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Education
몬터규 헨리 톨러는 1871년 1월 1일 잉글랜드 데번주 반스터플에서 윌리엄 헨리 톨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티버턴에 위치한 블런델 학교에 다녔으며, 학창 시절부터 크리켓 XI 팀과 럭비 XV 팀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였다.
2. Professional and Public Service Career
학업을 마친 후 몬터규 헨리 톨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었다. 1901년 해리엇 존스와 결혼한 뒤, 그는 아내와 함께 반스터플에 있는 로열 & 포테스큐 호텔의 공동 관리직을 맡았다.
그는 지역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 후보로서 카운티 의회와 시의회에 모두 선출되었다. 이는 그가 전문 직업인 외에 지역 사회의 공공 서비스에도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아내와 헤어진 후 그는 호텔 관리직을 떠나 브라이튼으로 이주하여 다시 변호사로 활동을 이어갔다.
3. Sporting Achievements
몬터규 헨리 톨러는 '웨스턴 이브닝 헤럴드'지(紙)에서 "럭비와 크리켓에 능숙했다"고 묘사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또한 테니스, 골프, 당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존경할 만한 수준의 실력을 갖춘 만능 선수였다. 강인하고 튼튼한 체격을 지녔던 그는 특히 크리켓 분야에서 오른손잡이 타자이자 오른손 패스트 볼러로 활약했다. 서머셋 크리켓 역사가 스티븐 힐은 톨러를 "데번 및 서머셋 원더러스" 팀의 "선두 주자"이자 저명한 클럽 크리켓 선수로 평가했다.
3.1. Rugby Career
톨러는 반스터플 RFC에서 쓰리쿼터백으로 활약하며 뛰어난 럭비 실력을 선보였다. 반스터플 RFC는 당시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의 주요 클럽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데번 카운티 대표팀에 1889년부터 발탁되어 활약했다. 1894-95 시즌에는 반스터플 소속으로 한 경기에서 3개의 드롭골을 성공시키는 드문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반스터플의 주장직을 여러 차례 제안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3.2. Cricket Career
톨러는 1889년부터 1895년까지 데번 카운티 크리켓 클럽에서 2류 크리켓 선수로 뛰면서, 볼링과 타구 실적으로 여러 상을 수상했다. 1895년 시즌 말에는 저명한 크리켓 선수인 W. G. 그레이스의 팀에 초대되어 경기에서 41점을 득점하기도 했다.
1897년에는 서머셋 카운티 크리켓 클럽에서 성공적인 테스트 경기를 치렀는데, "새미 우즈의 XI" 팀에서 33점을 득점했다. 이후 그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해당 시즌 서머셋 소속으로 6번의 일류 크리켓 경기에 출전했다. 스티븐 힐은 서머셋에서 톨러의 활용 방식이 의아하다고 평했는데, 클럽 크리켓에서는 톨러가 패스트 볼링으로 가장 높이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머셋에서는 단 한 번만 볼링을 했고, 그 경기에서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15점을 내주고 1개의 위켓을 잡는 데 그쳤다. 1897년 시즌이 끝날 무렵, '크리켓: 주간 경기 기록' 잡지는 그가 서머셋에서 "완전한 실패를 입증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3.3. 1900 Summer Olympics
톨러는 1900년 하계 올림픽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 크리켓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이 올림픽은 크리켓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등장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파리 인근 뱅센에서 1900년 8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치러진 이 경기는 4이닝 동안 총 366점만 득점되어 낮은 점수로 종료되었다. 톨러는 영국팀의 첫 번째 이닝에서 2점을 득점했으며, 두 번째 이닝에서는 타구를 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팀의 두 번째 이닝에서 단 9점을 내주고 7개의 위켓을 모두 볼링으로 잡아내며, 경기 종료를 단 5분 남겨두고 영국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몬터규 톨러는 알프레드 바우어먼과 함께 이 유일한 올림픽 크리켓 경기에서 158점 차이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4. Personal Life and Later Years
몬터규 헨리 톨러는 1901년에 해리엇 존스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는 아내와 함께 반스터플에 있는 로열 & 포테스큐 호텔의 공동 관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그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내는 호텔 관리를 계속했으며 톨러는 브라이튼으로 이주하여 다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짧은 투병 끝에 1948년 8월 5일 햄프셔주 티치필드의 미온 해변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Legacy and Reception
몬터규 헨리 톨러는 크리켓과 럭비에 모두 능숙한 "재능 있는" 선수로 묘사되었으며, 테니스, 골프, 당구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보인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으로 기억된다. 그의 부고 기사는 노스데번 저널에 실려 그가 당시 남서부 지역의 주요 클럽 중 하나였던 반스터플 RFC에서 보여준 럭비 기량을 높이 평가했다. 서머셋 크리켓 역사가 스티븐 힐은 톨러를 저명한 클럽 크리켓 선수이자 데번 및 서머셋 원더러스의 "선두 주자"로 칭하며 그의 클럽 크리켓에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897년 서머셋에서의 일류 크리켓 시즌에 대해서는 '크리켓' 잡지가 그가 "완전한 실패를 입증했다"고 혹평하는 등, 프로 무대에서의 성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0년 하계 올림픽 크리켓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일원으로서 그의 업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