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education
마이클 어빈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은 그가 미식축구 스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가족 배경과 학업 및 미식축구 경력은 다음과 같다.
1.1. Childhood
어빈은 1966년 3월 5일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명의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1.2. High school and college
어빈은 처음에 플로리다주 선라이즈의 파이퍼 고등학교에 다녔고, 이후 포트로더데일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아퀴나스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 스타로 성장했다. 세인트 토마스 아퀴나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미국 최고의 대학 풋볼 프로그램 중 하나인 마이애미 대학교의 마이애미 허리케인스로부터 강하게 스카우트되었다.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지미 존슨 감독 밑에서 뛰면서, 어빈은 마이애미 허리케인스의 경력 최다 리셉션(143개), 리시빙 야드(2,423야드, 나중에 산타나 모스가 경신), 터치다운 리셉션(26개)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87년 마이애미 대학교의 전국 챔피언십 팀의 일원이었으며, 그해 학교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플레이 중 하나를 만들었다. 스티브 월시로부터 73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받아 숙명의 라이벌인 플로리다 스테이트를 상대로 승리를 확정 지었고, 이로 인해 마이애미는 최고 랭킹의 오클라호마 수너스를 상대로 한 1988 오렌지 볼 전국 챔피언십 경기에 진출할 수 있었다.
어빈은 신문 기업 협회로부터 세 차례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다. 신입생 때는 2군, 2학년 때는 1군, 3학년 때는 다시 2군에 이름을 올렸다. 1988년,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3학년을 마친 후, 어빈은 남은 1년의 대학 자격을 포기하고 1988 NFL 드래프트에 참가할 의사를 밝혔다.
1.2.1. College statistics
| Year | Catches | Yards | Touchdowns | Carries | Rushing Yards |
|---|---|---|---|---|---|
| 1985 | 46 | 840 | 9 | - | - |
| 1986 | 53 | 868 | 11 | - | - |
| 1987 | 44 | 715 | 6 | 2 | 4 |
2. Professional career
마이클 어빈은 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12년간의 NFL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1. Dallas Cowboys (1988-1999)
어빈은 1988년 NFL 드래프트에서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지명된 이후 팀의 암흑기를 벗어나 1990년대 슈퍼볼 왕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선수 생활은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끝이 났지만, 카우보이스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1.1. Early years and initial impact (1988-1990)
어빈은 1988 NF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1번째로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지명되었다. 이는 텍스 슈람 총지배인, 길 브랜트 선수 관리 이사, 톰 랜드리 감독의 지도 아래 카우보이스가 마지막으로 1라운드에서 지명한 선수였다. 슈람은 어빈이 카우보이스의 "생환"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88년 시즌 루키로서, 어빈은 카우보이스 역사상 20년 만에 처음으로 시즌 개막전에 선발 출전한 루키 리시버가 되었다. 1988년 9월 3일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루키 시즌 개막전에서 어빈은 생애 첫 NFL 터치다운을 기록했다. 또한 1988년 12월 11일 RFK 스타디움에서 열린 워싱턴 레드스킨스와의 경기에서 세 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잡아냈다. 이 승리는 랜드리 감독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카우보이스의 3승 13패 시즌에서 단 세 번의 승리 중 하나였다. 이 시즌에 어빈은 경기당 평균 20.4야드로 NFC에서 평균 야드당 리셉션 부문 선두를 차지했다.
1989년, 카우보이스는 랜드리 감독을 대신해 어빈의 마이애미 대학교 시절 스승인 지미 존슨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1989년에도 카우보이스의 불운은 계속되어 1승 15패로 시즌을 마쳤고, 이는 카우보이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시즌 기록이었다. 이 시즌에 어빈은 부상으로 인해 6경기만 출전했다. 그는 1989년 10월 15일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의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1,000 리시빙 야드를 넘는 페이스를 보이다가 부상자 명단에 올라 1989년 시즌 나머지 경기와 1990년 시즌의 첫 세 경기에 결장했다.
1990년, 어빈은 7번째 경기에서야 첫 리셉션을 기록했고, 시즌을 20리셉션, 413야드로 마쳤지만, 야드당 평균 20.7야드를 기록했다. 이 부상 전에 어빈은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될 뻔했지만, 레이더스의 구단주 앨 데이비스가 존슨 감독에게 "확실히 그렇게 하고 싶냐? 누가 네 패스를 받을 것이냐?"고 말하며 존슨 감독을 설득했고, 결국 존슨은 허셸 워커를 미네소타 바이킹스로 트레이드했다. 어빈이 트레이드될 뻔했던 한 가지 이유는 당시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데이비드 슐라가 어빈이 느리고 팀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우보이스가 슐라를 해고하고 노브 터너를 그의 후임으로 임명하자, 터너가 어빈이 자신의 시스템에서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빈을 트레이드하려던 생각은 사라졌다.
2.1.2. Championship era and "The Triplets" (1991-1996)

1991년, 어빈은 카우보이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시즌을 93리셉션(시즌 NFL 2위), 1,523리시빙 야드(시즌 NFL 1위), 8개의 리시빙 터치다운으로 마쳤고, 7번의 100야드 이상 경기라는 카우보이스 프랜차이즈 기록을 세웠다. 어빈은 1991년 프로볼에 선정되었는데, 이는 그가 5시즌 연속 프로볼에 선정된 첫 번째 해였다.
1992년과 1993년에 어빈은 카우보이스 슈퍼볼 우승팀의 핵심 선수였다. 1994년에도 그는 4시즌 연속 프로볼에 선정되는 또 다른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그해 카우보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패했다. 그러나 어빈은 이 경기에서 12리셉션, NFC 챔피언십 기록인 192야드, 2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NFL 플레이오프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경기 중 하나를 펼쳤다.
그의 가장 위대한 활약 중 하나는 슈퍼볼 XXVII (1993년)에서였다. 그는 6개의 패스를 잡아 114야드와 2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다. 그의 두 개의 터치다운은 2쿼터에 단 18초 간격으로 터졌는데, 이는 슈퍼볼 역사상 한 선수가 기록한 가장 빠른 연속 터치다운이었다. 그는 또한 슈퍼볼 XXII에서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와이드 리시버 리키 샌더스에 이어 슈퍼볼 한 쿼터에 두 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한 역대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어빈은 1993년 버펄로 빌스를 상대로 한 슈퍼볼 XXVIII와 1995년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상대로 한 슈퍼볼 XXX에서 카우보이스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93년 빌스와의 슈퍼볼에서 어빈은 5개의 리셉션으로 66야드를 기록했다. 1995년 스틸러스와의 슈퍼볼에서는 5개의 리셉션으로 76야드를 기록했다.
어빈의 카우보이스에서의 최고의 시즌은 1995년이었다. 이 시즌에 그는 리셉션(111개)과 리시빙 야드(1,603야드)에서 프랜차이즈 기록을 세웠고, 10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11번의 100야드 이상 리시빙 경기라는 NFL 기록을 세웠다. 어빈은 그린베이 패커스와의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7개의 리셉션으로 100야드와 2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으며, 이는 카우보이스를 슈퍼볼 XXX로 이끌었고, 팀은 4시즌 만에 세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어빈은 제리 존스가 구단주가 된 이래 카우보이스의 첫 네 명의 감독(톰 랜드리, 지미 존슨, 배리 스위처, 챈 게일리) 밑에서 모두 뛴 유일한 선수이다. 어빈은 데이브 캄포가 카우보이스의 다섯 번째 감독이 된 후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지만, 캄포 밑에서는 실제로 경기를 뛰지 않았다.
2.1.3. Later career and retirement (1997-1999)
어빈은 쇄골 부상에서 회복한 후, 1997년과 1998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99년 시즌 다섯 번째 경기에서, 어빈은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디펜시브 백 팀 하우크에게 태클당하여 필라델피아의 베테랑스 스타디움 잔디밭에 머리부터 박혔다. 그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경추 부상을 입었지만, 들것에 실려 필라델피아의 토마스 제퍼슨 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어빈은 그 시즌에 다시는 경기를 뛰지 못했다. 의사들은 이후 어빈이 선천적으로 경추 척추관 협착증을 앓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의사들은 어빈에게 이 상태가 목이나 머리에 또 다른 충격을 받으면 마비 등 더 심각한 부상을 입을 위험이 높다고 경고했다. 축구를 그만하라는 조언을 받은 후, 어빈은 2000년 5월에 은퇴를 발표했다. 어빈은 NFL에서 은퇴한 마지막 톰 랜드리 감독의 선수였다. 랜드리 감독은 어빈이 필라델피아에서 부상을 입은 지 몇 달 후인 2000년 2월 12일에 사망했지만, 어빈이 부상의 심각성으로 인해 은퇴를 발표하기 전이었다.
3. Post-playing career
마이클 어빈은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미식축구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3.1. Broadcasting and media
어빈은 ESPN의 선데이 NFL 카운트다운의 전직 방송인이었으며, 현재는 NFL 네트워크의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폴 피어스, 키숀 존슨, 조이 테일러와 함께 FS1의 주중 토론 프로그램인 스피크의 공동 진행자이기도 하다.
2008년 1월, 어빈은 댈러스의 ESPN 라디오 계열사인 KESN (103.3 FM)에 합류하여 더 마이클 어빈 쇼를 진행했다. 이 지역 방송 프로그램은 시청률 하락과 2007년 사건에 대한 소송 소식이 "상황을 가속화"했다는 ESPN 대변인의 발언에 따라 2010년 2월 5일 계약 만료로 종료되었다.
3.2. Acting and business ventures
어빈은 2005년 애덤 샌들러와 크리스 록 주연의 롱기스트 야드 리메이크 영화에서 공동 주연을 맡았다. 또한 2011년 11월 11일 개봉한 샌들러의 영화 잭 앤 질에 특별 출연했다. 그는 전직 프로 운동선수들과 일반인들이 대결하는 프로그램인 프로스 vs. 조스의 "프로"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어빈은 스파이크 TV에서 방영된 미식축구 테마 리얼리티 시리즈 4th and Long의 진행자였다. 이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제시 홀리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훈련 캠프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다. 어빈은 2017년 농구 드라마 슬라마 잠마에서 비열한 스포츠 에이전트 역으로 조연을 맡았다.
2011년 8월, 인도 엘리트 풋볼 리그 관계자들은 어빈이 리그의 주요 투자자 및 고문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저명한 후원자로는 전 시카고 베어스 감독 마이크 딧카, 전 필라델피아 이글스 쿼터백 론 야워스키, NFL 라인배커 브랜든 칠라 등이 있었다.
2023년 7월, 애셋 엔티티스 경영진은 어빈이 TRITON FUNDS와 함께 회사의 주요 투자자 및 고문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4. Achievements and honors
마이클 어빈은 선수 생활 동안 수많은 기록과 영예를 얻었으며, 그의 뛰어난 기량은 여러 명예의 전당 헌액으로 이어졌다.
4.1. Hall of Fame inductions
2000년, 어빈은 마이애미 대학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7년에는 텍사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세 명의 전 NFL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2008년 2월 텍사스주 와코에서 열린 헌액식에 참석했다. 다른 두 명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카우보이스(1963-64)에서 마무리한 짐 레이 스미스와 휴스턴 오일러스의 5회 프로볼 디펜시브 엔드였고 1996년 카우보이스에서 NFL 경력을 마무리한 레이 차일드레스였다.
어빈은 2005년에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을 얻었다. 그는 2007년 2월 3일, 자격 3년 만에 진 히커슨, 브루스 매슈스, 서먼 토마스, 찰리 샌더스, 로저 웨얼리와 함께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2007년 8월 4일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열린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공식적으로 헌액되었다.
2007년 8월 4일, 어빈은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삶과 살면서 저지른 많은 실수들을 언급하며 눈물의 수락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그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NFL 해설가들로부터 진심 어린 연설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007년 10월 14일, 어빈은 텍사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우보이스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경기의 하프타임에 명예의 전당 반지를 받았다. 그의 연설에서, 그는 로저 구델 커미셔너에게 모든 드래프트된 신인들이 그들의 미식축구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을 견학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4.2. NFL records and awards
어빈은 750리셉션(NFL 역대 30위, 찰리 조이너와 동률), 11,904야드(NFL 역대 21위), 65개의 터치다운으로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의 47번의 100야드 리시빙 경기는 토리 홀트와 동률인 NFL 역사상 8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어빈은 5번의 프로볼에 선정되었고(프랜차이즈 역사상 다른 어떤 와이드 리시버보다 2회 더 많음), 1991년 시즌 후인 1992년 프로볼에서는 NFC의 21대15 승리에서 8개의 패스를 받아 125야드와 1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었다. 어빈은 6번의 디비전 타이틀과 3번의 슈퍼볼 우승을 차지한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핵심 플레이메이커였다.
댈러스 공격 라인업의 선발 선수로서 어빈은 정규 시즌에서 꾸준히 위협적인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의 6번의 100야드 리시빙 플레이오프 경기는 NFL 기록 보유자 제리 라이스의 8번보다 단 2개 적은 기록이다. 어빈의 플레이오프 리셉션 87개는 라이스(151개)에 이어 NFL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 번째이며, 그의 플레이오프 리시빙 야드 1,315야드도 라이스(2,245야드)에 이어 두 번째이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어빈은 단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1,000야드 이상 시즌을 기록하며 8년 동안 인상적인 10,292야드를 쌓았다. 그 과정에서 카우보이스는 4년 연속 NFC 챔피언십 게임(1992-1995)에 진출했고, 슈퍼볼 XXVII와 슈퍼볼 XXVIII에서 버펄로 빌스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고, 슈퍼볼 XX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세 번의 슈퍼볼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4.3. Team and college honors
전 동료인 트로이 에이크만과 에미트 스미스와 함께, 어빈은 2005년 9월 19일 댈러스 카우보이스 링 오브 아너에 헌액되었다.
2007년, 어빈은 플로리다 고등학교 체육 협회의 올-센추리 팀에 선정되었는데, 이 팀은 플로리다 주 100년 고등학교 미식축구 역사상 최고의 미식축구 선수 33명을 선정했다.
5. Legacy
어빈은 미식축구 역사와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리더십은 NFL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키 6피트 2인치(약 188 cm)에 체중 207파운드(약 94 kg)의 어빈은 크고 신체적인 리시버로, 코너백을 압도하고 수비수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캐치를 종종 성공시켰다. 어빈이 수비수를 쉽게 밀어내는 능력 때문에 NFL은 결국 어빈의 신체적인 스타일을 모방하는 와이드 리시버들을 위해 규칙을 변경하기도 했다.
어빈은 목소리가 크고 감성적인 리더였으며, 리셉션과 리시빙 야드를 포함하여 카우보이스 역사상 모든 주요 리시빙 기록을 세웠다. 은퇴 당시 그는 20개의 팀 리시빙 기록을 보유하거나 공동으로 가지고 있었다. 2008년 11월, 그의 카우보이스 팀 동료였던 대릴 존스턴은 "마이클은 우리 팀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했지만, 결코 어떤 것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우리 팀원 중 누구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어빈은 자신이 "더 유"(The U영어)라고 부르는 마이애미 대학교 출신 선수들, 예를 들어 프랭크 고어, 에저린 제임스 등을 매우 존경한다.
6. Personal life
마이클 어빈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가족 관계, 종교적 신념,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포함한다.
6.1. Family
어빈은 1990년부터 샌디 해럴과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딸 한 명과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어빈은 또한 이전 관계에서 얻은 또 다른 딸이 있다.
6.2. Religion
어빈은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2001년 초 T.D. 제이크스 목사님과 나의 친구이자 동료 신자인 데이온 샌더스의 도움으로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손길을 진정으로 깨닫는 데 40년이 걸렸다. 나는 거의 모든 나쁜 짓을 다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어빈은 아웃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2006년 위암으로 사망한 자신의 동성애자 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형과 관련하여 처음 느꼈던 동성애 혐오가 선수 시절 여성 편력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형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자신의 상황을 공유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7. Controversies and legal issues
마이클 어빈의 경력과 개인적인 삶은 여러 논란과 법적 문제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이다.
7.1. Sexual assault allegations
1996년, 카우보이스가 캐롤라이나 팬서스와의 NFC 디비전 플레이오프 경기를 준비하던 중,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어빈과 팀 동료인 에릭 윌리엄스가 코카인에 취한 상태에서 댈러스 치어리더 니나 샤흐라반을 성폭행하고 총으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며 그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고 전해졌다. 윌리엄스와 어빈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카우보이스가 패배한 경기를 크게 뒤덮었다. 고소인은 나중에 전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진술을 번복하고 위증과 허위 경찰 보고서 제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으며, 90일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캐롤라이나와의 경기에서 어빈은 경기 초반에 부상으로 이탈하여 복귀하지 못했다.
2007년 7월 4일, 어빈은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의 세미놀 하드록 카지노에서 성폭행 혐의로 고발되었다. 혐의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2010년에 민사 소송이 제기되었다. 어빈은 1.00 억 USD의 명예훼손 반소를 제기했으며, 이 사건은 2011년 1월 법정 밖 합의로 종결되면서 반소도 철회되었다.
2017년 3월 22일,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 경찰은 어빈이 플로리다에서 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그를 조사했다. 어빈은 혐의를 부인했다. 7월 24일, 플로리다주 브로워드 카운티 검찰청은 증거 부족으로 사건 조사를 종결하고 어빈을 기소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23년 2월 슈퍼볼 LVII에서, NFL 네트워크는 피닉스 지역의 호텔에서 한 여성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후 어빈을 슈퍼볼 중계에서 제외했다. 감시 카메라 영상에 그가 여성과 교류하는 모습이 담겼지만, 어빈은 댈러스 포트워스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술에 취해 어떤 사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어떠한 잘못도 부인했다.
7.2. Other legal incidents
1998년 7월 29일, 어빈은 동료 카우보이스 공격 라인맨 에버렛 맥아이버를 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 초기 분쟁은 어빈이 이발을 기다리지 않기 위해 맥아이버에게 이발사 의자에서 비키라고 요구하면서 발생했다. 맥아이버와 어빈은 곧 이발소에서 싸움을 시작했고, 동료 카우보이 레온 렛이 이를 말리려고 했다. 이 분쟁 중에 어빈은 가위를 들고 맥아이버의 목을 찔렀는데, 경동맥을 간신히 비켜갔다. 카우보이스 구단주 제리 존스는 맥아이버의 침묵과 그가 어빈에 대한 형사 고발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빈과 맥아이버 사이에 6자리 숫자의 합의를 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6월, NFL 은퇴 1년 후, 어빈은 중범죄인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어빈은 댈러스의 한 아파트에서 무관한 여성과 함께 있었는데, 경찰 마약 전담반 요원들이 수색 영장을 가지고 도착했을 때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강제로 아파트에 진입하여 마약을 발견했다. 어빈과 여성은 체포되었지만, 어빈에 대한 혐의는 나중에 철회되었다. 2005년 11월 25일, 어빈은 텍사스주 플라노에서 과속으로 정지되었다. 어빈은 텍사스주 어빙에서 미납된 과속 딱지에 대한 미결 영장으로 체포되었으며, 경찰이 그의 차를 수색하여 파이프와 마리화나 잔여물이 든 비닐봉지를 발견한 후 경범죄 마약 도구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어빈은 3급 경범죄로 체포되었고, 나중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2005년 12월 1일, 체포에 대한 대응으로 ESPN은 2005년 12월 4일과 5일의 일요일 및 월요일 밤 카운트다운 프로그램에서 어빈을 정지시켰다. 그는 이후 두 프로그램에 복귀했으며, 이전 사건에 대한 언급이나 결과는 없었다.
2009년 1월 12일, 어빈은 댈러스에서 신호등에 멈춰 섰을 때 차량 절도 미수 사건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두 남성이 자신에게 총을 겨눴지만, 카우보이스 팬이라고 말한 후 결국 차를 몰고 달아났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댈러스 경찰은 어빈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그의 협조 없이는 진행할 수 없다고 밝히며 2주 후 수사를 중단했다.
7.3. Public comments and media controversies
2006년 11월, 댄 패트릭의 라디오 쇼에서 진행된 라디오 인터뷰에서 어빈은 댈러스 카우보이스 쿼터백 토니 로모의 운동 능력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 때문일 수 있다고 농담하며, 로모의 어머니 쪽 친척들이 "노예 형제들"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농담조로 발언했다. 어빈은 나중에 사과하며 "이것은 우리가 농구를 할 때 로모와 농담하는 방식이다. 선수로서의 나와 방송인으로서의 나는 다르다"고 말했다.
2007년 2월 17일, 스포츠센터 심야판에서 ESPN은 어빈이 더 이상 네트워크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ESPN 커뮤니케이션 부사장 조쉬 크룰레위츠는 "우리는 마이클의 ESPN 기여에 감사하며 그의 앞날에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그러나 11개월 후인 2008년 1월, 어빈은 댈러스의 ESPN 라디오 계열사인 KESN (103.3 FM)에서 더 마이클 어빈 쇼의 진행자로 ESPN에 다시 합류했다. 이 지역 방송 프로그램은 2010년 2월 5일 계약 만료로 종료되었다. ESPN 대변인은 시청률 하락과 2007년 사건에 대한 소송 소식이 "상황을 가속화"했다고 언급했다.
2017년 2월 더 리치 아이젠 쇼 에피소드에서 어빈은 슈퍼볼 XXVII 하프타임 도중 라커룸에서 몰래 빠져나와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보았다고 인정했다.
8. Career statistics
| NFL career statistics | |||||||||||||
|---|---|---|---|---|---|---|---|---|---|---|---|---|---|
| Year | Team | Games | Receiving | Rushing | |||||||||
| GP | GS | Rec | Yds | Avg | Lng | TD | Att | Yds | Avg | Lng | TD | ||
| 1988 | DAL | 14 | 10 | 32 | 654 | 20.4 | 61 | 5 | 1 | 2 | 2.0 | 2 | 0 |
| 1989 | DAL | 6 | 6 | 26 | 378 | 14.5 | 65 | 2 | 1 | 6 | 6.0 | 6 | 0 |
| 1990 | DAL | 12 | 7 | 20 | 413 | 20.7 | 61 | 5 | 0 | 0 | 0.0 | 0 | 0 |
| 1991 | DAL | 16 | 16 | 93 | 1,523 | 16.4 | 66 | 8 | 0 | 0 | 0.0 | 0 | 0 |
| 1992 | DAL | 16 | 14 | 78 | 1,396 | 17.9 | 87 | 7 | 1 | -9 | -9.0 | -9 | 0 |
| 1993 | DAL | 16 | 16 | 88 | 1,330 | 15.1 | 61 | 7 | 2 | 6 | 3.0 | 9 | 0 |
| 1994 | DAL | 16 | 16 | 79 | 1,241 | 15.7 | 65 | 6 | 0 | 0 | 0.0 | 0 | 0 |
| 1995 | DAL | 16 | 16 | 111 | 1,603 | 14.4 | 50 | 10 | 0 | 0 | 0.0 | 0 | 0 |
| 1996 | DAL | 11 | 11 | 64 | 962 | 15.0 | 61 | 2 | 0 | 0 | 0.0 | 0 | 0 |
| 1997 | DAL | 16 | 16 | 75 | 1,180 | 15.7 | 55 | 9 | 0 | 0 | 0.0 | 0 | 0 |
| 1998 | DAL | 16 | 15 | 74 | 1,057 | 14.3 | 51 | 1 | 1 | 1 | 1.0 | 1 | 0 |
| 1999 | DAL | 4 | 4 | 10 | 167 | 16.7 | 37 | 3 | 0 | 0 | 0.0 | 0 | 0 |
| Career | 159 | 147 | 750 | 11,904 | 15.9 | 87 | 65 | 6 | 6 | 1.0 | 9 |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