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멜 스토틀마이어 시니어는 미주리주 헤이즐턴에서 태어나 워싱턴주 맵턴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야구 선수로서의 꿈을 향해 나아갔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토틀마이어는 워싱턴주 맵턴에서 자랐으며, 그곳의 맵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야키마 밸리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으며 야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야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어주는 중요한 시기였다.
1.2. 초기 야구 경력
스토틀마이어는 아메리칸 리전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야키마 밸리 커뮤니티 칼리지의 야구팀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61년 6월 10일,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에 의해 발굴되어 계약금 없이 양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루키 리그인 애팔래치아 리그의 할런 스모키스에 배정되어 8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클래스 D 뉴욕-펜 리그의 오번 양키스로 승격되어 7경기에 더 출전했다.
1962년에는 클래스 B 캐롤라이나 리그의 그린즈버러 양키스에서 17승 9패, 평균자책점 2.50의 기록을 세웠다. 1963년에는 클래스 AAA 인터내셔널 리그의 리치먼드 버지니언스로 승격되었으며,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했다. 그러나 양키스의 단장이었던 랄프 하우크의 지시에 따라 선발 투수로만 기용되기 시작했다. 1964년 시즌에는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좋은 1.4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 선수 경력 (1964-1974)
멜 스토틀마이어는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1시즌 동안 뉴욕 양키스에서 메이저 리그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1. 메이저 리그 데뷔 및 성장
1964년 시즌 중반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된 스토틀마이어는 그해 8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는 9승 3패를 기록하며 양키스가 5년 연속 페넌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활약은 당시 더 스포팅 뉴스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은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스토틀마이어는 밥 깁슨을 상대로 3차례 선발 등판했다. 그는 2차전에서 깁슨을 꺾고 완투승을 거두며 시리즈를 동점으로 만들었고, 5차전에서는 승패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결정적인 7차전에서 패배하며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2.2. 주요 성과 및 기록
스토틀마이어는 1965년 MLB 올스타전의 아메리칸 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지만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1965년 시즌에는 20승을 달성했으며, 18번의 완투, 291 투구 이닝, 1,188명의 타자 상대 등 투구 부문에서 아메리칸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1966년 MLB 올스타전에도 출전했으나, 그해에는 리그 최다인 20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과 1969년 시즌에는 다시 20승을 달성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1969년 MLB 올스타전에서는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그는 1973년까지 9년 연속으로 12승 이상과 200 투구 이닝 이상의 투구 이닝을 기록하며 양키스가 침체기를 겪던 시기에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토틀마이어는 11시즌 동안 40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좌완 투수 샌디 쿠팩스와 같은 기록으로 역대 44위에 해당한다. 특히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시즌 동안 18번의 완봉승을 거두었다.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타격 능력 또한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5년 7월 20일에는 드물게 인사이드 더 파크 그랜드 슬램을 기록했으며, 1964년 9월 26일에는 5타수 5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2.3. 통산 기록 및 은퇴
1974년 어깨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1975년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에서 방출되었다. 스토틀마이어는 통산 164승과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은퇴했다. 그의 메이저 리그 통산 투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홀드 | 승 | 패 | 세이브 | 블론세이브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몸에 맞는 볼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64 | NYY | 13 | 12 | 5 | 2 | 9 | 3 | 0 | 0 | .750 | 390 | 96.0 | 77 | 3 | 35 | 3 | 2 | 49 | 1 | 0 | 26 | 22 | 2.06 | 1.17 | |
1965 | 37 | 37 | 18 | 4 | 20 | 9 | 0 | 0 | .690 | 1188 | 291.0 | 250 | 18 | 88 | 3 | 7 | 155 | 5 | 0 | 99 | 85 | 2.63 | 1.16 | ||
1966 | 37 | 35 | 9 | 3 | 12 | 20 | 1 | 0 | .375 | 1042 | 251.0 | 239 | 18 | 82 | 7 | 1 | 146 | 8 | 0 | 116 | 106 | 3.80 | 1.28 | ||
1967 | 36 | 36 | 10 | 4 | 15 | 15 | 0 | 0 | .500 | 1063 | 255.0 | 235 | 20 | 88 | 11 | 2 | 151 | 5 | 0 | 96 | 84 | 2.96 | 1.27 | ||
1968 | 36 | 36 | 19 | 6 | 21 | 12 | 0 | 0 | .636 | 1123 | 278.2 | 243 | 21 | 65 | 7 | 3 | 140 | 3 | 1 | 86 | 76 | 2.45 | 1.11 | ||
1969 | 39 | 39 | 24 | 3 | 20 | 14 | 0 | 0 | .588 | 1244 | 303.0 | 267 | 19 | 97 | 11 | 6 | 113 | 6 | 0 | 105 | 95 | 2.82 | 1.20 | ||
1970 | 37 | 37 | 14 | 0 | 15 | 13 | 0 | 0 | .536 | 1136 | 271.0 | 262 | 23 | 84 | 8 | 6 | 126 | 10 | 0 | 110 | 93 | 3.09 | 1.28 | ||
1971 | 35 | 35 | 19 | 7 | 16 | 12 | 0 | 0 | .571 | 1091 | 269.2 | 234 | 16 | 69 | 6 | 4 | 132 | 5 | 0 | 100 | 86 | 2.87 | 1.12 | ||
1972 | 36 | 36 | 9 | 7 | 14 | 18 | 0 | 0 | .438 | 1088 | 260.0 | 250 | 13 | 85 | 13 | 4 | 110 | 6 | 0 | 99 | 93 | 3.22 | 1.29 | ||
1973 | 38 | 38 | 19 | 4 | 16 | 16 | 0 | 0 | .500 | 1122 | 273.0 | 259 | 13 | 79 | 3 | 5 | 95 | 5 | 0 | 112 | 93 | 3.07 | 1.24 | ||
1974 | 16 | 15 | 6 | 0 | 6 | 7 | 0 | 0 | .462 | 485 | 113.0 | 119 | 7 | 37 | 3 | 4 | 40 | 3 | 0 | 54 | 45 | 3.58 | 1.38 | ||
MLB 11년 | 360 | 356 | 152 | 40 | 164 | 139 | 1 | 0 | .541 | 10972 | 2661.1 | 2435 | 171 | 809 | 75 | 44 | 1257 | 57 | 1 | 1003 | 878 | 2.97 | 1.22 |
3. 지도자 경력 (1984-2008)
선수 은퇴 후 멜 스토틀마이어는 1984년부터 2008년까지 여러 메이저 리그 구단에서 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3.1. 초기 지도자 활동
1977년, 스토틀마이어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순회 지도자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그는 5시즌 동안 이 직책을 수행했으며, 1983년 11월에는 뉴욕 메츠의 투수 코치로 고용되었다.
3.2. 뉴욕 메츠 시절

메츠의 투수 코치로서 스토틀마이어는 1984년 내셔널 리그 신인왕과 1985년 사이 영 상을 수상한 드와이트 구든과 같은 젊은 투수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을 포함하여 10년 동안 메츠의 투수 코치로 재직했다.
3.3. 뉴욕 양키스 시절
1996년, 스토틀마이어는 조 토레 감독과 함께 뉴욕 양키스 코칭 스태프에 합류했다. 그의 지도 아래 양키스 팀의 평균자책점은 1996년 4.65에서 1997년 3.84로 크게 낮아졌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스토틀마이어가 지도한 양키스 투수진은 평균 4.2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의 투수진은 양키스가 5년 동안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양키스 왕조 시대를 이끄는 데 주요 요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0시즌 후인 2005년 10월 12일, 양키스가 2005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게 패배한 후, 스토틀마이어는 코치직을 사임했다. 그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와의 개인적인 의견 불일치를 사임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특히 스타인브레너가 디비전 시리즈 종료 후 에인절스 감독 마이크 쇼시아에게 축하를 보냈지만, 자신들의 감독인 조 토레에게는 축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내 첫 생각은 '조는 어때?'였다. 조도 올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다른 감독에게는 축하하고 자기 팀 감독에게는 축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올해 한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고 언급했다. 양키스는 스토틀마이어의 후임으로 전 양키스 투수 론 기드리를 임명했다. 뉴욕 양키스 시절 그는 이리부 히데키 투수를 지도하기도 했다.
3.4. 휴스턴 애스트로스 및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메츠를 떠난 후 스토틀마이어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2년 동안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존 맥클라렌 감독 아래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맥클라렌이 해고된 후 임시 감독 짐 리그먼에 의해 유임되었으나, 시즌 종료 후 해고되었다. 2008년 시즌을 끝으로 그는 야구계에서 은퇴했다. 2009년에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불펜 코치를 맡기도 했다.
4. 개인사
멜 스토틀마이어는 가족과 깊은 유대감을 가졌으며, 건강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4.1. 가족 관계
스토틀마이어는 워싱턴주 맵턴에서 성장했으며, 아내 진과 함께 워싱턴주 이사콰에 거주했다. 그의 두 아들인 토드 스토틀마이어와 멜 스토틀마이어 주니어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이저 리그 투수가 되었다. 특히 토드 스토틀마이어는 138승을 거두며, 아버지와 아들 모두 100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부자 투수가 되었다. 다른 아들인 제이슨은 11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하여 가족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4.2. 자서전 및 건강
2007년, 스토틀마이어는 존 하퍼와 공동으로 자서전 《Pride and Pinstripes프라이드 앤 핀스트라이프스영어》를 출간했다.
그는 2000년에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수년간 관해 상태를 유지하며 다발성 골수종 연구 재단의 열렬한 후원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1년에 암이 재발하여 다시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5. 명예 및 헌사
멜 스토틀마이어의 야구계에 대한 공헌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려졌다.
5.1. 주요 수상 및 기념
1964년 10월 12일, 워싱턴주 맵턴 시장은 이 날을 '멜 스토틀마이어의 날'로 선포했다. 2012년에는 워싱턴주 아메리칸 리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5년 6월 20일 올드 타이머스 데이에 양키스는 스토틀마이어를 기리기 위해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기념 명판을 헌정했다. 2002년에는 조 토레, 돈 짐머와 함께 야구계에 공헌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윌리, 미키 앤 더 듀크 어워드를 수상했다.
6. 사망
멜 스토틀마이어는 암 투병 끝에 2019년 1월 13일, 77세의 나이로 시애틀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사망 원인이 다발성 골수종의 합병증이라고 밝혔다. 그의 사망 후, 양키스는 2019년 시즌 동안 유니폼에 검은색 완장을 착용하여 그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