 | 1233년 11월 22일 | 1202년 뤼네부르크의 빌헬름과 결혼 (자녀 1명) | ||||
리키사 | 약 1178년 | 1220년 5월 8일 | 1210년 스웨덴의 에리크 10세와 결혼 (자녀 5명) | ||||
발부르기스 | 미상 | 1177년 | 포메라니아 공작 보기슬라프 1세와 결혼 (자녀 2명) |
소피아 왕비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며, 국왕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잔혹한 성격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피아 왕비는 발데마르 국왕의 첩이었던 프리리 토베를 살해하고, 국왕의 여동생인 키르슈텐을 다치게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역사적 증거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발데마르 사망 후, 소피아는 1184년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3세와 재혼했다.
발데마르 1세는 프리리 토베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아들 크리스토페르 (1150년 ~ 1173년)를 두었다. 크리스토페르는 발데마르의 장남이었으며, 약 1170년부터 1173년까지 윌란반도의 공작(dux Iuciae)을 지냈다.
5. 사망
발데마르 1세는 1182년 5월 12일, 51세의 나이로 보르딩보르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장남 크누드 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6. 유산과 평가
발데마르 1세는 덴마크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는 덴마크 중세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후대 왕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1. 역사적 의의
발데마르 1세는 '발데마르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덴마크의 부흥을 알리는 시기였다. 그는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덴마크를 재건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했다. 특히 벤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트해 연안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덴마크를 북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통치는 덴마크 중세 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2. 영향력
발데마르 1세의 통치와 정책은 후대 국왕, 특히 그의 아들인 발데마르 2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발데마르 2세는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여 덴마크 왕국을 중세 시대의 최전성기로 이끌었다. 발데마르 1세가 구축한 강력한 군사력과 안정된 국내 통치 시스템은 덴마크가 발트해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의 스코네 정책과 같은 국내 통치 방식은 훗날 칼마르 동맹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덴마크 왕국의 평화와 확장에 기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