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Sumo Entry
미토이즈미 마사유키는 어린 시절부터 스모에 입문하기까지 특별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유도와의 인연과 다카사고 스모 방에서의 초기 훈련은 그의 프로 스모 경력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1. Childhood and Family Background
미토이즈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남동생 쇼지(후에 주료 13위 우메노사토)와 함께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이바라키현 미토 시립 이토미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유도에 매진하여 초단에 오를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다.
1.2. Recruitment and Early Training in Sumo
1977년 말, 미토이즈미는 당시 인기 스모 선수였던 다카미야마와 후지자쿠라의 사인회에 갔다가 다카미야마의 눈에 띄어 스모 선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며칠 후 다카사고 사부로부터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구하기 힘들었던 29 cm 사이즈의 신발을 선물받고 스모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시코나(四股名시코나일본어, 스모 선수의 링네임)인 '미토이즈미'는 고향인 미토시와 본명 고이즈미,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성공하라"는 다카사고 사부의 염원을 담아 지어졌다.
다카사고 스모 방에는 당시 동기생으로 후일 오제키가 되는 4대 아사시오가 있었다. 7살이나 많고 두 차례의 대학 요코즈나 타이틀을 획득한 아사시오와의 훈련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미토이즈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이는 후일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아사시오의 팬티를 빨아 신사에 두고 와 혼난 일화나, 1979년 9월 아사시오가 스모를 그만두려 할 때 "오늘 훈련은 어떻게 되셨나요?"라고 무심하게 말을 걸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일화 등 아사시오와의 여러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미토이즈미는 현역 생활 초반 질병으로 고생했고, 1982년에는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4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여러 대회를 놓치고 순위가 급락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그의 오랜 경력 동안 수없이 겪게 될 부상과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2. Professional Sumo Career
미토이즈미는 프로 스모 선수로서 22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현역 경력을 보냈으며, 여러 부상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활약하며 마쿠우치 우승이라는 정점을 경험했다.
2.1. Early Career and Rank Progression
미토이즈미는 1978년 3월에 프로 데뷔를 했고, 1981년에는 본명인 고이즈미 대신 출신지인 미토시를 반영한 '미토이즈미'라는 시코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4년 5월, 그는 봉급을 받는 세키토리 등급인 주료에 진출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대회에서 그의 스카우트 역이었던 다카미야마가 은퇴를 발표했다. 불과 두 대회 뒤인 1984년 9월, 그는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 승격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불운은 계속되었다. 1985년 5월 대회 직전, 그는 자동차 사고에 연루되어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대회 일부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고는 현역 스모 선수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하는 규정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고, 이 규정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다음 대회에서도 패배를 기록하며 주료로 다시 강등되었다. 1986년 3월 대회에서 마쿠우치에 재진입한 그는 5일째부터 11연승을 거두며 12승 3패의 성적으로 간토쇼를 수상했다. 1986년 9월에는 세키와케로 승진했으나, 이 대회에서 오제키 오노쿠니와의 경기 중 왼쪽 무릎 내측 측부 인대 파열, 경골 간과 능 골절, 반월상 연골 박리 골절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의사로부터 "스모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는 3개 대회를 연속으로 불참하며 다시 주료로 떨어졌다.
그는 1988년 1월에 다시 마쿠우치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11년 동안 최고 등급에 머물렀다. 1988년 9월에는 고무스비 등급에서 1요코즈나, 1오제키를 꺾고 10승 5패를 기록하며 슈쿤쇼를 수상했다. 이로 인해 큰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또다시 오노쿠니와의 대결에서 왼쪽 발목을 다쳐 두 차례의 큰 부상이 그의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히게 되었다. 1989년 11월 규슈 대회에서는 1요코즈나, 1오제키를 꺾고 11승을 기록하며 다섯 번째 간토쇼를 수상하는 등, 평막 상위권과 세키와케에서 활약했으나, 1990년 하반기에는 부진에 빠졌다. 1991년 3월 대회부터 7개 대회 연속으로 가치코시(승월)를 기록했으며, 그 중 6개 대회는 8승 7패였고, 4개 대회는 7승 7패로 센슈라쿠(최종일)에 승월 여부가 결정되는 등 힘든 복귀 과정을 거쳐 삼역으로 복귀했다. 1992년 3월 대회에서는 2패로 우승 경쟁을 하던 고무스비 도치노와카를 꺾어 같은 방의 오제키 고니시키의 3번째 우승을 도왔다. 1992년 5월 대회에서는 10일째까지 7승 3패로 좋은 흐름이었으나, 요통 악화로 이후 5연패하며 7승 8패로 8개 대회 만에 마케코시(패월)를 기록했다.
2.2. Unique Style and "Salt Shaker" Nickname
미토이즈미는 경기 전 예비 의식에서 씨름판에 엄청난 양의 정화용 소금을 뿌리는 독특한 습관으로 유명했다. 특히 제한 시간 직전의 마지막 소금 뿌리기에서 한 움큼의 소금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높이 던지는 동작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영국의 스모 팬들(채널 4와 1991년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시범 경기를 통해 그를 접한 팬들)로부터 "소금 뿌리는 사람(Salt Shaker)"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별명은 일본에서도 "미토이즈미하면 호쾌한 소금 뿌리기"로 자리 잡았다. 그가 한 번에 뿌리는 소금의 양은 600 g에 달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아사노와카도 많은 소금을 뿌렸는데, 둘이 맞붙을 때는 미토이즈미의 호쾌한 소금 뿌리기와 아사노와카의 강하게 내리치는 소금 뿌리기에 관중들이 열광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소금을 뿌린 후 자신의 얼굴과 마와시(샅바)를 강하게 때려 기합을 넣는 동작도 특징적이었다. 이 동작은 그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시작한 것이며, 어느 날 술집에서 팬이 지적해줘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벤트 등에서 요청받아 의식적으로 따라 하려 하면 잘 되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시간 제한까지 서려고 하지 않고 형식적인 시키리(仕切り시키리일본어, 경기 전 준비 동작)를 반복했기 때문에 일부 스모 애호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카토우키나 나미노하나처럼 시간 전에도 여러 차례 서는 선수들과의 대결에서는 흥을 깨는 경우가 많았다.
2.3. Makuuchi Championship and Peak Performance
1992년 7월 대회는 미토이즈미 경력의 정점이었다. 서쪽 마에가시라 1위에 랭크된 그는 당시 신오제키였던 아케보노가 훈련 중 왼쪽 발가락 부상으로 대회에 불참한 덕을 보기도 했다. 또한 대회 전 유럽 원정을 요통으로 불참하여 과도한 일정과 시차 적응에 시달린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좋은 컨디션으로 씨름판에 나섰다. 마쿠우치 승격 후 처음으로 개막 7연승을 달성하며 승수를 쌓아갔다. 8일째 고무스비 다카노하나에게 첫 패배를 기록했고, 10일째 오제키 기리시마에게도 패하여 2패를 기록했지만, 그 후에도 우승 경쟁 단독 선두를 달렸다.
대회 중 그의 유럽 순회 불참이 좋은 성적을 노린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으나, 그는 "솔직히 나도 유럽에 가고 싶었다"며 부상으로 인해 순회에 전면 불참했음을 강조했다。종반전, 13일째 세키와케 고토니시키와의 경기에서는 들배지기 한 방으로 쓰키오토시에 성공했고, 14일째 마에가시라 12위 다카노나미에게도 우와테나게로 승리하며 12승 2패를 기록했다. 다카노나미와의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젊음이 깃든 밀어내기를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왼쪽 오토가케로 들어오는 다카노나미를 들어 올리는 듯한 우와테나게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 순간, 10승 3패로 1승 차이로 추격하던 고무스비 무사시마루와 오제키 고니시키, 기리시마 세 선수 모두 패하면서 미토이즈미의 첫 마쿠우치 우승이 확정되었다. 미토이즈미는 14일째에 우승이 확정될 가능성이 있어 대기하고 있었지만, 3패를 기록 중이던 세 선수가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기리시마마저 패한 순간 "정말이야!?"라며 놀라워한 뒤 남동생 우메노사토와 함께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기쁨의 눈물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가장 화려한 눈물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다카사고 사부였던 후지니시키가 현역 시절 1964년에 평막 우승을 차지했던 것과 같은 나고야의 씨름판이었다. 그는 센슈라쿠에서도 승리하여 13승 2패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1909년 우승 제도가 확립된 이후 미토이즈미는 역대 24번째 평막 우승자였는데, 1991년 7월의 고토후지, 같은 해 9월의 고토니시키, 그리고 1992년 1월의 다카노하나에 이어 불과 1년 사이에 4명의 평막 우승자가 탄생하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우승 퍼레이드에서는 당시 오제키였고, 우승 경쟁을 펼쳤던 고니시키가 우승 깃발을 들었다. 오제키급 선수가 하위 등급 선수의 우승 퍼레이드에서 깃발을 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고니시키는 일부로부터 "천하의 오제키가 평막 선수의 깃발을 드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다카사고 스모 방 입문 시절부터 고니시키에게 미토이즈미는 함께 어려운 시절을 보낸 사이이자 좋은 상담 상대였고, 형 같은 존재였다. 또한 입문 초부터 오랫동안 훈련 상대를 해주던 사이였다. 고니시키는 "나의 세 번의 우승 외에도 지난 대회(1992년 5월)에서는 아케보노의 깃발까지 들게 했다. 미토 세키는 나의 은인이니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깃발을 들겠다", "내가 우승했던 세 번 모두 미토 세키가 깃발을 들어주었다. 이건 단순한 보답이다"라고 말하며, 고니시키가 '은혜갚기'의 의미로 스스로 요청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고니시키는 4패를 기록했을 때부터 이미 미토이즈미의 우승을 확신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2.4. Career Longevity and Injury Battles
미토이즈미는 1992년 7월의 우승 이후 다시는 그와 같은 높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1992년 11월 산야쿠 등급에서의 마지막 출전 이후 1999년 3월까지 최고 등급에 머물렀다. 그는 2000년 9월까지 주료 등급에서 계속 싸웠으며, 더 낮은 마쿠시타 등급으로 강등되기 직전인 38세에 마침내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22년 이상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통산 807승은 스모 역사상 12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그는 고무스비나 세키와케 등급에서 요코즈나에게 여러 번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긴보시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이는 긴보시가 평막 등급 선수만이 요코즈나에게 승리했을 때 주어지는 특별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9월 대회에서 서쪽 하리다시 세키와케로 승격하여 8승 7패로 승월하며 7월 대회의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1992년 11월 대회는 성적에 따라 오제키 승격까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또다시 왼쪽 발 부상으로 1승 12패 2휴를 기록하며 평막으로 강등되었다. 1993년부터는 "마사토는 정치인 같다"며 시코나를 '미토이즈미 마사유키'로 개명했다. 그러나 이후 무릎 부상이 잦아 다시는 삼역 등급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1999년 5월 대회에서 주료로 강등되었고, 그 후로는 마쿠우치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현역 생활을 이어가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마쿠우치에서 활약했던 선수 중 마지막까지 현역에 남은 선수로 38세까지 활동했다. 2000년 9월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며 니시키도 연장자로 이름을 바꿨다. 마쿠우치 재위 79개 대회 동안 99회 휴장은 요코즈나나 오제키를 제외하면 당시 역대 최다 휴장 기록(2009년 3월에 와카노사토가 100회 휴장을 기록하며 갱신)이었기 때문에 '부상 백화점'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단파쓰시키(머리카락 자르기 의식)에는 470명이라는 기록적인 수의 관계자들이 가위를 넣었는데, 잡지 『스모』에 따르면 이는 역대 최다 인원이라고 한다.
3. Fighting Style
미토이즈미는 기술적인 스모 선수로 평가받지는 않았으며, 기술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의 가장 흔한 승리 기술(決まり手키마리테일본어)은 압도적으로 요리키리(寄り切り요리키리일본어, 곧게 밀어내기)였는데, 이는 세키토리 등급에서의 승리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키와 힘을 바탕으로 드물게 사용되는 기술인 키메다시(極め出し키메다시일본어, 팔로 상대의 움직임을 막고 밀어내기)도 자주 구사했다.
그는 주로 히다리미요쓰(왼손띠잡이)와 우와테나게(덧걸이)를 선호했다. 강력한 쓰카파리(밀어치기)와 쓰리기미노요리(들어 올리며 밀어내기)는 매우 위력적이었다. 특히 그의 오른쪽 우와테나게는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여 요코즈나 다카노하나를 집어던진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미토이즈미와 대결하는 선수들은 대체로 오른쪽 우와테를 경계했으며, 그 공방이 그의 경기에서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미토이즈미가 오른쪽 자세에 약했던 것은 아니며, 깊은 품을 활용한 히키(끌어당기기)나 상대의 팔을 제압하는 기술도 자주 선보였다.
그는 일본인 답지 않은 타고난 신체와 파워를 겸비하여 신입 제자 시절부터 장래가 촉망받았다. 하지만 허리가 높고 옆구리가 허술하여 상대에게 쉽게 모로자시(양손으로 띠를 잡는 자세)를 허용했으며, 만세 자세에서 어깨 너머로 마와시를 잡는 스모도 많아 무릎이 지지대처럼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시즈모(밀치기 스모)와 대결할 때는 허무하게 씨름판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는데, 상반신의 강인함과 하반신의 취약함이 공존했으며, 오노쿠니 같은 거구의 오른쪽 자세 선수와 대결하여 좋지 않은 무릎에 더 큰 부담을 주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의 잠재력은 기타노후지가 "무릎 부상이 없었다면 당연히 오제키가 되었을 것"이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높았으며, 거듭되는 부상으로 오제키 승격이 좌절된 점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4. Retirement and Life as a Sumo Elder
미토이즈미는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 후 스모 연장자로서 일본 스모 협회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후학 양성과 행정 업무에 기여하고 있다.
4.1. Retirement Ceremony and Becoming an Elder
미토이즈미의 공식 은퇴 의식인 단파쓰시키(断髪式단파쓰시키일본어, 머리카락 자르기 의식)는 2001년 6월 9일에 거행되었는데, 470명이라는 기록적인 수의 후원자, 선수, 코치들이 머리카락 자르기 의식에 참여했다. 이는 잡지 『스모』에 따르면 역대 최다 인원이다. 그는 다카사고 스모 방에 남아 니시키도 연장자(年寄도시요리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사부의 병환 중에는 실질적으로 스모 방을 이끌기도 했다.
4.2. Founding and Leading Nishikido Stable
그는 다카사고 스모 방의 후계자 지명까지 받았으나, 한 여성과의 약혼 파기 문제로 인해 사퇴했다. 이 여성은 이토 후미오의 전처였으며, 이혼 후에는 결혼 사기 같은 행동으로 한때 와이드쇼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 여성은 또한 니시키도와 약혼 파기 후 오이카제우미 나오토와 결혼했는데(후에 이혼), 이 문제가 불거져 오이카제우미는 사부에게 파문당해 협회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미토이즈미는 다카사고 스모 방의 지배권을 전 오제키 아사시오에게 넘기고, 2002년 12월 자신의 훈련 스모 방인 니시키도 스모 방을 설립했다. 스모 방 입구 옆에는 그의 우승 액자가 걸려 있다. 니시키도 스모 방은 2017년 11월 미토리유가 주료로 승격될 때까지 세키토리 선수를 배출하지 못했다. 스모 방의 사부로서는 드물게 오랫동안 미혼으로 지내다 2016년 2월 소프라노 가수 오노 유키코와 결혼했다.
4.3. Roles within the Japan Sumo Association
은퇴 후 미토이즈미는 일본 스모 협회 내에서 오랫동안 심판위원을 역임했다. 2014년 4월에는 협회 임원 외의 연장자들로 구성된 연장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장 취임 시 그는 형식화된 총회의 방식을 재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연락망을 확실히 하여 무슨 일이 있을 때 즉시 모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스모 협회를 위해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좋은 연장자회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표명했다. 2016년 8월 심판위원직을 퇴임했으나, 2018년 3월 28일 직무 분장에 따라 임원 대우 위원으로 승격되며 심판부 부부장으로 취임했다. 2019년 3월 8일, 건강 문제로 3월 대회의 휴장이 보도되었고, 다카다가와 부부장이 15일간의 심판장을 대신 맡게 되었다.
4.4. Health Challenges and Public Awareness
2016년 10월 28일, TBS의 『폭로! 더 프라이데이』에 출연하여, 당시 일부 주간지에서 '사부에 대한 반발로 제자들이 연이어 그만두었다'는 보도에 대해 "우연히 (제자들의) 나이도 있었고, 부상이나 질병으로 그만둔 것이 겹쳤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제자 수가 3명으로 줄어들어 수입원인 스모 협회의 지급금이 줄어 매달 적자 상태로 어려운 상황임을 밝혔다. 또한 자신도 말기 신부전에 걸려 장시간 투석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훈련에 나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아내 또한 주간지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보도되어 '여주인 실격'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같은 방송에서는 오전 7시부터 스모 방의 집안일을 처리하고, 훈련에 나가지 못하는 사부를 대신하여 훈련 번수를 그래프로 기록하며, 제자들의 식사를 만들거나, 제자들을 술집에 불러내 고민을 들어주는 등 여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 소개되었다.
2020년 8월 6일, 그의 제자인 고쿠신도가 아비와 동행하여 스모 협회의 코로나19 대응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행위로 인해 견책 처분을 받았다. 2021년 3월 대회에서는 4일째부터 건강 문제로 휴장했다. 시바타야마 홍보부장은 "발열은 없지만, 오늘부터 니시키도 사부가 휴장한다. 몸이 좋지 않아서 심판장도 교대로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2022년 1월 9일, 아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이 확인되었고, 다음 날(10일)에는 그 자신도 감염된 사실이 밝혀졌다. 소속 스모 선수 4명과 함께 1월 대회를 모두 불참했으며, 감염 확인 후 건강이 악화되어 고열과 기저 질환으로 인해 보건소 지정 격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14일째(22일) 열이 내려 퇴원했음을 블로그를 통해 알렸다. 2022년 3월 30일 발표된 직무 분장에 따라 다시 임원 대우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5. Personal Life and Interests
미토이즈미는 스모 선수로서의 삶 외에도 개인적인 취미와 가족 관계를 통해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5.1. Family and Marriage
미토이즈미의 남동생인 우메노사토는 그와 같은 다카사고 스모 방 소속의 스모 선수였다. 그는 1980년부터 2001년까지 21년간 선수 생활을 했지만, 1993년 7월 단 한 차례만 주료 등급에 진출했다. 현재는 니시키도 스모 방에서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미토이즈미는 2016년 2월 12일, 22세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오노 유키코와 결혼을 발표했다.
5.2. Hobbies and Other Interests
미토이즈미는 어릴 때부터 키워온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어머니가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선물 받은 크레용으로 좋아하는 만화를 따라 그렸다. 데즈카 오사무, 지바 데쓰야, 지바 아키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스케치하면서 데생 실력을 키웠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시내 대회에서 표창을 받을 만큼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그는 처음에 만화가로서의 경력을 꿈꾸기도 했다.
프로 스모 선수가 된 후 시간이 생기자 당시 다카사고 사부의 부인이었던 후지니시키의 아내로부터 유화 그리기를 소개받아 시작했다. 스승에게 주걱이나 빗으로 그리는 방법을 배우면서 표현의 폭넓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신을 차리면 식사도 거른 채 5~6시간을 계속 그림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몰입했으며, 본 대회 중에는 자제하기도 했다. 그는 꾸준히 이어지는 '취미'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2023년 현재도 그림 전시회에 출품하거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에 드는 풍경화를 덧붙이기도 한다.
그는 자타 공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자신이 마쿠우치 우승을 다투던 1992년 7월 대회에서도 기자들에게 "우승 가능성? 100퍼센트다. 물론, 자이언츠의 우승 말이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참고로 그해 자이언츠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2경기 차로 2위를 기록했다.
그는 게임 팬이기도 하여 드래곤 퀘스트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당시 수행원이던 토우가에게 캐릭터 레벨업을 부탁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토우가는 은퇴 후 2012년부터 니시키도 스모 방의 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심판위원을 맡고 있던 2007년 9월 대회 11일째, 고에이도 대 고후의 경기 직전, 갑자기 대량의 전단을 든 여성 관객이 씨름판에 오르려는 해프닝이 발생했는데, 그는 서쪽 도효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카미사카 등과 함께 그 여성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했다.
2020년 7월 대회에서 데루노후지가 마에가시라 우승을 차지했을 때,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대진 편성이 늦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심판장을 맡았던 니시키도는 대회 11일째 시점에서도 "타마와시 (12일째 상대)에게 이기면 삼역으로 올려야 한다"고 태평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단파쓰시키 후 많은 전직 선수들이 올백 머리를 하는 것과 달리, 미토이즈미는 곧바로 삭발을 했다. 본인의 말로는 당시 탈모증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탈모 부위가 눈에 띄지 않도록 머리를 밀었다고 한다. 현재는 증상이 개선되었는지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있다.
6. Overall Achievements and Records
미토이즈미 마사유키의 주요 성과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통산 성적: 807승 766패 162휴, 승률 0.513
- 마쿠우치 성적: 530승 556패 99휴, 승률 0.487
- 현역 재위: 136개 대회
- 마쿠우치 재위: 79개 대회
- 산야쿠 재위: 11개 대회 (세키와케 4개 대회, 고무스비 7개 대회)
- 삼상: 7회
- 슈쿤쇼: 1회 (1988년 9월 대회)
- 간토쇼: 6회 (1985년 1월 대회, 1986년 3월 대회, 1986년 7월 대회, 1988년 5월 대회, 1989년 11월 대회, 1992년 7월 대회)
- 각 등급 우승:
- 마쿠우치 최고 우승: 1회 (1992년 7월 대회)
- 주료 우승: 1회 (1986년 1월 대회)
- 마쿠시타 우승: 1회 (1984년 3월 대회)
- 긴보시: 없음
- 그는 삼역 시절 여러 번 요코즈나에게 승리했지만, 평막 등급에서는 요코즈나에게 모두 패배하여 은퇴할 때까지 긴보시를 획득하지 못했다.
6.1. 마쿠우치 대전 기록
마쿠우치 등급에서의 주요 상대 선수별 대전 기록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불전승 및 불전패를 포함한 수치이다.)
선수명 승수 패수 선수명 승수 패수 선수명 승수 패수 선수명 승수 패수 아오키야마 6 5 아오바조 1 2 아키노시마 13 9 아키노스 2 2 아케보노 0 11 아사노쇼 6 10 아사노와카 10 8 아사히후지 6 9 아사히유타카 5 7 이타이 6 6 에나자쿠라 1 2 교호 6 3 오니시키 1 0 오노쿠니 3 8 오노하나 1 0 오와카마쓰 1 0 오기니시키 7 8 오기노하나 8 4 카이오 1 5 카이키 3 0 카이호 2 2 카스가후지 10 8 간유 4 6 키타카쓰토키 8 6 쿄코잔 2 0 아사히와시 5 3 아사히텐호 2 0 아사히도잔 8 7 키라이호 5 6 기리시마 14 17(1) 키리니시키 4 3 키린지 0 6 킨카이잔 0 2 쿠시마우미 11(1) 2 쿠라마야마 3 3 켄코 1 3 다카미모리 1 2 고조로 5 2 고토이즈마 14 13 고토가우메 9 11 고토카제 2 0 고토쓰바키 4 3 고토니시키 6 13(1) 고토노와카 7 9 고토후지 10 9 고토베후 3 6 고토류 5 6 사카호코 7 8 사다노우미 0 3 시키시마 6 5 시시호 1 0 진가쿠 3 7 다이키코 1 0 다이시 6 5 다이주잔 8 8(1) 다이쇼호 8 8 다이쇼잔 4 5 다이젠 2 2 다이테쓰 4 3 다이히쇼 1 2 다카토우키 9 13 다카노나미 6 7 다카노하나 5 13 코노후지 3 4 류자쿠미 11 11 타가류 7 4 타치코 2 0 타마카이리키 1 0 타마하루히 1 6 타마류 2 1 치요타이카이 0 1 치요텐잔 0 1 지요노후지 1 10 데지마 1 1 테라오 16 16(1) 데와아라시 1 1 데와노하나 4 1 토료 1 1 토키츠우미 2 1 토키츠요 1 3 토사노우미 1 5 토치아카기 1 0 토치아즈마 0 1 토치즈카 6 2 토치츠루 2 1 토치노요 1 2 토치노후지 1 1 도치노와카 13 18 토치마토메 1 0 토모후지 4 2 치노하나 1 1 도요노우미 5 4 나미노하나 6 3 하치야 1 0 하나노이케 3 1 하나노쿠니 3 3 하마노시마 6 9 히고노우미 6 7 히타치류 0 1 히다노하나 2 1 후지노신지 1 1 후타바구로 1 3 호오 3 1 호쿠텐유 7 6(1) 호쿠토우미 3 10 마이노우미 11 6 마에노신 2 0 마스타야마 3 0 마스라오 2 0 미스기사토 17 7 미나토후지 10 8 무사시마루 3 10 무소야마 1 5 야마토 1 3 리키오 1 0 료고쿠 10(1) 0 와카시마즈 1 2 와카쇼요 7 4 와카세가와 2 4 와카노사토 1 2 와카노조 3 4 와카노하나 8 8 와카노야마 0 1
7. Reception and Legacy
미토이즈미 마사유키는 그의 경기 스타일과 인간적인 면모 모두에서 다양하게 평가되며, 그의 경력과 행동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일부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7.1. Positive Evaluations and Contributions
미토이즈미는 "어릴 때부터 고생한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효도하고 싶다"고 말하며 스모 선수가 되었고, 이후에도 늘 이 말을 되뇌었다. 실제로 마쿠우치 우승을 차지하기 전, 그의 어머니는 미토이즈미에게 "늘 우승 퍼레이드에서는 깃발만 들고 있네. 가끔은 네가 우승해서 누군가에게 우승 깃발을 들게 해봐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토이즈미가 그 후 마쿠우치 우승을 진정으로 달성함으로써 훌륭하게 효도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비로운 성품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자신의 수행원 중 스모를 그만두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포장마차에 데려가 술을 마시며 설득했는데, "나도 옛날엔 약했어"라고 말하다가 자신이 울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보 미토이즈미"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입문 당시 유무형의 차별에 시달리던 고니시키도 미토이즈미의 이러한 눈물에 감동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고니시키는 후에 "입문 당시 미토 세키만이 차별 없이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고 말하며 미토이즈미의 사려 깊은 인품을 칭찬했다.
그는 같은 다카사고 계열의 고코노에 스모 방 소속 지요노후지와 호쿠토우미, 그리고 도세키 스모 방 소속 아케보노 등의 요코즈나들과 동방의 오제키 고니시키 등 당대 최고 선수들의 우승 퍼레이드에서 깃발을 드는 단골손님이었다. 실제로 첫 우승 선수를 배출한 스모 방에서는 우승 퍼레이드 절차를 모르면 미토이즈미에게 물어봤다고 할 정도였다. 정작 미토이즈미 자신의 평막 우승 퍼레이드에서는 고니시키가 깃발을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나도 모르게 우승 깃발을 들 뻔했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회고했다.
7.2. Criticisms and Controversies
1992년 마쿠우치 우승 당시, 그가 유럽 순회에 불참한 것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부상 때문에 불참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며 논란을 해명했다.
1985년 5월 대회 직전에 발생한 자동차 사고는 현역 스모 선수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하는 규정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고는 그의 경력 초반에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또한, 6대 다카사고의 양자로 입적되어 한때 다카사고 스모 방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한 여성과의 약혼 파기 문제로 인해 사퇴해야 했다. 이 문제는 복잡한 결혼 사기 의혹으로 번져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다른 스모 선수인 오이카제우미의 스모계 퇴출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판위원을 맡고 있던 2020년 7월 대회에서 데루노후지가 마에가시라 우승을 차지했을 때, 일부 언론에서는 심판부가 대진 편성을 늦게 진행하여 번외 우승 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당시 심판장이었던 미토이즈미도 이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경기 전 예비 의식인 시키리에서 시간 제한까지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시간 제한까지 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미토이즈미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는 다카토우키나 나미노하나 등 시간 전에도 자주 서는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경기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8. 외부 링크
- [https://ameblo.jp/mitoizumimasayuki/ 미토이즈미 메모리 (본인 블로그)]
- [http://www.szumo.hu/sekitori/Mitoizumi.html 미토이즈미의 대회 결과]
- [https://web.archive.org/web/20070708223722/http://sumo.goo.ne.jp/eng/ozumo_meikan/sumo_beya/nishikido.html 니시키도 스모 방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