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몰데카이 링컨은 1771년에 버지니아주 오거스타 카운티(현재의 로킹엄 카운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생애는 켄터키주와 일리노이주를 오가는 이주와 정착의 과정이었습니다.
1.1. 유년기와 가족 배경
몰데카이 링컨은 1771년 버지니아주 오거스타 카운티(현재의 로킹엄 카운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위와 바스셰바 헤링(1742년경-183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 대위는 할아버지 존 링컨으로부터 버지니아의 비옥한 토지 210 acre를 물려받았으나, 1782년에 이 땅을 팔고 서부 버지니아(현재의 켄터키주)로 이주했습니다. 링컨 가문의 친척인 대니얼 부운의 조언을 받아 켄터키주에 5544 acre에 달하는 비옥한 토지를 축적했습니다. 몰데카이의 형제자매로는 조시아, 토머스 링컨, 앤(낸시), 그리고 메리 링컨 크룸이 있었습니다. 가족은 루이빌에서 동쪽으로 약 32 km 떨어진 제퍼슨 카운티에 정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오하이오 강 건너편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여전히 분쟁 중인 영토였습니다. 정착민들은 방어를 위해 변방의 요새인 '스테이션' 근처에 살았고, 경보가 울리면 그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위는 플로이드 포크의 휴즈 스테이션 근처에 정착하여 땅을 개간하고 옥수수를 심고 통나무집을 지었습니다.
1.2. 아버지의 죽음과 그 영향
1786년 5월 어느 날, 몰데카이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 대위는 세 아들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중 인근 숲에서 날아온 총에 맞아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당시 장남이었던 몰데카이는 장전된 총을 가지러 오두막으로 달려갔고, 둘째 아들 조시아는 도움을 요청하러 휴즈 스테이션으로 달려갔습니다. 막내아들 토머스는 아버지 옆에 충격을 받은 채 서 있었습니다. 오두막에서 몰데카이는 한 아메리카 원주민이 숲에서 나와 아버지의 시신 옆에 멈춰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원주민이 토머스에게 손을 뻗자, 몰데카이는 조준하여 원주민의 가슴을 쏘아 죽임으로써 토머스를 구했습니다. 아버지의 살해를 목격한 후, 몰데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평생 동안 유지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직후, 그의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켄터키주 워싱턴 카운티(스프링필드 근처)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장자상속제에 따라 몰데카이는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습니다. 이와 달리 조시아와 토머스 같은 어린 아들들은 유산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바스셰바가 다섯 아이를 키웠던 집의 복제품은 1934년 링컨 홈스테드 주립 공원에 건립되었습니다.
1.3. 켄터키에서의 결혼과 성인기
1792년, 몰데카이는 루크 머드의 딸 메리 머드와 결혼했습니다. 1797년 1월, 그는 아버지가 1780년에 구입하여 상속받은 제퍼슨 카운티의 400 acre 토지를 400 GBP에 매각했습니다. 넉 달 후, 그는 켄터키주 최초의 장로교 목사인 테라 템플린으로부터 스프링필드의 300 acre 토지를 100 GBP에 구입했습니다. 몰데카이는 26세 때 '링컨 홈스테드'라고 불리는 2층짜리 통나무집을 지었습니다. 1810년에서 1815년 사이에 이 통나무집은 두 번째 소유주인 윌프레드 헤이든에 의해 확장되었고, 연방 양식의 목조 외관으로 개조되었습니다. 현재 이 확장 및 개조된 몰데카이 링컨 홈스테드는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는 유일한 링컨 가문의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몰데카이 부부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모두 켄터키주 워싱턴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아들의 이름은 각각 에이브러햄, 제임스, 몰데카이였습니다.
몰데카이는 그의 친구 리처드 베리 근처에 살았는데, 이곳은 그의 동생 토머스 링컨과 낸시 행크스가 1806년에 결혼했던 집입니다. 1802년에 몰데카이는 자신이 소유한 300 acre 중 200 acre와 집을 매각했으며, 1806년에는 나머지 100 acre도 매각했습니다. 그는 경주마를 사육하기도 했습니다. 1810년까지 링컨은 400 acre가 넘는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1811년에는 몰데카이와 그의 가족이 워싱턴 카운티에서 그레이슨 카운티로 이주했습니다.
1.4. 말년과 일리노이주로의 이주
1827년, 몰데카이는 치안판사로서 앤드루 존슨(훗날 그의 조카 에이브러햄 링컨의 두 번째 부통령이자 후계자가 됨)과 엘리자 맥카드르의 결혼식을 주재했습니다. 1828년 봄, 그는 그레이슨 카운티의 집을 떠나 다른 가톨릭 신자 가족들과 함께 일리노이주 핸콕 카운티 파운틴 파크(파운틴 그린)로 이주했습니다. 그의 여섯 자녀 중 네 명이 함께 이사했습니다. 1830년 12월, 몰데카이는 파운틴 그린에서 사흘간 이어진 눈보라 속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말은 폭풍 속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시신은 눈이 6.1 m (20 ft)까지 쌓여 얼어붙어 4월에 눈이 녹을 때까지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몰데카이의 사망 후, 그의 아내 메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아들 몰데카이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일리노이주 파운틴 그린 근처의 올드 가톨릭 또는 링컨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2. 개인적 특징
몰데카이 링컨은 그의 지적 능력, 관대함, 그리고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명석하고 상식이 풍부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러웠다고 전해집니다.
3.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관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몰데카이의 기지와 능력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며, 그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적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몰드 삼촌이 우리 가족의 모든 재능을 다 가지고 가버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마찬가지로, 그의 삼촌인 몰데카이의 가족 역시 "링컨 호러즈(Lincoln horrors)"라고 불리는 우울증을 겪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링컨 가문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우울증 경향 외에도, 몰데카이와 그의 아들들은 에이브러햄 링컨과 유머 감각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유사점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유산
몰데카이 링컨의 켄터키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집은 링컨 가문의 구성원이 지은 집 중 유일하게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입니다. 이 집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는 몰데카이 링컨이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링컨 가문의 초기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