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개인적 배경과 주요 생애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다.
1.1. 초기 생애 및 아르투아 백작위 계승 분쟁
로베르는 1287년경 콩슈앙우슈의 영주인 아르투아의 필리프와 브르타뉴 공작 장 2세의 딸인 브르타뉴의 블랑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카페 왕조의 남성 후손이었다. 로베르의 아버지 필리프는 1297년 8월 20일 플랑드르인과의 푸르네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298년 9월 11일 사망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아르투아 백작위 계승 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302년, 그의 조부인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가 쿠르트레 전투에서 전사하자, 아르투아 백작위는 관례에 따라 조부의 장녀이자 로베르의 고모인 마오(Mahaut프랑스어 또는 마틸드)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로베르는 백작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훗날 이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로베르는 1309년과 1318년에 걸쳐 아르투아 백작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두 번 모두 패소했다. 그는 스스로를 정당한 아르투아 백작의 상속인으로 여겼으며,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주요 동기가 되었다.
1.2. 필리프 6세와의 관계와 보몽르로제 백작위 부여
로베르는 그의 처남인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동안 필리프 6세의 신뢰받는 조언자였다. 이러한 영향력을 통해 필리프 6세는 1328년 6월, 마오의 아르투아 상속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보몽르로제 백작령을 부여했다. 로베르는 1318년 발루아의 잔느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발루아 백작 샤를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쿠르트네의 카트린 1세의 딸이었다. 1328년, 아내의 이복오빠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로 즉위하자, 로베르 3세는 보몽르로제 백작의 지위를 부여받고 필리프 6세의 측근으로 우대받았다. 그러나 1329년 마오가 사망하자, 아르투아 백작위는 그녀의 딸이자 필리프 5세의 왕비였던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에게 넘어갔다. 로베르는 플랑드르 백작령의 사례를 들어 다시 아르투아 계승 문제를 제기했다.
1.3. 위조 유언장 사건과 망명
1331년, 로베르는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장을 위조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 위조를 위해 34건의 위증된 진술과 잔 드 디비옹이라는 인물이 만든 가짜 문서를 사용했다. 이 위조가 발각된 후, 로베르는 아르투아 백작위를 얻으려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로베르는 왕에게 출석하라는 네 번째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고, 1332년 4월 8일 궐석재판에서 추방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체포와 처형을 피하기 위해 로베르는 프랑스를 탈출하여 그의 조카인 나무르 후작 장 2세에게 피신했다. 필리프 6세는 로베르를 추격하여 리에주 주교에게 나무르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로베르는 다시 그의 처조카인 브라반트 공작 장 3세에게로 도피했다. 그러나 필리프 6세가 브라반트 공작에게 로베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자, 로베르는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인 장과 샤를은 1334년 노르망디의 가이야르 성에 투옥되었다.
1.4.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와의 동맹 및 백년 전쟁 발발 기여
로베르는 잉글랜드에서 에드워드 3세와 만나게 되었고, 이후의 전설에 따르면 잉글랜드 국왕에게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도록 강력히 촉구했다.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로베르는 에드워드 3세의 왕실 고문이 되어 프랑스 궁정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했다. 많은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은 로베르의 영향력이 백년 전쟁의 시작으로 직접 이어졌다고 기록한다. 특히 필리프 6세는 1337년 5월 기옌 공국을 몰수하는 이유로 에드워드 3세가 로베르를 추방하기를 거부한 것을 들었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를 보호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로베르 3세를 환대하며 1341년 그에게 리치먼드 백작 작위를 부여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로베르 3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여계 계승을 통해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했으며, 프랑스 왕실과 귀족의 내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여 전쟁 계획에 기여했다.
백년 전쟁 초기에 로베르는 에드워드 3세의 전역에 동행했으며, 1340년 생오메르 전투에서 앵글로-플랑드르군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아르투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340년 9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로베르는 잉글랜드 몽포르파의 일원으로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1.5. 사망
로베르 3세는 1342년 11월 반 시에서 퇴각하던 중 부상을 입고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일은 10월 6일에서 11월 20일 사이로 추정된다. 그는 본래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교회에 묻혔으나, 그의 무덤은 현재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2. 가족
로베르는 1320년경 잔느 드 발루아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 루이 다르투아 (1320년 ~ 1326/1329년)
- 장 다르투아 (1321년 ~ 1387년): 외 백작
- 잔느 다르투아 (1323년 ~ 1324년)
- 자크 다르투아 (1325년경 ~ 1347년)
- 로베르 다르투아 (1326년경 ~ 1347년)
- 샤를 다르투아 (1328년 ~ 1385년): 페즈나 백작
3. 유산과 영향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생애는 그의 개인적인 야망과 복수심이 유럽 국제 관계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아르투아 백작위를 둘러싼 오랜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위조와 기만이라는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개인적인 몰락을 넘어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3.1. 긍정적 평가
로베르는 비록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그의 뛰어난 정보력과 설득력은 에드워드 3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프랑스 궁정의 내부 사정과 귀족들의 동향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에드워드에게 제공함으로써,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침공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그의 '지략'과 '영향력'은 잉글랜드 입장에서 '긍정적인' 기여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1340년대 후반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유행했던 '헤론의 맹세'(Voeux du héron프랑스어)라는 시적 맹세는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침공을 로베르에게 한 기사도적 맹세의 이행으로 묘사하며, 그가 전쟁 발발의 상징적 인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3.2. 비판과 논란
로베르 3세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그의 권력욕과 복수심이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대규모 전쟁인 백년 전쟁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위조된 유언장을 제출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 그의 행위는 법적,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사건은 그에게 재산 몰수와 망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와 에드워드 3세 사이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잔 2세의 죽음에 독살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국가 간의 평화를 해치고 수많은 인명의 손실을 야기한 그의 행동은 역사적으로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4. 대중문화 속의 모습
로베르 3세 다르투아는 모리스 드루옹의 프랑스 역사 소설 시리즈인 저주받은 왕조(Les Rois maudits프랑스어)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그의 삶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재구성되었다. 이 소설을 각색한 1972년 프랑스 미니시리즈에서는 장 피아가, 2005년 각색판에서는 필리프 토레통이 로베르 3세 역을 연기했다.
5. 같이 보기
- 아르투아 가문
- 필리프 6세
- 에드워드 3세
- 백년 전쟁
- 아르투아 백국
- 보몽르로제
- 가이야르 성
- 브르타뉴 계승 전쟁
- 리치먼드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