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밋 차이반차의 초기 생애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강인한 정신과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밋 차이반차는 1934년 1월 28일 태국 페차부리주 타야앙군 싸이칸 마을(หมู่บ้านไสค้าน태국어)에서 경찰관인 아버지 촘 라위쌩(ชม ระวีแสง태국어)과 어머니 싸응우언 라위쌩(สงวน ระวีแสง태국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부안팅 라위쌩(บุญทิ้ง ระวีแสง태국어)이었는데, 부모님이 그가 어렸을 때 헤어졌기 때문에 버려진 운명이라는 뜻의 '부안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는 또한 '수핏 닐시통'(สุพิศ นิลสีทอง태국어)과 '수핏 품헴'(สุพิศ พุ่มเหม태국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살 때 어머니는 방콕으로 건너가 채소 장사를 했고, 그는 페차부리주 싸이칸 마을에 있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이가 들자, 그는 삼촌인 싸엠 라위쌩 삼매승(สามเณรแช่ม ระวีแสง태국어)의 보살핌을 받으며 왓 타 끄라티암(วัดท่ากระเทียม태국어)에서 지냈고, 이후 삼매승이 승려가 되면서 왓 싸남 프람(วัดสนามพราหมณ์태국어)으로 옮겨 밥을 얻어먹는 절 아이로 생활했습니다. 8세 또는 9세 무렵, 어머니의 형편이 나아지자 방콕 낭릉(นางเลิ้ง태국어) 지역으로 이사하여 어머니와 새아버지 찰름 품헴(เฉลิม พุ่มเหม태국어)과 함께 살게 되었고, 이때부터 품헴이라는 성을 사용했습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방콕으로 이주한 후 밋 차이반차는 끄룽까셈 로드(ถนนกรุงเกษม태국어)에 위치한 타이 쁘라싸트 위타야 학교(โรงเรียนไทยประสาทวิทยา태국어)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특히 미술, 공예, 영어에 능했습니다. 학업과 여러 아르바이트 외에도 그는 투어를 키우고 모기 유충을 잡아 팔았으며, 낡은 자전거를 수리하여 대여하는 등 스스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스포츠를 좋아하여 자기 방어를 위해 복싱을 배웠습니다. 1949년과 1951년에는 학교 페더급 및 라이트급(135파운드) 복싱 챔피언이 되어 두 차례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세 개의 라이트급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중등 학교를 마친 후 잠시 페차부리주 쁘리야띠랑싼 학교(โรงเรียนปริยัติรังสรรค์태국어)에 다녔고, 이후 쁘라나콘 칼리지(โรงเรียนพระนครวิทยาลัย태국어)에서 예비 대학 과정을 밟았습니다.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1954년에 태국 왕립 공군 항공 학교에 입학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1956년 3월 졸업 후 1956년 7월 17일 공군 하사 2급으로 임관했으며, 돈므앙 공군 기지(กองทัพอากาศดอนเมือง태국어)의 공군 보병대대에서 비행 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의 군 복무 기간은 1954년부터 1963년까지였습니다.

2. 영화 경력
밋 차이반차는 태국 영화계에 입문한 후 빠르게 명성을 얻었으며, 1960년대 태국 영화의 황금기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2.1. 영화계 입문 및 초기 경력
1956년, 밋 차이반차의 친구들은 그의 사진을 기자 낑깨우 깨우쁘라섯(กิ่งแก้ว แก้วประเสริฐ태국어)에게 보여주었고, 낑깨우는 그를 영화 잡지 편집장인 쑤랏 푹까웻(สุรัฐ พุกกะเวส태국어)에게 소개했습니다. 당시 바라돈 싸끄다(ภราดร ศักดา태국어) 작가가 그를 여러 영화 제작자에게 추천했습니다. 곧이어 밋 차이반차는 그의 첫 영화인 《차트 쑤아》(ชาติเสือ태국어)(호랑이 본능)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인 피쳇 품헴(พิเชษฐ์ พุ่มเหม태국어)을 밋 차이반차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이름 '밋'은 친구를 뜻하며, '차이반차'는 그가 국왕 탄신일 열병식에서 국기인 '통차이찰름폰'(ธงชัยเฉลิมพล태국어)을 운반하며 느꼈던 자부심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매년 군 복무 기간 동안 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작가 쎅 두씻(เศก ดุสิต태국어)의 소설 《인시댕》(อินทรีแดง태국어)(붉은 독수리) 시리즈의 롬 릿티끄라이(โรม ฤทธิไกร태국어) 캐릭터를 사용한 영화 《차오 낙렝》(จ้าวนักเลง태국어)(갱스터 군주)에 출연한 후 영화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100만 밧 이상의 수입을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그는 《느아 마눗》(เหนือมนุษย์태국어), 《쌩 쑤리야》(แสงสูรย์태국어), 《카 남 놈》(ค่าน้ำนม태국어), 《라이 꺼 락》(ร้ายก็รัก태국어), 《푸 잉 야이 탕 까오》(ผู้ยิ่งใหญ่ทั้งเก้า태국어), 《홍 파》(หงษ์ฟ้า태국어), 《탑 싸밍 클라》(ทับสมิงคลา태국어)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2.2. 명성 절정기 및 파트너십
1961년 밋 차이반차는 펫차라 차오와랏(เพชรา เชาวราษฎร์태국어)과 함께한 첫 영화인 《반특 락 핌차위》(บันทึกรักของพิมพ์ฉวี태국어)(핌차위의 사랑 일기)에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는 1962년에 개봉되었으며, 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웅-여주인공 파트너십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밋과 펫차라 듀오는 약 165편에서 200편에 달하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며 태국 영화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팬들은 그들을 '밋-펫차라'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밋 차이반차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는 보지 않고 돌아가는 팬들도 많았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엄청나게 바쁜 배우였으며, 항상 촬영장을 오가며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달에 약 30편의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연인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펫차라를 여동생처럼 아끼고 보호하며 상담해주는 좋은 동료였습니다. 비록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진심으로 돈독했습니다. 펫차라는 밋이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2.3. 주요 작품 및 수상
밋 차이반차의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는 1970년의 《몬락 룩퉁》(มนต์รักลูกทุ่ง태국어)(시골의 마법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뮤지컬 로맨틱 코미디는 태국 시골 생활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1970년 방콕 극장에서 6개월 동안 상영되며 600.00 만 THB의 수입을 올렸고, 전국적으로는 1300.00 만 THB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영화는 밋 차이반차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영화인 1966년의 《펫 탓 펫》(เพชรตัดเพชร태국어)(방콕 작전)은 방콕과 홍콩에서 촬영되었으며, 케차 쁠리안위티(เคชา ปลื้มวิทัย태국어)와 르차 나르낫(ลือชัย นฤนาท태국어)이 악당으로, 당시 홍콩의 최고 여배우 레지나 파이핑(Regina Piping영어)이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는 《응언 응언 응언》(เงิน เงิน เงิน태국어)의 흥행 기록을 깨고 한 달 만에 300.00 만 THB를 벌어들였습니다.
1965년 영화 《응언 응언 응언》(เงิน เงิน เงิน태국어)(돈 돈 돈)은 쁘라티프 꼬몬피스(ประทีป โกมลภิส태국어)의 작품으로, 35mm 필름과 이스트만 컬러 슈퍼 시네스코프 시스템으로 촬영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펫차라 차오와랏, 차린 난타나콘(ชรินทร์ นันทนาคร태국어), 쑤말리 텅러(สุมาลี ทองหล่อ태국어), 쑤텝 웡캄행(สุเทพ วงศ์กำแหง태국어), 어라싸 이싸랑꾼 나 아유타야(อรสา อิศรางกูร ณ อยุธยา태국어)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전례 없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1965년 이 영화로 연예 기자 협회로부터 최고 흥행 남자 주연 배우상을 수상했으며,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으로부터 직접 상패를 받았습니다. 또한 1966년에는 연예 기자 협회로부터 신념, 의무, 우정, 관대함이라는 네 가지 자질을 인정받아 '다라통 상'(황금 스타상) 남자 주연 배우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낭 싸오 포 로독》(นางสาวโพระดก태국어)과 《싸오 크르아 파》(สาวเครือฟ้า태국어)는 그해의 골든 돌 최고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4. 영화 제작
밋 차이반차는 직접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1962년, 그는 아누차 랏따나만(อนุชา รัตนมาลย์태국어), 댄 끄릿싸다(แดน กฤษดา태국어), 파이랏 싸응워리붓(ไพรัช สังวริบุตร태국어) 등 영화계 친구들과 함께 '와치린톤 영화사'(วชิรนทร์ภาพยนตร์태국어)를 설립하여 《욧 콴 찟》(ยอดขวัญจิต태국어)과 《탑 싸밍 클라》(ทับสมิงคลา태국어)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1963년에는 자신의 영화 제작사인 '차이반차 영화사'(ชัยบัญชาภาพยนตร์태국어)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쎅 두씻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아오 담》(เหยี่ยวดำ태국어)(검은 매)을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에 문제가 있었지만, 밋 차이반차는 투자를 아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여 상영에 성공했고 손실을 입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밋 차이반차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그는 《쫌 쫀 마헤쑤언》(จอมโจรมเหศวร태국어), 《싸완 비앙》(สวรรค์เบี่ยง태국어) 등 여러 영화에 공동 투자했습니다. 또한 1970년에는 차이반차 영화사 이름으로 영화 《로이 프란》(รอยพราน태국어)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태국 영화만을 상영할 표준 영화관을 파안 파 다리(สะพานผ่านฟ้า태국어) 근처에 건설하기 위해 총 700.00 만 THB를 투자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모든 토지를 아시아 은행(ธนาคารเอเชีย태국어)에 460.00 만 THB에 저당 잡히고, 싸라부리주(จังหวัดสระบุรี태국어)의 토지를 70.00 만 THB에 매각했습니다. 이 영화관은 현대적인 상점과 주차 공간을 갖출 예정이었으며, 태국 영화 제작자들이 외국 영화 상영 일정에 맞춰 기다릴 필요가 없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3. 군 복무 및 정치 활동
밋 차이반차는 배우 경력 이전에 태국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짧게 정치에 입문하기도 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1954년부터 1963년까지 태국 왕립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최종 계급은 공군 하사 2급이었습니다. 그는 돈므앙 공군 기지(กองทัพอากาศดอนเมือง태국어)에서 비행 교관으로 일했습니다.
1963년 5월 31일, 그는 영화 《이아오 담》(เหยี่ยวดำ태국어) 제작과 관련하여 군 당국으로부터 한 가지 직업만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군에서 전역해야 했습니다. 당시 그는 팬들에게 "생계를 위해 배우의 길을 택했지만, 저의 몸과 마음은 군인입니다. 저는 군복을 사랑합니다. 배우로서 대중이 저에게 준 명성 또한 공군의 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 인터뷰에서 저는 항상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공군이었음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비록 연기 활동이 저를 전역하게 만들었지만, 저의 마음과 존재는 공군입니다."라고 말하며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그는 연기 활동에 전념하여 연간 35~40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는 당시 태국에서 개봉되는 영화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낑다오 다라니(กิ่งดาว ดารณี태국어)는 밋 차이반차가 한 달에 약 30편의 영화를 촬영해야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1968년 말, 밋 차이반차는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그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1968년 9월 1일, 그는 방락(เขตบางรัก태국어), 얀나와(ยานนาวา태국어), 싸판타웡(สัมพันธวงศ์태국어), 폼 쁘랍 싸뜨루 파이(ป้อมปราบศัตรูพ่าย태국어) 지역에서 '눔 그룹'(กลุ่ม หนุ่ม태국어) 소속으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이후 1969년, 그는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인기를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내오 쁘라차티빠타이'(แนว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태국어)(민주 전선) 당 소속으로 쁘라못 꼬차쑨톤(ปราโมทย์ คชสุนทร태국어)과 함께 프라나콘주(จังหวัดพระนคร태국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배우들이 안정적인 직업과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선거 운동 당시에도 그는 많은 영화 촬영 일정을 소화해야 했으며, 일본과 페낭에서 해외 촬영도 병행했습니다. 경쟁자들은 그가 당선되면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두 번째 선거에서도 낙선했는데, 15명의 당선자 중 3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선거 출마로 인해 그는 수백만 밧의 재산과 은행에 저당 잡힌 집 한 채를 잃었습니다. 그는 실망감을 조용히 간직했으며,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한 또 다른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며 《찟 씽 큰 틴》(7 สิงห์คืนถิ่น태국어), 《위만 파이》(วิมานไฟ태국어), 《쫌 쫀 마헤쑤언》(จอมโจรมเหศวร태국어), 《톤 쫀 덴 따이》(ทรชนเดนตาย태국어), 《파 피앙 딘》(ฟ้าเพียงดิน태국어), 《아이 능》(ไอ้หนึ่ง태국어), 《차트 람 치》(ชาติลำชี태국어), 《쿤 탓》(ขุนทาส태국어), 《싸밍 짜오 타》(สมิงเจ้าท่า태국어), 《매 야 낭》(แม่ย่านาง태국어), 《롬 느아》(ลมเหนือ태국어), 《썽 씽 짜오 파약》(2สิงห์จ้าวพยัคฆ์태국어), 《깜팽 응언 뜨라》(กำแพงเงินตรา태국어), 《위냔 덕 쁘라두》(วิญญาณดอกประดู่태국어), 《싸완 비앙》(สวรรค์เบี่ยง태국어), 《폰 드안 혹》(ฝนเดือนหก태국어)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차이반차 영화사 이름으로 영화 《로이 프란》(รอยพราน태국어)을 제작했습니다.
4. 개인 생활
밋 차이반차는 여러 관계를 통해 가족을 이루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은 대중의 관심 속에서도 책임감과 헌신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는 1959년 짜루완 싸리라웡(จารุวรรณ สรีรวงศ์태국어)과 조용히 결혼했습니다. 1961년 12월 8일에는 아들 유타나 품헴(ยุทธนา พุ่มเหม태국어)(애칭 똔)이 태어났으나, 유타나는 2023년 2월 16일에 사망했습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밋 차이반차가 낮에는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영화를 촬영하느라 아내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중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 사실을 숨겨야 했고, 아내는 그의 직업과 진심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63년에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이혼 후에도 밋 차이반차는 아들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꾸준히 책임졌습니다.
이후 그는 낑다오 다라니(กิ่งดาว ดารณี태국어)와 비공개적인 관계를 맺고 5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1964년에서 1965년 사이에 그는 쑤쿰윗(สุขุมวิท태국어)의 쏘이 끌랑(ซอยกลาง태국어)에 집을 빌려 살다가, 1967년에서 1968년 사이에 쏘이 짠타롯웡(ซอยจันทโรจน์วงศ์태국어)에 자신의 집을 짓고 함께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둘 다 뛰어난 능력과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고, 밋은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휴식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한 질투와 낑다오의 고집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밋 차이반차의 두 번째 정치 출마 이후 낑다오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싸시톤 펫차룽(ศศิธร เพชรรุ่ง태국어)이라는 세 번째 연인을 만났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싸시톤의 부모님을 찾아가 허락을 받았고, 나콘나욕주 반나군(อำเภอบ้านนา태국어)에 집을 지어주었으며 매달 1000 THB의 생활비를 주었습니다. 이는 낑다오 다라니에게 주던 1.00 만 THB보다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4.1. 성격 및 기부 활동
밋 차이반차는 강한 리더십을 지닌 인물로, 솔직하고 진심을 다하며 모든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는 꼼꼼하고 규율이 철저하며 시간을 잘 지켰습니다. 또한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유머 감각이 있었고, 장난치기를 좋아했습니다. 약속을 어기거나 불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화가 나면 무섭게 변하기도 했습니다. 밋은 매우 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이었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잔소리가 많거나 불평하지 않았지만, 직접 본보기를 보여주며 가르쳤습니다. 겉으로는 강인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여리고 자비로우며 타인을 동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한 영화 제작자에게는 촬영 일정을 최대한 맞춰주어 빨리 촬영을 마치고 개봉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는 대출 이자를 절약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친절은 밋 차이반차의 타고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촬영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했으며, 제작자들이 상담을 요청할 때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보조 출연자들과 회의를 열어 촬영 일정에 늦지 않도록 요청하여 제작자들이 정해진 예산 내에서 촬영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다른 배우들이 출연료를 받지 못했을 때는 제작자들과 협상하기도 했으며, 운영 자금을 빌려주거나 문제가 있는 동료 배우들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고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다른 중요한 일정이 있어도 촬영장을 떠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태국 왕족인 아누쏜몽콘깐 왕자(พระเจ้าวรวงศ์เธอ พระองค์เจ้าอนุสรมงคลการ태국어)가 그를 외국 영화계 인사와의 만찬에 초대했을 때도, 그의 부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하여 촬영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촬영장 밖에서도 그는 친절함을 보였습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이발사로 일하는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오토바이를 사서 출퇴근할 수 있도록 6000 THB를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군인 복장을 한 남성에게 4.00 만 THB를 빌려주었지만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관대함과 타인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는 친한 친구에게 40.00 만 THB를 사기당하기도 했지만, 친구 가족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밋 차이반차는 매일 20 THB만 소지했습니다.
그는 '자선 배우'(พระเอกนักบุญ태국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다라 카틴'(กฐินดารา태국어)(배우들의 카틴)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리낏 왕대비(สิริกิติ์태국어)의 후원 아래 장애인 지원 재단에 잉용 싸데얏(ยิ่งยง สะเด็ดยาด태국어)과 함께 1.00 만 THB를 기부했고, 왓 캐 낭릉(วัดแคนางเลิ้ง태국어) 사원에 50.00 만 THB를 기부하여 교회를 짓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왓 캐 낭릉의 카틴 행사를 주최하여 총 40.21 만 THB를 모금했습니다. 치앙마이주에 있는 짜오 까윌라 기념비(อนุสาวรีย์เจ้ากาวิละ태국어) 건설 기금으로 1.29 만 THB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어려운 삶을 살아왔으며, 군 복무를 통해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소박한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사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절에서처럼 양철 숟가락으로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샴푸가 없을 때 세탁 세제로 머리를 감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동차는 운송 수단이지 가구가 아니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주 10.00 만 THB가 넘는 돈이 은행 계좌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낡은 지프 윌리(왼쪽 핸들)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운전사를 두어 자신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요타 차량을 이용했지만, 아무리 부유한 배우라도 메르세데스-벤츠는 배우의 지위에 비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여 절대 타지 않았습니다. 그의 키는 186 cm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직접 키우지 않았지만, 첫 영화의 주연이 되었을 때 자신의 집을 촬영 장소로 제공하고 어머니가 촬영팀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에도 집을 개조하고 생활비를 책임지며 가족과 친척들을 도왔습니다. 자신을 키우지 않았던 친아버지와도 1961년 쑤랏타니주(จังหวัดสุราษฎร์ธานี태국어)에서 재회했을 때 기뻐했으며, 아버지를 방콕으로 모시고 집을 지어주었으며 페차부리주 싸이칸 마을에 5 rai의 땅을 사주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영화계의 선배들과 특히 대중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국민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새해에는 수많은 연하장을 만들어 팬들에게 행복을 전했으며, 한 해에는 "밋 차이반차는 국민이 만들었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은혜를 기억합니다"라는 문구를 담기도 했습니다.
5. 사망
밋 차이반차의 비극적인 죽음은 태국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마지막 순간은 영화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1970년 10월 8일, 밋 차이반차는 자신이 주연과 감독을 맡은 영화 《인시 통》(อินทรีทอง태국어)(황금 독수리)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중 비극적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영화는 밋 차이반차가 롬 릿티끄라이 또는 인시댕 역으로 출연한 '인시댕'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가짜 인시댕을 찾아 나서는 역할을 맡았으며, 펫차라 차오와랏은 와싸나 역으로 함께 출연했습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1970년 10월 8일 오전 9시, 촌부리주 파타야 남부 동탄 해변(หาดดงตาล태국어)에서 촬영이 진행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시댕은 악당들을 물리친 후, 와싸나가 조종하는 헬리콥터의 밧줄 사다리를 타고 경찰을 피해 악당의 은신처를 탈출하여 석양 속으로 날아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실제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대역 배우의 의상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장면을 직접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촬영은 세밀하게 계획되었지만, 밋 차이반차가 알 수 없는 기술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헬리콥터가 이륙할 때의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인해 밋 차이반차는 사다리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헬리콥터는 카메라 앞을 지나간 후에도 착륙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도를 높였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발을 부딪쳐 신호를 보내려 했지만, 조종사는 지상에서의 신호를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헬리콥터가 방향을 틀 때 원심력이 발생했고, 밋 차이반차는 왼손목으로 사다리를 감아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밧줄이 손목을 거의 끊어질 정도로 깊게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손목에 감긴 밧줄을 풀고 아래 연못으로 떨어져 살아남으려 했지만, 바람이 그의 몸을 강타하면서 91 m (300 ft) 높이에서 흰개미집이 있는 땅에 부딪혔습니다.
사고 후 5분 이내에 같은 헬리콥터로 시라차 병원(โรงพยาบาลศรีราชา태국어)으로 이송되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부검 결과, 그는 몸이 심하게 손상되어 즉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손목에는 깊이 2 cm, 길이 8 cm의 상처가 있었고, 오른쪽 턱뼈와 왼쪽 및 오른쪽 광대뼈가 부러졌으며,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났고, 오른쪽 갈비뼈 5개가 부러졌으며, 오른쪽 허벅지 뼈와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약 16시 13분에 사망했습니다.
이 사고는 모두 필름에 기록되었고, 실제 영화의 극장 개봉판에는 이 치명적인 추락 장면이 그대로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DVD 버전에서는 이 장면이 삭제되었고, 밋 차이반차가 단순히 멀리 날아가는 모습과 함께 그를 추모하는 자막이 추가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몇 달 전 태국 영화 산업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 중 쓰러져 사망한 선구적인 감독 라타나 페스톤지(รัตน์ เปสตันยี태국어)의 죽음과 함께 1970년을 태국 영화계에 어려운 한 해로 만들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는 최종 장면을 두 번 촬영했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밋 차이반차가 낮은 고도에서 사다리를 잡고 날아가는 장면이었고, 두 번째는 스턴트 대역이 더 높은 고도에서 연기하는 장면이었어야 했습니다.
6. 장례 및 추모
밋 차이반차의 사망은 태국 전역에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의 장례식은 역사적인 규모로 치러졌으며,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불교 사원으로 향하는 거리는 수만 명의 조문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2005년 태국에서 출시된 《인시 통》 DVD의 특별 영상에는 그의 화장식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밋 차이반차의 시신은 수많은 조문객들이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의 전 부인과 아들이 유족으로 남았습니다. 1971년 1월 21일, 그의 시신은 왓 캐 낭릉(วัดแคนางเลิ้ง태국어)에서 화장되었으며,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몸랏차웡 끅릿 쁘라못(หม่อมราชวงศ์คึกฤทธิ์ ปราโมช태국어)은 이를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평민의 장례식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의 유골은 왓 캐 낭릉(วัดแคนางเลิ้ง태국어)(왓 쑨톤탐마탄(วัดสุนทรธรรมทาน태국어))의 유골함에 안치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찾아 참배하고 있습니다.

밋 차이반차의 기념 사당은 파타야 좀티엔 해변(หาดจอมเทียน태국어)의 작은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좀티엔 로드에서 좀티엔 팜 비치 호텔(โรงแรมจอมเทียนปาล์มบีช태국어) 뒤편에 있는 세무서 건물 맞은편에 있습니다. 사당은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됩니다. 사당 안에는 권총을 든 밋 차이반차의 동상이 있는데, 이는 액션 영화 배우로서의 그의 수많은 역할을 상기시킵니다. 벽에는 사진과 다른 기념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행운을 비는 사람들은 사당을 방문하여 까오 침(เสี่ยงเซียมซี태국어) 막대기를 흔든 다음, 사당에 걸린 판에서 해당 운세를 확인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행운을 비는 사람들은 사당에 작은 제물을 바치기 위해 다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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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망 4년 후, 밋 차이반차의 뜻에 따라 '피 뜨어이 깨우'(ผีถ้วยแก้ว태국어)(유리컵 귀신) 놀이를 통해 그를 추모하는 인형이 제작되어 페차부리주 차암군(อำเภอชะอำ태국어) 반 타 사원(วัดบ้านท่า태국어)에 보관되었습니다. 또한 파타야 남부 동탄 해변의 사망 장소에는 밋 차이반차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토지 매입으로 호텔이 건설되면서 사당은 티크 목재로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현재는 좀티엔 해변의 좀티엔 팜 비치 호텔 뒤편 세무서 맞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외에도 텝쁘라씻 로드(ถนนเทพประสิทธิ์태국어)에는 '쏘이 밋 차이반차' 또는 '파타야 쏘이 17'이라는 이름의 골목이 있습니다. 2006년에는 밋 차이반차의 고향인 페차부리주 타야앙군 왓 타 끄라티암(วัดท่ากระเทียม태국어)에 밋 차이반차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실물 크기의 유리 섬유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2005년, JSL 컴퍼니(บริษัท เจ เอส แอล จำกัด태국어)는 밋 차이반차의 실제 삶과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밋 차이반차 마야-치윗》(มิตร ชัยบัญชา มายา-ชีวิต태국어)(밋 차이반차 환상-삶)을 태국 육군 채널 7(สถานีโทรทัศน์สีกองทัพบกช่อง 7태국어)에서 제작했습니다. 이 드라마는 낑다오 다라니, 펫차라 차오와랏, 유타나 품헴이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배우 아카라 아마따야꾼(อครา อมาตยกุล태국어)이 밋 차이반차 역을, 폰 타나쑨톤(ฝน ธนสุนทร태국어)이 그의 파트너인 펫차라 역을 맡았으며, 태국의 선도적인 감독인 찰루아이 씨랏따나(ฉลวย ศรีรัตนา태국어)가 연출했습니다.
밋 차이반차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는 1987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이 행사에서는 그의 사진 전시회와 영화 상영회가 진행됩니다. 2007년에는 '엠 차름끄룽'(เอ็ม เฉลิมกรุง태국어)(잉카싹 겟홈(อิงคศักย์ เกตุหอม태국어))이 집필한 라디오 드라마 《다오 딘 빠띠한 행 락 리킷 행 후아차이》(ดาวดิน ปาฏิหาริย์แห่งรัก ลิขิตแห่งหัวใจ태국어)(땅의 별: 사랑의 기적, 마음의 운명)가 공개되었습니다. 또한 국민 예술가인 친꼰 끄라일랏(ชินกร ไกรลาศ태국어)이 이 라디오 드라마를 위해 '밋 차이반차'라는 제목의 현대적인 스타일의 노래를 작사, 작곡했습니다. 친꼰 끄라일랏은 이 노래를 작곡하면서 "밋은 자비, 연민, 기쁨, 평온이라는 네 가지 브라마 위하라 원칙을 지킨 배우였기에 브라마와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매년 이 행사에는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이 외에도 마담 투소 방콕 박물관은 밋 차이반차의 《인시댕》 의상을 입은 밀랍 인형을 제작하여 시암 디스커버리 센터 6층과 7층에 있는 박물관에 다른 중요한 인물들의 밀랍 인형과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7. 작품 목록
밋 차이반차는 1956년부터 1970년까지 266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16mm 필름으로 제작되었고 현장에서 더빙되었으며, 35mm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16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29명이 넘는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는데, 이 중 펫차라 차오와랏과는 172편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출연했습니다.
다음은 밋 차이반차의 주요 영화 목록입니다.
- 《차트 쑤아》(ชาติเสือ태국어)(호랑이 본능) (1958)
- 《차오 낙렝》(จ้าวนักเลง태국어)(갱스터 군주) (1959)
- 《반특 락 핌차위》(บันทึกรักของพิมพ์ฉวี태국어)(핌차위의 사랑 일기) (1962)
- 《짜이 펫》(ใจเพชร태국어)(다이아몬드 하트) (1963)
- 《녹 노이》(นกน้อย태국어)(작은 새) (1964)
- 《씽 라 씽》(สิงห์ล่าสิงห์태국어)(사자를 사냥하는 사자) (1964)
- 《응언 응언 응언》(เงิน เงิน เงิน태국어)(돈 돈 돈) (1965)
- 《펫 탓 펫》(เพชรตัดเพชร태국어)(방콕 작전) (1966)
- 《탑 시크릿》(Top Secret영어)(기밀) (1967)
- 《싸엔 락》(แสนรัก태국어)(수백만 사랑) (1967)
- 《몬락 룩퉁》(มนต์รักลูกทุ่ง태국어)(시골의 마법 같은 사랑) (1970)
- 《인시 통》(อินทรีทอง태국어)(황금 독수리) (1970)
- 《더 타이거 앤 더 드래곤》(The Tiger and the Dragon영어)(호랑이와 용) (1971)
8. 평가 및 영향
밋 차이반차는 태국 영화계의 영원한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연기는 물론 인간적인 면모가 후대 배우들과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거의 300편에 달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단 한 번도 골든 돌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누쏜몽콘깐 왕자(พระเจ้าวรวงศ์เธอ พระองค์เจ้าอนุสรมงคลการ태국어)는 이에 대해 "밋 차이반차는 연기 수업을 받은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담아냈다. 부자든, 거지든, 해외 유학생이든, 심지어 프라 로나 룩퉁 가수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역할이든, 때로는 침대에서 사랑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팬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만족했다. 그는 어떤 역할에 있든 그저 밋 차이반차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하루에 4~5편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유명 칼럼니스트 쏜 탈레(สนทะเล태국어)는 밋 차이반차에 대해 "우리는 그의 연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그가 출연한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밤새도록 밋의 미소만 보였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던 그의 뛰는 모습도 보였다. 영화 화면에 나타난 그의 모든 몸짓을 아쉬움과 함께 보았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라고 회상했습니다.
밋 차이반차는 태국 영화계의 영원한 영웅으로 여겨지며, 그의 매력은 동시대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1년, 워크포인트 엔터테인먼트 컴퍼니(บริษัท เวิร์คพอยท์ เอ็นเทอร์เทนเมนท์ จำกัด (มหาชน)태국어)는 밋 차이반차를 주제로 한 퀴즈 프로그램 《팬 판 태》(แฟนพันธุ์แท้태국어)(진정한 팬)를 개최했으며, 쫑분 쑤키니(จงบุญ สุขินี태국어)가 우승했습니다.
배우 끄룽 씨위라이(กรุง ศรีวิไล태국어)는 "만약 1970년 10월 8일(밋 차이반차가 사망한 날) 그날이 없었다면, 끄룽 씨위라이도, 파이롯 짜이씽(ไพโรจน์ ใจสิงห์태국어)도, 싸라퐁 찻뜨리(สรพงษ์ ชาตรี태국어)도, 욧차이 멕쑤완(ยอดชาย เมฆสุวรรณ태국어)도, 라핀 프라이완(รพินทร์ ไพรวัลย์태국어)도, 콴차이 쑤리야(ขวัญชัย สุริยา태국어)도, 낫 푸와나이(นาท ภูวนัย태국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밋 차이반차의 죽음이 후대 배우들의 등용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습니다. 펫차라 차오와랏은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사람들을 돕는 것을 좋아했으며, 타인을 배려하고 항상 미소 지으며 모든 사람과 대화할 수 있었다. 거만하지 않고 겸손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유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9. 수상
연도 | 상 | 부문 | 결과 | 영화 |
---|---|---|---|---|
1965 | 프라쑤랏싸와디 왕실상(รางวัลพระราชทานพระสุรัสวดี태국어) | 최고 흥행 남자 주연 배우 | 수상 | 《응언 응언 응언》 |
1966 | 다라통 왕실상(รางวัลดาราทองพระราชทาน태국어) |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다라통 상 | 수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