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스 마레샬Maurice Maréchal모리스 마레샬프랑스어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첼로 예술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는 1911년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유수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를 거쳐 솔리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장에서 동료 병사들이 탄약 상자로 만들어 준 '전시의 첼로'로 위문 공연을 펼쳐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이 악기는 그의 애국심과 예술 혼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 의지를 가지고 점령된 프랑스에서의 연주를 거부하며 음악가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전쟁 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고,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도 활발히 활동하며 프랑스 첼로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삶은 예술적 기여와 함께 불굴의 정신, 그리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빛난 도덕적 용기를 보여줍니다.
2. 생애
모리스 마레샬의 삶은 깊은 음악적 헌신과 함께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을 보여줍니다.
2.1. 유년기 및 교육
모리스 마레샬은 1892년 10월 3일 프랑스 디종에서 우체국 직원인 아버지 쥘 자크 마레샬과 음악을 사랑하는 학교 교장인 어머니 마르타 쥐스틴 모리에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6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곧 첼로로 전향하여 아뉴이에 교수에게 사사했습니다. 10세에는 이미 디종 시립 극장의 공개 연주회에 출연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1907년 5월, 카를 다비도프의 협주곡 2번으로 1등 상을 받으며 고향의 음악원을 졸업한 후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처음에는 루이 피야르에게 사사했으며, 1905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뒤에는 첼로를 쥘 로브Jules-Léopold Loeb쥘 레오폴 로브프랑스어에게, 실내악을 르페브르에게, 이론과 오케스트라를 폴 뒤카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1911년 19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서 첼로 부문 1등 상을 받으며 졸업했습니다. 또한,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레샬은 징집되어 4년간의 군 복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1914년 8월부터 1919년 2월까지의 일상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이 일기에는 두 명의 목수 동료가 탄약 상자로 조잡한 목재 첼로를 만들어 주어, 그가 이 악기로 종교 의식과 장교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악기는 현재 파리 음악원 악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페르디낭 포슈, 앙리 조제프 외젠 구로, 샤를 망쟁, 필리프 페탱 등 연합군 장군들의 사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군 복무 중 그는 귀스타브 클뢰즈, 뤼시앵 뒤로수아, 앙드레 카플레, 앙리 르무안 등 다른 음악가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소규모 앙상블을 결성하여 장교단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특히 클로드 드뷔시를 존경하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앙드레 카플레와 깊은 우정을 쌓았습니다. 마레샬은 1916년 크루아 드 게르Croix de Guerre크루아 드 게르프랑스어 훈장을 수훈했으며, 이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장교로도 추서되었습니다.
2.3. 전후 활동과 음악적 명성
전쟁이 끝난 후, 마레샬은 1919년 콩세르 라무뢰 오케스트라에 1년간 합류했으며, 이후 뉴욕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곧 솔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친구인 피아니스트 에밀 푸아요는 스페인(1925년, 1926년), 프랑스(1928년), 싱가포르(1933년), 네덜란드령 동인도(1933년) 등 순회공연에서 그와 함께했습니다.
전후 콩세르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활약하며 비평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1922년에는 그가 존경하는 카잘스가 이끄는 파블로 카잘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콘서트마스터 엔리크 카잘스(파블로 카잘스의 형제)와 함께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같은 해 4월 6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엘렌 주르당-모랑주와 함께 모리스 라벨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세계 초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마레샬에게 헌정되었습니다.
또한, 친구 앙드레 카플레의 '에피파니'를 초연하면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주목을 받았고, 1926년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미국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마레샬의 활동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확대되어 프랑스 최고의 첼리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함께 트리오로도 활약했습니다. 1935년 10월 30일 일본에 내한하여 나고야시와 도쿄도에서 콘서트를 열었으며, 같은 해 11월 3일에는 라디오 방송으로 그의 연주가 송출되었습니다.
2.4. 제2차 세계 대전과 저항 활동
1939년 장기간의 미국 투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그의 마지막 해외 연주 여행이 되었습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마레샬은 파리를 떠나 고향 디종으로, 다시 마르세유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미국으로 피난시켰지만, 자신은 프랑스에 남아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그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공감하며 나치 독일에서의 연주 제안을 일절 거부했으며,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도시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않으면서 애국적인 면모와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보여주었습니다. 1942년에는 사망한 제라르 에킹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어 사망 전년도인 1963년까지 재직했습니다.

2.5. 말년과 사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레샬은 다시 유럽 전역에서 활동을 펼쳤으나, 오른쪽 팔의 점진적인 근육 질환으로 인해 연주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콩세르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마지막으로 협연했으며, 이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57년에는 문화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1950년 이후로는 연주를 중단하고 남은 생애를 교육과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연주는 1963년, 그의 첼로를 제작했던 마르크 라베르트의 추모 미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리스 마레샬은 1964년 4월 19일 파리 자택에서 신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4월 22일 디종의 디종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는 디종의 페조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3. 음악적 업적
모리스 마레샬은 탁월한 연주 실력과 더불어 후학 양성, 동시대 음악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1. 교수 활동
마레샬은 1942년부터 1963년까지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첼리스트를 길러냈습니다. 그의 제자로는 크리스틴 발레프스카, 알랭 람베르, 장 무브스, 알랭 뫼니에, 구라타 다카시 등이 있습니다. 제자 발레프스카는 마레샬에게 "자신의 느낌대로 연주하라. 피아노로 연주하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라도 포르테로 연주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자신의 직관에 따라 연주하라. 연주하는 음악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연주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자유롭고 직관적인 음악 철학을 보여줍니다.
또한, 1962년에 개최된 제2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는 첼로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가스파르 카사도, 피에르 푸르니에, 스뱌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 다니일 샤프란 등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들과 함께 심사를 맡았습니다. 그의 수업에서는 첼리스트 폴 토르틀리에가 작곡한 작품들을 다루기도 했으며, 토르틀리에 자신을 초청하여 직접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토르틀리에는 이 수업에서 훗날 배우자가 될 첼리스트 모드 마르탱을 만났습니다.
3.2. 주요 레퍼토리 및 초연
마레샬은 고전 작품은 물론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하고 초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모리스 라벨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세계 초연했으며, 이 작품은 그에게 헌정되었습니다. 또한 앙드레 카플레의 '에피파니',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협주곡, 다리우스 미요의 협주곡, 에두아르 랄로의 협주곡 등을 연주했습니다. 특히 오네게르의 협주곡은 1930년 2월 17일 보스턴에서 마레샬이 세계 초연했으며, 카덴차 부분은 그 자신이 작곡했습니다. 미요의 협주곡은 1934년 파리에서 초연되었고, 이 작품 역시 마레샬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그는 어니스트 블로흐의 랩소디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연주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현지 민속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거나 아시아 음악가들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내한 시에는 '일본의 멜로디'라는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3.3. '전시의 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마레샬은 전장에서 첼로를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그의 동료 병사들이 탄약 상자와 나무 조각들을 이용해 즉석에서 특별한 첼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악기는 '전시의 첼로'(Cello of the War)라고 불리며, 병사들이 직접 만든 조잡한 형태였지만, 마레샬은 이 첼로로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 첼로에는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등 당시 프랑스군을 이끌던 주요 장군들의 사인이 새겨져 있어, 그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 악기는 마레샬 일가가 소중히 보관하다가 1969년 파리 음악원 악기 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첼로'는 단순한 악기를 넘어,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예술이 지닌 치유의 힘과 인간 정신의 불굴함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 개인 생활
모리스 마레샬은 배우 로이스 퍼킨스(Lois Perkins)와 결혼했습니다. 로이스 퍼킨스는 코네티컷 주 노리치 출신으로, 두 사람은 1920년 프랑스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로이스는 미국 해외원정군의 자원봉사 매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딸 데니스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5. 평가 및 유산
폴 토르틀리에에게 첼로를 가르쳤던 루이 피야르는 학생들에게 더욱 따뜻한 연주를 지도할 때 종종 마레샬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마레샬이 동료 및 후배 음악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모리스 라벨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와 아르튀르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의 첼로 협주곡 등 동시대 중요 작품들의 세계 초연을 맡으며 20세기 첼로 레퍼토리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전시의 첼로'를 만들어 위문 공연을 펼쳤던 일화는 그의 불굴의 정신과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산으로 기억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 의지를 가지고 연주를 거부했던 그의 행동은 음악가로서의 양심과 애국심을 동시에 보여준 사례로 높이 평가됩니다.
6. 관련 저작물
모리스 마레샬의 삶과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요 문헌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로이스 퍼킨스-마레샬은 1979년 프랑스 앙피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L'Amérique avant les gratte-ciel마천루 이전의 아메리카프랑스어에서 남편과의 삶과 그의 예술 활동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 마레샬의 일기 9권과 뤼시앵 뒤로수아의 편지들은 뒤로수아의 아들 뤽 뒤로수아가 편집하여 2005년 탈랑디에르 출판사에서 Two Musicians in the Great War대전 중 두 음악가영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