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트런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정식 자연사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탐구 정신과 광범위한 지식으로 이스트런던 박물관에 채용되어 평생을 박물학자로 헌신했다.
1.1. 유년 시절 및 교육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1907년 2월 2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트런던에서 남아프리카 철도청 역장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두 달 일찍 조산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내내 병약했으며, 한때는 디프테리아 감염으로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열렬한 박물학자였고 야외 활동을 즐겼다. 해변에 있는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알고아만의 버드 아일랜드에 있는 등대에 매료되었다. 11세에 그녀는 새 전문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학교를 마친 후, 그녀는 킹 윌리엄스 타운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았으나, 훈련을 마치기 직전 새로 개관한 이스트런던 박물관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2. 초기 경력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정식적인 자연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면접관들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연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선보여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결과 그녀는 1931년 8월, 24세의 나이로 이스트런던 박물관에 채용되었다. 그녀는 남은 경력 전부를 이 박물관에서 보냈다.
2. 실러캔스 발견
마저리 코트니-래티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38년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실러캔스를 발견한 일이다. 이 발견은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생물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1. 발견 과정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박물관을 위해 암석, 깃털, 조개껍데기 등을 수집하는 데 바빴으며, 어부들에게 특이한 표본을 보고 싶다는 의사를 꾸준히 알려왔다. 1938년 12월 22일, 그녀는 헨드릭 구센 선장의 지휘 아래 막 항구로 돌아온 트롤선 네리네호의 부수어획물을 조사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 부수어획물 중에서 그녀는 매우 인상적인 한 표본을 발견했다.
그녀는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몇 겹의 점액질을 걷어내자 제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물고기가 드러났습니다... 길이는 약 150 cm였고, 옅은 보랏빛 푸른색에 희미한 흰 반점이 흩어져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무지개빛 은청록색 광택이 돌았습니다. 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었고, 네 개의 다리 같은 지느러미와 이상한 강아지 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물고기였어요. 마치 큰 도자기 장식품 같았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조수는 그 물고기를 택시에 싣고 박물관으로 가져가 자신의 책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2. 보존 및 동정
이 특이한 물고기를 보존하고 싶었지만, 박물관에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이 물고기를 먼저 시체 안치소로 가져갔고, 그 다음에는 냉동 창고로 가져갔지만, 두 곳 모두 보관을 거부했다. 결국 그녀는 아는 박제사 로버트 센터에게 가져갔고, 그는 그녀의 친구이자 로드스 대학교의 어류학자인 J. L. B. 스미스가 동정할 수 있도록 포르말린에 적신 신문지와 침대 시트로 물고기를 감싸 보존하는 것을 도왔다.
코트니-래티머가 스미스에게 연락하려던 시도는 불행히도 처음에는 실패했는데, 스미스가 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12월 27일까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자, 뜨겁고 습한 남아프리카의 여름 날씨에 물고기가 부패하고 기름을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못해 센터에게 물고기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하여 박제할 준비를 하도록 허락했다.
스미스는 며칠 후 마침내 코트니-래티머와 연락이 닿았고, 1939년 2월 16일 박제된 표본을 처음 보자마자 그것이 실러캔스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며, "2억 년 전의 생물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이 물고기에 그녀의 이름을 따서 Latimeria chalumnae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속명 Latimeria는 코트니-래티머에게 헌정되었고, 종명 chalumnae는 발견된 찰룸나강의 이름을 딴 것이다. 두 번째 실러캔스가 발견되기까지는 14년이 더 걸렸다.

3. 개인 생활 및 후기 활동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과학 연구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은퇴 후에도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3.1. 개인 생활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20대에 '인생의 사랑'을 잃은 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3.2. 퇴직 후 활동 및 저술
박물관에서의 경력을 마친 후, 그녀는 츠치카마 국립공원 근처의 농장으로 은퇴하여 꽃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등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그녀는 다시 이스트런던으로 돌아왔다.
4. 저서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다음과 같은 주요 저서들을 남겼다.
- Gray's Beaked Whale, Mesoplodon Grayi. Annals of the Cape Provincial Museums Vol.3 (1963)
- [https://files.afu.se/Downloads/?dir=Magazines%2FUnited%20States%2FCryptozoology%20%28ISC%29/ Reminiscences of the Discovery of the Coelacanth, Latimeria Chalumnae Smith: Based on Notes from a Diary Kept at the Time.] Cryptozoology Vol.8 (1989)
- The Flowering Plants of the Tsitsikama Forest and Coastal National Park (1967)
5. 의의 및 평가
마저리 코트니-래티머의 실러캔스 발견은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여성 과학자로서 그녀의 업적은 후대에 큰 영감을 주었다.
5.1. 과학계에 미친 영향
마저리 코트니-래티머의 실러캔스 발견은 6,500만 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생물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발견은 생물학적 지식을 수정하고, 고대 생물의 보존과 진화 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실러캔스는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키고, 생물학자들이 화석 기록과 현존하는 생물 간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이는 생물학적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진화론적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5.2. 여성 과학자로서의 위상
20세기 초는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와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저리 코트니-래티머는 정식 자연사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관찰력과 끈기, 그리고 과학적 직관으로 인류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냈다. 그녀의 실러캔스 발견은 남성 중심적이었던 과학계에서 여성의 능력을 입증한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과학 분야를 지망하는 후대 여성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으며, 과학 연구에서 성별의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