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리처드 H. 트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 그리고 군 복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의 미래 경력에 필요한 기반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트룰리는 1937년 11월 12일 미시시피주 페이엣에서 태어났다. 그는 페이엣과 미시시피주 메리디언에 있는 인종 분리 학교에 다녔다. 1959년에는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항공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Kappa Alpha Order영어의 회원이었다. 또한 그는 보이 스카우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최고 등급인 이글 스카우트를 획득했다.
1.2. 군 경력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해군 예비 장교 훈련단의 일원이었던 트룰리는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비행 훈련을 받았다. 1960년 10월 7일에는 해군 항공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제33 전투비행대대(VF-33)에서 F-8 크루세이더를 조종하며 USS 인트레피드 (CVA-11)와 USS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에서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는 300회 이상의 항공모함 착륙 기록을 세웠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트룰리는 캘리포니아주 에드워즈 공군 기지에 위치한 미국 공군 시험 비행사 학교에서 학생으로 수학했으며, 이후에는 교관으로 활동했다.
2. NASA 경력
리처드 H. 트룰리는 우주비행사로서 여러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NASA 행정관으로서 기관의 위기 극복과 미래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1. 우주비행사로서의 활동
1965년, 트룰리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된 미국 공군의 유인 궤도 실험실(MOL) 프로그램에 선발된 최초의 군 소속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MOL 프로그램이 취소된 후 1969년 8월 NASA 우주비행사 그룹 7에 합류했다. NASA에서 그는 1973년의 세 차례 스카이랩 유인 임무와 1975년의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에서 우주비행사 지원팀의 일원이자 캡슐 통신사(CAPCOM)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우주왕복선 엔터프라이즈의 진입 및 착륙 시험(ALT)에 두 차례 2인 승무원으로 비행했다.

1981년 11월 12일, 그는 STS-2 임무를 통해 자신의 생일에 우주로 발사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에는 STS-8의 사령관을 맡았다.

STS-8 임무를 마친 후, 트룰리는 NASA를 떠나 해군 우주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 되었다.

2.2. NASA 행정관으로서의 활동
챌린저호 폭발 사고 발생 3주 후인 1986년 2월 20일, 트룰리는 NASA로 복귀하여 우주 비행 담당 부행정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우주왕복선의 비행 재개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챌린저호의 대체 여부, 미래 우주왕복선의 역할, 그리고 향후 임무에서 일회용 우주선과 왕복선의 혼합 사용 문제와 같은 장기적인 사안에 대한 책임도 맡았다. 사고의 기술적 원인을 파악하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결국 트룰리와 NASA의 "비행 재개" 프로그램은 31개월이 지난 1988년 9월 29일, STS-26 임무를 통해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가 성공적으로 비행할 때까지 이어졌다. 1986년 3월, 트룰리는 메모를 통해 NASA가 다음 우주왕복선 발사 전에 완료해야 할 몇 가지 조치들을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고체 로켓 모터 조인트 재설계, 중요 품목 검토, 운영 및 유지보수 지침 검토" 등이 포함되었다.
트룰리는 NASA 행정관이 되기 직전에 해군 중장으로 전역했다. 그는 1989년 5월, NASA의 제8대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전직 우주비행사로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1992년 5월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칼 세이건에 의해 보이저 1호가 주 임무를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구 사진을 촬영할지 여부에 대한 내부 논쟁에 개입하여 이를 중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 결과 촬영된 사진은 이후 '창백한 푸른 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2월 12일, 트룰리는 행정관직에서 해임되었다. 2주 전, 댄 퀘일 부통령은 트룰리를 만나 사임하고 대사직을 수락할 것을 요청했으나, 트룰리는 이 제안을 고려한 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해임 당시 트룰리는 "충격을 받았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1년 후 퀘일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 된 앨 고어 상원의원은 이 조치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트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일을 해낸 훌륭한 인물"이며, "퀘일 부통령의 우주 위원회가 부통령실에서 NASA를 운영하려는 고집 때문에 트룰리 제독을 이 직책에서 떠나게 한 매우 우려스러운 징후로 본다"고 언급했다. 관측자들은 트룰리의 해임이 행정부가 선호하는 더 작고 빠른 임무보다는 우주왕복선의 수명 연장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그가 "관료주의에 사로잡혀 행정부가 원하는 변화와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른 이들은 예기치 않게 의회에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행정부가 개입하여 살려야 했던 국제우주정거장을 둘러싼 갈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3. NASA 퇴임 후 활동
NASA를 떠난 후에도 리처드 H. 트룰리는 다양한 과학 기술 및 사회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조지아 공과대학교 산하의 조지아 기술 연구소 부소장 겸 소장을 역임했다. 이후 1997년부터 2005년까지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의 국립 재생 가능 에너지 연구소 소장과 MRIGlobal영어(구 미드웨스트 연구소)의 수석 부사장을 지냈다.
2007년 5월, 트룰리 전 중장은 군사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서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하여 기후 변화가 미국 국가 안보에 미치는 위협에 대해 증언했다. 2010년에는 빌 리터 주지사에 의해 콜로라도 광산 학교의 이사회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사회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4. 개인적인 삶과 사망
트룰리는 Colleen "Cody" Hanner영어와 결혼하여 세 자녀(마이클, 다니엘, 리)를 두었다. 그는 2024년 2월 27일, 향년 86세의 나이로 콜로라도주 제네시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5. 수상 및 훈장

리처드 H. 트룰리는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군사 훈장과 정부 포상, 그리고 명예로운 상을 받았다.
그가 받은 주요 군사 훈장 및 정부 포상은 다음과 같다.
- 방위수훈메달
- 방위공로장
- 공로훈장 (별 1개)
- 수훈비행십자훈장
- 공로메달
- 대통령 시민 훈장 (1989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수여)
NASA에서 받은 주요 포상은 다음과 같다.
- NASA 수훈 근무 메달 (별 1개)
- NASA 우수 리더십 메달
- NASA 특별 근무 메달 (별 1개)
- NASA 우주 비행 메달 (별 1개)
그 외의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 1972년: 존슨 우주 센터 우수 성과상
- 1977년: 미국 우주항공 학회 비행 성과상
- 1981년: 토마스 D. 화이트 공군 우주 트로피
- 1988년: 실험기 테스트 파일럿 협회의 제임스 H. 두리틀 상
- 1988년: 챌린저호 폭발 사고 이후 NASA의 유인 임무 재개를 도운 공로로 콜리어 트로피
- 1995년: 조지아 항공 명예의 전당 헌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