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밀레바 마리치(Милева Марић세르비아어, Mileva Marić독일어, 1875년 12월 19일 ~ 1948년 8월 4일)는 세르비아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아내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재능을 보였으며, 남성 중심의 학문 분야였던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취리히)에 입학한 소수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미래의 남편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마리치는 아인슈타인과의 결혼 생활 중 세 자녀를 두었으나, 첫째 딸 리젤 아인슈타인의 불분명한 운명과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그녀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의 주요 논문들에 과학적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그녀의 학문적 역량과 아인슈타인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려는 시도의 핵심을 이룬다.
이혼 후 마리치는 아들의 병간호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고단한 말년을 보냈으나, 사망 이후 그녀의 삶과 잠재적 기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그녀를 기리는 기념물과 대중문화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이는 여성 과학자로서 그녀가 겪었던 사회적 맥락과 과학계에서의 잠재적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밀레바 마리치는 1875년 12월 1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텔(오늘날 세르비아 내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 아버지 밀로시 마리치(Miloš Marić, 1846년 ~ 1922년)와 어머니 마리야 루지치-마리치(Marija Ružić-Marić, 1847년 ~ 1935년) 사이의 세 자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 경력을 마친 후 루마와 자그레브에서 법원직을 맡으며 부유한 가정을 꾸렸다.
마리치는 1886년 노비사드의 여자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1890년부터는 샤바츠의 왕립 세르비아 문법 학교에 다녔다. 1891년, 그녀의 아버지는 특별 허가를 받아 마리치를 전원 남학생 학교였던 자그레브의 왕립 고전 고등학교에 개인 학생으로 입학시켰다. 그녀는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1892년에 10학년으로 진급했다. 1894년 2월에는 물리학 강의를 수강할 특별 허가를 얻었고, 같은 해 9월에 최종 시험에 합격했다. 그녀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모두 "아주 좋음"이라는 최고 등급에 준하는 성적을 받았다. 이 시기 그녀의 수학 교사는 블라디미르 바리차크였다.
같은 해, 마리치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고, 스위스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4일, 그녀는 취리히의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96년에는 마투라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취리히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다.
3.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의 학업 및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
1896년 가을, 밀레바 마리치는 수학 입학 시험에서 6점 만점에 4.25점의 평균 점수를 받고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당시 취리히 폴리테크닉, 이후 ETH 취리히)로 편입했다. 그녀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중등 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디플로마 과정(섹션 VIA)에 등록했다. 그녀는 6명의 학생 그룹 중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이 섹션에 입학한 다섯 번째 여성이었다.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은 곧 친한 친구가 되었다.
1897년 10월부터 1898년 겨울 학기 동안, 마리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강의를 청강생으로 수강했다. 1898년 4월, 그녀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로 돌아와 미적분학, 기술 기하학, 사영 기하학, 역학, 이론 물리학, 응용 물리학, 실험 물리학, 천문학 등의 과정을 공부했다.
1899년, 마리치는 그룹 내 다른 학생들보다 1년 늦게 중간 디플로마 시험을 치렀다. 그녀의 평균 점수는 6점 만점에 5.05점으로, 그해 시험을 치른 6명의 학생 중 5위였다. 특히 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5.5점을 받았다. 그러나 1900년 최종 교원 디플로마 시험에서는 수학(함수론) 부문에서 2.5점만을 얻어 평균 4.00점으로 불합격했다. 이 시험에서 아인슈타인은 평균 4.91점으로 합격했다.
1901년 5월, 이탈리아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던 중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학업이 중단되었다. 임신 3개월 상태에서 다시 디플로마 시험에 응시했으나, 성적 향상 없이 두 번째로 불합격했다. 그녀는 물리학 교수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베버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디플로마 논문 작업도 중단했다.
4. 결혼 및 가족 생활
1902년 1월경, 밀레바 마리치는 노비사드에 있는 본가에서 아인슈타인과의 첫 아이를 출산했다. 이 딸은 부부 간의 서신에서 태어나기 전에는 '한젤'로, 태어난 후에는 '리젤 아인슈타인'으로 언급되었다. 리젤은 한 살 때 성홍열을 앓아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1903년 곧 사망했다고 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세르비아에서 입양되었다고도 전해진다.
1903년,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연방 지적 재산권 사무소에 취직한 스위스 베른에서 결혼했다. 1904년에는 첫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태어났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교수직 변경으로 인해 마리치 부부는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다. 1909년까지 베른에 거주했으며, 이후 취리히로 이주했다. 1910년에는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이 태어났다. 1911년에는 아인슈타인이 카를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어 프라하로 이사했고, 1년 뒤 아인슈타인이 모교에서 교수직을 수락하면서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다.
1913년 7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으로 이주하려는 계획 때문에 괴로워했다. 8월에는 아인슈타인 가족이 두 아들과 함께 마리 퀴리 및 그녀의 두 딸과 함께 도보 여행을 계획했으나, 에두아르트의 병으로 마리치는 잠시 지연되었다가 일행에 합류했다. 1913년 9월, 아인슈타인 가족은 노비사드 근처에 있는 마리치의 부모님을 방문했고, 빈으로 떠나기로 한 날 마리치는 아들들에게 동방 정교회 세례를 받게 했다. 빈 방문 후 마리치는 취리히로 돌아갔고,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친척들을 방문했다. 크리스마스 이후 마리치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츠 하버의 도움을 받아 1914년 4월에 있을 아인슈타인 가족의 이사를 위한 숙소를 알아보았다. 부부는 3월 말 취리히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고, 도중에 마리치는 아이들과 함께 로카르노에서 수영 휴가를 보낸 후 4월 중순 베를린에 도착했다.
5. 별거 및 이혼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의 결혼 생활은 1912년부터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인슈타인은 사촌인 엘자 아인슈타인과 재회하여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베를린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마리치는 그곳에서 점점 더 불행해졌다. 1914년 7월 중순, 베를린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마리치가 자신과 함께 살려면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조건을 수락했지만, 마리치는 재고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다음 날인 1914년 7월 29일, 독일을 떠나 아들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갔고, 이는 영구적인 별거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은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연봉 절반에 못 미치는 연간 5600 라이히스마르크를 분기별로 지급하겠다는 법적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을 대체로 이행했다. 5년간의 의무적인 별거 기간을 거쳐, 부부는 1919년 2월 14일 정식으로 이혼했다.
이혼 합의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이 곧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노벨상 상금은 두 아들을 위한 신탁으로 설정하기로 협상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로 노벨상을 받을 것이고, 마리치는 그 상금을 받게 되는 조건이었다. 마리치는 이자만 사용할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의 허락 없이는 원금을 처분할 권한이 없었다.
1922년, 밀레바 마리치는 이혼 합의에 따라 약속받았던 노벨상 상금을 아들들의 양육을 위해 받았다. 그녀는 이 돈을 취리히에 아파트 건물 세 채를 구입하는 데 투자하여 수입을 창출했다. 그녀는 후텐슈트라세 62번지에 있는 5층짜리 건물 한 채에서 살았고, 나머지 두 채는 투자용이었다.
6. 과학적 협력에 대한 논쟁

밀레바 마리치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의 기적의 해 논문에 과학적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많은 물리학사학자들은 그녀가 중요한 과학적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는 그녀가 과학적으로 지원하는 동반자였으며 그의 연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또한, 그들이 학생 시절에 과학적 개념을 함께 발전시켰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6.1. 공동 저작권에 대한 논쟁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 논문들의 공동 저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주로 러시아 물리학자 아브람 이오페의 개인 회고록의 한 구절에 기반한다. 이오페는 "1905년, '물리학 연보'에 20세기 물리학의 세 가지 매우 중요한 분야를 시작한 세 편의 논문이 실렸다. 그것은 브라운 운동 이론, 광자 이론, 그리고 상대성 이론이었다. 이 논문들의 저자는 당시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베른 특허청의 관료인 아인슈타인-마리티(마리티는 그의 아내의 결혼 전 성으로, 스위스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에 덧붙여진다)였다"고 기록했다.
지지자들은 이오페가 마리치의 공식 이름인 '마리티'를 '존재하지 않는' 스위스 관습에 따라 잘못 추가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이오페가 논문이 출판되기 전에 보았을 가능성이 낮고, 보았더라도 논문에 적힌 정확한 이름을 기억했을 가능성도 낮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리치가 1905년과 관련하여 세르비아 친구에게 "우리는 남편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 중요한 작업을 마쳤다"고 말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역사가 하이필드와 카터는 이 진술을 "고향의 민담"으로 간주한다.
6.2. 협력 관계에 대한 논쟁
마리치가 아인슈타인과 협력했는지에 대한 논쟁의 일부는 그들의 서신에 기반한다.
- 존 스타첼은 아인슈타인이 "우리의" 이론과 "우리의" 작업이라고 언급한 편지들이 1905년 논문이 나오기 최소 4년 전인 학생 시절에 쓰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타첼은 또한 아인슈타인이 과학적 작업과 관련하여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일부 사례가 그들이 각자 같은 주제(열 전도에 대한 실험 연구)를 선택했던 디플로마 논문을 지칭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스타첼은 아인슈타인이 일반적인 진술에서는 "우리"를 사용했지만, 자신이 작업하던 "특정" 아이디어를 설명할 때는 항상 "나"와 "나의"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마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그의" 연구, "그의"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한 작업을 12번 이상 언급한 반면, 상대 운동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작업은 단 한 번 언급했다.
- 스타첼은 또한 마리치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최신 아이디어를 언급한 편지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서신이 두 건 남아 있지만, 그녀는 아무런 과학적 응답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녀의 편지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와 달리 개인적인 문제나 폴리테크닉 학업과 관련된 언급만을 포함한다. 스타첼은 "그녀의 경우, 출판된 논문이 전혀 없으며, 아인슈타인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진지한 과학적 내용을 담은 편지도 없고, 그녀의 창의적인 재능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도 없다. 심지어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 중 구체적인 과학적 내용을 담거나 그녀의 아이디어를 보고하는 소문조차 없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이론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적어도 1901년 자녀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들의 서신이 협력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마리치가 아인슈타인과 협력했는지에 대한 논쟁의 일부는 그들의 상호작용에 기반한다.
- 마리치의 오빠와 다른 친척들은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이 결혼했을 때 함께 물리학을 논의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했다.
- 부부의 첫째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04년생)은 어머니가 1903년 아인슈타인과 결혼하면서 과학적 야망을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부모님의 "과학적 협력이 결혼 생활 내내 이어졌고, 저녁에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작업하는 것을 기억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1914년 마리치와 별거한 이후에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한 과학적 활동을 펼쳤고, 1920년대에 들어서도 매우 많은 성과를 냈다. 반면 마리치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졸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과학적 결과물을 출판한 적이 없다. 또한 마리치 본인이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업적에 관여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가장 친한 친구인 헬레네 사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아인슈타인의 과학 연구에 관여했다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2019년, 물리학자이자 작가인 가브리엘라 그레이슨은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밀레바 마리치에게 사후 학위를 수여해 줄 것을 신청했으나, 4개월간의 논의 끝에 대학은 이를 거부했다.
7. 말년의 삶과 개인적 어려움
q=Burghölzli, Zürich|position=right
1930년경, 마리치의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당시 약 20세)은 정신적 붕괴를 겪고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취리히 대학교의 정신과 병원 "부르크휠츨리"에서의 아들 치료 비용이 마리치에게 엄청난 재정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아들의 치료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전에 노벨상 상금으로 구입했던 아파트 두 채를 매각해야 했다.
1939년, 마리치는 자신이 거주하던 후텐슈트라세의 주택 소유권을 아인슈타인에게 이전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주택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마리치는 여전히 해당 주택에 대한 대리인 자격을 유지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마리치와 에두아르트를 위해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보냈다.
8. 사망
밀레바 마리치는 1948년 8월 4일, 취리히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취리히의 노르트하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은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9. 유산 및 평가

밀레바 마리치의 삶과 업적은 사후에 재평가되고 기려졌다.
2005년, 마리치는 ETH 취리히와 프라우뮌스터 협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녀가 이전에 거주했던 취리히의 후텐슈트라세 62번지에는 그녀를 기리는 기념 명판이 공개되었다. 같은 해,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도 그녀의 흉상이 세워졌다. 또 다른 흉상은 노비사드 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해 있다. 그녀의 고향인 티텔에 있는 고등학교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녀의 사망 60년 후에는 그녀가 사망했던 취리히의 옛 병원 건물에 기념 명판이 설치되었다. 2009년 6월에는 그녀가 안장된 취리히 노르트하임 공동묘지에 기념 묘비가 헌정되었다.
9.1. 대중문화
밀레바 마리치의 삶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1995년, 베오그라드의 '나로드나 크니가' 출판사는 드라가나 부쿠미로비치(Dragana Bukumirović) 기자가 쓴 세르비아어 저서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을 출판했다.
- 1998년, 비다 오그녜노비치는 연극 『밀레바 아인슈타인』을 제작했으며, 이 작품은 2002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오그녜노비치는 후에 이 연극을 알렉산드라 브레발로프가 작곡한 오페라 『밀레바』의 리브레토로 각색했고, 이 오페라는 2011년 노비사드의 세르비아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2012년,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의 청소년 SF 소설 『붙잡힌 자들』(The Missing 시리즈의 일부)에서 밀레바 마리치는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 2016년, 마리 베네딕트의 소설 『또 다른 아인슈타인』은 밀레바 마리치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관계를 허구적으로 묘사한다.
- 2017년, 아인슈타인의 삶을 다룬 TV 시리즈 『지니어스』의 첫 번째 시즌에서 그녀의 삶이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니키 한, 서맨사 콜리, 샐리 덱스터가 연기했다.
- 타임 워프 슈퍼히어로 TV 시리즈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의 두 번째 시즌 첫 에피소드에서는 밀레바 마리치(크리스티나 야스트르젬스카 분)와 그녀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잠재적으로 기여했을 가능성이 허구적으로 묘사된다.
- 2022년, 보니 가머스의 소설 『화학 수업』에서 밀레바 마리치는 자신의 작업이 유명한 과학자 남편의 업적에 가려진 선구적인 여성 과학자의 예시로 두 차례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