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무함마드 알람은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의 장남으로,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팽기란 아낙 살라마 이브누 팽기란 세리 라마였다. 그는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의 이복형제였기 때문에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 이브누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의 가장 저명한 이복 누이는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팽기란 아낙 살레하의 장녀인 라자 이스테리 노르알람이다. 그의 형제로는 팽기란 무다 하시움과 팽기란 바다루딘이 있다. 그는 또한 Paduka Raja파두카 라자말레이어 또는 Sultan Panji Alam술탄 판지 알람말레이어으로도 알려져 있다. 말레이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60년대에 사바주 산다칸의 캄퐁 세갈리우드 마을에서 팽기란 베사르 이브니 팽기란 아낙 삽투 이브니 술탄 하시움 잘리룰 알람 아카마딘에 의해 확인된 '술탄 탄줄 알람'이라는 칭호로도 알려져 있었다.
1.1. 가족 관계
무함마드 알람의 아버지는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이며, 어머니는 팽기란 아낙 살라마 이브누 팽기란 세리 라마이다. 그의 이복 누이로는 라자 이스테리 노르알람이 있으며, 형제로는 팽기란 무다 하시움과 팽기란 바다루딘이 있다. 그의 배우자는 팽기란 라자 이스테리 누를라나 압둘라이다. 자녀로는 팽기란 아낙 누르 알람, 팽기란 아낙 살라마, 팽기란 무다 무함마드 오마르 자야가 있다. 그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2. 초기 활동 및 영향
무함마드 알람은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브루나이의 상업 문제에 대해 윌리엄 파커와 직접 소통하는 등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알람은 파커의 서신에 답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며 통치 술탄에 대한 복종을 보여주었다. 애나벨의 분석에 따르면, 아버지와의 협력적인 관계는 왕실 내에서 그의 영향력 있으면서도 복종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무함마드 칸줄 알람은 그를 "우리 아들"(anakanda kita아나칸다 키타말레이어) 대신 "우리 친구"(sahabat kita사하밧 키타말레이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의 행정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1809년 시 메라의 도전으로 알려진 사건 동안 영국 장교가 브루나이에 왔다. 그는 술탄을 통하지 않고 무함마드 알람에게 직접 가는 등 왕실 관습을 어겼다. 그가 Lapau라파우말레이어 청중 앞에서 물리적으로 개입하여 중위를 몇 피트 날려버리자 긴장이 고조되었다. 현지 기록에 따르면 이 행동은 브루나이 영토를 차지하려는 그의 야망을 상징하는 "상업"이라는 사냥개에 대한 시 메라의 도전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의 단호한 답변은 식민주의에 대한 브루나이의 이익을 보호하고 아버지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드라마우트의 샤리프 하산 알 합시가 브루나이를 반나절 만에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무함마드 알람에게 도전했는데, 이는 브루나이의 주권을 유지하는 데 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는 형제들과 현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우중 사포 무아라 베사르에서 알 합시에게 도전했다. 알 합시는 그의 끈기를 보고 포기했으며, 이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술탄과 무함마드 알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았다. 때때로 그는 아버지인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내내 보르네오의 해안 도시와 항구에서는 해적 행위가 증가하여 무역로와 지역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 정부는 로버트 C. 가넘 대위를 파견하여 폰티아낙, 반자르마신, 브루나이를 제외한 보르네오 항구의 봉쇄를 시행했다. 이 조치의 목표는 해적 행위를 줄이고 상업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가넘과 다른 외국 사절들은 무함마드 알람이 거칠고 짜증을 잘 낸다고 생각했으며, 그는 그들의 임무 수행에 저항했다. 1813년 가넘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세 곳에 승인된 항구를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알람이 청중 앞에서 보이는 관찰적인 태도에 가넘은 불안해하며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했다.
무함마드 알람은 아버지의 행정에서 많은 권위와 통제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의 사망 이전에 부술탄의 지위를 맡았을 수도 있다. 1826년 아버지의 병환과 1823년 술탄을 대신하여 네덜란드 대사를 접견한 것 등은 그가 이 시기에 브루나이를 통치하는 데 더 큰 책임과 권력을 맡았음을 시사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허락했지만, 왕관과 크리스 시 나가와 같은 상징적인 물건들은 보관하여 그들 사이의 권력 분할을 유지했다.
무함마드 알람의 성격은 H. R. 휴즈-할렛이 언급한 "스피어스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이 사건은 스피어스 선장이 무함마드 알람을 왕족이 아닌 동료 상인처럼 대하는 무례함 때문에 발생했다. 스피어스 선장의 이기적인 행동, 즉 예정된 거래 시간인 오후 2시 이전에 브루나이를 떠난 것 때문에 왕자는 아버지에게 영국이 브루나이를 가지고 노는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술탄은 외국 상업에 '행동하라'는 강력한 성명으로 답했지만, 파커는 스피어스 선장에게 벵골의 영국 정부에 징계 조치를 위해 보고하라고 지시하여 분쟁을 해결했다.
2. 통치 기간 및 주요 활동
무함마드 알람의 술탄 통치 기간은 역사적으로 1826년부터 1828년까지로 알려져 있지만, 말레이어 자료에서는 1822년 5월 18일부터 1824년까지 통치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의 통치는 왕위 계승 분쟁과 내전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브루나이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1. 왕위 계승 분쟁
무함마드 알람은 아버지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통치에 확신을 가졌지만, 전통적으로 완전한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과 크리스 시 나가와 같은 상징물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브루나이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을 샀다. 15년 전 그의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와 달리, 팽기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은 이미 성숙하여 왕위에 오르기에 적합하다고 널리 인정받는 유능한 젊은이가 되었다. 무함마드 알람의 지지 기반은 브루나이 내 그의 상업적 동료들에게 한정되었는데, 그의 권위주의적 성향은 그와 신하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켜 그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을 조성했다. 그의 아버지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강력한 지도자로 묘사되었고, 때로는 외국인의 기만을 막아 브루나이를 보호했던 엄격한 태도로 존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또한 외국 사절들을 소외시키고 내부 불만을 악화시켜 결국 그를 제국에서 가장 혐오받고 두려워하는 인물로 고립시켰다.
이 분쟁은 무함마드 알람이 정당한 후계자인 팽기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대신 왕위를 차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1804년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이 아들인 술탄 무함마드 자말룰 알람에게 왕위를 양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은 곧 사망하여 어린 아들 팽기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을 추정 상속자로 남겼다. 손자들을 위해 왕위를 재개한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은 1806년 팽기란 디가동 아야의 섭정을 요청하며 팽기란 무다 오마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조언자를 선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타주딘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팽기란 디가동 아야는 1807년 술탄 무함마드 타주딘 사망 시 자신을 술탄으로 선포하며 조약 조건을 위반했다. 그는 1826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아들 무함마드 알람과 함께 통치했다. 술탄 무함마드 칸줄 알람이 사망했을 때, 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왕실 휘장을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알람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는 무함마드 알람과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의 지지자들 사이에 공개적인 분쟁을 야기했다.
2.2. 내전
아버지의 사망 이후, 1826년에서 1828년경 브루나이에서 내전이 발발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팽기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과 그의 동맹자들은 1826년 2월 15일 케잉아란 섬으로 이동하여, 잠재적으로 자신들을 술탄으로 선언하고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이 시기에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러한 이동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무함마드 알람의 폭정에 대한 두려움, 특히 그가 무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피의 의식을 요구했다는 보고는 이러한 이주를 야기했을 수 있다. 이는 무함마드 알람이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의 추종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잔혹성과 인질극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무자비한 라자 아피로서의 그의 이미지를 굳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브루나이 사람들은, 특히 캄퐁 부롱 핑아이(현재의 캄퐁 부롱 핑아이 아예르)와 인접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를 지지했다. 페힌 다토 페르다나 멘테리 압둘 학이 이끄는 무함마드 알람에 대한 봉기는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이 왕위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캄퐁 부롱 핑아이는 이슬람 교리와 정의의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 학자들을 포함한 고학력 인구로 유명했다. 이는 이들이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을 지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과거에는 그들이 적극적인 무역을 통해 브루나이 경제에 이바지하며 팽기란 무다 무함마드 유소프와 무함마드 알람을 지지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람이 집권하자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케잉아란 섬에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의 추종자들과 합류하여 그의 통치에 대한 봉쇄를 세웠다. 반면 그의 지지는 그의 측근과 가족에게 한정되었는데, 이는 그의 가혹하고 독재적인 통치가 일반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음을 강조한다.
2.3. 영토 방어 및 통치
무함마드 알람의 통치 기간 동안 브루나이는 사라왁의 탄종 다투에서 사바의 키마니스까지 영토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비투루 정착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말레이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탄종 키두룽 지역이 술루크 해적들에게 공격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비투루로 가서 영토를 방어했다. 해적들을 물리친 후, 그는 쿠알라 세간에 요새를 세우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팽기란 아낙 누르 알람에 따르면, 무함마드 알람은 이반 전사들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였는데, 이는 그가 40개의 브루나이 왕국 깃발을 들고 해적들을 물리쳤던 그의 경건함과 용맹함 때문이었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타타우까지 항해하여 그곳의 통치자인 라자 카야 자반과 그의 아내 마이잉 라비아를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인 라나를 만났고, 경건한 브루나이 통치자로서 라나를 팽기란 이스테리 누르 라나 압둘라로 맞아들였다. 그들의 결혼은 그의 생애 동안 종교 장관이었던 팽기란 사히불 카팁 하지 다미트 이브니 카팁 베키르에 의해 진행되었다.
2.4. 통치 종료 및 퇴위
무함마드 알람의 죽음은 1828년 브루나이 내전을 종식시켰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는 서로 다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함마드 알람은 체르민 섬에 있었을 때 암살자들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라자 이스테리 노르알람은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의 어머니이자 무함마드 알람의 이복 누이였다. 이 암살자들은 임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는 협력하여 자신의 무적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주었고, 그들은 그를 섬에 묻고 교살했다. 그러나 그의 잘 알려진 분노와 목격자 증언의 부재 때문에 역사가 페힌 자밀은 이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함마드 알람 통치 종료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두 번째 이야기에 의해 제공된다. 이 버전에서는 그가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하는 대신 패배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브루나이를 떠났다. 그는 푸타탄에 있는 사바 주로 이동하여 더 단순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브루나이 역사 센터의 2009년 조사에서 푸타탄에서 무함마드 알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가 발견되어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체르민 섬이나 왕실 묘지에 그의 매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센터는 이 묘비가 브루나이에서 발견된 왕실 묘비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말레이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사라왁의 비투루 지역, 특히 쿠알라 세간의 부킷 세루웨이에 거주했으며, 그곳에 묻혔다는 현지 이야기도 전해진다.
무함마드 알람의 통치를 둘러싼 사건들의 연대기는 브루나이의 정치적 불안과 계승 분쟁을 보여주며, 이는 내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이 시기의 내부 불안, 파벌 싸움, 정통성 도전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는 현지 연대기와 페힌 자밀과 같은 개인들의 학술적 평가가 있다. 언급된 지표들은 지도력에 대한 주목할 만한 내부 분열과 폭력적인 갈등을 시사하며, 이는 일반적으로 내전의 특징과 일치한다. 그러나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역사 기록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무함마드 알람의 형제인 팽기란 무다 하시움은 1820년대의 실패한 봉기에 참여했으며, 그의 몰락이 브루나이의 안정적이지만 엄격한 통치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고 말했다. 그의 사망 후 형제들과 다른 친척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사라왁으로 이주했다.
말레이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팽기란 무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이 비투루를 방문하여 궁전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했을 때, 비투루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왕위를 섭정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는 가족 및 추종자들과 함께 비투루 지역에 정착했다.
3. 평판 및 평가
무함마드 알람은 강압적이고 잔혹한 통치자로 평가되며, 그의 별명과 유럽 자료, 현지 전승에서 그의 성격과 통치 방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제시된다.
3.1. 별명 및 상징성
무함마드 알람은 라자 아피(Raja Api말레이어, 불의 왕) 또는 술탄 마락 베라피(Sultan Marak Berapi말레이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말레이어 자료에서는 그가 태어날 때 불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전설 때문에 Ria Apui리아 아푸이말레이어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별명은 그의 강인하고 엄격한 성격뿐만 아니라, 분노할 때 불을 뿜고 무적 상태를 얻기 위해 피를 찾아 날아다니는 등의 초자연적인 힘을 가졌다는 신화적인 전설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는 현지 주민들이 그를 두렵고 걱정스러운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페힌 자밀과 유라 할림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사용하여 그 시대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3.2. 비판 및 논란
무함마드 알람은 실제 능력보다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지도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라자 아피"라는 용어는 그의 잔혹한 군주정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음을 암시하며, 이는 인기 없는 왕들을 조용히 비판하는 말레이 관습을 반영한다. 또한, 라자 베르시옹과 같은 신화적 인물과의 비교는 비행 능력과 인혈에 대한 식욕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특성으로 그를 묘사하는 데 있어 민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는 그의 권력 남용과 엄격한 통치에 대한 은유적인 비난으로 작용한다.
무함마드 알람의 특징으로는 모든 상호작용에서 진지하고 가혹하며, 종종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무례함을 보이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불관용에 기여했을 수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한 불관용을 가졌다고 묘사될 수 있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 그의 행동은 그가 독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정확하다.
3.3. 유럽 자료 및 전승
스탬퍼드 래플스와 파커의 저작물과 같은 유럽 자료는 소문과 간접적인 지식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지 전승을 뒷받침하며 추가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유럽의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문헌은 현지 지역의 주관적인 자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애나벨 테 갤럽의 아버지 통치 기간 동안의 영국 기록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는 무함마드 알람의 가혹한 성격을 드러내는데, 이는 외국 사절에 대한 의심과 브루나이 및 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자칭 역할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그가 많은 외국 사절들을 차갑고 가혹하게 대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4. 후손 및 유산
무함마드 알람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는 말레이어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4.1. 후손의 확인
무함마드 알람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존재하며, 팽기란 베사르 이브니 팽기란 아낙 삽투 이브니 술탄 하시움 잘리룰 알람 아카마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60년대 당시 브루나이 통치자였던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의 대리인으로 직접 사바주 산다칸의 캄퐁 세갈리우드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무함마드 알람의 아들인 팽기란 세루딘(사이푸딘)의 후손들이 캄퐁 세갈리우드에서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의 대리인인 팽기란 베사르 이브니 팽기란 아낙 삽투 이브니 술탄 하시움 잘리룰 알람 아카마딘의 탐색 결과이다. 그는 양 물리아 투안 하지 오마르 @ 카빅 빈 팽기란 술라이만이라는 주민을 발견했는데, 그 주민의 이야기와 마을 주민들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는 팽기란 고마랑 키소르 에마스의 혈통이 포함되어 있었다. 팽기란 베사르 이브니 팽기란 아낙 삽투 이브니 술탄 하시움 잘리룰 알람 아카마딘은 양 물리아 투안 하지 오마르 @ 카빅 빈 팽기란 술라이만을 브루나이 다루살람으로 데려와 1961년경 다룰 하나 궁전에서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앞에서 팽기란 고마랑 키소르 에마스의 혈통을 구두로 제시했다. 이 혈통 제시 결과, 양 물리아 투안 하지 팽기란 하지 오마르 @ 카빅 빈 팽기란 술라이만은 칼집에 다투 팡리마 가랑(Datu Panglima Garang)이라고 새겨진 단검과 함께 검은색 궁정 의상 한 벌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후손 혈통이다.
- 팽기란 세루딘(사이푸딘)
- 팽기란 데라만(두라만) 리아우
- 팽기란 고마랑 키소르 마스
- 팽기란 타바론
- 팽기란 무다
- 팽기란 텔록
- 팽기란 타립(타리드)
- 팽기란 술라이만
- 팽기란 하지 오마르 @ 카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