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미키 로후의 생애는 출생부터 교육, 그리고 초기 문학 활동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그의 문학적 기반과 사상적 배경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미키 로후는 1889년 6월 23일, 효고현 이비군 다쓰노정(현 다쓰노시)에서 아버지 미키 세쓰지로(三木節次郎미키 세쓰지로일본어)와 어머니 미도리카와 가타(碧川かた미도리카와 가타일본어, 1869년~1962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미도리카와 가타는 15세에 결혼했으며 메이지 시대 여성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자 간호사였다. 그에게는 이부동생이자 영화 카메라 감독인 미도리카와 미치오(碧川道夫미도리카와 미치오일본어)가 있었다. 미키 로후가 5세가 되던 1895년, 부모가 이혼하면서 그는 다쓰노 초대 시장이었던 조부의 품에서 자랐다.

1.2. 교육
미키 로후는 다쓰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으며, 학창 시절부터 시, 하이쿠, 단가를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등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1905년 17세 때, 효고현립 다쓰노 중학교(현 효고현립 다쓰노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학업에 소홀하여 졸업이 어렵게 되자, 오카야마현에 위치한 시즈타니 학교(閑谷学校시즈타니 학교일본어)로 전학을 가게 된다. 이후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대학교와 게이오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1.3. 초기 문학 활동
1905년 17세에 처녀 시집 『나쓰히메』(夏姫나쓰히메일본어)를 발표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미키 로후는, 1907년부터 소마 교후(相馬御風소마 교후일본어), 노구치 우조(野口雨情노구치 우조일본어) 등과 함께 '와세다 시사'(早稲田詩社와세다 시사일본어)를 결성하고 그해 9월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단가에서 벗어나 시 창작에 전념하며 매달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09년 20세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집 『폐원』(廃園하이엔일본어, '황폐한 정원' 또는 '버려진 정원'으로 번역됨)을 출간하여 자유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주목받았다. 이는 기타하라 하쿠슈와 함께 당시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했다. 이듬해인 1910년에는 『적막한 새벽』(寂しき曙사비시키 아케보노일본어)을 출간하며 상징주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1911년에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던 조부가 사망하면서 깊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으나, 1913년 『하얀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猟人시로키 테노 료진일본어)을 발표하며 비로소 완성도 높은 상징시의 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그는 가와지 류코(川路柳虹가와지 류코일본어), 사이죠 야소(西條八十사이죠 야소일본어), 야나기사와 다케시(柳澤健야나기사와 다케시일본어) 등과 함께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모임인 '미래사'(未來社미라이샤일본어)를 결성하기도 했다. 국키다 돗포의 증조모가 미키 가문 출신이었고, 그 인연으로 1912년 『돗포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2. 문학 경력 및 성취
미키 로후는 일본 문단에 상징주의 시를 정착시키고 동요 운동에 크게 기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2.1. 상징주의와 주요 시집
미키 로후는 일본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며, 초기부터 기타하라 하쿠슈와 더불어 '백로 시대'(白露時代하쿠로 지다이일본어)를 구축한 핵심 인물이다. 그의 시는 자유로운 형식과 깊은 감정,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로 큰 주목을 받았다.
대표 시집으로는 20세에 발표한 『폐원』(廃園하이엔일본어, 1909년)이 있으며, 이는 당시 자유시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어서 출간된 『적막한 새벽』(寂しき曙사비시키 아케보노일본어, 1910년)은 그의 상징주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또한 『하얀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猟人시로키 테노 료진일본어, 1913년)을 통해 완성도 높은 상징시의 세계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종교적 색채가 반영된 『양심』(良心료신일본어, 1915년), 『노후집』(露風集로후슈일본어, 1913년), 『생과 사랑』(生と恋세이토 아이일본어, 1920년) 등의 시집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탐구했다.
2.2. 아동 문학과 "아카톤보"

미키 로후는 1918년경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스즈키 미에키치일본어)가 창간한 아동 문학 잡지 『붉은 새』(赤い鳥아카이 토리일본어)에 참여하면서 동요 운동인 '도요'(童謡도요일본어)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운동은 고품질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어린이 시와 노래를 창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21년에는 동요집 『진주섬』(真珠島신주지마일본어)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 수록된 동요 '아카톤보'(赤とんぼ아카톤보일본어, 붉은 잠자리)는 1927년 야마다 고사쿠에 의해 곡이 붙여져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동요 중 하나가 되었다. '아카톤보'는 1989년 NHK 프로그램 '일본의 노래, 고향의 노래' 설문조사에서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선정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고향인 다쓰노시에는 '아카톤보'를 기념하는 거대한 벽면 기념비와 기념 명판이 세워져 있다.
2.3. 수필 및 종교 관련 저술
미키 로후는 시인 활동 외에도 뛰어난 수필가였다. 그는 1915년 『환상의 전원』(幻の田園마보로시노 덴엔일본어)을 출간한 이후,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도원에 머물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수도원 잡필』(修道院雑筆슈도인 잣피쓰일본어, 1925년), 『수도원 생활』(修道院生活슈도인 세이카쓰일본어, 1926년)과 같은 수필집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은 그의 수도원 경험과 깊어진 종교적 신앙심을 반영한다. 또한 1929년에는 일본 가톨릭의 역사를 탐구한 『일본 가톨릭 교사』(日本カトリツク教史니혼 가토리쿠쿄시일본어)를 저술하는 등 종교 관련 역사 저술에도 힘썼다. 그의 자서전적인 수필인 『내가 걸어온 길』(我が歩める道와가 아유메루 미치일본어, 1928년)도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3. 종교 생활 및 수도원 경험
미키 로후의 삶에서 기독교 신앙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후기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세례와 가톨릭 신앙
미키 로후는 1916년부터 1924년까지 홋카이도 가미이소정(현 호쿠토시)에 위치한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도원에서 문학 강사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22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크리스천이 되었다. 세례명은 바오로였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그의 신앙심을 더욱 깊게 했으며, 뿌리 깊은 고독과 공허함으로 고통받던 그에게 위안이 되고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신앙심은 이후 그의 에세이와 종교 시집에 깊이 반영되었다.
3.2. 신앙 관련 저술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미키 로후는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종교적 경험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여러 저술로 이어졌다. 그는 『수도원 잡필』(修道院雑筆슈도인 잣피쓰일본어, 1925년)과 『수도원 생활』(修道院生活슈도인 세이카쓰일본어, 1926년) 등 수도원에서의 삶을 기록한 수필들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 가톨릭 교사』(日本カトリツク教史니혼 가토리쿠쿄시일본어, 1929년)를 저술하여 일본 가톨릭의 역사를 탐구했다.
그의 시집 중에도 신앙심이 반영된 작품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신앙의 새벽』(信仰の曙신코노 아케보노일본어, 1922년)과 『하느님과 사람』(神と人카미토 히토일본어, 1926년)이 있다. 이 외에도 『트라피스트 가집』(トラピスト歌集토라피스토 카슈일본어, 1926년)과 같은 종교 시들을 모은 앤솔로지도 출간했다.
4. 개인 생활
미키 로후는 비교적 사적인 삶의 세부 사항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진 자료 등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동요 '아카톤보'의 시비 제막식 사진에는 그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나카'(なか나카일본어) 여사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어 그가 결혼 생활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5. 만년 및 거주
미키 로후는 1924년 수도원에서 나온 후, 1928년부터 도쿄도 미타카시 무레(牟礼무레일본어)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36년간 이 곳에서 거주했다. 당시 미타카의 무레 지역은 뽕나무밭과 잡목림이 이어지는 무사시노(武蔵野무사시노일본어)의 농촌이었고, 무레 논에는 저녁노을이 드리워지는 전원 지대였다.
로후는 이 지역의 자연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고향인 다쓰노에 있는 다쓰노성(龍野城다쓰노성일본어)이 '안개 성'(霞城카스미조일본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에서 영감을 받아, 무레에 새로 지은 자신의 집을 '원하장'(遠霞荘엔카소일본어, '멀리 드리운 안개 저택'이라는 뜻)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옛 거주지는 1990년까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정원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만이 남아 있으며, 미타카시에서 '미키 로후 옛 거주지 터'(三木露風旧居跡미키 로후 큐쿄 아토일본어)라는 안내판(미타카시 무레 4-17-18)이 설치되어 있다.
6. 사망
1964년 12월 21일 오전 9시 15분경, 미키 로후는 미타카 시내의 시모렌자쿠(下連雀시모렌자쿠일본어) 우체국에서 나오던 중 택시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두개골 골절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 8일 후인 12월 29일 오후 3시 35분경, 그는 뇌출혈로 인해 7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동요 '아카톤보'에 곡을 붙인 야마다 고사쿠도 정확히 1년 뒤 같은 날에 사망했다.
미키 로후의 장례식은 12월 31일 거행되었고, 다마 화장터(多摩火葬場다마 카소바일본어)에서 화장되었다. 이듬해인 1965년 1월 18일에는 가톨릭 기치조지(吉祥寺기치조지일본어) 교회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묘는 옛 거주지에서 가까운 오모리 절(大盛寺오모리 지일본어) 별원 묘지(미타카시 무레 2-14-16)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계명은 아키운인 세키레이로후 거사(穐雲院赤蛉露風居士아키운인 세키레이로후 거사일본어)이다.
7. 유산 및 기념
미키 로후는 일본 문학, 특히 시와 동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과 생애는 그의 고향과 거주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7.1. "아카톤보"의 문화적 영향
미키 로후의 동요 '아카톤보'는 작곡가 야마다 고사쿠의 선율과 결합하여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1989년 NHK의 '일본의 노래, 고향의 노래' 설문조사에서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선정될 만큼 광범위한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아카톤보'는 그의 만년을 보낸 미타카시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미타카시의 저녁 시보는 '아카톤보'의 멜로디로 송출되며, 미타카시의 커뮤니티 버스인 '미타카 시티버스'(みたかシティバス미타카 시티버스일본어)는 '아카톤보 버스'(赤とんぼバス아카톤보 바스일본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붉은색 차체에 잠자리 마크가 그려져 있다. 또한 미타카역 남쪽 출구의 중앙 거리에는 '아카톤보'의 '두 자매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미키 로후 생가 1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아카톤보 어린이 공원'(赤とんぼ児童遊園아카톤보 지도 유엔일본어, 2009년 개설)에는 노래비와 그의 발자취를 기록한 비석들이 설치되어 있다.
7.2. 출향 및 도시 기념 사업
미키 로후의 고향인 다쓰노시에서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5년부터 매년 '미키 로후상 신 동요 콩쿠르'(三木露風賞 新しい童謡コンクール미키 로후쇼 아타라시 도요 콘쿠루일본어)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5년 시정촌 합병 이후에는 다쓰노시가 이 콩쿠르 운영을 이어받았다. 2001년에는 로후의 공적을 기념하여 다쓰노시와 미타카시 사이에 자매결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그의 만년 거주지인 미타카시에서는 1959년 개교한 미타카시립 다카야마 초등학교(三鷹市立高山小学校미타카 시리쓰 다카야마 쇼가쿠코일본어)의 교가가 1963년 미키 로후에게 작사를 의뢰하여 제정되었으며, 이 학교 내에는 자필 원고와 연보 등이 전시된 '미키 로후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다쓰노시에는 슈엔테이(聚遠亭슈엔테이일본어) 내에 '고향'(ふるさとの후루사토노일본어) 시비가 있으며, 뇨라이지(如来寺뇨라이지일본어)에는 그의 동상과 필적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시라사기야마 공원(白鷺山公園시라사기야마 고엔일본어)에도 '아카톤보' 노래비가 있다.
7.3. 수상 및 영예
미키 로후는 그의 문학적 공헌과 종교적 삶에 대한 인정으로 생전과 사후 여러 영예와 상을 받았다.
- 1927년: 바티칸 시국으로부터 성 세풀크레 기사단의 기사작위(Holy Sepulchre of Jerusalem홀리 세풀크레영어)와 '홀리 나이트'(Holy Knight홀리 나이트영어) 칭호를 수여받았다.
- 1963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紫綬褒章시주호쇼일본어)을 수훈했다.
- 1965년: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사등 서보장(勲四等瑞宝章쿤시토 즈이호쇼일본어)을 수훈했다.
8. 저작
미키 로후의 주요 저작물은 시집, 수필집, 가집, 시론, 그리고 작사 작품 등으로 분류된다.
8.1. 시집
- 『나쓰히메』(夏姫나쓰히메일본어, 1906년)
- 『병든 장미』(病める薔薇야메루 바라일본어, 1908년)
- 『폐원』(廃園하이엔일본어, 1909년)
- 『적막한 새벽』(寂しき曙사비시키 아케보노일본어, 1910년)
- 『하얀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猟人시로키 테노 료진일본어, 1913년)
- 『로후집』(露風集로후슈일본어, 1913년)
- 『환상의 전원』(幻の田園마보로시노 덴엔일본어, 1915년)
- 『양심』(良心료신일본어, 1915년)
- 『갈대 사이의 환영』(蘆間の幻影아시마노 겐에이일본어, 1920년)
- 『생과 사랑』(生と恋세이토 아이일본어, 1920년)
- 『진주섬』(真珠島신주지마일본어, 1921년)
- 『푸른 나무 그늘』(青き樹かげ아오키 키카게일본어, 1922년)
- 『신앙의 새벽』(信仰の曙신코노 아케보노일본어, 1922년)
- 『작은 새의 친구』(小鳥の友고토리노 도모일본어, 1926년)
- 『하느님과 사람』(神と人카미토 히토일본어, 1926년)
8.2. 수필집
- 『수도원 잡필』(修道院雑筆슈도인 잣피쓰일본어, 1925년)
- 『수도원 생활』(修道院生活슈도인 세이카쓰일본어, 1926년)
- 『내가 걸어온 길』(我が歩める道와가 아유메루 미치일본어, 1928년)
- 『일본 가톨릭 교사』(日本カトリツク教史니혼 가토리쿠쿄시일본어, 1929년)
8.3. 가집 및 시론
- 『트라피스트 가집』(トラピスト歌集토라피스토 카슈일본어, 1926년) - 앤솔로지
- 『로후 시화』(露風詩話로후 시와일본어, 1915년)
- 『시가의 길』(詩歌の道시카노 미치일본어, 1925년)
8.4. 작사 및 동요
- 아카톤보
- 가을밤(秋の夜아키노 요일본어)
- 뻐꾸기(かっこう캇코일본어)
- 보름달(十五夜주고야일본어)
- 들장미(野薔薇노바라일본어)
미키 로후는 여러 학교의 교가도 작사했다.
- 효고현립 시카마 공업고등학교(兵庫県立飾磨工業高等学校효고켄리쓰 시카마 고교일본어) 교가
- 히메지 시립 히메지 고등학교(姫路市立姫路高等学校히메지 시리쓰 히메지 고교일본어) 교가
- 다쓰노시립 혼다 초등학교(たつの市立誉田小学校다쓰노 시리쓰 혼다 쇼가쿠코일본어) 교가
- 다쓰노시립 다쓰노 초등학교(たつの市立龍野小学校다쓰노 시리쓰 다쓰노 쇼가쿠코일본어) 교가
- 다쓰노시립 오야케 초등학교(たつの市立小宅小学校다쓰노 시리쓰 오야케 쇼가쿠코일본어) 교가
- 효고현립 다쓰노 실업고등학교(兵庫県立龍野実業高等学校효고켄리쓰 다쓰노 지쓰교 고교일본어) 교가
- 아코 시립 아코 초등학교(赤穂市立赤穂小学校아코 시리쓰 아코 쇼가쿠코일본어) 교가
- 미타카시립 다카야마 초등학교(三鷹市立高山小学校미타카 시리쓰 다카야마 쇼가쿠코일본어) 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