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전전 경력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1907년 5월 29일 젬갈레 지방의 펜쿨레 교구에서 태어났다. 전쟁 발발 이전에는 펜쿨레 지역 초등학교에서 학교 행정가로 일했다. 또한 그는 라트비아 육군에 복무하며 준사관 계급까지 진급했다.
2. 제2차 세계 대전 활동
2.1. 소련 점령과 초기 대응
1940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이 이루어진 후, 가이타르스는 1940년 9월 학교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941년 6월 14일 6월 강제 이주 당시 그는 강제 이주 대상자 명단에 있었으나, 숲 속에 숨어 체포를 피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가이타르스는 펜쿨레에서 무장 조직을 결성했다. 그는 전 아이자르기 (향토방위대) 대원들과 함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소련 활동가들과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후 그는 펜쿨레 교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2.2. 라트비아 경찰대대 복무
1942년 5월, 가이타르스는 제19 라트갈레 라트비아 경찰대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전선의 풀코보 천문대 근처에서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전투에서 대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다.
2.3. 무장친위대 복무 및 군사적 업적
1943년 4월, 제19대대의 잔여 병력은 제2SS 라트비아 보병 여단 (이후 제19SS 무장척탄병사단 (제2 라트비아)으로 개편)에 편입되어 볼호프 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이타르스는 운터슈투름führer 계급으로 진급했으며, 1943년 8월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이어서 10월에는 1급을 수훈했다.
1944년 2월, 가이타르스의 중대는 자폴례 근처에서 소련군 1개 대대 규모의 공격을 격퇴했으며, 이후 소련군 수송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용맹한 행동으로 1944년 5월, 가이타르스는 라트비아인으로는 최초로 독일 황금 십자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2.4. 최후의 전투와 사망
가이타르스의 중대는 194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독일군이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계속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쿠를란트 포위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1945년 1월까지 전선에서 이탈해야 했다. 1945년 3월 22일, 그는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투쿰스 근처 잔테에 위치한 야전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다르지니(Dārziņi) 농장 근처의 작은 시골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와 유산
루돌프스 가이타르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사적 업적을 통해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독일 황금 십자장을 받은 최초의 라트비아인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무장친위대 복무는 전후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무장친위대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범죄 조직으로 판결받았기 때문에, 가이타르스와 같은 무장친위대 소속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논쟁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그의 초기 반소 활동을 소련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활동했다는 점은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